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의 나음이 무엇이냐?
본문: 여러 본문
설교자: 조정의
하나님의 백성이 이 땅의 백성보다 나은 것이 무엇일까? 그리스도인은 시험에 붙고 세상 사람은 떨어지고, 그리스도인은 원하는 직장에 빨리 들어가고 세상 사람은 못 들어가고, 그리스도인은 결혼도 잘하고 아기도 잘 낳고 경제적으로 부유해지는데, 비그리스도인은 결혼도 늦어지고 아기도 잘 안 생기고 경제적으로 궁핍해진다면, 그리스도인은 질병에 잘 걸리지 않고 장수하고, 비그리스도인은 자주 질병에 걸리고 빨리 죽는다면, 그러면 하나님을 믿고 섬기기를 잘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세상 사람들에게 우리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말할 때 설득력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 타락한 세상에 살면서 죄의 결과인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겪는다. 그리고 이런 현실은 우리를 실족하게 한다. 시편 73편의 저자 아삽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다고 노래했다(시 73:2). 욥도 여러 번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이 당하는 고난과 악인의 평안함을 비교하며 억울함을 호소했다(욥 21:-13). ‘우리의 나음이 무엇인가?’, 이것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불신, 원망, 분노 등 여러 가지 죄를 맺는 악의 씨앗이다. 그 씨앗이 우리 마음 밭에 깊이 뿌리 내리기 전에 예리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제거해야 한다. 말씀은 우리에게 밝히 ‘우리의 나음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1. 우리는 사망을 삼키는 소망을 가졌다
죽음은 인류 최대의 원수다. 히브리서 기자는 사람들을 가리켜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 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말했다(히 2:15). 우리 모두는 죽음을 무서워한다. 죽음은 고통스럽고 사랑하는 사람을 상실하는 슬픔을 가져온다. 죽음을 피해 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냥감을 지켜보다가 갑자기 달려들어 삼키는 맹수처럼 죽음은 갑자기 우리를 삼킨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사망에 삼킴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망을 삼키는 소망을 가지고 있다.
53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54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3-55)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죽음은 썩을 것을 벗고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 일이다. 죽을 것을 벗고 죽지 아니함을 입는 것이다. 썩음과 죽음은 죄의 결과이다. 우리가 입을 새로운 육신은 죄와 그 결과에서 자유로운 육신이다.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고 질병과 고통과 죽음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육신이다. 비그리스도인도 부활한다. 하지만 그들의 부활은 “심판의 부활”이다(요 5:29). 그들은 영원히 죄에서 자유롭지 않으며 자기 죄의 결과인 고통을 영원히 받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부활은 “생명의 부활”이며,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게 되어 거룩하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살면서 온전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소망을 가진 우리는 바울처럼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고후 5:8). 사망보다 큰 소망이 있는 사람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곰곰이 따져보라. 영원이라는 시간을 두고 볼때 이 땅에서의 삶은 길어야 100년 밖에 되지 않는다. 야고보가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라고 말한 이 땅에서의 짧은 삶에 죄가 가져온 고통과 슬픔은 또 얼마나 많은가? 하루 빨리 거기서 해방되어 새로운 육신을 입고 하나님과 영원히 더불어 살게 될 소망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는 담대하게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넘어 바라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죽음이 주는 고통과 슬픔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도 죽음 앞에 무기력한 인생을 보시고 눈물을 흘리시며 불쌍히 여기셨다(요 11:33, 35). 하지만 죽음이 주는 고통을 삼킬 만큼 커다란 기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상실이 주는 슬픔을 삼키고도 남을 만큼 엄청난 것들을 우리는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사망에게 담대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그리스도인에게는 인류 최대의 원수인 죽음을 삼키는 소망이 있다. 우리의 나음이 바로 여기에 있다.
2. 우리는 영혼을 살피는 안목을 가졌다
욥에게 불어닥친 시련을 생각해보라. 욥이 겪은 모든 시련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주어졌다. 그 시련을 통해 욥이 잃은 것은 거의 ‘전부’다. 그러면 욥이 얻은 것은 무엇일까? 비그리스도인이 생각할 때 욥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신이 자기 원수와 자존심 싸움하는 바람에 괜히 죄 없는 욥만 재산, 가족, 건강 다 잃은 것 아닌가?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생각할 때 욥은 확실히 얻은 것이 있다. 욥과 세 친구가 가지고 있던 보응 신학(하나님께 잘하면 좋은 걸 주시고, 못 하면 나쁜 걸 주신다는 믿음, 기복신앙)이 잘못된 믿음이라는 걸 배웠다.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그 입을 가리고 겸손히 그 주권에 순응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그에 대한 사람의 올바른 반응을 배웠다.
비그리스도인의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것을 ‘얻었다’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영혼을 살피는 안목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얻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주권을 부정하고 교만하게 자기 뜻을 내세우는 것이 죄의 시작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비그리스도인은 재물과 건강과 결혼, 자녀, 취업 등이 잘 되는 것만 계산하지만(운세), 그리스도인은 영혼의 잘됨을 계산하는 법을 안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사랑하는 형제 가이오를 이렇게 축복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 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삼 1:2).
영혼의 잘됨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인이 속으로 탄식하며 기다리고 갈망하는 바임에 틀림이 없다.
23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24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25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롬 8:23-25)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우리뿐만 아니라 피조물도 우리의 속량을 고대한다고 말했고, 성령님도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했다. 가만히 살펴보면 바울은 단순히 우리가 몸을 떠나 새 몸을 입는 그 순간에 집중하는 게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전체 과정에 집중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의롭다고 하신 우리를 영화롭게 하시는 과정.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시는 과정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영혼의 잘됨이다.
비그리스도인은 단순히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잘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보지 못하는 것을 참고 기다릴 수 있다. 내 몸을 통해 예수님께서 존귀하게 되는 것,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는 것,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 그것이 비그리스도인의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잘됨이다. 영혼을 살피는 안목을 가진 우리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 3:17-18).
3. 우리는 영혼을 돌보는 목자를 가졌다
그리스도인이 영혼의 잘됨을 인내하며 바랄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우리 영혼을 돌보시는 목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에게 없는 것을 기뻐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있는 분 곧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기뻐하기 어려운 환경 가령 사랑하는 이가 아프거나,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거나, 바라는 것이 계속 이루어지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궁핍하거나, 관계적으로 고통 중에 있는 환경 등에서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그 고통과 상실 가운데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고 계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33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0-33)
그리스도인이 고통과 슬픔을 겪을 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믿음’이다. 하나님께서 돌보고 계신다는 믿음. 예수님은 먹을 것, 마실 것, 입을 것을 염려하여 구하지 말라고 하셨고 이방인(비그리스도인)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대신 그리스도인이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다(영혼의 잘됨). 그 이유가 무엇인가? 들풀도 성실하게 입히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를 통해 예수님은 영적인 공급뿐만 아니라 물질적 필요도 공급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사도 바울 역시 이렇게 말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롬 8:32). 그리스도인이 고통과 슬픔 중에 있을 때, 믿음이 요구된다. 그때가 바로 믿음이 강력하게 일할 때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를 위해 내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우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하나님께서 지금 내가 처한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계시며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다윗의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랑하는 시편 23편을 지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리스도인은 이 고백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다. 조니 에릭슨 타다, 닉 부이치치같이 일반인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장애를 겪는 이들의 입에서도 똑같은 고백이 흘러나온다. 어떻게 그럴 수 있나? 하나님께서 자기 영혼을 돌보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죄로 인해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우리의 나음이 여기에 있다. 우리는 반드시 모든 것을 합하여 선을 내시는 분께 온전히 우리를 맡길 수 있다.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이 어려움을 만날 때 실족한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원망하며 심지어 떠난다. 그런 심정을 인간적으로 충분히 공감하지만, 결국 과거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찾았던 이유와 같은 이유로, 즉 자신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신, 이 땅에서의 복을 빌어주는 신을 하나님으로 택하여 잠시 따르다가 실망스러우면 다른 신으로 갈아치우는 식으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이 드러난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전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은 저에게 최고의 하나님이시고 선하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저의 하나님이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을 듣고 깊이 감동하였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다. 죽음이 두렵고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지는 것은 큰 상실을 맛보는 슬픔이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나음이 있다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 보이는 것을 뛰어넘는 보이지 않는 소망, 영혼의 잘됨을 바라보는 그리스도인.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내 영혼의 목자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또한 이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하나님은 기브앤테이크 방식으로 우리에게 무언가 주셔야만 좋은 분이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미 고귀한 아들을 주셨고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을 주셔야만 선한 분이 되는 것도 아니다. 우리보다 훨씬 지혜로운 하나님께서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좋은 것을 주신다. 이 땅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허락하시든지 우리는 선하고 좋으신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분을 전심으로 예배할 수 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