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우리가 품어야 할 같은 마음
본문: 빌립보서 4장 1-3절
설교자: 최종혁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빌립보 교회의 배경은 사도행전 16장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소아시아에서 전도하고픈 마음이 있었지만 하나님과 예수님, 성령님께서 막으십니다. 그러던 중에 사도 바울이 어느 날 밤 환상을 보게 됩니다. 마게도냐에 있는 사람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라고 말하는 환상이었습니다. 그는 ‘이것이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다’라는 결론을 내리고 함께 하는 사람들과 그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게 되는데, 그곳에 가서 가장 처음 머물렀던 곳이 이 빌립보 성입니다.

이곳은 로마의 식민지였고(행16:12) 이곳에 유대인의 회당이 없었던 것으로 보아 유대인들이 적었던 곳임을 알 수 있습니다(행16:13). 또한 빌립보서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에바브로디도, 유오디아, 순두게, 글레멘드 등 모두 로마식 이름, 즉 이방인의 이름들입니다. 빌립보는 로마의 문화 속에 있었던 도시였고, 그래서 빌립보 교회의 구성원들도 역시 대부분 로마 시민이었을 것입니다.

처음 빌립보 교회가 시작되는 모습을 보면 분명한 성령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강가에서 여자들을 만나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루디아'라는 여자의 마음을 여셔서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십니다. 또한 귀신들린 여종을 만났을 때에도 성령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게 됩니다. 이 여종의 귀신을 쫓아낸 일로 사도 바울은 감옥에 갇히게 되는데, 그 날 밤 기도하고 찬양할 때 지진이 일어나 옥문이 열리고 간수와 그의 가족들이 구원받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빌4:15).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세운 교회였고, 그 이후로도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 물질적으로 도움을 주며 함께 일했던 교회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빌립보서는 다른 서신서들과는 달리 교회의 어떤 문제에 대해 언급한 것이 없습니다. 고린도서나 갈라디아서 등을 보면 교회 내의 여러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 빌립보서에는 교회의 구체적인 문제에 대한 지적이 없습니다. 이런 것들로 볼 때 빌립보 교회는 많이 성숙한 교회, 좋은 교회였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4:1).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위와 같이 부르고 있습니다. 그는 빌립보 교회를 사랑하고 있었고 만나고 싶어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편지를 감옥에 있을 때 썼는데 빌립보 교회는 그에게 기쁨을 준 교회였던 것입니다. 또한 이 교회를 가리켜 자신의 ‘면류관’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기쁨이자 자랑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성숙한 교회, 좋은 교회라고 해서 그 중에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 교회에는 몇 가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빌1:17~2:18을 보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4:2). 또한 빌립보 교회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무슨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1:28). 또한 빌3:2,3에서는 “개들, 행악하는 자들” 즉 거짓교사들로서 유대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을 때 믿음 뿐만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빌립보 교회에는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3:18)고 하여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3:19)들로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런 자들이 빌립보 교회에 있었고 교회에 어려움을 끼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성숙하고 좋은 교회, 복음에 힘쓰던 교회였지만 그 안에도 여러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교회에게 “이와 같이 주안에 서라”(4:1)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 서라”는 말은 “주 안에서 흔들리지 말고 굳게 서라”는 의미인데 이 말은 로마 군인들에게 익숙한 용어입니다. 로마시대가 배경인 전쟁 영화를 보면 군사들이 자신의 키만한 방패를 들고 대열에 맞춰 서서 적군과 싸웁니다. 반드시 각자 자신의 자리에 서 있어야 하고, 두려움에 물러섰다가는 진영이 깨져 전쟁에서 지기 쉽습니다. “굳게 서라”는 말은 그와 같은 상황을 가리킵니다. 교회도 외부의 공격이 있습니다. 대적들이 교회를 흔들려고 하는데 피하지 말고 그 자리에 굳게 서라는 것입니다.

사단은 빌립보 교회만 공격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전, 이후의 모든 교회들을 공격합니다. 교회가 굳게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사단이 예전부터 지금까지 충실하게 하고 있는 일입니다. 사단은 한 사람이 구원받으면 그냥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굳게 서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합니다. 핍박하거나 대적하기도 하고 진리를 잘못 가르치기도 합니다. 진리가 아닌 것이나 진리와 유사한 것을 가르치고 성도들이 하나 되지 못하도록 내부에 분열을 일으킵니다.

성도들 개개인을 향해 사단이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무너뜨려 교회를 무너뜨리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럽의 교회가 문을 닫고 있고 미국의 교회가 자유주의 신학에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주님 안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좋은 교회, 주님 안에 잘 서있는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말이 우리 교회에 어려움이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단은 계속해서 교회를 넘어뜨리려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불화살을 날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주님 안에 굳게 설 수 있을까요?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1)에서 “이와 같이”라는 말은 2~9절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는 방법을 6가지 명령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4절),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5절), “염려하지 말고 아뢰라”(6절),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행하라”(9절)고 명령합니다. 이 명령들에 순종할 때 주님 안에 굳게 설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이 중에서 2,3절에 있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명령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 말씀은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권면하면서 2절에서 ‘유오디아’와 ‘순두개’라는 자매들에게 개인적으로 권면하고 있고, 3절에서는 교회 차원에서 권면하고 있습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먼저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생각해보면, 사도 바울이 교회에 쓴 편지를 한 형제가 대표로 앞에 나와서 읽어주고 있는 상황을 연상할 수 있습니다. 빌립보서 1~3장을 기쁘게 읽어내려간 뒤에 4장으로 와서 ‘주 안에 서라’는 일반적인 명령을 할 때까지만 해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2절에 와서 구체적으로 두 자매를 언급했을 때, 그것도 칭찬이 아니라 권면하는 글이었을 때 그것을 듣는 당사자들은 어땠을까요? 분명 그 두 자매는 그 자리에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신중하고도 심각하게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일도 역시 일반적인 명령으로 끝낼 수도 있었는데 그는 굳이 구체적인 이름을 언급하며 ‘권한다’는 말도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두 자매를 각각 부르고 각각 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개개인에게 책임을 더욱 느끼게 하기 위함입니다. 유오디아는 순두개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순두개는 유오디아에게 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각각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두 사람은 믿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는 이들이 복음에 함께 힘쓰던 여인들이라고 했습니다(3절).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던 자매들인 것입니다. 이들은 진리에 있어서 다른 견해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주 안에서 열심과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 마음을 품지 못하고 마음이 갈라선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 되지 못해서 교회가 하나 되지 못하는 문제가 생기고 있었습니다.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133:1).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롬12:16-18)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전1:10)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벧전3: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시고 믿는 자들이 하나될 것에 대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17:21) 예수님의 이 기도는 성령께서 오셨을 때 응답되었습니다.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12:13). 성령님으로 온 교회가 하나가 된 것입니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교회는 예수님의 기도와 하나님의 응답으로, 그리고 성령님의 능력으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문제는 이 하나됨을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엡4:3) 성령께서 이미 교회를 하나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복음의 한 팀입니다. 이 하나됨을 지키는 것,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같은 마음을 품고 하나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빌립보서 2장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2:1). 그리스도 안에 권면, 사랑의 위로, 성령의 교제, 긍휼, 자비가 있습니다.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마음을 품어”(2:2). 교회가 하나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됨의 방법은 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2:3). 어떻게 하나될 수 있습니까?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것입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2:4). 또한 자신의 유익만 구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유익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기중심적 가치관을 버리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2:5) 그러한 겸손의 마음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2:6). 예수님이 하나님이셨다는 사실에서 주님의 겸손이 시작됩니다. 주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세상을 창조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취한다”는 말은 무엇인가를 “붙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권리’입니다.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마땅히 붙잡아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그 권리를 마땅히 주장해야 할 것으로 생각지 않으신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2:7). 예수님의 태도가 겸손한 행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비우시고 자신의 권리와 혜택을 내려놓으셨습니다. 그것도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주님은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이신데 겉모습만 사람이 되셨던 것이 아니라 정말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이 피조물 중에 하나가 되셨습니다. 스스로 온전하신 하나님이 인간의 도움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셨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죽음을 면하기 위해 피하셔야 했고, 모든 것을 가지신 하나님이 배고픈 존재가 되셨습니다. 피곤하지 않는 분이 피곤해서 주무셔야 했고, 거룩하신 분이 죄의 유혹을 이기셔야 했으며 영원히 찬양받으실 분이 섬기는 자로 사람 중에 계셨습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주님은 낮은 자로 오셔서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죽음은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느 시대든지 오실 수 있었고 어떻게 죽으실 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좀더 편하고 영광스러운 죽음도 있었는데 주님은 굳이 십자가의 죽음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가장 끔찍하고 참혹한 죽음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그리스도의 수난>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그 영화 중에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실 때 길가에 있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장면입니다. 그 때 그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지금 이 십자가를 지지만 나의 죄 때문에 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자체가 수치스러운 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면 모두들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던 것입니다. 그런 십자가를 예수님께서 지고 돌아가셨습니다. 우리들의 죄 때문에 그렇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유오디아와 순두개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같은 마음을 품지 못한 것은 겸손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서로 자신의 권리를 취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갈등이 있을 때 내가 잘못한 것도 인정하지만 그가 더 잘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두 자매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저 사람이 먼저 용서를 구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마땅히 취해야 할 권리이다’라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하나될 수 없습니다. 주 안에서 같은 마음, 즉 겸손한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높은 자들입니다. 야고보는 낮은 형제에게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약1:9). 내 육체의 어떠함과 상관없이 주님 안에 있으면 높은 자들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우리가 얼마나 높은 자들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고 모든 신령한 복으로 복 받은 자이며,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는 제사장이고 장차 주님이 다시 오실 때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을 다스릴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우리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생각한다면 교만한 생각에 빠지기 쉽습니다. ‘내가 더 대접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말하는데 사람들이 왜 잘 듣지 않지?’, ‘나는 이런 대우를 받을 존재가 아닌데…’ 이런 생각들이 교회를 흔들어 하나 되지 못하게 합니다.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 제자들의 모습을 생각해보십시오. 주님은 십자가를 향해 가고 있을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높은 자들인지를 두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제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마땅히 누려야 할 것으로 생각했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마땅히 섬김을 받으셔야 했지만 그런 권리를 취하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중에 교만해지고 싶은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나 겸손하기를 원합니다. 다른 이를 높이고 나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고 싶어 합니다. 그렇다면 그 방법을 예수님의 태도를 통해 배우셔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권리를 마땅히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을 때 겸손한 자로 오셔서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이루실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포기하셨던 것들을 생각할 때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유익을 버려야 하고 손해 봐야 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는 것은 그 겸손의 끝에 하나님의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2:9-11).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는 본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낮아지신 예수님께 가장 높은 자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스스로를 낮출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시고, 우리가 스스로를 높일 때 우리를 낮추실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십시오. 그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겸손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빌4:3에서 교회 차원에서의 권고를 보겠습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3).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는 빌립보 교회의 장로 중 하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빌립보 교회의 리더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자매들은 “복음에 함께 힘쓰던 자들”로서 그녀들을 도와주라는 말입니다. “함께 힘쓰던”이라는 말은 “함께 고생한”이라는 말입니다. 빌립보 교회는 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던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실라와 함께 감옥에 갇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 학자들은 이 유오디아와 순두개가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만났던 강가의 여인들 중에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분명한 것은 이들이 복음에 힘쓰던 자들이고, 사도 바울과 함께 동역하던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사도 바울과 복음을 전하던 한 팀이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장로에게 두 자매를 도와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하나되는 모습니다. 개개인 스스로는 주님의 마음을 따라서 같은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하나 되게 하는데 도와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됨을 깨는 사람이 아니라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른 성도의 넘어짐이 기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한 팀,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성도들의 다툼이 재미있는 이야기꺼리가 되지는 않습니까?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같다고 했습니다(잠 18:8).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이 별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안에 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 되기 위해 겸손한 마음으로 화평케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들의 대적 사단은 우리가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다투고 자랑하고 불평하고 갈라서기를 바랍니다. 힘이 약해져서 주 안에 굳게 서지 못하고 복음에 힘쓰는 자들이 되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대장’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대적’이 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대장은 우리가 믿음의 군사, 복음의 군사들로서 하나 되어 굳게 서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군사입니까? 겸손한 마음으로, 화평케 하는 자로 교회의 하나됨을 지키고 계십니까? 우리가 주님의 겸손을 닮고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서, 교회가 하나 되어 하나님의 일에 힘쓰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