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왜 예수는 죄인을 용서하는가?
본문: 누가복음 15장 11~24절
설교자: 조정의
오늘 우리가 살펴볼 말씀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했던 질문, ‘왜 죄인과 함께 하는가’에 대한 대답입니다. 연속된 비유들,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비유를 생각할 때 참 주님께서 지혜로우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세 비유의 공통점은 무언가 잃어버렸다는 점, 찾아내기까지 찾았다는 점, 찾고 기뻐했다는 점에서 같습니다.
그러나 오늘 등장하는 비유는 앞의 것과 참 다릅니다. 가치의 차이가 다릅니다. 잃어버린 양이나 은전은 안타까워도 없는 셈 칠 수 있지만 잃어버린 아들은 다릅니다. 영혼의 가치에 무게를 싣고 있습니다. 또한 잃게 된 원인이 다릅니다. 양은 우매한 짐승이라 자주 길을 잃고, 작은 은전도 쉽게 잃어버릴 수 있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자식은 의지를 가지고 의도적으로 아버지를 떠났습니다. 이는 죄에 대한 책임과 결과를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또한 그동안은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는 것에 강조점이 있다면 오늘 비유는 잃어버린 아들을 받아주는 아버지의 사랑과 은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 역시 핵심은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점입니다.
오늘 말씀을 4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 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을 떠나는가?(범죄)
2. 하나님을 떠났을 때 어떤 상태에 이르는가?(타락)
3. 어떻게 하나님께 돌아오게 되는가?(회개)
4. 회개한 한 죄인을 하나님은 어떻게 맞이하시는가?(구원)
윌리엄 바클레이라는 주석가는 이 비유에 대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이라고 말했습니다.
1. 범죄: 하나님을 떠난 죄의 실체(11-12)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는 장면을 통해 하나님을 떠난 죄인의 실체를 보겠습니다. 아버지는 당시 많은 품꾼, 옷, 반지, 살진 송아지, 많은 토지 등을 소유한 것을 볼 때 그는 부농이었을 것입니다. 둘째 아들은 결혼하지 않은 것을 보면 아마도 십대 후반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탕자’라고 부르는 둘째 아들은 오만 불손하고 완악하며 배은망덕한 자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요구는 무리한 요구였습니다.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12절). 당시 유대인의 법(신 21:16, 17)에서는 장자, 차자에게 나눠 줄 유산에 대한 법이 있었습니다. 사회 관습으로 죽기 전에 유산을 분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유산에 대한 권리를 누가 주장하는가입니다. 그것은 아버지의 권한이었습니다. 당시 집회서(33:19-23)라는 문서를 보면 생전에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말라, 다시 달라고 할 수 없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들은 아버지에게 찾아가서 당당하게 달라고 합니다. 그는 ‘분깃’을 달라고 하는데 그것은 ‘생명’입니다. 결국 아버지의 목숨이 나에게 남겨줄 재산을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국 아버지에게 “아버지 어차피 죽으면 나한테 줄 재산, 지금 주소!”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무리한 요구를 할 때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사정을 밝히며 말합니다. 그러나 아들은 그러한 설명이 없습니다. 죄송스러운 마음이나 겸손한 태도가 묻어있지 않습니다. 아들은 철저하게 자신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받아낸 돈으로 아들이 한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아버지를 떠나 자기행복과 유익을 누리기 위한 목적이 뚜렷했습니다.(13-14절)
또한 아들은 아버지의 명예가 땅에 떨어질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생전에 재산을 달라는 것 자체로 아버지의 명예는 이미 땅에 떨어졌을 것입니다. 그는 받은 재산을 팔아 현금으로 찾아 떠났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 땅, 재물은 현금으로서의 가치를 초월한 것이었습니다. 아들이 그 땅을 별 것 아닌 것처럼 며칠 만에 팔아버리고 현금으로 바꾼 것으로 볼 때 그는 참 오만불손한 아들입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떠나 먼 나라로 떠났다는 것은 아버지와 완전히 분리된 것입니다. 찰스 스윈돌은 이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현금을 두둑이 챙겨서 아마도 자신이 건너온 다리도 불로 태워버리고 먼 나라로 떠나버렸을 것이다” 아들의 머릿속에는 아버지와의 장래 관계에 대한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노년에 아버지가 어떻게 먹고 사실지 관심도 없고, 그동안 자신을 어떻게 키우고 보호하고 먹이고 입혔는지에 대한 감사가 조금도 없습니다. 떠나간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마음에 대한 헤아림도 없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스스로 끊어져 나간 것입니다. 유대사회에서 이런 아들에 대해 장례를 치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이미 죽은 것과 같은 사람입니다.
한 마디로 탕자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이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죽으면 어차피 내 것이 될 내 돈 미리 주세요. 어디에다 쓸 건지 묻지 마세요. 내가 하고 싶은 거 마음껏 하고 살라니까. 그리고 앞으로 나 찾지 마세요. 아버지랑 별로 상관 안하고 살고 싶으니까. 나중에 어떻게 되든지 나랑 이제 신경 쓰지 말고 없는 셈 치고 내가 죽었다 생각하고 그렇게 사세요. 알겠죠?” 탕자는 그런 아들이었습니다. 유대 사회에서 이런 아들은 가문의 수치였고, 아버지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이름에 먹칠을 하며,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히고 마음을 찢어놓는 일을 했습니다. 배은망덕한 아들이고 패륜아였습니다. 조선 시대였다면 참수였고 능지처참 감이었습니다. 유대인도 체면과 명예가 중시되는 사회였습니다. 유대인 십계명(5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였고,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레 20:9). 선지자 나단이 여기 있었다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이게 바로 당신이다!”
하나님은 모든 만물, 특별히 사람의 아버지이십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셨습니다. (창 1:27; 약 3:9, 사 43:7; 골 1:16). 모든 피조물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매순간 공급하십니다(사망, 생명, 호흡, 재물, 질병, 치유). 성경은 하나님을 가리켜 “만물을 살게 하신 분”(딤전 6:13), “만물을 붙드시는 분”(히 1:3)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죄인은 탕자처럼 하나님을 없다고 말합니다(시 14:1). 또한 죄인은 하나님의 명예를 실추시킵니다(롬 1:21-23).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썩어질 영광과 맞바꾸었습니다. 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행복과 유익만 추구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한다(엡 2:3)” 죄인은 오직 하나님이 주실 수 있는 것들을 달라고 요구하고 정작 하나님은 내팽개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렘 2:13).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은 거절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들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2. 타락: 하나님을 떠난 죄의 결과(13-16)
아들은 며칠이 되지 않아 재물을 다 모아 먼 나라에 갔습니다.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였습니다(13절). 허랑 방탕은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물 쓰듯이’, ‘뿌리다’는 것입니다. 결국 몽땅 다 써서 없앴습니다.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뭘 먹고 살 수 있을까요? 수렵 채집을 통해 먹을 것을 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나라에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흉년이 들면 풀을 뜯어 먹거나 신발 가죽을 먹거나 음식 쓰레기, 죽은 지 얼마 안 된 인육을 먹기도 하는 시대였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배고파서 죽게 되었습니다. 그가 생각한 해법은 그 나라의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어 사는 것이었습니다. 이방인의 노예, 품꾼이 된 것입니다. 당시로서는 창피하고 모욕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한 일은 돼지 치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 중에는 돼지를 치는 사람에게 화가 있다고 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는 너무 배고파서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열매는 식용으로 먹지 않는 열매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도 잘 먹이지 않는 열매라고 합니다. 그것마저도 주인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와 함께라면 어떤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무 걱정 없이 아버지의 친밀한 사랑 속에서 살았을 것입니다. 그 사랑을 박차고 나갔을 때 아들이 경험한 것은 인생의 밑바닥이었습니다. 한없이 추락해서 돼지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 상태가 하나님을 떠난 죄인이 맞이할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아들처럼 처음에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있었기에 아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들을 소진할 때까지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재물이 많아 실컷 방탕하게 누리느라 몰랐지만 그는 친밀한 아버지의 사랑과 완전히 끊어져 있었고 그 관계 속에서 주어지는 평안과 사랑과 보호와 공급을 스스로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짐승보다 못한 상태로 추락하는 것은 단지 시간 문제였습니다.
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스스로 생명과 호흡을 주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떠나버린 자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하는 건강, 재물, 힘과 지혜를 지금 방탕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일시적인 것들이 사라져 추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입니다.
죄인은 하나님께 ‘내가 사는 동안 필요한 것만 주시오’라고 말하고 그 모든 것의 근원되신 하나님은 떠나버린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창조하지 않으셨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친밀하게 동행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영혼은 일시적으로 가진 것이 있더라도 그 영혼에 공허함을 강하게 느낍니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영혼. 공허한 마음을 채우려고 이것저것에 힘쓰지만 아무 것도 우리 영혼을 온전히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썩어질 것으로는 우리 썩지 않는 영혼을 채울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으로 채워야 우리 영혼은 만족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 모든 선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결국 생명의 웅덩이를 떠나 아무 것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를 가진 사람처럼 서서히 목말라 죽어가는 것입니다. 이 땅에 일시적인 것을 방탕하게 사용하다가 다 없애고 나면 궁핍에 이르는 것입니다. 성경은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 6:23)”라고 선포하고 우리를 향해 ‘허물과 죄로 죽은 너(엡 2:1)”라고 했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엡 2:2)’의 노예라고 말합니다. 탕자가 짐승보다 못한 삶을 산 것처럼 죄인 역시 그렇습니다. 짐승도 타락한 세상에서 고생하지만 짐승은 그들의 목적에 맞게 살다 죽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은 자기의 목적에 맞게 살지 못하고 이 땅에서 먹는 쥐엄열매를 먹으려고 열정적으로 달려들다가 결국은 사망을 맞이하니 어떤 면에서 짐승보다 못한 인생을 사는 것입니다.
3. 회개: 하나님을 떠난 죄로부터 회개(17-19)
극심한 배고픔 중에 있던 아들은 자신의 처절한 상태를 생각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 탕자는 긍정적이거나 낙관적인 태도로 느긋해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제대로 파악한 것입니다. 아버지의 품꾼을 떠올립니다. 자기처럼 주인의 집에서 일하는 그들은 오히려 풍족하게 양식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내 처지보다 훨씬 낫다! 돼지 음식조차 주지 않으려는 내 주인보다 일용직 근무자들에게도 풍족하게 음식을 주는 내 아버지가 더 좋은 주인 아닌가하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는 일어나 아버지께 가기로 결심합니다. 과거의 잘못된 길로 멀리 왔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죄로부터 회개하는 것에는 반드시 현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합니다. 이대로 산다면 나는 죽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다(마 7:14)”고 했습니다. ‘일어나다’는 ‘죽었다가 살아나다’와 같은 의미입니다. 회개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은 지금 현재의 상태가 죽음에 이르는 길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아들은 다음의 고백을 준비합니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19). 그는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죄를 지었음을 고백하며 자신이 자격 없는 자임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겸손히 은혜를 구합니다. 모든 죄인이 하나님께 돌아올 때 회개할 때 이런 고백이 필요합니다. 죄를 고백하고, 받을 자격이 없는 자의 겸손한 태도로 은혜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제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갔습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이 장면에서 어떻게 될까 궁금해 했을 것입니다.
4. 구원: 하나님을 떠난 죄의 용서
아버지가 아들을 문전박대하여 아들은 결국 굶어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유대 장로들 앞에 세우고 율법에 따라 아들을 심판하여 죄에 대한 대가를 받게 하는 방법을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는 아들을 용서는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모습, 정말 품꾼으로 쓰는 것을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 되었든 아버지로서는 당연히 할 수 있는 일,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용서는 명예를 다시 훼손하는 일이었습니다.
먼 거리를 걸어오는 아들의 발걸음은 아버지 집을 떠날 때보다 훨씬 더 무거웠을 것입니다. 아들은 두려움과 염려를 가지고 아버지 집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마치 야곱이 에서를 맞이할 때처럼 말입니다.
아버지의 반응은 쉼 없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매우 급한 동작이었을 것입니다. 먼 거리에서 그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아들이 떠나간 그 길에 아들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린 것처럼 먼 거리를 바라봤던 것 같습니다. 아들은 아버지의 돈이 다 떨어지고 비참한 상태에 빠졌을 때까지 아버지가 있는 곳을 바라보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떠난 순간부터 아들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먼 거리에 나타난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차렸습니다. 아들은 아버지를 못 알아봤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아들을 알아봤습니다.
아버지는 그를 측은히 여겼습니다. ‘내 땅을 팔아먹고 도망가서 저 꼴을 하고 나타나다니!’라고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여기가 어디라고 다시 찾아와’라고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처한 환경, 불쌍한 처지에 대해 측은하게 여겼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받았을 사회적 핍박, 손가락질, 멸시를 불쌍히 여기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버지를 떠났지만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돌아왔을 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아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이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치마처럼 긴 겉옷을 생각할 때 달리려면 옷을 붙잡고 걷어 올려야만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양반처럼 유대인 성인 남자는 체면과 명예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전쟁이나 아주 급한 일이 아니면 뛰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천사들이 자신을 방문했을 때 달려 나가 맞이했지만, 탕자 아버지가 맞이할 사람은 “나 죽은셈 치라”고 하면서 달려 나간 아들 아닙니까?
아버지는 아들의 목을 안고 입을 맞췄습니다. 용서와 화해의 표현입니다. 어린 아이가 마음이 상할 때 부모의 따뜻한 품을 찾아 달려들고는 위로와 평안을 누리듯 아버지는 아들을 안아주고 그에게 입을 맞춰 그를 환영하고 받아들이겠다는 표현을 느껴지도록 하였습니다.
아들이 준비한 대답을 시작합니다.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아버지는 그 뒤에 “나를 품꾼으로 삼으소서”를 듣지도 않고 종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3절)
아버지는 돼지 치던 이방인의 품꾼으로 돌아온 아들을 다시 자기의 자녀의 위치로 높이 올려놓습니다. 귀빈이 입는 옷, 높은 자리에 있는 자가 입는 것을 입히고 명예와 권위를 상징하는 반지를 끼웁니다. 종은 신발을 신지 않는데 아버지는 아들에게 신발을 신겨 이제 너는 다시 내 아들이라고 선포합니다. 아버지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넘치는 기쁨을 나누고 싶어 잔치를 벌어자고 합니다. 여간해선 잡지 않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큰 잔치를 벌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왜 이 아들을 환영할까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이 죽었다가 살아났는데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자신을 잃어버린 슬픔, 자식을 먼저 보낸 부모의 아픔을 듣습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찾을 수만 있다면 내 생명을 줄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한 젊은 청년이 약혼녀와 결혼할 때 네 어미의 심장을 가져와야한다고 했습니다. 어머니의 심장을 가지고 뛰어오는데 너무 급하게 뛰어와 넘어졌는데 그 심장이 굴러가면서 ‘아들아 다치지 않았니?’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마음이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방황하는 삶을 살았든지 상관없습니다. 맨발로 걸어와 발바닥이 흙 천지이고, 입에서 쥐엄열매 냄새가 풀풀 나고, 헐벗고 굶주리고, 모든 재산을 다 탕진하고 빈손으로 올지라도 오기만 하면 됩니다. 제대로 아버지를 향하여 오기만 하면 됩니다.
아직 당신이 멀리 있을 때, 그분은 당신을 알아보십니다. 그분은 당신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당신에게 달려 나와 용서와 화해의 의미로 당신을 안아주십니다. 당신에게 입을 맞추십니다. 당신을 자기 아들의 신분으로 들어 높여주시고, 당신을 위해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십니다.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여기서 잠깐 아버지의 종들, 품꾼의 입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는 참 좋은 인격과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품꾼에게도 풍족하게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제멋대로인 아들이 아버지의 뒤통수를 치고 나갈 때도 아버지는 참 인격적이었습니다. 아들이 떠나고 나서도 아버지는 비뚤어지거나 낙담하지 않고 성실하게 그들에게 베풀고 돌보는 분이었습니다. 그런 그들의 입장에서도 일반적인 용서의 수준을 뛰어넘는 믿을 수 없는 사랑의 장면을 보는 것은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있는 넘치는 사랑을 옆에서 함께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즐거워한다”(24). 그들이 하나님의 천사들을 의미한다면 그들 역시 아버지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보며 함께 즐거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아직 먼 나라에서 자신은 괜찮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관계를 단절하며 살고 있어도 문제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당신의 궁핍한 상황을 인식해야 합니다. 당신이 떠난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십시오. 이 세상의 것들로 채우려고 허덕이다가 결국 죽음을 맞이하는 이 인생의 자리에서 일어나십시오. 그리고 당신을 지으시고 당신을 돌보시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께 돌아오십시오.
이미 아버지의 품에 돌아와 놀라운 사랑과 용서를 맛본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먼저 이렇게 우리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이 아들이 다시 아버지에게 재물을 달라고 하면서 아버지를 떠나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아버지의 사랑을 잊어버릴 수 있을까요?
에베소 교회에 대하여 주님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2:4)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면 됐고 하나님 그분을 아는 일이 가장 행복했고, 말씀이 꿀처럼 달고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 되기를 추구했던, 아버지의 사랑을 말하고 아버지의 사랑을 노래하고 아버지의 음성을 들으려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새 종교인처럼 모든 것이 의무가 되고 세상 사람이 누리는 것에 눈을 돌리고 있다면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 아닐까요?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탕자 같은 나를 한걸음에 달려와 받아주시고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 어떻게 이렇게 쉽게 잊을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 그분께 우리의 입술로 사랑을 고백하고 그분을 위해 살게 해달라고 구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