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왕이신 예수님의 눈물
본문: 누가복음 19장 41절 ~44절
설교자: 조정의
감람산 꼭대기에서 예루살렘 향하여 곧게 뻗어난 내리막 길을 따라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힘찬 발걸음을 디딜 때마다 제자의 온 무리가 크게 기뻐하며 찬양을 불렀습니다. 그들이 경험한 능력의 왕 예수께서 그 강하신 손으로 이방인에게 억눌려 있던 예루살렘에 참된 평화를 가져다 주실 것이라 굳게 믿었기 때문입니다.
왕에 대한 기대와 소망에 부푼 제자들은 왕과 함께 성을 따라 들어가며, 성안에서 있던 백성들은 밖으로 나와 왕을 맞이하며 구원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시편 118편 26절 노랫말처럼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 축복과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는 찬송을 불렀습니다. 손에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요 12:13) 호산나!(구원하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왕이여!)라고 외치며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했습니다.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워진 하나님의 성 예루살렘(시 48:1-2)이 정오의 빛을 받아 찬란하고 아름다운 빛을 왕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에게 비추고 있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는 자기 아들 요한이 증언할 메시야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치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눅 1:78-9)
바로 지금 그 예언대로 참빛이신 예수께서 평화의 메시지를 가지고 나귀 새끼를 타고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기 백성들을 향해 나아오고 계셨습니다. 그들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 기쁘고 즐겁고 영광스럽고 흥분되는 순간을 망친 이들이 있으니 39절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무리 중에 있다가 잔칫집같던 분위기를 초상집처럼 만들어버립니다. 엄청난 기대로 왕을 환영하며 소리치는 인파 속에서 갑자기 누군가가 계란을 투척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바리새인들이 보기에 예수는 이런 찬양을 받기에 부적절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제자들이 찬양하는 것은 신성모독 행위입니다. “당장 그치게 하라”고 예수님을 비난하며 책망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사람이 침묵하더라도 입이 없는 피조물인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다. 아무리 너희가 나를 거절한다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모든 만물에게 찬송을 받기 합당한 만물의 창조주요 만물을 다스리는 왕이다’라는 메시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지 그런 의미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지난 설교 시간에 이것이 심판의 메시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물론 ‘너희가 거절해도 만물은 나를 찬송할것이다’라는 표현자체가 그들의 거절에 대한 책망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보다 직접적으로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는 표현이 구약 선지자 하박국의 표현와 일치한다는 점에서 이것은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은 분열왕국 시대에 타락한 유다를 왜 가만히 두고 있냐고 하나님께 물었던 선지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갈대아인(바벨론)을 통해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하박국이 다시 물었습니다. “어찌하여 악하고 부패한 갈대아인을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까?”
그때 하나님은 유다의 죄를 심판하기 위해 갈대아인을 사용하시지만, 갈대아인의 추악한 범죄도 가만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물으실 것이라고 설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담에서 돌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합 2:11). 담을 이루는 각각의 돌들, 집에 있는 돌들이 갈대아인의 포악한 행위에 대하여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하박국에게 하신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그대로 바리새인에게 사용하셨습니다. “너희의 죄악, 너희의 교만에 대하여 이 돌들이 정의를 부르짖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1. 예수님이 우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예수님을 태운 나귀 새끼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조금씩 더 가까이 다가왔고 이 때 예수님은 성을 바라보시며 우셨습니다(41절).
참 이상한 광경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서 나뭇가지와 옷을 예수님 발 앞에 펼쳐두고 시와 찬미로 노래를 부르며 기대감에 충만해있는데, 정작 예수님은 성 가까이 오시면서 통곡하셨습니다. 그냥 눈물을 주르륵 흘린 것이 아니라 원어 표현에 따르면 예수님은 격하게 흐느끼셨습니다. 울부짖으셨습니다. 왜 우셨을까요? 왜 그렇게 슬피 흐느끼며 울부짖으셨을까요?
42절에서 44절까지 예수님이 울부짖으며 하신 말씀에서 우리는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함때문에 우셨습니다(42절)
42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42절에서 예수님이 통곡하신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무지함때문에 통곡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오늘 예수님은 그들에게 평화의 소식을 전하기 원하셨습니다.
어떤 평화에 관한 소식입니까? 그들은 이방국가와의 평화를 원했고 자유를 원했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평화,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의 평화입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님의 피를 통해 죄인과 평화협정을 맺겠다는 엄청난 소식을 공포하셨습니다. 죄의 종에서 완전한 자유를 얻게 하시겠다는 복되고 좋은 소식입니다.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가치 있는 평화의 소식은 없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그 소식을 듣지 못합니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시온을 향하여 평화를 공포하러 산을 넘는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발을 알아보지 못합니다(사 52:7). 이것이 너무나 안타까워서 예수님은 흐느껴 우셨습니다.
가끔 길에 보면 “아이를 찾습니다”라고 붙여 놓은 전단지를 봅니다. 잃어버린 지 십수년이 된 어린아이의 사진이 있고, 현재는 20살이 넘었을 것이라고 적혀있습니다. 부모가 그 아이를 찾기 위해 얼마나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밤잠을 자지 못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언제가 아이를 되찾을 날을 기다렸겠습니까?
그런데, 기적적으로 십수년만에 아이를 찾았다고 생각해보십시오. 부모에게 이보다 더 기쁜일이 있을까요? 정말 뛸듯이 기쁠 것입니다. 하지만 아이가 부모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부모를 거절하며 함께 하기를 싫어한다면 자식을 찾은 기쁨은 금세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바뀔 것입니다. 예수님이 지금 그런 슬픔으로 눈물을 흘리고 계셨습니다.
구약성경은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을 낳으시고 기르셨는지 설명하는 책입니다(육아일기). 그런데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을 떠나 이방 민족에게 팔려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서를 통하여 이들을 찾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장차 어떤 모습으로 그들을 찾아올 것인지 상세히 알려 주셨습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베들레헴에 나셔서 나사렛 사람으로 자라고 나귀 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분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이 주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구약성경은 죄로 인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책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이 계신 동산에서 쫓겨난 사람은 화목제물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죽었던 수많은 희생양이 이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드디어 하나님의 화목제물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한 평화를 이루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것을 못알아 본 것입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것이 너무나 안타까운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알아본 소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바를 보고자 하였으되 보지 못하였으며 너희가 듣는 바를 듣고자 하였으되 듣지 못하였느니라(눅 10:24)
많은 선지자와 임금이야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했다지만,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이스라엘의 영적 지도자들은 눈이 가리워져 보지 못하고,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불쌍하여 예수님은 흐느끼며 통곡하셨습니다.
구약의 유대 백성을 보며 슬퍼하신 아버지 하나님의 심정으로 예수님은 우셨을 것입니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 1:3-4)
예수님은 그들의 무지함을 보고 우셨습니다. 그들이 자기의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자기들에게 임한 평화의 일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보며 슬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이 받을 심판을 아셨기 때문에 울부짖으셨습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당할 심판때문에 우셨습니다(43-4절).
43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44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을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43-44절까지 예수님은 계속해서 미래형 동사를 사용하십니다. 앞으로 그들에게 임할 일을 미리 보시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특정한 ‘날’이 그들에게 임할 것입니다. 그 날에 이스라엘의 원수들이 토둔(토성, 공격축대)을 쌓고 이스라엘 백성을 사면에서 포위할 것입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죽임을 당할 것인데, 그 참혹함에 대하여 ‘너와 자식들을 땅에 메어칠 것’이라고 표현합니다.
과거 독일 나치군이 유대인 아이들의 발목을 잡고 그대로 벽에 메어쳐 죽였는데, 예수님은 그런 끔찍한 방식으로 유대인들이 죽임을 당할 것을 보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벽은 모두 무너지고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을 정도로, 사람이 살았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될 것입니다. 한 마디로 폐허가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일어날 이 끔찍한 미래를 내다보셨습니다. 심판의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그 심판의 날에 참혹한 일이 그들 가운데 일어날 것임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져온 평화의 소식을 거절한 결과가 얼마나 끔찍할지 알고 계셨습니다.
실제로 1세기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는 AD66년 유대인이 로마에게 반역을 시도했을 때 그 결과로 로마의 침략을 받게 되는데 70년에는 로마 황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약탈하기 위해 방벽과 참호를 만들고 예루살렘 성을 사면에서 둘러 싸며, 일부 탑과 성벽은 주둔하는 군대를 위해 남겨두지만, 나머지는 여기에 사람이 살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파괴했다고 기록합니다.
또한 AD135년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예루살렘의 지역명을 시리아 팔라이스티나로 바꾸고 유대인을 말살하여 역사에서 그들의 흔적을 영원히 지워버리려고 하였습니다.
가까운 20세기에도 유대인은 나치에 의해 6백만 가량이 학살되었고, 어린 아이만 약 백만명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렇게 무시무시한 심판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고, 예수님이 지금 그것을 경고하고 있음에도 며칠 후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치면서 끝끝내 자기 땅에 오신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외쳤습니다.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
그들은 임박한 진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고 그렇게 당당하게 말했겠지만, 예수님은 그들이 당할 고통과 슬픔을 미리 아시고 애통히 여기셨습니다. 통쾌하고 시원하게 여기신 것이 아니라 격정적으로 흐느끼며 괴로워할정도로 슬퍼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선지자 이사야가 기록한 하나님의 마음으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기 원하셨을 것입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매를 더 맞으려고 패역을 거듭하느냐 온 머리는 병들었고 온 마음은 피곤하였으며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거늘 그것을 짜매 싸매며 기름으로 부드럽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사 1:5-6)
마치 많이 맞아서 멍이 들고 붓고 눈물이 나도 끝까지 악을 쓰며 고집을 피우는 아이를 때리는 부모의 마음처럼, 예수님은 안타까운 마음으로, 회개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그들에게 임할 심판을 두려워해서라도 제발 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제발 끝까지 부모가 내미는 사랑의 손을 거절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셨던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우셨다고 말하는 장면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두 번 정도 등장하는 장면에서 예수님의 눈물은 참으로 이타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울지 않으셨습니다. 울어야 할 일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억울해서 눈물을 흘린다면, 예수님만큼 눈물을 많이 흘려야 할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부지중에 저지른 죄때문에라도 당하는 고통에 이유가 있다고 생각할 여지가 있지만, 죄를 알지도 못하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신 예수님은 왜 많은 사람들의 죄때문에 목숨이 끊어질정도로 고통을 받아야 할까요? 분하고 억울하게 여긴다면 통곡할 일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이 이 때 울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육체적, 정신적 고통에 괴로울 때 눈물이 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찢기시고 상하셨습니다. 아버지와 친밀했던 관계가 끊어지는 헤아릴 수 없는 슬픔을 맛보셨습니다. 하지만 죽음에 이르는 육체의 고통 속에서도 성경은 예수님이 우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우신 장면, 그것도 울부짖으셨던 장면은 죄인이 평화의 왕을 알아보지 못했을 때, 그리고 그 결과 받을 심판을 보셨을 때,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안타깝게 여기셔서 우셨던 바로 이 장면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을 보면서 우리는 분명히 확신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입니다(딤전 2:4). 그분은 악인이 죽는 것을 조금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가 돌이켜서 그 길에서 떠나 사는 것일 기뻐하십니다(겔 18:23).
수많은 군중의 환호와 기대, 즐거운 찬송 소리와 어색하게 섞여 울려 퍼지는 예수님의 흐느끼는 울부짖음 소리에서 우리는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사랑의 주님께 나오십시오. 예수님은 자기를 알아보지 못하는 당신을 안타깝게 여기시는 사랑의 왕이십니다.
예수님을 거절하여 당할 영원하고 무서운 심판을 피하십시오. 예수님은 당신이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흐느껴 우실 정도로 당신이 그 길에서 돌이키기를 간절히 원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인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의 눈물은 한 가지 큰 교훈을 줍니다. 죄인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을 배우게 합니다. 죄인이 망하게 되었을 때, 죄인이 멸망의 길로 가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뻐하지 않았는지, 아니면 무감각하게 대하지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죄인을 향한 우리의 눈이 냉정하고 차가울때마다 그들 앞에서 슬피 우셨던 주님을 기억하기 원합니다. 잃어버린 자식을 생각하며 울고 있는 아버지 옆에서 무감각하고 관심도 없는 매정한 형제, 자매로 살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고 믿지 않는 가족, 친척, 직장동료, 친구, 이웃을 바라보는 우리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