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의로우신 재판장

본문 : 시편 7편

설교자 : 최종혁

시 7 [1]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2]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 [3]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4]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5]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 (셀라) [6]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 [7]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8]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 [9]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 [10]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 [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12]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13]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들이로다 [14]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15]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16]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 [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편의 제 1권(1편-41편)의 대부분의 저자는 다윗입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6편까지의 내용을 보면 다윗의 감정이 점점 고조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3편에서 다윗이 압살롬으로부터 피난하는 상황에서 상황은 매우 심각했지만 오히려 감정적으로는 그다지 동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4편에 가서는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1)라고 말하며 자신의 곤란한 상황에서 절박한 심정을 토로합니다. 또한 5편을 보면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1,2)라며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달라고 말합니다. 이어지는 6편에서는 다윗이 자신의 탄식이나 고통에 대해 여러 가지로 표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로 자신을 책망하고 계신다고 느낄 정도로 상황이 어려웠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2),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6). 영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육적인 고통을 느끼고 있었고,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시편이 차례로 기록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성경의 순서에 따르면 다윗은 자신의 감정을 점점 고조시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제 7편에 와서는 다윗이 적들로부터 당하는 비방과 모함 때문에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6). 다윗이 고통 가운데서 이제 더 이상은 못 참겠다, 더 이상은 힘드니 이제는 응답해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제는 정말 때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행동해 달라, 움직여 달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오늘 저는 시편 7편 말씀을 통해, 우리가 당하는 억울하고 부당한 상황에서 어떻게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다윗의 시편들을 읽으면서 그가 참 정직하고 솔직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기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남김없이 다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먼저 본문을 쓰게 된 상황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7편의 제목은 “다윗의 식가욘,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식가욘”이라는 말은 ‘비틀거리다’, ‘멀리 떠나가다’라는 뜻으로 멜로디가 중간에 흔들리는, 리듬이 불규칙하게 쓰여진 시를 가리키는 음악적인 용어입니다. “베냐민인 구시”는 구약성경에서 누구인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당시 베냐민 지파 사람들이 다윗에 대항하여 종종 반역을 일으켰음을 고려할 때, 이 사람도 역시 그런 일을 했던 사람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마침 거기에 불량배 하나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세바인데 베냐민 사람 비그리의 아들이었더라 그가 나팔을 불며 이르되 우리는 다윗과 나눌 분깃이 없으며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우리에게 없도다 이스라엘아 각각 장막으로 돌아가라 하매 이에 온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윗 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 비그리의 아들 세바를 따르나 유다 사람들은 그들의 왕과 합하여 요단에서 예루살렘까지 따르니라”(삼하 20:1-2). 베냐민 사람 세바는 다윗을 대적해서 일어납니다.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던 사울 이후에 왕이 된 다윗에 대해 이런 반역을 일으키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모함하고 비방하는 말들을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7편은 그것에 대해 다윗이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시입니다.

다윗은 왕이라는 매우 영향력 있는 위치에 올라와 있습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주변 사람들이 가만히 두지 않습니다. 그를 모함해서 깎아 내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도 어쩌면 그런 상황을 당하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 ‘나도 똑같이 갚아줘야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공개적으로 대항하거나 항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기도 하는데, 굳이 몰랐던 사람도 그 일을 알게 되면서 전후 관계를 잘 알아보려고 하지 않은 채 마치 그것이 사실인양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떨까요? 참 억울하고 분할 것입니다. 차라리 나에게 잘못한 것이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할 것입니다. 또 자신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 것이 원망스러울지 모릅니다. 화를 내거나 그대로 갚아줄 수도 있는데 믿는 사람이라서 그러지 못하는 자신이 한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일수록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 나를 보고 계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다윗은 그런 상황에서 의로우신 하나님께 이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에 대한 신뢰(1-10)

그는 먼저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보여줍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 건져낼 자가 없으면 그들이 사자 같이 나를 찢고 뜯을까 하나이다”(1,2). 다윗은 자신을 쫓아오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그런 상황은 아니지만 말로 그를 괴롭히는 사람들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는 말로 괴롭히는 것이 뭐 그리 힘든 일인가 생각하는 분도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언어로써 당하는 폭력적인 일들은 요즘들어 그 문제가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이런 문제들이 많다는 뉴스를 종종 보게 됩니다. 미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물리적으로 폭력을 당한 학생들보다, 언어적으로 폭력을 당한 학생들이 자살시도율이 더 높다고 합니다.

말이 가진 이와 같은 힘에 대해 야고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3:6). 말은 그 파괴력이 엄청납니다. 너무나 쉽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입만 열고 한 두 마디만 하면 그것이 불씨가 되어 사람들이 모여들고 그들이 저마다 말을 더 보태어 한 사람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또한 사람을 때리면 상처가 남지만 말은 마음에 상처를 주고 인격에 흠집을 내는 것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고 증거가 남지 않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로 공격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누가 도와주지 않으면 죽을 것 같은 상황에 있다고 말하면서 자신을 건져낼 자가 하나님이시라고 말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1) “주께 피한다”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의 표현입니다(2:12; 5:11). 아기 새가 부모의 날개 아래로 숨듯이, 그는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찾고 있습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런 일을 행하였거나 내 손에 죄악이 있거나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 원수가 나의 영혼을 쫓아 잡아 내 생명을 땅에 짓밟게 하고 내 영광을 먼지 속에 살게 하소서”(3-5). 그는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 종종 이와 같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말씀을 볼 수 있습니다. 욥기 31장에서 욥은 자신이 얼마나 의로운 사람인지를 말합니다(욥31:1,5,9). 이러한 말씀을 읽을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당당할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구약의 성도들도 은혜로 받는 구원에 대해 알고 있었습니다(시3:8; 4:1, 3; 5:7; 6:4). 다윗은 자신에게 절대 죄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고소하고 있는 죄목들에 대해 결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법정에 나가서 자신을 변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는 자신이 만약 그와 같은 죄를 지었다면 원수들에 의해 죽어도 괜찮다고 말합니다(5).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알고 계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9).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신앙의 양심에 대해 자신의 변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준행자로 자신의 할 일을 했고 심판자 되시는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나이다”(6). 그는 이제 하나님께 움직여달라고, 의로우신 심판을 보여달라고 말합니다. 마치 하나님이 앉아계시는 것처럼 일어나라고 말하고, 주무시는 것처럼 깨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바라보고 있는 상황이 그와 같은 것입니다. 불의가 충만하고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하나님께 움직여달라고, 행동해달라고 구합니다.

“주께서 심판을 명령하셨다”는 것은 심판을 정해두셨다는 말입니다. “민족들의 모임이 주를 두르게 하시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소서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7,8). 심판을 행하실 분이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 의로우신 하나님이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나이다”(9). 의로우신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시고 의롭게 심판하십니다. 인간 재판관들은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거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판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시고 거짓에 속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을 알기에 담대히 말합니다. “나를 심판하소서” 우리는 늘 은혜를 구하는데, 다윗은 심판을 구합니다. 다윗이 어떻게 이와 같이 담대하게 심판을 구할 수 있었을까요?

지금 상황은 명백하게 부당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부당한 상황을 용납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담대하게 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10). 다윗은 왕이라는 높은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흠집 내려는 사람들이 도처에 깔려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칼같이 날카롭고 포악한 말로, 비난의 창으로 찌르려고 했을 것입니다. 비방과 모함으로 먼 곳에서 화살을 쏘고 있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이 모든 공격을 막아줄 이가 하나님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만이 다윗의 방패가 되어 주실 수 있기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때로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특별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비방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기 힘들고 어떻게 대항해야 할지도 잘 모릅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감정과 생각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당장 눈 앞에 변화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면서 인내 가운데 평안을 누리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가운데 할 수 있는 일이 기도와 기다림입니다. 다윗은 두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방패 안에 피하며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7편은 여기서 끝났어도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줄 텐데, 다윗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한 단계 더 나갑니다. 바로 의로우신 하나님에 대한 찬양입니다.

의로우신 재판장에 대한 찬양(11-17)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17) 이 시는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마무리됩니다. 우리는 은혜에 대해서는 감사할 것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감사할 것이 잘 떠오르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의에 대해 어떻게 감사할 수 있었을까요?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11). 하나님은 죄 때문에 매일 분노하십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의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12). 하나님은 악과 죄에 대해, 그리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심판을 준비해두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가 끝날 때가 있습니다. 노아의 때가 그러했습니다(창 6:5-7). 죄가 온 세상에 가득 찼을 때 무작정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물로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도 그랬습니다(창 18:20).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지만, 가나안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심판이었습니다. 그들의 죄악이 가득찼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해 심판하신 것입니다. 벧전3:7을 보면 세상은 불사르기 위해 보존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죄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시고 죄를 용납하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심판당하지 않는 죄들이 계속해서 우리를 괴롭힐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납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십니다. 그 의로우심 때문에 우리도 죄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이 의롭지 않으시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의 속박 가운데서 살았을 것입니다.

이어지는 말씀은 회개하지 않는 악인이 어떻게 되는지 알려줍니다. “악인이 죄악을 낳음이여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았도다 그가 웅덩이를 파 만듦이여 제가 만든 함정에 빠졌도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그의 포악은 자기 정수리에 내리리로다”(14-16). 악인들은 부지런히 죄를 범하면서 멸망의 길로 갑니다. 그들은 죄의 대가를 그대로 받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에 대해 말하면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부하지 않고 놀았던 학생이 교수님을 찾아가 ‘어떻게 나에게 F를 줄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기회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는 그 기회가 지나갔을 때입니다. 그때는 공의로운 심판을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주인으로서, 심판자로서 놀라운 권위를 보여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우심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 차 있습니다. 비방, 비난, 험담하는 것은 경쟁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이런 세상에서 믿는 자로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있는 자로서, 심판자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자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똑같이 그들과 함께 누군가를 비방하고 모함하며 살아야 할까요? 반대로 누군가의 비방으로 인해 억울해하고 분해하면서, 원망과 쓴 뿌리를 가지고 참으며 살아야 할까요?

그리스도인이라면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의로운신 하나님 앞에 그 문제를 가지고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평안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온 세상의 재판장이 되십니다. 그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언젠가 공의를 행하실 것을 믿고 있다면, 그런 비방과 모함들은 큰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이뤄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짐, 두려움, 분노, 쓴 뿌리를 내려놓고 하나님께 나아오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의로움을 기억하시고, 그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