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는 자다

본문: 에베소서 4장 32절 외

설교자: 최종혁

‘용서’라는 주제를 들었을 때 어떤 마음이 가장 먼저 있었는가? 누군가는 ‘용서 해야만 한다’는 부담감이 가장 먼저 있었을 수 있다. 누군가는 ‘용서하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가장 먼저 있었을 수 있다. 또 누군가는 ‘용서를 왜 해야하냐’는 억울함이 가장 먼저 있었을 수 있다. 지금 언급한 마음들은 모두 ‘피해자’의 입장에서 가질 수 있는 마음들이다. 반대로 가해자라면 용서를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 있고, 그럼에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용서’를 주제로 말하는 것은 모두에게 불편하다는 것이다. 방금 전에도 ‘피해자’, ‘가해자’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데, 용서는 뭔가 잘못된 일(악, 죄)이 저질러졌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로 인한 원하지 않은 결과가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존재한다는 것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상처를 입었고 시간이 지나 어느정도 치유가 되었는데 용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마치 그 상처를 다시 드러내는 것과 같고 심지어 그 상처를 다시 칼로 쑤시는 것과 같은 일로 여겨진다. 틀린 생각은 아니다. 용서는 때로 겉보기에는 그렇지 않지만 속에서 곪아가는 상처를 드러내어 치료하는 외과적 수술과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용서는 불편하다. 그래서 앞으로 몇주간 듣게 될 설교도 불편할 것이다. 이 설교를 듣는 동안 계속해서 기억 저편에 묻어 두었던, 혹은 그러려고 했던 누군가가 떠오를 수 있다. 기억에서 지우려고 노력했던 어떤 사건이 떠오를 수 있다.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더러운 것들이 물을 휘저으면 올라오는 것처럼, 그런 좋지 않은 경험을 다시 하게 될 수도 있다. 굳이 회복같은 것 바라지 않으니 그냥 좀 조용히 해줄 수 없냐는 마음으로 이 설교를 듣고 싶어하지 않을 수도 있다. 용서에 대해서 말하는 것, 특히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마치 2차 가해처럼 여겨질 수도 있다. 사실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용서하는 것에 대해서 비슷한 감정이 있는 똑같은 인간으로서 이 말을 하기 때문이다. 그 말을 가장 먼저 나에게 하기 때문이다. 또한 듣는 자들의 상처를 모르는 것이 아니고 그 어려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쨌든 당장에 문제가 없는데, 굳이 긁어서 부스럼 만드는 것은 아닐까하는 두려움도 있다.

따라서 용서에 대한 이런 저런 얘기를 하기에 앞서서 우리가 왜 서로 불편한 이런 얘기를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무엇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용서인지, 어떻게 해야하는지 등에 대해서 다루겠지만, 그보다 먼저 우리가 “왜” 용서해야 하는지, 용서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 시간에는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좋아하지 않는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이 말하는 바를 온유한 마음으로 받고, 또한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 성경을 살펴보기 원한다.

용서하라는 명령

용서에 대한 정의나 방법에 대해서는 조금씩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4: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용서의 반대말은 복수나 앙갚음이라 할 수 있을텐데, 성경은 이런 행위도 분명히 금지한다.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신약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구약에서도 마찬가지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구약 율법의 원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라고 생각해서 복수가 정당화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이 원리는 받은대로 돌려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죄에 대한 형벌이 정당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잠언 말씀에서는 당한대로 갚아주겠다는 마음도 버려야할 것을 분명히 말한다.

24:29 너는 그가 내게 행함 같이 나도 그에게 행하여 그가 행한 대로 그 사람에게 갚겠다 말하지 말지니라

왜 그럴까? 당한대로 갚아주는 것이 정의 아닌가? 그건 우리 생각이다. 사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정의’라는 말로 포장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바라는 정의는 언제나 내 편에서의 정의다. 실제로 사람들은 당한대로 갚아주는 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그 이상으로 갚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만족할 때까지. 어른들도 그렇지만 아이들의 싸움을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다. 한 대 맞은 아이는 똑같이 한 대를 때리는 것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한 대만 때려야 한다면 최소한 더 세게라도 때려야 한다. 그러고 나서도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린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사실 고대 사회는 ‘명예살인’이 널리 퍼져있었다. 야곱의 아들들이 그들의 누이 디나가 세겜에게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세겜 뿐 아니라 그 성의 남자들을 다 살해했던 것이 바로 명예살인이다. 아들들의 행동을 책망했던 야곱에게 그들은 “그가 우리 누이를 창녀 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라고 반문했다(창 34:31). 이것이 그들이 생각했던 정의인 것이고 사실은 복수였다. 이런 고대 사회의 복수 문화는 계속해서 복수를 대물림하였다. 짐 엘리엇 선교사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창 끝”도 보면 이런 복수 문화로 부족들이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만 이상한 것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가 이런 복수의 문화였는데,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던 것이다.

이와 관련된 말씀 중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의 말씀일 것이다.

5:38–42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여기서 예수님은 ‘눈눈이이’의 근본적인 정신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즉, 우리는 보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 관용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씀만 들어서 가슴이 답답할 것이다. 보복하지 않는 것은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해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가해자에게 관용까지 베푸는 것은 너무한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든다. 그럼 도대체 나는 뭐가 되냐는 생각이 든다. 피해를 본 사람은 나고 악을 행한 사람도 상대방인데, 왜 내가 그렇게까지 해야되냐는 생각이 든다. 아마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사람들도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정말 핵폭탄같은 말씀을 더하셨다.

5:43–44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관용을 베푸는 것을 넘어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위하여 기도까지 하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가해자의 편이신가? 피해자의 마음은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이런 말을 어떻게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하실 수 있을까? 최소한 “힘들겠지만 이런 노력은 좀 해보면 어떻겠니?”라는 식으로 말씀하시면 안되었을까? “그래도 어쩌겠어. 미워해봐야 결국 너만 손해인데. 그냥 니가 참아야지”라고 말씀하시면 안되었을까? 왜 예수님은 이렇게 무심하게 피해자에게 잔인한 말씀을 하셨을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왜 성경이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용서하라는 명령의 이유

용서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를 할 수 있다. 용서하는 것이 결국 나에게도 좋은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하고, 용서해야 결과적으로 관계의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가 되기도 한다. 보복이 가져오는 사회적 해악에 대해서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인 이유를 말씀하셨다.

5:45–48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간단히 말해, 우리가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지 않으면 죄가 지배하는 세상과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가 아무 차이가 없다는 말씀이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을 닮았다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처럼 우리의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에 ‘용서’하는 사랑도 포함되어 있음은 맥락 상 분명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복수다. 그것이 죄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 마음의 중심에 내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죄의 특징은 이기심이다. 나의 유익을 추구하고 절대로 내가 손해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것은 그럴 수도 있는 일이다. 내가 교통법규를 어기면 항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당연히 이해해줘야하지만, 다른 사람이 교통법규를 어기면 세상에 그런 몰상식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다. 우리가 생각하는 ‘정의’라는 것은 우리 입장에서의 정의일 뿐, 진짜 정의는 아니다. 내가 오른 뺨을 맞으면 상대의 왼 뺨까지 때려줘야 된다. 어쩔 수 없이 속옷을 빼앗기면 당장은 어떻게 못하더라도 다시 그것을 찾아와야하고 그 이상을 찾아와야 한다. 나에 대해서 한없이 관대하고 남에 대해서 한없이 냉철할 뿐 아니라 희생과 손해까지도 당연히 여기는 것이 죄의 특징이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기 때문이다.

그런 세상에서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보일 수 있는 차이가 바로 ‘용서’다. 남을 손해보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해를 감수하는 것이다. 바로 그 차이가 우리의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지를 보여준다. 앞서 살펴봤었던 용서에 대한 명령들도 보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라였다. 용서의 방법이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것처럼인 것인데, 그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내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 내 마음의 중심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용서로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세상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과 다르지 않다면, 용서로서 그 차이를 드러내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희미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용서가 전적으로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내가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피해자인 나에게 용서와 관련된 모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용서를 하고 말고는 내가 결정할 문제이지 다른 사람이 이래라 저래라 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명령하셨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이유로 하나님의 영광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하는 다른 모든 것과 같이 용서의 문제에 있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우리는 용서하는 것으로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한다.

용서와 관련된 우리의 어려움이나 불편함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감정도 없고 우리의 감정이나 어려움 같은 것은 상관도 하지 않으셔서 이런 명령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이런 명령을 들을 때 마치 하나님이 그러신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할 때, 결국 그 안에 우리의 행복도 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나의 행복이 같은 곳에 있는 것처럼, 용서의 영역에 있어서도 그런 것이다.

이것을 진리로서 받아들이지 못하게 하는 것이 사탄이 하는 일이다. 마치 우리를 걱정해주는 듯하며 진리에서 멀어지게 한다. 용서가 아니라 복수를 하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고 그래야 내가 행복할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용서하신 것처럼 용서하는 것,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와 우리의 용서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와 하나님의 용서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말씀하셨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6:12). 뭔가 순서가 바뀐 것 같다.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줄 수 있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할 것 같은데, 그 반대다. 이어지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에서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6:14–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 말씀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만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구원은 언제든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어떤 선한 행위로도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예수님은 우리는 용서받은 자로서 ‘당연히’ 용서하는 자가 되었음을 전제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하나님처럼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렇게 해서 이 세상 속에서 차이나는 삶을 살고 그렇게 하나님께 영광돌리라고 하신 것이다.

이 원리를 예수님은 베드로가 용서에 대해서 물었을 때 다시 한번 가르쳐주셨다.

18:21–22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은 용서는 490번까지하고 491번째에는 폭발해도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그저 계속해서 용서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 뿐이다. 어렸을 때 이 말씀을 가지고 용서의 횟수를 센 적이 있는데, 실상은 그렇게 하는 자체로 이 말씀을 어긴 것이다. 예수님은 용서의 횟수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 아니라 용서의 태도를 말씀하고 계신 것이기 때문이다. 횟수를 세는 것은 복수할 날만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 실제로 용서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용서받은 자로서 ‘당연히’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말씀하신 것 뿐이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만 달란트를 빚진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다. 주인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갚을 것이 없어 주인에게 자비를 구했을 때, 주인은 그를 불쌍히 여겨서 그 빚을 탕감(면제)해주었다. 그런데 그 종은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가 돈을 갚지 않는다며 그를 옥에 가두었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종의 동료들은 이 사실을 주인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들은 주인은 좀 괘씸하긴 하지만 어차피 빚은 탕감해 주었으니 별 수 없지라고 하지 않았다. 주인은 그 종을 불러 이렇게 말했다.

18:32–33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여기서 주목할 것은 “마땅하지 아니하냐”는 말이다. ‘불쌍히 여기는 것’은 단순히 그런 마음만 가지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빚을 탕감하는 것, 즉 용서를 말한다. 35절에서 예수님은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여기서 말하는 불쌍히 여기는 것이다. 즉, 주인은 종에게 네가 용서를 받았으니 너도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은 종을 “악한 종”이라고 부른 것이다. 탕감 받은 자로서 마땅히 탕감 하는 자가 되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는가? 내가 탕감을 받은 것과 내가 탕감을 해주는 것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되는가? 내가 용서 받은 것과 용서 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인가? 그렇지 않다. 동료들이 탕감 받은 종이 탕감 해주지 않는 모습을 보고 주인에게 그 사실을 알렸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들이 봐도 그 모습이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마땅하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여기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은 우리와 같이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여전히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을 탕감해 주고 말고는 자신의 권한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탕감받은 것하고는 아무 상관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그때부터 그에게 당연한 것은 자신에게 빚진 사람의 빚도 탕감해주는 것이 되었던 것이다. 주인은 자신이 불쌍히 여긴 것처럼 그도 불쌍히 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고, 종도 그러해야 했다.

특히 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을 비교해보면 더욱 이 상황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계산법에 따라서 결과가 좀 다를 수 있지만, 여기서 달란트가 금이었다고 하면 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 된다. 데나리온은 노동자가 하루를 일해서 벌 수 있는 돈인데, 만 달란트는 노동자가 20만년을 일해야 얻을 수 있는 돈이다.

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탕감해 주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용서를 ‘당연한 것’으로 말씀하신다. 마치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말씀하신다. 사실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용서가 얼마나 어렵든지에 관계없이 실제로 용서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용서받은 자는 당연히 용서하는 자가 된다. 사실 세상의 법은 그렇지 않다. 용서받았다고 해서 반드시 용서해야한다는 법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다. 용서받은 자는 용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차이가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세상 가운데 드러낸다. 그 차이가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그 차이가 우리가 아는 하나님이 용서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그래서 하나님은 복수하지 말고 용서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그렇게 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생각해 볼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용서를 받았는가. 받았다면 어떤 용서를 받았는가.

우리가 받은 용서

우리가 마땅히 용서해야 하는 이유가 우리가 용서를 받았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정말 용서를 받았는지, 어떤 용서를 받았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은 누가봐도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을 탕감해 주는 것이 타당했다. 그런데 그 반대의 경우도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즉 백 데나리온을 탕감 받은 사람은 만 달란트를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애초에 백 데나리온을 빚진 사람이 만 달란트를 빌려줄 능력이 있었다고 말하기도 어렵지만, 혹 만 달란트가 아니라 이백 데나리온이라고 해도 당연히 탕감해주어야 한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즉, 예수님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보면, 단순히 용서를 받았으니 용서를 해야한다는 아닌 것이다. 우리가 받은 그 용서가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용서 하는 것이 당연해 진 것이다. 일만 달란트와 백 데나리온의 차이다. 100일의 품삯과 20만년의 품삯의 차이다. 예수님은 이 차이를 과장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축소하셨다. 실제로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은 영원이고 우리의 형제들이 우리에게 진 빚은 순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받은 용서와 우리가 해야할 용서의 차이는 무한대다.

우리가 받은 용서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 우리가 받은 하나님의 용서를 이해하려면 우리는 우리 죄와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공의를 함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감사’하면서도 하나님의 용서는 쉬웠던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 있어서도 용서는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냥 아무런 희생 없이 그냥 용서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해서 그냥 눈 감아주기로 결정하시지 않았다. 그렇게 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를 반드시 심판하신다.

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고 말하는데, 이는 정확한 말은 아니다.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시고 죄인 또한 미워하신다.

17:15 악인을 의롭다 하고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사람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은 죄와 연관된 것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인과 원수 관계다. 예수님이 ‘죄인의 친구’로 불리셨던 것은 예수님이 죄인으로 불리던 자들을 찾아가셔서 그들로 회개하고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지, 예수님께서 그들의 죄를 용납하고 그들의 죄에 동참하셨기 때문이 아니다. 계시록에 기록된 심판에 대한 말씀이 바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이런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왜 저렇게까지 하시지 싶은 그런 심판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죄를 얼마나 미워하시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하나님은 절대로 죄를 그냥 용납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죄인을 그냥 의롭다고 하실 수도 없으시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반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연 상태의 인간은 죄의 노예이며(요 8:34,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진노의 자녀다(엡 2:3,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이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이것이 모든 사람들이 처해있는 상황이고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문제다. 이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만 달란트 빚진 사람처럼 우리 힘으로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것이다. 누군가 이 문제를 대신 해결해 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 무서운 심판을 영원히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스스로 그 짐을 지셨다.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죄인인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얻기 위해 의로우신 예수님이 우리의 자리에 서신 것이다. 이것을 ‘대속’이라 말하는데, 신학자 존 스토트는 이 원리를 이렇게 간결하게 설명했다.

그러므로 대신한다는 개념이 죄와 구원, 둘 다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한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신 것이다. 인간은 감히 하나님께 맞서 그분께만 합당한 자리로 올라섰고,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희생해서 우리에게만 합당한 자리로 내려오셨다. 인간은 하나님의 특권을 찬탈했고, 하나님은 인간의 형벌을 받으셨다. – 존 스토트, <그리스도의 십자가>, 160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선 극악무도한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리로 오신 것이 바로 대속인 것이다. 우리가 당해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셨다.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 예수님은 단 1초도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고 싶어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을 심판하는 재판관으로 만나기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으시며 고통스러워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가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워서,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진노의 하나님을 마주하는 것을 예수님은 절대로 경험하기 원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우리를 용서하시기 위해 이런 희생을 하셨다. 리처드 필립스는 하나님의 이런 희생을 이렇게 묘사했다.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에 들어오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의 흙먼지 속을 걸으셨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무덤 앞에서 우셨으며, 생명의 떡이신 하나님이 배고픔의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이 약한 자와 지친 자, 죄인 및 세리와 함께 음식을 먹는 장면보다 성경에서 더 아름다운 장면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죄로 상처 입은 이 세상을 괴롭히는 가시를 취하셔서 자기 머리에 쓰실 면류관을 만드셨습니다. 사랑으로 팔을 벌리심으로 창조물을 빚던 손이 나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우리를 정복하려는 모든 것을 정복하시고, 하나님 앞에서 평강과 기쁨을 누리며 살도록 우리를 해방하셨습니다. – 리처드 필립스, <히브리서>, 150

하나님의 이런 아픈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용서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것이다.

5:6–11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이유,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용서에는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없는 희생이 있었다.

용서의 중요성

이것이 우리가 받은 용서다. 우리가 탕감 받은 일만 달란트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에게 백 데나리온을 탕감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용서해 주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여전히 이 명령이 무자비하게 들리는가. 여전히 나에 대해서는 하나도 알지 못하면서 불편한 요구만 하는 것으로 들리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용서를 알지 못한다는 말 밖에는 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용서받은 자에게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세상 가운데 가장 분명하게 드러낼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세상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과 다르지 않으면, 용서로 차이를 만들지 못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한다.

우리는 용서를 ‘감정’적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용서가 안되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냐고 말한다. 하지만 용서는 되는 것이 아니라 하는 것이다. 죄악된 본성을 가진 자에게 용서는 자연스럽게 되지 않는다. 용서가 자연스럽게 되는 때가 있다면, 이미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용서와는 거리가 멀어져 있을 것이다. 용서가 될 때 용서를 하겠다면 우리는 절대 용서하지 못한다.

이것은 여전히 그 본성과 싸우고 있는 구원받은 자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용서할 수 있으면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용서가 자연스럽게 될 때 용서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용서하라고 하셨다. 힘든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은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라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르셔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시지만,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 좋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얘기를 하면, 모르니까 할 수 있는 얘기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당연히 당사자가 아닌 사람은 알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도 모르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나님도 잘 모르면서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용서해야 한다고 말씀하실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아신다. 모르는 것은 우리다. 우리가 하나님의 용서에 대해서, 우리가 받은 그 용서에 대해서 제대로 알고 있지 않기 때문에 용서에 대한 얘기는 그만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받은 용서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에 내가 용서하기엔 저 사람의 잘못이 너무 크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 때 모두가 ‘죄인’으로 인정하는 한 여자가 향유 옥합을 가지고 와서 예수님 곁에 서서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면서 향유를 부었다. 그 모습을 본 바리새인은 예수님이 진짜 선지자라서 이 죄인인 여자를 바로 알아 볼 것이고 당연히 그 여자를 쫓아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을 아신 예수님이 그에게 물으셨다.

7:40–42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시몬아 내가 네게 이를 말이 있다 하시니 그가 이르되 선생님 말씀하소서 41이르시되 빚 주는 사람에게 빚진 자가 둘이 있어 하나는 오백 데나리온을 졌고 하나는 오십 데나리온을 졌는데 42갚을 것이 없으므로 둘 다 탕감하여 주었으니 둘 중에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어렵지 않은 질문이다. 시몬은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을 받은 자니이다”라고 답했고 예수님은 “네 판단이 옳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이셨다.

7:44–48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닦았으며 45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46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그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47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48이에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실제로 누구는 더 거룩한 사람이어서 적게 사함을 받고 누구는 더 죄악된 사람이어서 많이 사함을 받은 것이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우리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 멸망받아 마땅한 죄인들이다. 차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많이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적게 사함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따라서 사랑하는 것이 달라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뿐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도 달라지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가 달라진다.

이는 내가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적게 사함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내가 받은 용서의 크기가 내가 해야 할 용서의 크기에 비해 그리 크지 않거나 오히려 작다고 여기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그것이 용서받은 자로서 마땅한 태도다.

두 가지 적용

첫째, 받은 용서를 알라. 이것이 시작이다. 용서에 대해서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내가 용서받은 자임을 생각하고 내가 받은 용서가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라.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기억하라. 내가 용서를 하고 안하고에 달려있는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자존심이나 평판 같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이다. 나를 용서하신 하나님께서 어떤 분으로서 세상에 드러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용서라는 차이를 세상 가운데 보여주어야 한다. 불편하고 부담이 될 수 있다. 억울하고 화가 날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것이 옳은 길이고 또한 가장 좋은 길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러니 하나님을 믿고, 용서하자. 용서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용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