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본문: 시편 83편

설교자: 최종혁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귀한 사명을 지닌 연약한 우리들의 삶을 이렇게 묘사했다. 사실 우리가 좋아할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욱여쌈을 당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에베소서 말씀에서 배웠던 것처럼 우리가 신분에 합당한 삶, 사명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전쟁은 피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전쟁을 치르느냐의 문제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이 전쟁도 승리가 목적이고 그 승리를 가져오게 하는 요인은 여러가지가 있다.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고 전술도 중요하다. 어떤 무기를 가지고 있는지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숫자’다. 특히 개인의 전력이 비슷하다면 숫자는 승패를 가르는 결정적인 요인이 될 때가 많다. 스포츠 경기에서 양 팀의 숫자를 정해두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우리 편이 숫자가 많다면 좁은 곳에서 정면으로 싸움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하면 많은 숫자의 유리함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넓은 곳에서 적을 둘러싸는 형태로 싸워야 유리하다. 적을 욱여싸야하는 것이다.

세상에 있는 그리스도인이(교회가) 딱 그런 싸움을 하고 있다. 우리 편이 많은 것이 아니라 우리 편이 적다. 예수님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4). 그래서 이 편에 선 자들은 욱여쌈을 당한다. 이상한 일이 아니다. 우리의 적은 바보가 아니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를 욱여싸고 고립시키려고 한다. 숫자의 유리함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 속에서 혼자된 느낌, 외로움, 답답함은 우리의 친구처럼 우리와 가까이 있다. 전쟁이라면 진퇴양난, 사면초가의 상황에 혼자 놓여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적이 바라는 것은 항복이다. 그것을 유일한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히스기야 왕 때 예루살렘을 치러 올라왔던 앗수르가 좋은 예를 보여준다. 앗수르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신도 앗수르의 군대에게서 유다를 구원할 수 없다면서 항복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항복하기만 하면 평안하고 안정된 삶을 살 수 있다고 회유했다. 유다를 완전히 멸망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들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집을 파괴하는 것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정신과 그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파괴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적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대적,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악한 영들은 우리를 둘러싸고 우리에게 평안과 행복을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이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힘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평안으로 우리를 유혹하여 결국 우리를 무력화하기를 원할 뿐이다. 무장 해제시켜서 결국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그것이 욱여쌈을 당하여 완전히 싸여버린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좌절과 낙심을 넘어서 오히려 그 안에서 평안을 느끼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떡해야할까? 욱여쌈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싸이지는 않으면서 살 수 있을까? 바울은 어떻게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 있었을까? 우리가 오늘 살펴볼 시편 83편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 있는 중요한 힌트를 제공한다. 바로 ‘기도’다. 이 시편에서 아삽은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뢸 수 있고,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신 일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구할 수 있고, 또한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 받으시기를 바랄 수 있다’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말한다. 기도로 낙심한 마음을 위로 받고, 기도로 낙심한 상황에서 소망을 가지며, 기도로 하나님께서 높임 받으시기를 구하는 것이 적들에 둘러쌓인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이다.

어려움을 아뢰자(1-8절)

먼저 1-8절에서 우리는 아삽이 자신들이 처한 어려움을 구체적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기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시 83:1 하나님이여 침묵하지 마소서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마소서

여기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어떤 계시를 주시는 것이 아니다. 단순히 말씀하시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사야 42:13-14는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시는 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 42:13–14 여호와께서 용사 같이 나가시며 전사 같이 분발하여 외쳐 크게 부르시며 그 대적을 크게 치시리로다 14내가 오랫동안 조용하며 잠잠하고 참았으나 내가 해산하는 여인 같이 부르짖으리니 숨이 차서 심히 헐떡일 것이라

즉, 어떤 상황을 더이상 참으며 묵인하지 말고 움직여 달라는 요청이다. 이런 비슷한 내용의 기도를 긍정형으로 할 수도 있다. ‘하나님, 말씀하십시오. 하나님, 움직이십시오’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부정형의 기도에는 그 간절함과 긴급함이 담겨있다. ‘주말에 여행가자’라고 말하는 것과 ‘주말에 집에 좀 그만있자’라고 말하는 것은 느낌이 다르다. 하나님께 침묵하지 마시고 잠잠하지 마시고 조용하지 말아달라고 구하는 것은 그동안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오셨다는 것이 전제되어 있고 그동안의 인내와 오래 참음이 이 기도 안에는 있다.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으니 하나님 이제는 움직여 주십시오라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언제나 큰 어려움이었다. 하나님의 침묵은 곧 하나님의 부재,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죽음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이 그 살아계심을 나타내시지 않을 때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절망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삽은 먼저는 하나님을 느낄 수 없는 가장 궁극적인 어려움을 언급하고 있다.

하나님의 침묵이 궁극적인 어려움이라면 그 어려움의 시작에 있는 것은 원수들의 시끄러움(소동)이다.

시 83:2 무릇 주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

원수들은 떠들고 있다. 그들은 머리를 들고 있다. 적대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공격하려 하고 있다.

시 83:3–4 그들이 주의 백성을 치려 하여 간계를 꾀하며 주께서 숨기신 자를 치려고 서로 의논하여 4말하기를 가서 그들을 멸하여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대적들의 목적은 분명하다. 이스라엘을 완전히 지워버리는 것이다.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고 이스라엘이 기억되지도 못하게 만드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다. 소멸시키는 것이다.

5절부터 아삽은 이스라엘의 대적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민족과 나라이고 그들이 마음을 모아서 이스라엘을 대적한다고 말하면서 구체적으로 그들이 누구인지를 말한다.

시 83:5–8 그들이 한마음으로 의논하고 주를 대적하여 서로 동맹하니 6곧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이며 7그발과 암몬과 아말렉이며 블레셋과 두로 사람이요 8앗수르도 그들과 연합하여 롯 자손의 도움이 되었나이다

“에돔의 장막”은 에돔인들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이스라엘 남부에 자리 잡은 에서의 후손들이다. “이스마엘인”도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남동쪽에 자리 잡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다. “모압”과 “암몬”은 소돔에서 살아남은 롯의 딸들이 낳은 아들들의 후손으로 이스라엘의 동쪽에 자리 잡은 세력이다. “하갈인”은 이스마엘의 어머니 하갈과 관련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 동쪽의 유목민이었을 것이다.

“그발”은 불확실하지만 에스겔 27:8-9을 보면 이스라엘 북쪽의 페니키아에 있는 비블로스의 옛이름으로 추정할 수 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을 지속적으로 괴롭혔던 유목민들로 남쪽에 주로 거주하였다. “블레셋”은 이스라엘 서쪽, “두로”는 북쪽에 자리한다.

여기에 시편 기자는 “앗수르”도 추가한다. 다른 나라들에 비해서 앗수르는 대국으로서 이스라엘 북쪽의 강력한 세력이었다.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나라이고 유다에게도 계속해서 위협을 가했다.

정리해 보면 이렇다. 여기서 이스라엘을 완전히 멸망시키려는 나라와 민족들은 총 10개가 언급되어 있고 그들은 각각 이스라엘의 동서남북에 위치하여 역사를 통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공격했었다. 여기 언급된 모든 나라들이 다 힘을 합하여 이스라엘을 공격했었던 적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는 없다. 가장 가능성 있는 상황은 모압과 암몬 자손들이 여호사밧을 치려고 연합하여 공격해 왔을 때다. 하지만 그 때도 이 모든 나라들이 연합군을 이루지는 않았다. 따라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그들을 에워싸고 있는 상황을 일반화하여 이렇게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성경에서 우리는 이런 역사를 볼 수 있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이 번성하는 것을 보고 남자 아이들을 죽이고 노예로 만들어 그들을 흡수하려 했었다. 가나안 땅의 여러 족속들 그리고 그 주변의 여러 나라들은 계속해서 이스라엘 민족들을 공격했다. 후에는 앗수르와 바벨론이 있었고, 에스더에 나오는 하만의 이야기도 유명하다. 로마나 그 이후의 역사를 봐도 이스라엘은 계속해서 다른 나라들의 공격을 받았고, 최근에는 히틀러의 지도 아래 나치가 유대인들 6백만명을 죽이기도 했다. 역사상 이렇게 많은 미움을 사고 공격을 받았던 민족이 없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인 이스라엘은 항상 더 강한 적들에게 공격 받고 있었고 따라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항상 필요했다.

아삽은 자신들이 처한 이런 어려움을 이 시를 통해 하나님께 아뢰고 있다. 그리고 이 시는 노래가 되어 이스라엘이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불려졌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그들에게 하나님이 계심을 다시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목할 만한 것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원수들에 대한 표현이다. 아삽은 이스라엘의 원수들을 “주의 원수”,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2절). 그리고 이스라엘은 “주의 백성”, “주께서 숨기신 자”라고 표현한다(3절). “숨기신 자”는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시고 보호하는 자들이라는 의미다.

하나님께 우리의 어려움을 말씀드릴 때, 그렇게 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우리에게 위로가 될 때가 있다. 힘든 일을 친구에게 털어 놓을 때 꼭 해결책이 있지는 않아도 내 문제를 누군가 알고 있고 함께 마음을 쓰고 있다는 사실 만으로도 위로를 얻는 것처럼, 하나님께 털어놓을 때도 그런 위로를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과정에서 우리는 우리의 어려움을 더 정확하게 볼 수 있게 되기도 한다. 이 어려움이 근본적으로 무엇인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단순하게 보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가 주변의 여러 나라들의 협공을 당하여 위기에 처한 상황이다. 하지만 정확히 보면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셔서 보호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들, 하나님의 원수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는 상황이다. 상황이 그렇다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침묵은 무관심이 아니다. 나에게 분노(삐침?)하시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잠잠히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나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침묵이 길어질 때도 있다. 우리를 더 하나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우리가 다 알지는 못한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실 때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욱여쌈을 당할 때 원망과 불평을 거두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

과거가 소망임을 기억하자(9-15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그런 상황 속에서 기도하면서도 소망이 없다고 느껴질 때가 있다. 기도한다는 것이 뭔가 실제적으로 해야할 것은 하지 않으면서 그냥 상황이 달라지기만을 바라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아삽은 과거의 역사를 통하여 그 안에서 기도의 소망을 발견하여 확신 가운데 기도한다.

이럴 때 주로 등장하는 과거는 출애굽이다. 하지만 여기서 아삽은 사사기 4-8장에 기록된 과거를 떠올린다. 하나님의 침묵과 여러 민족들의 침략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던 시대가 바로 사사 시대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삽은 두 사건을 기억한다.

시 83:9–10 주는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 같이,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 같이 그들에게도 행하소서 10그들은 엔돌에서 패망하여 땅에 거름이 되었나이다

미디안인에게 행하신 것은 사사기 6-8장에 기록된 기드온의 승리를 말한다. 기손 시내에서 시스라와 야빈에게 행하신 것은 사사기 4-5장에 기록된 드보라와 바락의 승리를 말한다. 아삽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행해주시기를 구한다.

야빈은 가나안의 왕이었고 시스라는 그의 군대 장관이었다. 당시 야빈은 철 병거 900대를 보유한 군대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20년간 학대하고 있었다. 20년간 하나님은 침묵하신 것이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드보라와 바락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기손 시내는 시스라의 군대가 진을 쳤던 곳이고 엔돌은 이스라엘이 진을 쳤던 다볼 산과 기손 시내 중간에 위치한 지점이다. 이 전쟁에서 시스라의 군대는 전멸했고 야엘의 장막으로 도망했던 시스라는 여인 야엘의 손에 비참하게 죽게 된다. 이 사건의 마지막은 이렇게 기록되어있다.

삿 4:24 이스라엘 자손의 손이 가나안 왕 야빈을 점점 더 눌러서 마침내 가나안 왕 야빈을 진멸하였더라

기드온 당시에는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학대하고 있었다. 미디안은 특별히 이스라엘의 먹을 것을 약탈해갔기 때문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을 피해서 굴에 살아야 했었다. 그렇게 7년을 하나님께서 침묵하셨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승리를 주셨다. 11절에는 기드온이 죽인 미디안의 방백과 왕들의 이름이 언급되어 있다.

시 83:11 그들의 귀인들이 오렙과 스엡 같게 하시며 그들의 모든 고관들은 세바와 살문나와 같게 하소서

이 사람들의 이름도 사사기에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삿 7:25 또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오렙은 오렙 바위에서 죽이고 스엡은 스엡 포도주 틀에서 죽이고 미디안을 추격하였고 오렙과 스엡의 머리를 요단 강 건너편에서 기드온에게 가져왔더라
삿 8:21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당시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차지하려고 했던 자들처럼 아삽 시대의 대적들도 그렇게 말한다.

시 83:12 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목장을 우리의 소유로 취하자 하였나이다

지금의 상황이 기드온의 때, 드보라/바락의 때와 같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하나님의 목장을 자신들의 소유로 차지하려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침묵을 깨시고 움직이셨었다. 그래서 아삽은 소망을 가지고 담대하게 이렇게 기도한다.

시 83:13–15 나의 하나님이여 그들이 굴러가는 검불 같게 하시며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 같게 하소서 14삼림을 사르는 불과 산에 붙는 불길 같이 15주의 광풍으로 그들을 쫓으시며 주의 폭풍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소서

“검불”은 가느다란 나뭇가지, 마른 풀, 낙엽 등을 통칭하는 표현이다. “굴러가는”이라는 표현을 볼 때 ‘회전초’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못봤던 것 같은데, 사막 등에서는 이렇게 마른 가지, 풀, 뿌리 등이 뭉쳐서 공처럼 굴러다니기도 한다. 이어 나오는 “바람에 날리는 지푸라기”와 같은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원수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날아가고 흩어지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14-15절은 더욱 하나님의 두려우신 능력을 생생하게 묘사한다. 거대한 산을 태우는 불길처럼 광풍처럼 폭풍처럼 원수들을 몰아내시고 그들을 두렵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자신들의 구원을 넘어서 원수들이 자신들에게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그대로 갚아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과거는 지금의 나와 관계 없는 그냥 지나간 시간이 아니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기도하면서도 소망이 없는 것 같다면 이렇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해 봐야 한다. ‘하나님, 과거에는 이렇게 하셨는지 지금은 왜 이러십니까!’라고 따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과거의 결과만을 기억하지 말고 과정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침묵하실 때가 있었고 그 침묵을 깨실 때가 있었다.

기드온의 경우를 다시 생각해 보라. 기드온도 과거를 기억했었지만 그는 소망을 가지지 못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와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고 말했을 때, 기드온은 이렇게 반응했었다.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우리가 좋아하는 결과만을 기억하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소망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을 가져온다. 왜 지금은 그렇게 하지 않으시냐는 원망이 남는다. 모든 원인과 과정과 결과를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욱여쌈을 당할 때, 소망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다. 적에게 완전히 둘러싸여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과거에 어떻게 하셨는지를 기억하라. 과거에 우리의 소망이 있다.

끝까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자(16-18절)

아삽의 기도의 마무리는 꽤나 의외다. 여전히 원수들의 수치와 멸명을 구하지만 그 궁극적인 목적을 이렇게 언급한다.

시 83:16–18 여호와여 그들의 얼굴에 수치가 가득하게 하사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하소서 17그들로 수치를 당하여 영원히 놀라게 하시며 낭패와 멸망을 당하게 하사 18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하나님께서 침묵을 깨고 심판을 행하셔서 내가 복수의 통쾌함을 느끼고 즐거워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다. 오히려 아삽은 “그들이 주의 이름을 찾게” 되기를 구하고 궁극적으로 그 모든 일을 통해서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이 온 세계에서 가장 높고 위대하신 분이신 것을 알게 해달라고 구한다.

나의 문제가 세상에서 가장 커보일 때, 우리는 모든 것을 나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럴 때조차도 하나님의 영광을 구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침묵도 이를 위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모든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자라게도 하시고 교훈하기도 하시고 깨닫게도 하시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러니 우리도 욱여쌈을 당할 때, 우리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기억하고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어떤 결과든 하나님 만이 온 세계의 지존자로서 알려지기를 기도해야 한다.

도전

오늘 시편을 통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보라.

나는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가? 하나님의 침묵은 어쩌면 내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애초에 하나님의 편에 서지 않았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편에 선 사람이 그에 합당하게 행하지 않고 있어서(죄) 일수도 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기에 앞서 회개하고 돌이키는 것이 먼저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려고 침묵하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 부를 수 있고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기에 합당하다면, 다음으로 이 질문을 해야 한다. 내가 기억하는 과거는 무엇인가? 어쩌면 나는 과거에 대한 왜곡된 기억을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 과거를 잘못 해석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에게 잘못하신 적이 없다. 실수하신 적이 없다. 나에게 뿐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하신 적이 없다. 그런데 딱 한번 지금 나에게 그렇게 하시겠는가! 그렇지 않다. 과거를 기억하고 참된 하나님 안에서 소망을 가지라.

마지막으로 내가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욱여쌈을 당할 때 항복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어 보일 수 있지만, 우리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이 길이 되신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대적의 어떤 무기나 전력이나 숫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하나님을 의지하고 결국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 우리 기도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

욱여쌈을 당할 때 싸이지 말고, 이렇게 기도하라. 나의 어려움을 하나님께 아뢰고, 과거를 기억하고 소망을 가지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은 합당하게 행하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