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온전한 자의 혀
본문 : 야고보서 3장 1절-12절
설교자 : 조 정의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행함’과 ‘믿음’의 관계는 야고보서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말, 언어생활에 대한 말씀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진 자라면 언어생활에 있어서도 믿지 않는 자와 다른 점이 드러나야 합니다. 야고보는 본문을 통해 우리의 언어생활이 참된 믿음을 어떻게 드러내는가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 “선생이 되지 말라”는 명령은 당시 많은 이들이 선생이 되려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랍비(선생)라는 존재를 존경하고 선망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랍비와 자신의 부모가 곤경에 처했을 때 랍비를 먼저 구해야 한다고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저마다 선생이 되려고 했습니다. 서로 말하고 서로 가르치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고린도 교회에서는 예언과 방언하는 자들이 질서 없이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자들에게 야고보는 선생이 되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선생이 더 많은 책임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인도하는 자들)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그들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맡고 있는 책임이 크기 때문입니다. 선생인 사람은 더 많은 말을 하기에 실수가 있고 더욱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6,37). 사람이 하는 말에는 그것이 무익한 말이라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말에 대한 심판과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야고보는 그 대상을 더 넓혀 “우리가 다” 말에 실수가 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말의 문제의 본질을 보게 만듭니다. 여기서 “온전하다”는 말은 적당히 괜찮은 사람, 우리가 보기에 착한 사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온전한 것은 완벽한 것입니다. 이 단어는 마태복음 5장 48절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온전하심과 같이 완벽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말실수를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내면의 문제입니다. 말은 우리의 마음속 깊은 것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 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마 15:11,18,19). 마음에 있는 더러운 것들을 쏟아내는 도구가 바로 우리의 말인 것입니다. 말에 책임이 따르고 심판이 있다는 것은 이것과 연관됩니다. 말에는 죄가 드러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입술에 실수가 없다면 그것은 마음에 전혀 더러움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이렇게 완벽하고 거룩한 분이 계십니까? 혀를 제어할 수 있다면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고 말합니다. 말을 통제할 수 있다면 온 몸을 통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고보는 3-5절에서 말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극히 작은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야고보는 이 작은 지체가 엄청난 영향력이 있다고 말합니다. 3절에는 “말의 입에 물리는 재갈”이 나옵니다. 말 한 마리가 2톤의 무게를 끌 수 있다고 합니다. 20명의 성인 남자와 말 한 마리가 줄다리기 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힘도 쓰지 못하고 끌려갑니다. 그런 말을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힘이 아주 작은 재갈에 있습니다. 야생마의 엄청난 힘을 제어하는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4절에는 “배의 작은 키”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사도 바울이 탔던 배가 나오는데 276명의 사람들과 많은 짐을 실은 배였습니다. 광풍이 불어야 밀려가는 이 배는 지극히 작은 키로 그 방향을 정합니다. 그 작은 키가 거대한 배를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통해 야고보가 하고 싶은 말은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5절)입니다. 혀는 지극히 작은 지체이지만 그 능력은 엄청난 것입니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실제로 2007년에 미국의 그리피스 공원은 작은 담뱃불 하나로 600에이커에 달하는(축구장 300개 규모) 공원이 불에 탔습니다. 야고보는 “말의 재갈”, “배의 키”, “작은 불씨”를 통해 작은 혀가 그만큼의 능력과 영향력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말의 영향력은 참으로 파괴적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우리는 성경에서 혀에 대해 가장 부정적으로 표현하는 구절을 보고 있습니다. “불”은 파괴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불의의 세계”라는 말은 악한 것들의 총집합체라는 의미입니다.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막 7:21). 이것들이 우리의 혀를 통해 나오는 것들입니다. 이것이 입 밖으로 나와, 불의를 말하고 궤휼(기만)하며, 신실하지 못한 말, 아첨, 저주, 포학, 자랑, 참소(중상모략), 험담, 행악, 훼방, 거짓, 죄로 유혹, 미련한 말, 무익한 말, 사악, 속임, 불평, 비난, 비방의 죄들을 짓는 것입니다. 과연 혀가 불의의 세계라고 할 만합니다.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른다”는 말은 인생의 흐름, 역사를 무너트린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말로 인해 한 사람의 인생이 망하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며 나라가 망하고 국가와 사회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말은 개인, 가정, 나라까지 불사를 수 있는 파괴력이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말은 위로부터(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에 대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귀신과 마귀들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렇듯 말은 파괴적입니다. 우리는 입에 핵폭탄을 하나씩 가지고 있는 셈입니다. 인생을 사르고 주위의 삶을 불사르며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무리 그런 혀라도 내가 길들일 수 있지 않을까’, ‘잘 통제하고 다스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혀는 통제불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7,8절). 야고보는 길들일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애완동물은 쉽게 길들일 수 있습니다. 도마뱀이나 파충류도, 야생동물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 서커스를 보면 야생동물들이 불을 뛰어넘고 공을 굴립니다. 날아다니는 새도, 바다의 물고기도 길들일 수 있고 심지어 벌레나 곤충도 길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길들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혀입니다. 아무도 절대로 혀는 길들일 수 없습니다.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우리에 갇혀서 날뛰는 야생동물처럼 혀는 계속해서 날 뛰는 악과 같습니다. 그것에는 죽이는 독이 가득합니다. 다른 사람을 쏴서 죽일 수 있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말의 영향력은 크고 파괴적이며 그것을 길들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시겠습니까? 서점에 가서 ‘성공하는 사람의 대화법’, ‘마음으로 다가서는 대화법’ 등의 책을 읽으시겠습니까? 이것으로 언어습관을 조금 고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내면에 있는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전까지 아무리 처방을 해도 문제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말의 본질은 마음의 문제입니다. 악한 것이 가득하므로 말로써 입 밖으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말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마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마음이 새롭게 변화되기 전까지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 36:26).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 마음과 영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이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믿고 그분을 나의 주인으로 영접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 있을 때 새로운 마음을 얻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이것이 새로운 마음과 영혼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저 ‘말조심해야지’ 생각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아직 예수 안에 계시지 않다면 본질의 문제를 생각하십시오. 이것은 온갖 더러운 것이 가득한 마음의 문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새로운 마음을 얻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예수님 안에 계신 분이라면 9-12절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9,10절).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이와 같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마음을 얻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또 다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맞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저주하거나 모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형제, 자매, 가족들, 세상 사람들에 대해 저주와 비방, 불평은 쉽게 나옵니다. 이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하는 것과 같다고 보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 4:20).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4:15; 15:12). 우리가 서로 사랑하지 않고 악한 말과 비방, 저주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1,12절). 본질은 본질에 맞는 결과를 내야 합니다. 샘은 그 본질에 맞는 물을 내야 하고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졌다면 그에 합당한 결과를 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성도님들, 그 믿음은 말을 통해 얼마나 입증되고 있습니까? 언어생활에서 어떻게 드러나고 있습니까?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저주하며 욕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본질과 거리가 멉니다.

우리도 여전히 실수가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영향력이 많고 파괴력을 지닌 죄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 모든 죄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치르셨습니다.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2:12). 우리는 말에 대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살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너희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을 입으라”(엡 4:22-24).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는 하나님의 의의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말과 언어생활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들의 참된 믿음의 증거로 드러나시기 바랍니다. 말로써 짓는 죄를 별것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어쩌면 자신의 믿음의 실체를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진정으로 거듭나지 않은 증거일지도 모릅니다. 언어생활에서 참된 믿음을 가진 자다운 모습이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오늘 당장 완벽하게 나타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완벽함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의 언어생활도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