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입다는 도대체 왜?

본문: 사사기 11장 29절 ~ 40절

설교자: 이병권

 

지난주에 입다에 대해서 살펴봤습니다. 입다는 출생부터 평범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들은 입다를 준비되도록 했고, 때가 되었을 때 입다는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일에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이제 입다는 암몬에게 맞서는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암몬 왕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반박하는 입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입다가 또 어떤 활약을 펼치게 될까? 기대가 되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좋았던 분위기는 그리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입다는 엄청난 일을 저지르게 됩니다. 이 일을 보면 우리에게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입다는 왜? 도대체 왜 그랬을까?’우린 입다가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입다가 자신이 한 일에 대한 동기를 밝히고 있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본문의 사실과 성경의 종합적인 근거를 가지고 세 가지 질문에 답을 하면서 이 사건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교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입다는 암몬 왕의 억지스러운 주장을 다양한 측면에서 논증하며 문제로 제기한 땅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땅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입다의 말을 들은 암몬 왕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설득이 되었을까요? 암몬 자손의 왕이 입다가 사람을 보내어 말한 것을 듣지 아니하였더라(28) 암몬 왕은 입다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말이 안 통합니다. 이제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암몬과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말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결과가 항상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뜻대로 되지 않을 때도 많습니다. 상대방이 마음을 닫고 끝까지 듣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도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우리가 그들을 듣게 만들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일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십니다.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하십니다(29). 사사기에서 이전에 몇 번 이런 기록이 있었는데, 옷니엘과 기드온이 전쟁에 나아갈 때 하나님의 영이 임하셔서 그들이 이스라엘의 대적들을 물리치고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지금 입다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임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전쟁에서 큰 승리를 거두겠구나!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확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안타깝게도 입다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합니다. 입다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승리를 확신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합니다. 그래서 입다가 무엇을 합니까?

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이르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 주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물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30-31)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세게 서원합니다. 정말로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넘겨주시면 내 집에서 나오는 사람, 그 사람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첫 번째 질문입니다. 입다는 왜 서원을 했을까요?

입다는 주목받지 못한 인생이었습니다. 출신의 약점이 있었고 집에서 쫓겨났으며 잡류들과 함께 지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입다에게 엄청난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어 지도자로서 다스릴 수 있는 자리입니다. 여기에는 암몬과의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조건이 있습니다. 입다는 어떻게 해서든 이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어야 합니다. 입다에게 주어진 책임, 그 무게가 무겁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상황은 어떻습니까?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요? 입다가 싸워야 할 대상은 암몬입니다. 암몬은 18년 동안이나 계속 이스라엘을 억압하며 괴롭혀왔습니다. 입다가 지금 이스라엘을 맡아 전쟁을 이끈다고 해서 뭔가 달라질까요? 암몬의 군대에 대해서 기록된 내용은 없지만, 아마 이스라엘이 감당할 만한 규모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갑자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입다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하게 승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입다는 승리를 위해서 자신이 잘 하는 일, 자신이 자신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협상입니다. 장로들과의 대화에서 그리고 암몬 왕과의 대화에서 협상가로서의 재능을 발휘했던 입다를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 하나님을 대상으로 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큰 것을 구하는 것만큼 나도 큰 것을 걸겠다고 합니다. 협상 테이블에 하나님을 모셔다두고 제물을 올려놓고 거래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이 제물을 받으시려면, 그 전에 이것부터 꼭 들어주셔야 됩니다하나님을 묶어두고 내 뜻대로 통제하려는 것입니다. 마치 누군가를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려고 뇌물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아니라 의심에서 나온 행동이며 지극히 인간적인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런 식으로 원하는 대로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구하기로 계획하셨고, 입다를 택하셨습니다. 하지만 입다는 그것을 깨닫지 못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입다는 하나님께 서원을 했고 커다란 비극을 낳게 됩니다.

본문을 차례로 읽으면 30절과 31절이 없을 때, 29절 다음에 32절을 읽을 때 더 자연스러운 연결이 됩니다. 입다는 불필요한 말, 오히려 해가 되는 말을 끼워 넣은 것입니다. 입다가 옆에 있다면 손으로 그 입을 막아버리고 싶습니다. 그 입을 쳐서라도 입다가 입을 열지 못하게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지만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내뱉은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습니다.

입다는 서원을 했고 그러고 나서 암몬과 싸웁니다. 누가 이길까요?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이스라엘이 크게 승리합니다. 33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얼마나 큰 승리를 거두었는지 나옵니다. 스무 개나 되는 성읍을 쳤고 수많은 사람들을 크게 무찌릅니다. 결국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이스라엘이 큰 승리를 거두었고 암몬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괴롭히지 못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그리 중요하게 다루지 않습니다. 간단하게 이 사실만 언급하고 입다의 서원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기록합니다. 오히려 입다가 서원을 어떻게 지키는지를 더 중요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본문에서 서원의 충격적인 결과가 나오는데, 승리의 기쁨과 즐거움을 한순간에 모두 빼앗아버립니다.

입다가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보라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34) 입다가 집에 왔을 때 하나뿐인 딸이 아버지의 승리를 축하하며 아버지를 맞으러 나왔습니다. 성경은 “보라”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이 끔찍한 일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경솔하게 내뱉은 말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하는지 보여줍니다. 입다는 자기 옷을 찢으며 괴로워합니다. 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하니(35) 입다는 이 일로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돌이킬 수 없다고 합니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입다는 왜 돌이키지 않았을까요?

왜 취소하지 않았을까요?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입니다. 다만, 지금까지의 내용을 고려해볼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입다가 하나님께 서원을 했던 이유와 같을 거라는 사실입니다. 입다가 승리를 원했던 만큼이나 그 승리를 잃어버리기 싫었을 것입니다. 승리로 얻은 것들을 포기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만약 협상에서 한 쪽에서 약속한 것을 이행하지 않는다면 그 협상은 무효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입다는 자신이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이 승리를 빼앗아 갈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입다는 지금 얻은 것들을 모두 잃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입다는 서원을 돌이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입다는 서원을 돌이키지 않겠다고,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율법에는 서원을 했다가 형편이 되지 않을 때 서원을 돌이키는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레27:8). 서원을 취소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던 일은 아닙니다.

입다는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며 아버지로서 엎드릴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다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잘못을 인정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하나뿐인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입다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보다 불신했기에 서원을 지키지 않으면 더 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입다는 지금 자기 스스로 만든 늪에 빠졌고, 그 늪에 빠져 나오기 위해서 하나뿐인 딸을 희생시키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입다의 딸이 말합니다. “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의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하니라”(36) 놀랍게도 딸은 아버지가 서원한대로 자신에게 행하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를 위해 하신 일을 기억하며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려고 합니다. 이거 반대로 된 것 아닙니까? 입다보다 입다의 딸이 더 성숙한 것 같습니다. 아버지가 딸을 위해 희생하기보다 딸이 아버지를 위해 희생합니다. 아버지의 입장에서 이 일을 그냥 허락할 수 있을까요?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입다가 해야 할 일은 서원을 지키기 위해 딸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 용서를 구하는 일입니다. 최악의 경우에 딸을 희생시키기보다 자신이 했던 서원을 어기고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 것이 더 나은 일입니다. 하지만 입다는 자신의 알량한 서원을 지키기 위해 딸을 희생합니다. 두 달 후에 입다는 자신이 서원한 대로 행합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여기서 세 번째 질문입니다. 입다는 정말 딸을 바쳤을까요?

이게 정말 실화냐! 하는 질문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좋은 뜻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입다의 딸이 번제로 바쳐진 것이 아니라 평생 처녀로 성전에 봉사하는 일을 위해 바쳐졌다고 해석합니다.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을 헌신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한나가 자신이 서원한대로 사무엘을 하나님께 드렸던 것처럼 같은 의미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문법에 따라 해석을 다르게 할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근거 없는 해석은 아닙니다. 다만 그렇게 해석했을 때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입다의 딸이 두 달의 유예 기간을 요청한 것이나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애곡했다는 것을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다른 해석의 여지는 있지만, 더 올바른 해석은 입다가 하나님이 승리를 주시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겠다고 서원했고, 입다의 예상과는 달리 그 제물이 외동딸이 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견해가 나오고 다른 식으로 해석하려는 노력이 있을까요? 그만큼 이 사건이 이해하기 힘든 상식 밖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사건입니다. 개인적으로 저도 이게 아니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가증한 행위라고 말씀하셨습니다(신12:31). 그런데 입다는 왜 이렇게 했을까요?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입다는 하나님을 몰랐던 것입니다. 입다는 길르앗 사람이었습니다. 그 지역에 살던 이방 사람들은 모압의 신, 그모스를 섬겼습니다. 그모스를 따르는 자들은 제물 중에서 가장 좋은 제물로 사람, 특히 아이를 드리는 것을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있을 때 종종 아이를 바쳤습니다.

입다는 그런 제사를 보고 자랐고 그들의 영향을 받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는 상태에서 하나님을 그런 이방 민족들이 섬기는 신들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입다의 딸은 이름 없이, 자손 없이, 충격적인 방법으로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들은 자기 생각대로 살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내가 생각하는 하나님을 만들어두고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섬기게 됩니다. 내가 편한 방법으로 혹은 주위에서 보고 들은 대로 하게 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사기의 키워드입니다. 그들에게 왕이 없어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모르니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모르니까 이방민족들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을 보고 ‘저 정도는 드려야 되는구나!’ 배우고 따라하는 것입니다.

입다가 딸을 번제로 바친 것은 하나님을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방민족들이 하는 것처럼 사람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스러운 일을 행한 것입니다.

입다는 경솔하게 하나님께 서원했고 하나뿐인 딸이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입다는 자신의 잘못을 고하며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알지 못했고,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시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했지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원하시는지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는 괜찮을까요? 입다보다 나은 상황입니까? 지금 우리는 입다가 살던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는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세상 문화는 우리를 오염시키고 우리가 아는 진리를 왜곡시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를 하게 만들고, 하나님을 잘못 섬기게 만듭니다.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세상의 문화에 노출되어 살고 있습니다. 잘못된 지식들과 타락한 가치들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귀에 솔깃 하는 이야기들, 자극적인 볼거리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니더라도 교묘하게 조금씩 다른 것들이 들어와서 하나님의 진리를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입다의 경우, 입다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성경(모세오경)이 가르치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 대신에 하나님과 사람에 대해서 이방민족들이 하는 것을 보고 잘못 배워서 그들을 따라 했습니다. 그렇게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입다의 경우처럼 성경의 진리보다 세상의 거짓이 훨씬 더 쉽게 우리 안으로 들어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향한 지식을 채우지 않으면, 진리로 무장하지 않으면, 세상에 가득한 온갖 거짓들로부터 영향을 받고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 결과 진리가 아닌 거짓에 속아서 가치 없는 헛된 것을 위해 인생을 낭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안에 무엇이 있는지 점검해보십시오. 하나님 말고 다른 것이 있지는 않습니까? 엉뚱한 것을 좇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진리에 대해서 멀어져 있는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이 무엇을 주목하고 무엇에 귀를 기울이지는 점검해보십시오. 무엇을 위해 시간을 쓰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에너지를 어디에 쏟고 계십니까? 이렇게 살아도 괜찮을까요?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이런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해봅니다. 이렇게 살다가 주님을 만나도 되는 걸까? 매일매일 나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입다의 제물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면서 정작 나는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고 있는 걸까?

우리 각자에게서 하나님은 무엇을 받고 계실까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을 드리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무엇을 기뻐하실까요?

여러분, 우리도 입다처럼 하나님께 사람을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제물로 받으실 때 기뻐하십니다. 다만, 입다와 다른 것은 우리가 드리는 사람은 살아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 드리는 제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을 하나님께 제물로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산 제물을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명령했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12:1-2)

이 세대를 본받지 마십시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여 우리의 삶으로 거룩한 제물을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내가 살아있는 제물이 되어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은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나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드리기 전에 나 자신부터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물입니다. 하나님께 다른 것들을 드리려고 노력하기 전에 나부터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입니다.

우리가 의식하든지 의식하지 않든지 우리는 매일매일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것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제물을 드리고 계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 어떻게 우리가 제물이 될 수 있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예수님이 먼저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희생함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제물로 받으시기 위해, 우리가 드리는 제사를 받으시기 위해 자신의 하나뿐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이게 말이 되는 일입니까? 무엇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셔야 했습니까? 왜 죽임을 당하셔야 했고, 왜 모든 것을 내어주셔야 했습니까?

다시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산 제물이 되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십자가에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가운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으로 예배드려야 하는 것은 우리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나를 위해 희생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제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내 삶이 하나님이 받으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 되었습니다.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이, 불가능했던 일이 주님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제물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기쁨으로, 감사함으로, 즐거움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내 삶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이 되기를 원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나의 삶에 합당치 않은 것은 없는지, 버려야 할 것은 없는지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내 삶의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내 삶의 무거운 짐들은 없는지, 내 삶의 죄는 없는지 계속 점검하시고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날마다 주님 앞에 나아가며 삶으로 예배드리는 산 제물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기뻐 받으시며 여러분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거룩한 예배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