주제 : 이 세대 사람에 대한 비유
본문 : 누가복음 7장 31~35절
설교자 : 조정의
-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우리는 종종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세태, 상태, 형편을 보면서 특징을 잡아 설명할 때가 있습니다. “~세대”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과거에 우리는 근대사 세대, 강점기 세대, 베이비 붐 세대, X세대, 밀레니엄 세대 등으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LTE-A세대(웨어러블: 2013-현재)라고도 부르는데 아마 여러분들에겐 “삼포세대(연애, 결혼, 출산),” “사포세대(+인간관계), 오포세대(+내집마련)”가 더 익숙하실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의 세태를 보시면서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라고 곰곰이 생각하시고 그 세대의 특징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긍정적인 평가는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종종 “이 세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평가 하시는 것을 봅니다.
“악하고 음란한 세대”(마 12:39, 41; 16:4; 눅 11:29)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마 17:17; 막 9:19; 눅 9:41)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막 8:38)
베드로는 오순절에 모인 수많은 무리들에게 복음을 전하면서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행 2:40)고 선포했고, 사도바울 역시 빌립보 성도들에게 그들이 살아가는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속에서 ‘흠이 없고 순전하라’고 명령하였습니다(빌 2:15). 예수님과 사도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세대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것이 분명합니다.
에베소서 2장 1-3절에 따르면 이 세상이 항상 그렇게 불린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권세를 잡은 자가 “마귀”이며 그가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면서 세상의 풍조를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지금 죄인들이 자기 욕심에 따라 살아가도록 조장되고 있고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로 그들의 대적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살아갑니다. 그렇기에 악하고, 음란하며, 믿음이 없고, 죄 많고, 패역한 세대라 불린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기를 이러한 세태가 더욱더 심화될 것이라 하였습니다(딤후 3:1-5)
저는 오늘 예수님이 이 세대의 특징에 대해 어떤 비유를 들어 설명하셨는지,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어떻게 그 특징을 나타내었는지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악한 세대 속에서 하나님의 지혜를 거스르지 않는 적은 무리들에 대한 교훈을 얻기 원합니다.
- 이 세대에 대한 비유
- 이 세대가 행한 일
- 이 세대를 거스르는 자들
- 이 세대에 대한 비유(31-32절)
“또 이르시되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예수님은 방금전까지 세례 요한을 배척한 이들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셨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과 율법교사들은 그의 세례를 받지 아니함으로 그들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니라”(눅 7:30). 그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가장 큰 선지자 세례 요한의 메시지를 거절했습니다. 성경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하던 그들이 성경의 예언을 정확하게 성취하여 회개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선지자를 배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곧 이어 그들에 대한 비유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그들이 마치 무엇과 같은지 이야기해주시겠다는 말입니다. 비유는 무언가에 빗대어 설명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자주 애용하신 설교 방식이었습니다. 우리도 종종 대화중에 비유를 사용합니다. “그 친구는 참 진국이야”란 말의 뜻은 “오랫동안 푹 고아서 걸쭉하게 된 국물”이지만 듣는 사람은 아무도 그 친구가 국물이라고 알아듣지 않습니다. 오래 고아 걸쭉하게 된 국물처럼 사람의 인성이나 성품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비유입니다. 유사성을 찾는 것이죠.
예수님의 비유를 해석할 때, 우리는 이러한 유사성을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초대교회 시대에는 풍유적 해석이라는 장치로 예수님의 비유를 지나치게 영해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왔다”는 비유에서 축복에서 떨어진 아담을 찾아내는 식입니다(어거스틴). “어떻게 복음서를 읽을 것인가?”의 저자 죠엘 그린은 비유를 해석할 때 이러한 풍유적 해석을 멀리하고, 또 지나치게 하나의 원리를 찾는데 집착하는 것도 피하라고 말합니다. 그는 예수님이 당시 문화적 배경에서 무엇을 말씀하고자 하셨는지 관심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듣는 이에게 기대하신 한 가지 반응이 무엇인지 찾으라고 말합니다.
오늘 예수님이 사용하신 비유를 잘 생각해봅시다. 당시 아이들은 장터에서 놀았습니다. 놀이터나 유치원에서 놀면 되지 않냐고 물으실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유치원은 1840년이 되서야 독일의 프뢰벨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아이들은 광장, 장터 등 모여 놀 수 있는 공터에서 놀았습니다. 예수님의 비유 속 아이들은 서로에게 불만을 가졌습니다. 뭔가 다투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
아이들은 지금 상황극 놀이(역할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것은 당시 결혼 풍습입니다. 그들은 결혼식 놀이를 한 것입니다. 그래서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피리를 불고 춤을 추기로 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춤추고 싶지 않았습니다. 결혼식 놀이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이제 다른 놀이를 제안합니다. 곡하고 우는 것입니다. 무슨 놀이 같습니까? 네, 장례식 놀이입니다. 이러한 역할극은 이천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들에게 인기 만점입니다. 아이들은 교회 3층에서 1층 방에서 자기들끼리 아직도 결혼식 놀이, 병원 놀이 등을 합니다. 이번에도 어떤 아이들은 장례식 놀이에 끼지 않습니다. 그러니 놀이를 제안한 아이들이 심통이 났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너는 왜 결혼식 놀이를 해도 안 하고, 장례식 놀이를 해도 안 하고, 왜 아무것도 안하냐?”
아이들이 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꼭 이런 상황이 펼쳐집니다. 아이들이 어떤 놀이를 해도 심통을 부리면서 한쪽 구석에서 불만을 표출하는 아이가 있습니다. 이 놀이, 저 놀이를 해도 함께 하기를 싫어합니다. “그럼 니가 신부해! 그럼 니가 주인공해!”라고 말해도 소용 없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 이런 아이들의 모습을 가리켜 이 세대와 같다고 하십니다. “이 세대가 무엇과 같은가?”라고 질문하시고 찾아내신 비유가 바로 이러한 아이들의 모습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자들에게 익숙했던 아이들의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자녀를 키우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정확하게 어떤 모습인지 머리에 그려지실 것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싫은 아이가 결국 만족하는 것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아이를 가리켜 이기적이고 고집센 아이라고 말합니다. 자기 자신만 아는 아이라고 말합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교만한 아이입니다. 정확하게 어떤 것이 싫어서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싶은 고집이 강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패역하고 음란하며 믿음이 없고 악한 세대를 가리켜 이런 아이들의 모습과 같다고 하십니다.
그럼 이제 정말 당시 세대 사람들이 어떻게 행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이 세대가 행한 일(33-34절)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33-34)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장터의 이기적이고 교만한 아이의 모습과 닮았는지 정확하게 그들이 행한 일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봐라, 너희가 이렇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큰 선지자 세례 요한이 그들 가운데 있었을 때, 요한은 아주 특별하게 메시아를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아주 금욕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꿀)이었고(마 3:4), 옷은 낙타털 옷에 가죽 띠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떡이나 포도주를 먹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금욕적인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치면 요한은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집은 아주 작은 평수에서 살았으며, 매일 같은 옷을 입고 다녔고 음식은 항상 흰쌀밥과 김치, 한두가지의 밑반찬 뿐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는 매일 같이 동네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만일 유평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만일 제가 그렇게 산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부담스럽겠죠? 나도 그렇게 살아야 하나? 별나다, 왜 저렇게 별나게 행동할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요한은 계속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고 하나님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마 3:2).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미친 사람처럼, 귀신 들린 사람처럼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를 거절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특별한 삶의 방식 때문일까요?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인자”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킵니다. 요한은 그렇다고 비난하면서 그가 전한 메시지를 거절했던 자들이 이제는 예수님을 거절합니다. 뭐라고 하면서 거절합니까? 예수님은 와서 먹고 마셨습니다.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만나셨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거절했습니다. 죄인들과 함께 모여 포도주를 마시는 것을 좋아하는 걸 보니 술꾼이구나! 그들과 함께 먹는 것을 좋아하니 먹보구나! 라며 예수님을 먹보와 술꾼이라고 놀렸습니다. 죄인과 세리의 친구라고 놀렸습니다. 예수님도 요한과 동일한 천국 복음을 외쳤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 4:17).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진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먹보와 술꾼이요 죄인과 세리의 친구의 말을 들을 수 없다고 주님을 거절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거절한 세대의 특징이 보이십니까? 장터의 고집세고 이기적인 아이와 똑같지 않습니까? 한 사람은 금욕적인 생활을 하면서 같은 진리를 전했지만 귀신들린 미친 사람이라며 거절하고, 또 다른 사람은 그들과 함께 어울러져 친구가 되어 그 가운데서 진리를 전했지만 먹보와 술꾼이라며 거절합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싫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이 진리를 거절한 이유는 전하는 자의 어떠함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리 그 자체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아비요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사탄이 그들 가운데 만들어낸 풍조대로 자기 육체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들은 불순종의 자식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예수님의 또 다른 비유에서 그들은 포도원 농부로 등장합니다(눅 20:9-18). 그들은 소출을 요구하는 포도원 주인이 보낸 종들을 차례차례 때리고 능욕하고 상하게 하고 내쫓습니다. ‘내 아들을 보내면 존대하리라’고 생각하여 주인이 사랑하는 아들을 보냈지만 농부들은 상속자를 죽이면 유산이 우리 것이 되겠다고 생각하며 주인의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였습니다. 주인이 보낸 종의 행실이나 태도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인의 아들이 와서 그들에게 뭔가 잘못을 한 것도 아닙니다. 포도원 농부들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들은 주인에 대한 증오심이 있었습니다. 교만과 이기심이 있었습니다. 주인이 전한 메시지를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그 농부들을 진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한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입니다.
또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보시면서 우셨습니다(눅 19:41-4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 23:37)
그리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려진 바 되리라”(마 23:38). 하나님의 진리를 대적한 자들이 당할 진노입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바로 하나님의 진리를 거절하는 교만과 이기심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패역하고 음란하며 악하고 죄 많은 세대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사렛 고향 주민들은 예수님이 약속을 성취하신 메시야라는 진리를 전했을 때, 예수님을 낭떠러지로 몰고 갔습니다. 세리 레위와 친구들을 만나신 예수님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못마땅히 여겼습니다. 안식일 논쟁을 벌였습니다.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그들은 광야의 외치는 소리, 세례 요한도 거절했고, 요한이 증거하여 가리킨 메시야, 온 세상의 구주로 오신 예수님도 거절했습니다. 그들 마음의 교만과 이기심, 죄악이 하나님으로 부터 온 빛이 비춰졌을 때 그것을 거절하게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이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특징은 오늘날에도 계속 되고 있습니다. 바울이 경고한 말세의 특징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하나님보다 돈을, 쾌락을, 자기 자신을 사랑합니다. 패역하고 음란하며 죄 많은 세대입니다.
- 이 세대를 거스르는 자들(35절)
“(그러나) 지혜는 자기의 모든 자녀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의 비유를 이렇게 마치십니다. “그러나…” 이 세대의 다수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을 지혜롭지 못한 것으로 보았지만 그 중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몇몇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의 자녀”가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은 전해지는 말씀을 옳다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이 정당하며 진리라는 것을 겸손히 받아들입니다. 그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생각, 기대, 취향, 기호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전해지는 말씀 그대로를 옳다고 여기는 겸손이 그들 마음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가 틀렸고 주님이 맞다’는 것이 그들의 모토입니다.
그들은 영적 암흑기를 살았던 사무엘과 같은 소수의 사람들입니다.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삼상 3:10). 패역한 백성들 가운데 부르심을 받은 에스겔입니다. “내가 보고 엎드려 말씀하시는 이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28).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는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았을 때 예수님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그들이 대답합니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요 6:67-69).
바울은 말세를 살아가는 패역한 세대의 특징을 묘사한 뒤 이렇게 말합니다.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딤후 3:5). 이 세대를 거스르는 소수의 사람들, 진리를 옳다고 말하며 따르는 자들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로 인정하고 그분이 뭐라고 하시든지 겸손히 따르려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예수를 만들어내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복 주시니까, 자식 잘되게 하시니까, 건강을 지켜주시니까, 특별히 불편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으시니까, 사랑의 주님이시니까, 그들이 원하는 뭔가를 만족시켜주니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참 주인이시기에 따릅니다. 참 진리를 말씀하시기에 주님을 따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안다”(요 10:14).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또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5).
하나님의 진리를 거스르는 세대 속에서 그 진리를 옳다고 여기는 자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는 항상 그들로 인해 옳다 함을 얻습니다. 노아와 그 가족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모두가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했지만 묵묵히 그 진리를 옳다고 여기며 살았습니다. 엘리야는 전국민이 바알숭배에 빠졌을 때, 그들과 맞서 싸우며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예수님을 거절한 백성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적은 무리였던 제자들은 죽기까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랐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말입니다. 지혜를 옳다고 여긴 자들의 선택은 옳았습니다. 그 지혜가 하늘로 부터 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의 왕이 계십니다. 열두살에 이미 이스라엘 학자들을 놀라게 했던 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많은 패역한 세대가 거절했지만, 여기 몇몇 사람들이 그분을 옳다고 여겼습니다. 겸손히 자신의 생각과 판단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진리 앞에서 들을 귀를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패역한 세대에 대한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제 밝히 알게 된 바와 같이 이 세대는 영광의 주님을 거절합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배척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으면 섬길 마음이 없습니다. 따를 생각이 없습니다. 이 세대는 하나님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이 주는 것으로도 만족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모양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전해져도 거절합니다. 그들은 전하는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진리가 싫은 것입니다.
성경은 어쩌면 친절하지 않은 책입니다. 듣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저렇게 비위를 맞추지 않습니다. 잘 들으면 무엇을 주겠다는 식의 거래도 없습니다. 사람들을 만족시키려고 이런 저런 입에 발린 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이해시키려고, 설득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진리는 단순 명료하게 선포됩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저는 종종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세대의 모습을 오늘 이 세대에서 발견합니다. 설교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하지만 정작 전해지는 진리에 대해서는 귀를 닫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이 어렵다 복잡하다고 말하면서 말씀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봅니다. 매 주 설교를 듣고, 매 주 말씀을 대하지만 그 삶이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마치 장터에서 내 맘대로 하지 않으면 아무 놀이도 하지 않겠다고 팔짱을 끼고 심통이 난 아이처럼 말입니다. 저는 여러분 중에 한 사람도 이 패역한 세대의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특징을 갖지 않기를 원합니다. 패역한 세대의 종말은 결국 하나님의 진노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미 이 지혜의 능력을 경험한 자들입니다. 마치 나병을 앓고 있던 아람 군대 장관 나아만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겨 우리의 영혼이 어린아이 살처럼 하얗게 정결하게 된 자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의 능력입니다. 복음의 능력입니다. 처음에 나아만은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담그라는 말에 어이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겨우 이거야? 뭔가 더 대단한 게 있어야 하는 거 아냐? 다메섹 강이 더 좋지 않나? 와서 여호와의 이름도 부르고 손을 흔들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나아만은 하나님의 방법을 탐탁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그의 종이 지혜롭게 권면하여 그 말씀 그대로 행했을 때, 그는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이스라엘 외에는 온 천하에 신이 없는 줄을 아나이다”(왕하 5:15)
구원 받은 우리는 이 능력의 말씀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습니다(벧전 1:23-25).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주의 말씀을 듣는 태도가 어찌해야겠습니까? 나아만 처럼 온천하에 여호와 외에는 하나님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에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라고 반응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을 따르는 양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분을 사랑하기에 그분의 계명을 지켜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누가복음 6장에서 이미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마다 누구와 같은 것을 너희에게 보이리라”(또 다른 비유입니다). 집을 짓되 깊이 파고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사람과 같으니 큰 물이 나서 탁류가 그 집에 부딪치되 잘 지었기 때문에 능히 요동하지 못하게 하였거니와(눅 6:47-48).
이번에 대만에서 지진이 나서 다른 건물은 멀쩡한데 한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속을 보니 철근과 시멘트로 튼튼히 채워져있어야 할 공간에 양철깡통이 가득 차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인생이라는 집을 짓고 있습니다. 이 세대는 우리 인생에 내가 원하는 것들을 가득 채워 넣자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설계도를 무시하고 내가 옳다고 여기는 대로 인생을 쌓자고 말합니다. 패역하고 죄 많은 세대는 그렇게 인생의 집을 짓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한 번 뿐인 이 소중한 인생을 어떻게 살기 원하십니까? 어떻게 집을 지으시렵니까? 기억하십시오. 이 패역한 세대 속에서 꼭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진리대로 살면 당신은 옳다 여김을 얻게 될 것입니다.
나눔을 위한 질문들
■ 예수님은 왜 이 세대 사람을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비유해서 말씀하셨나요?
■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은 어땠나요?
그들의 마음에 있는 본질적인 문제는 무엇이었나요?
■ 당신은 이 세대의 사람들과 같은 문제를 가지고 있지 않나요?
언제 그런 문제를 발견할 수 있나요?
■ 당신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당신의 자세에서 어떻게 발견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