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다
본문: 사무엘상 4장 1절-11절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것을 어떻게 알까? 우리에게 있어 무언가의 존재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내 눈으로 보기 전에는 못믿겠다’거나 ‘보고도 못믿겠다’는 식의 말을 한다. 그만큼 보는 것, 혹은 보는 것으로 대표되는 직접 경험이 우리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설명이 된다고 해도 눈으로 직접 보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셔서 우리가 무슨 수를 써도 우리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볼 수 없는 것 뿐 아니라 우리의 육체적인 감각으로 어떤 방식으로도 하나님을 경험할 수 없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다. 우주나 심해의 많은 부분이 아직 우리에게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지만, 그래도 조금씩 알아갈 수는 있고 실제로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런 가능성조차 없다.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는 없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우리를 그런 어둠 속에 버려두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신 것이다. 우리에게서 멀리 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 가까이 오셨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이유를 아덴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행 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를 찾아오실까? 어떻게 자신을 드러내실까?
시 19: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
창조주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해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은 말씀하기도 하셨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나님께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말씀하셨다고 말했다(히 1:1).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성경 외에도 하나님은 꿈이나 환상을 통해 말씀하기도 하셨고, 혹은 기적을 통해서 말씀하기도 하셨다. 구약의 성막이나 성전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신을 드러내셨다.
이렇게 우리가 알 수 없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알게 하시는 것이 넓은 의미에서 보면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아 오시고 우리에게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을 드러내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우리와 교제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그럴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그럴 필요가 있고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먼저 찾아 오시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일들, 주시는 모든 것들, 허락하시는 상황들, 곁에 두신 사람들, 무엇이든 사실은 은혜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은혜는 우리에게 긍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부정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의 느낌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더 알게 해주는 것들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될 때
여기에 한가지 문제(함정)가 있다. 처음에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는 보는 것, 직접 경험하는 것이 중요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우리에게 보인다. 따라서 우리 입장에서는 점점 하나님 자체가 아니라 그분께서 주시는 은혜를 더 가까이(친밀하게) 느끼면서 그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는 위험이 존재한다. 은혜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게 되는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우리를 이끌기 위해서지, 단지 은혜 베푸는 것이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이다.
롬 1:21–23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을 통해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어리석게도 거기에 머물렀을 때, 사람들은 해와 달을 숭배했고 뱀이나 소 같은 동물들을 숭배했다. 피조물이 나쁜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것들 역시 우리가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돕는 하나님의 은혜다. 하지만 그 은혜가 가리키는 곳, 그 은혜의 근원을 보려고 하지 않을 때, 우리는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게 된다. 은혜 자체를 하나님으로 만들어 우상숭배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우리는 무엇이든 은혜를 하나님으로 만들 수 있다.
히브리서의 시작에서 저자가 천사에 대해서 말하면서, 아들 예수님이 천사보다 위대하시다고 강조했던 이유도 같다. 당시 사람들에게 천사가 사실상 하나님이 되어 있기도 했고 그럴 위험에 그들이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해주는 메신저(심부름꾼)였다. 주로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실 것인지에 대한 계획을 전해주었다(예언). 천사는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의 통로였던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기 멀리 계신 분으로서만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메신저인 천사를 더 가까운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하시니 우리도 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즉, 천사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필수적인 중재자가 되었다. 그러면서 결국은 천사 자체를 숭배하게 되기도 했다. 좋은 것이 나쁜 것이 된 것이다.
이에 대한 또 다른 좋은 예는 라헬이다. 라헬은 그의 언니는 아들을 낳았는데 자신은 그러지 못하자 언니를 시기하기 시작했고 그의 남편 야곱에게 이렇게 말했다.
창 30:1 … 내게 자식을 낳게 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죽겠노라
이에 대해 야곱은 이렇게 답했다.
창 30:2 야곱이 라헬에게 성을 내어 이르되 그대를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겠느냐
야곱의 이 말은 라헬의 문제가 근본적으로 어디에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라헬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아들을 낳고 싶어 했다. 그래서 실제로 자기 여종을 남편에게 주어서 아들을 낳게 하기도 했다. 자식을 죽을만큼 원했던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되겠다 싶었던 것이다. 자식은 나쁜 것일까?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다. 하지만 라헬은 좋은 것을 나쁜 것으로 만들었다. 자식을 하나님으로 삼는 우상숭배에 빠졌던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하나님으로 착각하기도 하고 의도적으로 은혜를 하나님처럼 섬기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보다 그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된 언약궤
오늘 본문인 사무엘상 4장에서도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치명적인 죄에 빠졌는지를 볼 수 있다.
먼저 상황은 이렇다.
삼상 4:1–2 사무엘의 말이 온 이스라엘에 전파되니라 이스라엘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려고 에벤에셀 곁에 진 치고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에 진 쳤더니 2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전열을 벌이니라 그 둘이 싸우다가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 앞에서 패하여 그들에게 전쟁에서 죽임을 당한 군사가 사천 명 가량이라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블레셋은 사사기 이후에 자주 등장하는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의 서쪽 해안에 거주하여 지속적으로 이스라엘을 위협했던 민족이다. 여기서도 특별한 전쟁의 이유가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전쟁 자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았지만 그 전쟁 중에 있었던 일이 중요해서 여기 기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처참하게 패배했다. 양측에 얼마나 많은 군사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4천명의 죽음은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패배한 군사들이 진영으로 돌아오자 그들은 패배의 원인을 찾고자 했다.
삼상 4:3 백성이 진영으로 돌아오매 이스라엘 장로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어찌하여 우리에게 오늘 블레셋 사람들 앞에 패하게 하셨는고 …
일반적인 경우라면 군대의 전력이나 전술적인 실패 등을 따져야겠지만, 이들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패하게 하셨다고 말하며 그 이유가 무엇일지를 고민했다. 전쟁의 승패는 하나님께 달려있었고 따라서 그들의 패배는 궁극적으로 영적인데서 그 이유를 찾아야했다. 따라서 이들의 질문에는 문제가 없다.
그리고 그에 대한 답도 조금만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하게 하셨을까? 레위기 26장이나 신명기 28장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언제 전쟁에서 승리하고 언제 패할지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면 승리할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패할 것이라고 하셨다.
레 26:17 내가 너희를 치리니 너희가 너희의 대적에게 패할 것이요 너희를 미워하는 자가 너희를 다스릴 것이며 너희는 쫓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리라
신 28:25 여호와께서 네 적군 앞에서 너를 패하게 하시리니 네가 그들을 치러 한 길로 나가서 그들 앞에서 일곱 길로 도망할 것이며 네가 또 땅의 모든 나라 중에 흩어지고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하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사람들에게 심판의 메시지가 선포된 후에 그제서야 가나안 땅에 올라가서 싸우겠다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었다.
민 14:42 여호와께서 너희 중에 계시지 아니하니 올라가지 말라 너희의 대적 앞에서 패할까 하노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시면 하나님의 백성은 패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의 싸움에서 패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에 불순종하는 죄를 범해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계시기는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에게 패배를 주실 수 있으셨다. 문제는 그들이 원하는 모습으로, 그들 편에 서서 그들 가운데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들을 치는 분으로서 그곳에 계셨다.
패배의 근본적인 원인이 그들의 죄에 있음은 분명했다. 마치 아이성을 칠 때 아간의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패배했던 것처럼 사무엘상 1-3장에는 제사장 엘리와 그의 아들들의 죄를 기록하고 있다. 특히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했던 자들로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를 멸시하고 성막에서 성적인 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 엘리는 그런 아들들을 하나님보다 더 중히여겨서 하나님을 멸시했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그들을 심판하실 것을 하나님은 이미 선포하셨다.
이스라엘의 지도자들만 그렇게 타락했던 것은 아니다. 이 때가 사사 시대의 끝자락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스라엘은 깊은 영적인 어둠 가운데 있었다. 사무엘상 3장 1절은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했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도 침묵하시던 그야말로 영적인 암흑의 때였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셔도 사람들은 듣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행했고, 결국 하나님은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으로 그들 심판하고 계셨던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장로들이 그들의 패배에 대하여 찾아야할 답이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고 하나님의 언약에 불순종했음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켜야 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찾은 답은 좀 달랐다.
삼상 4:3 … 여호와의 언약궤를 실로에서 우리에게로 가져다가 우리 중에 있게 하여 그것으로 우리를 우리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게 하자 하니
그들도 문제의 원인은 찾았다. 그들 중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전혀 다른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의 결론은 언약궤가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아서 하나님이 그들 중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언약궤만 가져오면 하나님이 그들을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약궤는 지성소 안에 있는 유일한 물건으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한다.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성막은 점점 하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누구든 들어갈 수 있는 뜰이 있었고 성소에는 지정된 제사장들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언약궤가 있는 지성소에는 대제사장만이 지정된 때에 들어갈 수 있었다.하나님은 그 언약궤에 특별한 임재를 드러내셨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이동할 때나 혹은 전쟁을 할 때도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며 때로는 중심에 때로는 제일 앞에 위치했었다.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돌판과 만나를 담은 항아리, 그리고 아론의 지팡이가 들어 있었다. 모두 특별한 의미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언약을 상징하는 십계명 돌판이라 할 수 있다. 즉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고 하나님께서 그곳에 특별한 임재를 드러내셨지만, 또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런 하나님을 기억하며 언약에 충성해야 할 것을 보여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장로들은 그들의 패배를 통해 언약궤를 생각하게 되었을 때 그 언약궤가 상징하는 하나님의 임재 뿐 아니라 ‘언약’ 자체도 생각했어야 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언약궤라는 ‘은혜’를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영화 같은데 나오는 것처럼 언약궤에 무슨 하나님의 영이 깃들어 있거나 하나님의 신비한 능력이 부여되어 있지 않았다. 하나님은 언약궤 안에 갖혀 계신 분이 아니시다. 단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실 뿐이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며 또한 우리와 함께 하길 원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언약궤를 통해 보여주셨다. 또한 그 하나님을 가까이 하기 위해서는 회개와 순종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언약궤를 볼 때 이들은 언약궤가 가리키는 이런 하나님을 봐야했지만,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그들은 그저 언약궤만을 그들이 원하는대로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미 언약궤라는 은혜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 자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언약궤만 가져오다면 하나님이 자기들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 언약궤가 하나님이 되면서 하나님도 언약궤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언약궤가 있는 곳에 있고 그곳에 있어야만 하는 분이 되신 것이다. 그래서 언약궤가 없을 때 하나님은 그들 중에 계시지 않았고, 언약궤를 가져오면 함께 오시는 그런 분이 되었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님이 된 언약궤를 전장으로 가져왔다.
삼상 4:4 이에 백성이 실로에 사람을 보내어 그룹 사이에 계신 만군의 여호와의 언약궤를 거기서 가져왔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하나님의 언약궤와 함께 거기에 있었더라
이 장면도 참 아이러니한 장면이다. 사람들은 언약궤를 가져오면서 하나님을 데려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실제로 언약궤와 함께 있었던 것은 홉니와 비느하스로서 하나님께서 심판을 이미 선포하신 엘리의 두 아들들이었다. 그들이 생각하는 은혜가 아니라 심판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모르는 이스라엘은 사기가 충천했다.
삼상 4:5 여호와의 언약궤가 진영에 들어올 때에 온 이스라엘이 큰 소리로 외치매 땅이 울린지라
그들의 믿음에 따르면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들 진영에 있다는 것은 곧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계시다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더 흥미로운 것은 블레셋 사람들의 반응이다.
삼상 4:6–8 블레셋 사람이 그 외치는 소리를 듣고 이르되 히브리 진영에서 큰 소리로 외침은 어찌 됨이냐 하다가 여호와의 궤가 진영에 들어온 줄을 깨달은지라 7블레셋 사람이 두려워하여 이르되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 하고 또 이르되 우리에게 화로다 전날에는 이런 일이 없었도다 8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블레셋 사람들도 이스라엘 사람들과 동일하게 생각하고 있다. 그들도 언약궤를 하나님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이 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며 두려워 했다.
블레셋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자들로서 당연히 우상이 곧 신을 의미했다. 그들의 우상에 대한 생각은 5장에서 더 자세히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과 이방인인 블레셋의 생각이 정확히 일치했다는 것이다.
십계명에서 하나님은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하셨을 뿐 아니라 어떤 우상도 만들지 말라고 하셨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이는 무언가로 만들지 말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했을 때 쉽게 그것 자체가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이 계명을 어겼었는데, 이 때가 되어서는 그렇게 직접적으로 우상을 만들지 않아도 언약궤를 그런 우상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여튼 이스라엘의 사기는 높아졌고 블레셋은 이제 두려움에 싸였다. 하지만 블레셋도 포기하지 않았다.
삼상 4:9 너희 블레셋 사람들아 강하게 되며 대장부가 되라 너희가 히브리 사람의 종이 되기를 그들이 너희의 종이 되었던 것 같이 되지 말고 대장부 같이 되어 싸우라 하고
싸움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전 전투에 비해 이스라엘은 이미 4천 명의 군사가 줄어든 상태였고,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시지 않았다. 블레셋은 두려웠지만 오히려 더 담대하게 싸웠다. 당연히 블레셋의 승리였다.
삼상 4:10–11 블레셋 사람들이 쳤더니 이스라엘이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하였고 살륙이 심히 커서 이스라엘 보병의 엎드러진 자가 삼만 명이었으며 11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이번에는 3만명의 이스라엘 군사가 전쟁터에서 죽임을 당했다. 언약궤도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엘리도 이 소식을 듣고 의자에서 뒤로 넘어져 죽었고 비느하스의 아내도 아기를 낳으며 죽어가면서 아들의 이름을 ‘영광이 없다’는 뜻의 ‘이가봇’이라고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삼상 4:22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맞는 말일까?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은 맞다. 하지만 하나님의 궤를 빼앗겨서 영광이 이스라엘을 떠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죄로 인해서 이미 하나님의 영광은 그들 가운데 있지 않았다. 그래서 전쟁에서 지고 궤를 빼앗긴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언약궤에 가둬두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살았을 때, 이미 하나님은 그들을 떠나셨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더 이상 살아계시지 않았다.
교훈
이제 왜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렇게 강조해서 이야기 했는지 알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도 언약궤를 하나님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은혜를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일이다. 블레셋 사람들 뿐 아니라 인류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은혜)을 하나님으로 만들어 섬겨오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그 어리석음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멀리 계셔서 닿을 수 없는 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런 관계가 될 때 하나님을 믿는 것은 무의미해진다. 이스라엘이 블레셋과 동일하게 되었던 것처럼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교훈을 정리하면 이렇다. 은혜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을 알게 하는 것이 은혜다. 그러니 은혜를 통해 하나님을 보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은혜만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기를 구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에게서 멀게 느껴지고 눈에 보이는 가까운 은혜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별히 우리는 ‘좋은 것’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서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언약궤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누구도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언약궤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했을 때,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되었고 성경의 하나님은 그들에게 있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 그리고 그런 은혜들 중에 우리가 특별히 좋아하는 것들이 있을 것이다. 그런 것들에 유의해야 한다. ‘이것만 있으면 되겠다’ 싶은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다. 라헬이나 엘리가 그러했듯 가족이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자녀, 남편, 아내가 하나님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재물이나 건강도 마찬가지다. 이런 은혜를 하나님으로 만든 것이 바로 기복신앙이다. 우리의 필요 혹은 더 나아가서 원하는 것을 하나님께 솔직히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응답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음을 알고 응답으로 주시는 것이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은혜임을 인정하고 살아가야 한다.
교회나 교회의 예식이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매주 드려지는 예배에 참여하기만 하면 잘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는 만찬 예배에도 들려지는 말씀에도 화답하지 않고, 예식을 통해 진심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으면서, 그래도 주일에 교회는 나왔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예식이라는 은혜가 하나님이 된 것이다.
개인의 경건생활도 마찬가지다. 그래도 하루에 10-20분 성경 읽고 기도도 했으니까 됐지라고 생각할 것이 아닌 것이다. 1분이라도 그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갔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것들을 하나님으로 만드는 것이 바로 위선적 종교 생활이고 율법주의다. 예수님은 이런 종교인들에게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은혜의 통로를 통과하여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 은혜가 하나님이 되어갈 수 있다.
눈에 보이는 봉사, 어떤 유명한 사람이나 책도 모두 그런 것들이 될 수 있다. 사실 우리가 가까이 해야하는 것들, 사랑해야 하는 것들, 추구해야하는 것들이 모두 그런 것들이 된다. 다 좋은 것들이다. 필요한 것들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이 우리의 종착지는 아니다. 은혜가 하나님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에 감사하라. 충분히 은혜를 누리라. 하지만 그것만 바라지 말고 그곳에 멈추지 말라. 그런 것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런 은혜를 통해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으려고 해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려 노력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또 다른 우상 숭배의 유혹에 넘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고 착각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언약궤만 있으면 승리할 것이라고 굳게 믿었던 것과 같은 잘못된 믿음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면 이런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는 아니다.
고전 13:12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이 땅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제한적이다. 지금이야 ‘거울’이 매끄럽게 잘 만들어지기 때문에 거의 본래 얼굴을 그대로 볼 수 있을 정도이지만, 그조차도 한계는 있다. 바울 시대의 거울은 그 왜곡이 훨씬 심했고 지금처럼 잘 반사되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희미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한 나라에서는 온전히 하나님을 알게 될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이런 제약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볼 수 있게 되고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모든 은혜를 통해 지금과는 비할 수 없이 선명하게 하나님을 알아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전까지는 유혹과 싸워야 한다. 자꾸 은혜를 하나님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과 싸워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게 될 그날을 기다리며, 지금은 희미하더라도 계속해서 하나님을 바라보기 위해 노력할 때, 우리에게 하나님은 진정한 은혜를 더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육신의 눈으로 하나님을 보지는 못해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 안에서 매일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