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
본문: 데살로니가전서 5장 17절
설교자: 최종혁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종교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 기도를 한다. 제도화된 종교든 미신이든, 어쨌든 ‘믿음’을 가진 사람은 기도한다. 심지어 평소에 믿음이 없던 사람도 절박한 상황에서는 기도하기도 한다. 성경과 같은 경전이 없는 종교도 기도는 강조한다. 각 종교에서 경전 혹은 교리서와 같은 것을 얼마나 읽으라고 강조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기도하는 것은 그 모양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공통적으로 강조한다는 사실은 쉽게 알 수 있다. 기도하는 행위는 우리에게 낯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기도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이유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기심에 바탕을 둔 기복신앙때문이다. 나를 위해 복을 비는 것이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기복신앙을 바탕에 두고 있다. 내가 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면 신이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상호 계약과 같은 신념이 모든 종교의 바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과 같은 경전이 없는 종교에도 자연스럽게 ‘기도’에 대한 개념은 있다. 기도를 해야 신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고 들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는 간절할수록 좋고 그 간절함이 잘 표현될수록 신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확률도 높아진다. 그런 것이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새벽에 일어나서 정화수를 떠놓고 기도하고, 제사상에 그래도 더 좋은 과일을 올려놓고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 이것이 종교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기복신앙이다.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나보다 더 능력이 있다고 여겨지는 존재를 이용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라면 누구에게 기도하는지(기도의 대상)는 중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누구에게든 기도할 수 있다. 고대부터 현대까지 다신론이 성행했던 이유 중 하나도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많은 신에게 기도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다. 혹은 사람도 전문 분야가 있듯이 신도 전문 영역이 있다고 보면, 특정 문제는 특정 신에게 기도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계속해서 우상숭배에 빠졌던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것이었다. 꼭 그들을 애굽에서 인도해낸 여호와 하나님께만 기도해야할 필요를 그들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기독교가 각 문화권에 전파될 때 생겼던 심각한 문제 중 하나도 바로 이런 사람들의 종교관이었다. 기도에 대한 생각은 그대로인 체 기도의 대상만 ‘하나님’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제대로 된 성경적인 이해 없이, 그저 하나님을 전지전능한, 그리고 사랑도 많아서 내가 원하는 것을 다 해주는 존재로만 막연하게 인식한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섬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런 사람들을 더욱 부추기며 자기 배를 불리는 목사들도 많았다. 성경에 기록된 복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들을 가져와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교회 잘 나오고 헌금 잘 하고 열심히 기도하면 그런 것들을 다 얻게 될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
말씀을 준비하면서 기도에 대한 설교들을 찾아보니, 그런 내용의 설교들이 정말 많았다. “하늘 보좌를 뒤흔드는 기도의 능력, 하나님의 능력을 내 것이 되게 하는 기적의 기도, 기도로 하늘의 보물 창고를 열라”와 같은 제목과 내용의 설교들이 많았다. 성경에서 말하는 기도가 정확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고, 따라서 복을 얻고 싶으면 기도하라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들이 좋아하는 말씀은 이런 말씀이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모든 것’을 주기 원하신다. 내가 건강하기 원하시고, 내 사업이 잘 되길 원하시고, 내 자녀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길 원하시고, 내 남편이 선거에서 당선되길 원하시고, 내가 원하는 모든 좋은 것들을 하나님은 나에게 주기 원하시니까 기도하라고 한다. 기도해도 받지 못하는 것은 더 열심히 기도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그 열심과 간절함이 제대로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말씀도 자주 인용된다.
말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기도의 간절함이 십일조나 물질적 헌신으로 더 표현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혹은 이미 하나님과 아주 가까운 목사의 기도를 받으면 된다고 가르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밑에 전화 번호와 계좌 번호가 나간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기도이고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하는 이유일까? 그렇지 않다. 세상의 정의를 따라서 우리를 ‘기독교(인)’라고 부른다고 해도, 기독 신앙의 바탕에 이런 기복신앙이 있을 수 없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첫째 이유는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부족한 것이 없고 따라서 필요한 것도 없으시다는 것이다.
시 50:9–12 내가 네 집에서 수소나 네 우리에서 숫염소를 가져가지 아니하리니 10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뭇 산의 가축이 다 내 것이며 11산의 모든 새들도 내가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12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아니할 것은 세계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하나님께 부족한 것이 없고 필요한 것이 없는데, 우리가 무언가를 드리고 무언가를 얻을 수는 없다. 기복신앙에서 전제로 하는 그런 계약 자체가 불가능하다.
또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는 서로의 이익을 위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한 언약 관계다. 결혼한 부부가 계약서를 쓰고 서로 절대 손해보지 않을 규칙을 세우고 생활을 한다고 생각해 보자. 서로가 벌어오는 돈에 따라 집안 일을 나누고 아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분단위로 나눈다. 혹시라도 내가 청소를 한번 더 하면 돈으로 받든지 아니면 다음에 반드시 상대가 한번을 더하든지 한다면 어떨까? 그런 사람들을 같이 살고 있다고 해서 ‘부부’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사랑은 나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고, 결혼은 그런 사랑의 언약에 기초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그렇다. 언제든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지 않으면 내가 하나님을 버릴 수 있는 관계가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릴 수 있는 관계도 아닌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러한데, 마치 직원이 사장에게 일에 대한 합당한 급여를 달라고 권리를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한 일에 대한 댓가를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바른 태도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런 기복신앙의 전형을 보여주었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 종교 생활을 강하게 책망하시며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셨다. 그들이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이유가 잘못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저 그들이 만든 이름만 ‘하나님’인 거짓 신을 섬기는 종교인일 뿐,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은 그런 이유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런 이기적인 동기와 목적으로 기도하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도하는 이유를 생각해 보기 전에 기도하지 않는 이유를 먼저 생각해 보자. 기복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기도에 열을 올린다. 거기에 정말 그들 삶의 성패가 달려있는 듯이 열심히 기도한다. 새벽에 기도하고 밤에 기도한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까지 기도하지는 않는 것 같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성경은 말하는데, 우리는 기도하기를 좀 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왜 그럴까? 기도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서 쉬지 않고 하기는 힘들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높은 산에 올라가 돌을 100개 이상 쌓은 후에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아니, 최소한 예배당에 나와서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에게 라틴어나 헬라어, 히브리어를 배워서 그 언어로 기도하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하루에 1시간 이상은 기도해야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기도 한번 하려면 100만원은 헌금해야한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말하는데, 기도가 꼭 필요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도가 자연스럽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더하자면, 기도는 그만큼 쉬운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호흡은 하는 것보다 하지 않는 것이 어렵다.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에게 우리는 “숨만 쉰다”라고 말한다. 기도도 그렇다. 그만큼 기도는 쉬운 것이다.
그런데, 이 쉬운 것을 왜 쉬고 있을까? 흥미롭게도 가장 큰 이유는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언제 기도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이 이해될 것이다. 우리는 언제 기도하는가? ‘큰 일’이 있을 때 한다.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큰 일’이 있을 때 기도한다. 지난 수능 시험날 궁금해서 어떤 교회의 수능 기도회 실시간 중계를 봤었다. 목사님이 올라와서 제일 처음 한 말씀이 이렇게 젊은 분들이 기도회에 많이 모이니 참 좋다면서 평소에도 좀 이렇게 오지라는 것이었다. 기도회에 오지 않으면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만, ‘큰 일’을 만났을 때 사람들이 더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나왔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도 쉬지 않고 기도하기 보다는 큰 일이 있을 때 기도한다. 큰 일이 있을 때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럴 때만 기도하는 것이다. 큰 일이 있을 때 기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니다. 그 때만 기도하는 것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 왜 큰 일이 있을 때만 기도하고 우리 기준에서 큰 일이 있지 않을 때는 기도하지 않을까? 위에 말한 것처럼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굳이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는 기도가 있다. 당시 사람들은 사실 이런 기도를 매일 했을 것이다. 매일 먹을 것이 필요한데 그들에게 매일 먹을 것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우리는 어떨까? 우린 이런 기도를 하지 않는다. 이미 냉장고에 먹을 것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냉장고도 2개씩 있고 김치냉장고도 따로 있다. 여차하면 언제든 배달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일용할 양식을 위해 우리는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음식을 요리하거나 조리할 약간의 귀찮음만 이길 수 있으면 된다. 그걸 위해 기도하기는 좀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실제적으로 우리는 과거에 비해 많이 풍요로운 삶을 누리고 있다. 삶이 풍요롭다는 것은 살아가는 환경에 덜 의존적이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아주 옛날을 생각하면, 비가 오면 비를 맞아야 했고 눈이 오면 눈을 맞아야 했다. 더우면 땀을 흘리고 추우면 추위에 떨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집에 살고 있다. 더위와 추위도 피할 수 있다. 흉년이 들어도 비축된 음식이 많이 있다. 비가 조금 오지 않고 혹은 반대로 많이 온다고 해도 약간의 피해를 입기는 하지만 여전히 어렵지 않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에서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께 기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기도하지 않아도 별 일이 없다. 혹은 반대로 기도해도 별 일이 없는 것 같다. 그냥 순리대로 될 일은 되고 그렇지 않은 일은 안되는 것 같다. 기술의 발달로 가능해진 일들은 기도하지 않아도 그 유익을 누릴 수 있고, 반대로 불가능한 일들은 기도한다고 해도 가능하게 되는 것 같지 않다. 기도를 하든 하지 않든, 어차피 결론은 정해져 있는 것 같은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큰 이유다.
그런데, 생각해 보자. 만약 ‘필요의 유무’가 우리가 기도하거나 하지 않는 이유라면 기복신앙과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가?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이기적이라고 생각될 수 있는 것까지는 구하지 않는다는 것 뿐이다. 즉, 과도한 욕심은 부리지 않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얘 없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기도로 표현하고 있지 않을 뿐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우리는 기도를 쉬고 있을 뿐이다. 결국 내가 원하는 것이 어디까지냐의 차이일 뿐, 기도하는 이유 자체는 다르다고 말할 수가 없다.
쉬지 않고 기도하지 않고 특별한 때만 기도한다면 내가 기도하는 이유에 대해서 크게 오해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특별할 때만 기도하는 것은 기도의 이유를 나의 필요와 원함을 채우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우리는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쉬지 않고’ 기도한다. 즉, 우리 삶에 항상 기도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기도의 이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올바른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위해 기도한다. 앞서 읽었던 시편 50편 말씀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충만하신 분으로서 사람에게서 무엇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할 것을 명하셨다.
시 50:14–15 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존하신 이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15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기도한다는 말의 의미가 그것이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께서 내 삶 가운데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 기도다. 그렇게 기도로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고, 그런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사람이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기도의 결과가 모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되기 때문이다.
다윗이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골리앗과 싸웠다고 생각해 보자. 그럼, 이겼을까, 졌을까? 이겼을 수도 있고 졌을 수도 있다.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윗이 이겼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이 영화롭게 되시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단지 다윗이 대단한 용사로서 드러났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고 싸움에 나섰고 그 결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 것이다.
앗수르와 대적하여 싸웠던 히스기야도 마찬가지다. 히스기야는 앗수르 왕의 편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셨고 그로인해 하나님이 유일한 참 하나님이심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이다.
이 원리는 우리 삶의 모든 곳에 적용된다. 식사 기도는 밥 먹기 전에 하는 의식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의 필요를 공급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기도를 하는 순간 모든 공은 하나님께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 삶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길 원한다면 기도해야 한다. 그냥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라고 말하면 그만이 아닌 것이다. 예수님께서 예로 들었던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라. 그는 마치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듯이 기도했지만 그의 기도는 “나”로 가득 차 있었다. ‘내’가 토색하지 않았고 불의하지 않았고 간음하지 않았다. ‘내’가 세리와 같지 않았다. ‘나’는 금식했고 십일조를 드렸다. 그의 자기 의로 가득찬 삶은 자기만 영화롭게 할 뿐이었다. 그는 금식하고 기도했을지 모르지만, 그 이유가 잘못되어 있었고 그 결과도 끔찍했다.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고 내가 그분의 피조물임을 기억하고 기도하라. 그럴 때 내 삶의 모든 부분을 통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실 것이다.
다음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아마 이 부분이 다른 종교적인 기도와는 가장 큰 차이를 만드는 부분일 것이다. 앞서 말했듯 종교적인 기도는 기복신앙을 바탕에 두고 있다. 단지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기도를 할 뿐이지 기도의 대상과의 관계에는 관심이 없다. 기도의 대상은 내가 기도한 것을 나에게 주면 그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실 뿐 아니라 인격을 가지고 계셔서 우리와 교제할 수 있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런 기도가 가능하다.
시 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 63:1–2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서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기도로 표현하는 것 뿐이다. 이 외에도 특히 시편을 보면 하나님께 솔직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는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성숙한 신앙인이면 하지 않을 것 같은 말들도 많다(불평, 원망).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아버지 앞에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회개하는 기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기도다.
시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왜 이런 사람이 복이 있을까? 처벌 받지 않으니까? 그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다. 유명한 회개의 시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했다.
시 51:11–15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12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켜 주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 … 14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15주여 내 입술을 열어 주소서 내 입이 주를 찬송하여 전파하리이다
죄는 하나님에게서 우리를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을 빼앗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용서를 받은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었을 때 당연히 회개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멀어진 관계의 회복이 바로 기도로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과 너무 멀어져서 기도할 수 없다는 말도 거짓말이다. 멀어졌다면 더욱 기도하고 싶을 것이고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하나님께로 이끄신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하는 또 다른 이유다.
끝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 아마 이 이유가 우리가 가장 많이 드리는 기도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바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다.
앞서 기복신앙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면서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얻으려는 이기적인 기도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합당하지 않다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하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기도할 때마다 이건 이기적인 기도인지 아닌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에게 구하라고 말씀하셨다.
마 7:7–8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8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요 15:7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예수님은 비유로도 우리가 하나님께 구해야 함을 강조하셨다. 하나는 밤 중에 자신을 찾아온 손님들 때문에 친구를 찾아왔던 사람의 비유다(눅 11장). 상대방에게는 어쩌면 무례할 수도 있는 상황이지만, 예수님은 그렇게 간청할 때 사람도 그 요구를 들어줄텐데, 하물며 우리에게 좋은 것 주기 원하시는 하나님은 어떠하시겠느냐고 물으셨다.
비슷한 비유가 누가복음 18장에도 있다. 거기서는 한 과부가 불의한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호소했다. 결국 재판관은 그것이 번거로와서 그 원한을 풀어주었다. 불의한 재판관도 이럴텐데, 하물며 의로우신 하나님은 어떻게 하시겠느냐며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이런 명령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께 구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한 올바른 지식과 그에 따른 믿음이 있어야 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선하심에 대한 확고한 믿음 위에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구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먼저 생각한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구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생각하면 기도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한다. 그리고 구해야 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기도의 응답과 관련하여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선하심이다. 우리는 무엇이든 구할 수 있다. 어떻게든 구할 수 있다. 심지어 기도의 결과에 대해서도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구할 수 있다. 그렇게 기도하는데 있어서 죄책감을 가지는 성도들도 있는데 그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기도의 결과가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이 기복신앙과의 결정적인 차이다. 기복신앙은 기도의 결과를 기도하는 사람이 정하고, 그것이 이루어져야 기도가 응답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성경적인 기도는 그렇지 않다. 기도의 결과는 내가 아닌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내가 기도한대로 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그 결과는 언제나 ‘선하다’. 왜냐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의 결과에 있어 이 부분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있다. 시험에서 떨어진 것이 어떻게 나에게 좋은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질병이 나에게서 떠나지 않는 것이 어떻게 나에게 좋은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가 잘 아는 욥의 경우가 그랬다. 엘리야도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렇게 이해하지 못하는 기도의 결과를 마주해야 했었다.
하지만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도 선하시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 예수님의 기도가 이에 대한 가장 좋은 본일 것이다. 십자가를 앞두시고 예수님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눅 22:42). 심지어 예수님은 땀방울이 핏방울같이 떨어지도록 간절히 기도하셨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렇게 덧붙이셨다.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결국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지만 그것이 예수님께 좋지 않은 일이 되지 않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든 뜻을 이루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이 앉으셨다. 선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예수님께도 가장 좋은 일이었다.
우리가 기도를 하는 이유도 이렇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기도하라고 하셨고 기도를 듣겠다고 하셨다. 우리는 그 말씀에 따라 기도한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선하심을 믿으며 기도한다. 그래서 우리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내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 내가 결국 원하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라면, 잘 알지도 못하고 구하는 내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보다 모든 것을 아시는 선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나에게 가장 좋은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좋은 방법으로, 가장 좋은 때 우리에게 주신다. 언제나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
정리하면 이렇다.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기도한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기도한다. 이 기도할 이유들을 기억하고, 끝으로 이 명령을 잊지 말라.
살전 5:17 쉬지 말고 기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