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우리 안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찬양
본문 : 시편 66편
설교자 : 최종혁
시편 65편에서는 세상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했었는데, 66편에서는 그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을 좀 더 생각해보기 원한다. 시편 66편은 감사의 찬양시다. 지난 주일오후성경공부 시간에 배운 것처럼, 감사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직접적으로 하신 일에 대해서 내가 보여야할 합당한 반응인데, 기도의 형태로 직접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본래 감사의 의미에는 더 적합하겠지만,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렇게 그런 감사한 마음을 찬양으로도 표현한다.
조금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다. 우리도 누군가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너무 클 때는 그 사람에게만 감사를 표할 뿐 아니라, 그런 감사한 일을 한 그 사람 자체에 대해서도 다른 사람에게도 말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볼 수 있는 이런 감사 찬양의 모습이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 아니라, 그런 고마우신 하나님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그들도 이런 좋으신 하나님을 알고 함께 하나님에 대해서 말할 수 있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놀라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높일 뿐 아니라 감사의 기쁨을 더욱 풍부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의 모습이다. 오늘은 시편 66편을 통해 그런 하나님 백성의 모습을 살펴보고, 우리의 감사와 찬양을 점검해하며 교훈을 얻기 원한다.
찬양의 초청(1-4) – 찬양의 이유(5-12) – 찬양의 실례(13-20)
I. 찬양의 초청(1-4절)
먼저 1-4절은 찬양으로의 초청이다.
“1 온 땅이여 하나님께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2 그의 이름의 영광을 찬양하고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1-2절)
“온 땅” – 초청의 대상. ‘온 세상’을 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어지는 말씀, 특히 3절에서는 하나님께 직접 말하는 것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온 세상 사람들’의 의미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물론 다른 시편에서 보면 사람이 아닌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여기서는 그런 다양한 피조물들보다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을 시편 기자는 초청한다. 마치 자기들만으로는 부족하다는 듯이 모든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해야할 것을 독려한다(루폴드).
“즐거운 소리를 낼지어다”, “찬양하고”, “찬송할지어다” – 초청의 내용. 즐거운 소리를 내는 것은 환호하는 것, 목소리를 크게 내는 것을 말하고, 2절의 찬양은 악기를 동원하여 노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찬양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고 그런 일에 초청을 하는 것이다. “영화롭게 찬송할지어다”는 찬송이 찬송의 대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그 대상은 바로 영화로우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 “그의 이름의 영광을” – 그들의 찬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한다. “이름”은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영광”은 그런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자신을 여러 모양과 방법으로 드러내시는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하신 일을 크게 강조한다. 그래서 찬양의 구체적인 내용도 바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한 것이다.
“3 하나님께 아뢰기를 주의 일이 어찌 그리 엄위하신지요 주의 큰 권능으로 말미암아 주의 원수가 주께 복종할 것이며 4 온 땅이 주께 경배하고 주를 노래하며 주의 이름을 노래하리이다 할지어다”(3-4절)
먼저는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 대해서 찬양을 한다. 이에 대해서는 이어지는 말씀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하는데, 여기서는 그 일이 어떠한지만 언급을 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엄위’하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너무 크고 놀라워서 사람을 두렵게 한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엄위한 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이 드러나고 이에 대해 모든 사람들은 결국 그 권능 앞에 무릎을 꿇게 된다. 4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기뻐하며 노래하는 사람이 있고 3절처럼 복종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복종” – 자발성은 배제. 힘에 밀려 억지로 굴복하는 것을 의미. 참된 마음 없이, 원하지 않는 거짓된 복종을 의미. 힘이 없어서 그렇지 할수만 있다면 절대 복종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빌 2:10에서 말하는 것처럼 결국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게 되는데, 어떤 이들은 자발적으로 어떤 이들은 강제적으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자발적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온 자들은 구원의 기쁨으로 노래하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되어 심판을 받게 된다. 구원이든, 심판이든 하나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 지를 드러내게 된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그런 두려운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께 나아와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초청하는 것이다.
초청이기는 하지만 뭔가 ‘정중함’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명령형’으로 되어 있어서 이 찬양의 초청에 응하는 것이 너무나 당연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찬양’은 “하나님의 찬양”이다.
“만민들아 우리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의 찬양 소리를 들리게 할지어다”(8절)
찬양을 드리는 것은 사람들이지만, 그 찬양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찬양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이 찬양을 받으시기에 마땅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두려운 일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이런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지를 증명합니다. 그런 하나님을 섬기고 찬양하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팀이 엄청나게 잘하면 내가 기쁜 것과 비슷한 원리다. 그럴 때는 다른 사람에게도 이 팀을 응원하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두려워할만한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만큼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은 없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이 일에 참여해야 한다고 이렇게 당당하게 소리를 높일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데 있어 시편 기자는 아무런 거리낌이나 부끄러움이 없다. 오히려 자신감이 가득하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렇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알면 모두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이라 확신이 가득한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을 보라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도다”(5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16절)
오라고 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라고 하고 들으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고 찬양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 무엇을 보고 들어야 하는지를 살펴보자.
II. 찬양의 이유(5-12절)
먼저 5-12절에서는 왜 하나님께 찬양이 합당한지를 말한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행하심 엄위하신 일 때문이다. 그 일은 크게 보면 6-7절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9-12절에서는 하나님의 단련하심이다.
구원하심(6-7절)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할 때 항상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건이 있었다. 바로 출애굽이다. 여기서도 그와 관련된 사건이 언급된다.
“하나님이 바다를 변하여 육지가 되게 하셨으므로 무리가 걸어서 강을 건너고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6절)
이것은 홍해를 건던 사건 만을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앞에는 홍해, 뒤에는 요단강을 건넌 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 두 사건 모두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며 기뻐했다. 특히 홍해를 건넌 후 모세는 백성들과 함께 기쁨의 노래를 불렀는데, 그 일부의 내용을 보면 이렇다.
출 15:1 이 때에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이 이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니 일렀으되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 말과 그 탄 자를 바다에 던지셨음이로다
출 15:6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권능으로 영광을 나타내시니이다 여호와여 주의 오른손이 원수를 부수시니이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출 15:14-15 14 여러 나라가 듣고 떨며 블레셋 주민이 두려움에 잡히며 15 에돔 두령들이 놀라고 모압 영웅이 떨림에 잡히며 가나안 주민이 다 낙담하나이다
출 15:18 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하였더라
시편 66편은 직접 출애굽을 경험한 사람이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66편의 저자는 “우리가 거기서 주로 말미암아 기뻐하였도다”라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먼저 가서 하나님께서 행하신 것, 하나님께서 사람의 아들들에게 행하심이 엄위하시다는 것을 보았고, 지금 다른 사람들에게 와서 보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다. 과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하셨던 일이 나와 관계 없는 일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7절 말씀은 홍해의 노래의 결말과 일맥상통한다.
“그가 그의 능력으로 영원히 다스리시며 그의 눈으로 나라들을 살피시나니 거역하는 자들은 교만하지 말지어다”(7절)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시고 그 백성을 안전하게 건너게 하셨던 사건이 주변의 민족들을 두렵게 했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다스리실 뿐 아니라 모든 나라들을 두루 살펴보고 계심을 기억하며 교만하기를 그쳐야 한다는 말이다.
두번째로 와서 봐야할 하나님의 엄위하신 일은 하나님의 단련하심이다.
단련하심(9-12절)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나타내신 것은 홍해를 가르는 그 순간만은 아니었습니다. 그 사건이 극적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을 극적으로 드러냈고 사람들의 기억에도 오래 남아 있지만, 그 이후 40년의 광야 생활을 이스라엘이 견뎌내고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모세의 말을 보라.
신 8:2-7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5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의 길을 따라가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7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 10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고난을 허락하셔서 그들을 연단하시고 마침내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셨다. 그 모든 일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 마땅했다.
9-12절을 보면 시편 기자는 모세와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9 그는 우리 영혼을 살려 두시고 우리의 실족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는 주시로다 10 하나님이여 주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되 우리를 단련하시기를 은을 단련함 같이 하셨으며 11 우리를 끌어 그물에 걸리게 하시며 어려운 짐을 우리 허리에 매어 두셨으며 12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불과 물을 통과하였더니 주께서 우리를 끌어내사 풍부한 곳에 들이셨나이다”(9-12절)
여기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실제로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인지, 아니면 시편 기자 시대에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했던 다른 어려움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표현들을 보면,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시편 기자가 염두에 두고 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앞에서 홍해가 갈라졌던 그곳에 갔다 왔다면, 여기서는 광야에 갔다 온 것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을 포함하여 우리가 경험하는 어려움들은 “영원히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주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그래서 여기 11-12절의 표현도 보면 하나님께서 그물에 걸리게 하시고 어려운 짐을 매어 두시고 사람들이 우리 머리를 타고 가게 하셨다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에게 물과 같은 어려움, 불과 같은 어려움이 있지만, 하나님은 그 영혼을 살리시고 완전히 넘어져 일어날 수 없게 만들지 않으신다(9절). 결국 자기 백성을 풍부한 곳으로 인도하신다. 이스라엘이 그들의 온갖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듯이, 하나님은 신실하게 자기 백성을 그 능력으로 붙드셔서 뜻하신 바를 이루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그냥 고통스러운 일이어서 없는게 최선이고 혹시라도 만나게되면 어떻게든 빨리 벗어나야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알고 신뢰하기 위한 ‘단련’의 과정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는 과정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의 구원과 성화의 과정도 그렇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건너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일이었다면, 오늘날의 우리가 구원을 받고 성화되어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가 어떤 분의 카톡 프로필 메시지에 “저도 제가 이렇게 변할 줄 몰랐어요”라고 써있는 것을 본적이 있는데, 정확히 뭐가 변한 것인지에 대한 것은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사실 이런 고백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정상이다. 구원 받은 사람은 사람으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변화, 사람으로서는 만들어낼 수 없는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그 변화는 오직 하나님만이 만들어내실 수 있음을 인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겪는 고난들도 결국은 그렇게 하나님을 드러내는 간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과 단련하심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드러내고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분명한 근거가 된다.
III. 찬양의 실례(13-20절)
13-20절은 지금까지와는 분위기가 좀 다르다. 지금까지는 “우리”였다면 13절부터는 “나”다. 지금까지는 “와서 보라”고 하면서 자신이 초청한 사람들과 함께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면, 이제는 16절에 말하는 것처럼 “와서 들으라”고 하면서 직접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고 할 수 있다. 12절까지는 과거의 이야기를 했고 13절부터는 현재의 이야기를 한다. 12절까지는 이론이었다면 13절부터는 실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도 셀라를 기준으로 둘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3-15절은 시편 기자 자신의 찬양에 대해서 묘사하고 16-20절은 그 이유를 말한다.
시편 기자의 찬양(13-15절)
“13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주의 집에 들어가서 나의 서원을 주께 갚으리니 14 이는 내 입술이 낸 것이요 내 환난 때에 내 입이 말한 것이니이다 15 내가 숫양의 향기와 함께 살진 것으로 주께 번제를 드리며 수소와 염소를 드리리이다”(13-15절)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시편 기자는 환난 중에 있었고 그 때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서원을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원을 지금 지키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있다. 먼저는 시편 기자가 ‘번제물’을 드리겠다고 한 것이다. 번제의 특징은 ‘전부’를 드린다는데 있다. 전적인 헌신의 의미인 것이다. 번제를 드린 자는 자기 몫으로 챙기는 것이 없다. 따라서 번제는 가장 제사다운 제사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제사를 지금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그렇게 번제로 드리겠다고 언급한 제물이 많다는 것이다. ‘숫양’, ‘수소’, ‘염소’가 있다. 이것들을 한 마리씩만 드려도 많은 제물일텐데, 시편 기자는 숫양과 염소는 복수형을 사용했고 수소는 집합적 단수를 사용했다. 어쨌든 최소한 두 마리 이상씩을 드리겠다고 말한 것이다. 단순히 부자여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께 더 풍성히 드리려는 마음이 드러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런 표현들을 통해 찬양을 드리는 시편 기자의 마음을 우리는 볼 수 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서원 했으니까, 이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아니다. 정말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더 많이 드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찬양의 제사에 그는 다른 사람들도 초대한다. 즐거움을 나누고 싶은 것이다.
찬양의 이유(16-20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너희들아 다 와서 들으라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내가 선포하리로다”(16절)
쉽게 말해 간증을 하겠다는 말인데, 아주 구체적으로 그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는 않고 그가 하나님께 구했을 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내용이다.
“17 내가 나의 입으로 그에게 부르짖으며 나의 혀로 높이 찬송하였도다 18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19 그러나 하나님이 실로 들으셨음이여 내 기도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도다 20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가 내 기도를 물리치지 아니하시고 그의 인자하심을 내게서 거두지도 아니하셨도다”(17-20절)
여기서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흥미로운 논리적 질문을 한다. 17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18절에서는 그의 마음에 죄악을 품고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맞는 말이다. 죄는 하나님과 우리의 사이를 멀게 하기 때문이다. 야고보는 우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도 말했는데, 구하는 동기 자체가 죄악된 것이 아니어도 우리가 죄를 인지하고 있으면서 그것을 품고 있으면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신다. 시편 기자는 자신은 그렇게 죄를 마음에 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리고 19절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기도를 들으셨다고 말한다. 그럼, 논리적으로 20절의 결론은 어떻게 될까? 내가 죄를 품지 않았으니 하나님은 당연히 내 기도를 들으셔야 했다일까? 그것은 이교도적인 논리다. 내가 무엇을 하면 신이 나에게 반드시 무엇을 해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결과적으로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인자하심을 거두지 않으셨다고 고백한다. 즉, 궁극적으로 기도에 응답하고 말고는 하나님의 뜻에 달린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녀로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나 우리가 구하는 그대로가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기도 응답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달려있다. 언제나 그분의 인자하심 때문에, 그분의 은혜 때문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아마, 시편 기자가 실제로 이 찬양을 드릴 때 함께 있었다면 우리는 더 자세한 그의 간증을 들을 수 있었겠지만, 시편으로 우리에게 남겨진 이야기는 여기까지다. 그리고 이것으로 충분하다. 왜냐하면 우리도 이런 경험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에게 들려줄 하나님의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의 기도도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구약에 나오는 ‘서원’이 우리에게 조금은 낯설고 어색하다. 하지만 그것이 이 시편에서처럼 올바르게 사용되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분명히 가르치는바가 있다. 만약 이 시간이 끝나고 기도 시간 대신에 몇 명씩 모여서 “최근 기도 응답을 받은 것에 대해서 나눠보세요”라고 하면, 꽤나 어색한 시간을 보내게될지 모른다. 왜 그럴까? 정말 기도 응답을 받은 것이 없어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을 받은 줄 모르고 있어서 할 얘기가 없는 경우도 많다. 그만큼 우리가 기도는 하지만 기대는 하지 않아서 그렇다. 기도하고 그냥 잊는 것이다. 서원 기도는 이런 면에서 우리의 기도에 간절함을 더하고 더욱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게 돕는다.
기도할 때 꼭 서원을 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런 간절함으로 기대하며 기도할 때 이 시편 기자처럼 우리가 “하나님이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을 선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찬양의 예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와서 들으라”고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위하여 행하신 일이 항상 “예전에 구원해 주신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지만, 그후로도 하나님은 계속해서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돕고 계신다. 계속해서 구원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도로 의지하고 기대할 때,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감사의 찬양은 그칠 줄을 모를 것이다.
도전
시편 66편의 말씀은 하나의 초대장과 같다. 의미 없이 아무에게나 주는 결혼식 초대장 같은게 아니라, 정말로 간절히 함께 하기 원하는 그런 초대장이다. 이 말씀을 통해 그런 간절함이 우리에게 있는지 돌아보게 된다. 정말로 하나님이 너무 좋아서 나만 알고 있을 수 없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이 너무 위대하셔서 아무 말이라도 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본 적이 있는가. 잘하지 못해도 이 하나님에 대해서, 여러분이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가.
전도가 어렵고, 만찬 예배에 앞에 나서는 것이 어렵고, 사람들 앞에서 간증하는 것이 어렵다. 여러 이유들을 생각해 내지만, 근본적으로 우리가 던져야할 질문은 이것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가. 그런 하나님의 찬양이 내 안에 가득하다면 그것은 결국 넘칠 것이다. 여기 시편 기자가 굳이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하는 것은 그 안에 하나님의 찬양이 차고 넘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에 차고 넘친다. 우리 삶에도 그렇다. 그렇다면 그 하나님을 아는 우리는 그 하나님의 찬양이 우리 안에 가득해야 하고 그것이 넘쳐나는 것이 자연스럽다.
가서 보고 들으라. 하나님께서 하신 일들을 성경 안에서 그리고 성도들과의 교제를 통해 보고 들으라. 그리고 그 하나님을 내 삶에서 경험한다면 우리 안에 하나님의 찬양이 차고 넘쳐 우리의 기쁨이 가득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