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본문: 에베소서 1장 1-2절
설교자: 조정의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주후 60-62년경 로마에 가택 연금됐을 때(행 28장) 에베소 교회에 쓴 편지로 같은 시기에 바울이 쓴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와 함께 옥중서신이라 불린다.
에베소서는 “정의(definition)와 격려의 서신”이라 불리는데, 이는 바울이 이 편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진정 누구인지(정체성) 확실하게 정의하고, 또 그분 안에 있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덕성) 힘 있게 격려하기 때문이다(1-3장, 교리, 신학/ 4-6장 행위, 실천).
동시에 에베소서만큼 기도문, 찬송시, 교리적 단언이 많은 책이 없다. 한 주석가는 책 전체가 기도와 찬송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했다. 그 말은 바울이 단지 에베소 교회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정체성을 바로 알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께 그들로 알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는 걸 의미한다.
또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떤 복을 얻었는지 알게 되면 바울처럼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송하고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대로 살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얻을 것을 확신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실로 에베소서의 핵심이다(39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지 정의되고 그분 안에서 어떻게 살 것인지 결정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모른 채 산다. 참으로 불쌍한 일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고전 15:19).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짜 우리가 누구인지, 바라는 소망이 얼마나 큰지, 약속된 복이 무엇인지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1:3).
그래서 바울은 편지의 초반에 이렇게 기도했다(1:17-19).
17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에베소서 강해를 하는 동안 지혜와 계시의 영,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얼마나 복된 자인지 분명히 알게 하시고 찬송하게 하시길 간구한다.
또한 에베소서는 개인(성도, 나)의 정체성을 넘어 교회(성도들, 우리)의 정체성에 주목한다. 하나님의 기업(1:11), 그리스도의 몸(4:12), 하나님의 만드신 바, 한 새 사람(2:15), 하나님의 권속(2:19), 거하실 처소(2:22), 하나님의 군사(6:10-18) 등 다양한 비유를 통해 교회의 정체성을 풍성하게 정의한다.
오늘날 어떤 교회가 참된 교회인지 그리고 좋은 교회인지 사람들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정의한다. 가나안 교회? 세상 속 교회? 시스템, 프로그램, 복지나 행정이 잘 된 교회가 좋은 교회? 에베소서 강해를 통해 사람이 내린 자기 멋대로의 정의를 버리고 성령께서 바울을 통해 주신 교회의 청사진을 받아들이자(“내 교회를 세우리니”, 마 16:18).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인 나뿐만 아니라 우리인 교회의 정체성이 결정된다. 교회의 본질과 목적을 바로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의 교회가 되자.
마지막으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의 새로운 삶을 제시한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라고 말했다(고후 5:17).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워진 정체성은 새로운 삶을 낳는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성품을 닮아가는 자가 되었다. 옛사람은 버리고 새 사람을 입는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편과 아내 역할을 한다. 주 안에서 부모와 자녀가 된다. 직장에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속한 일꾼으로 일한다. 교회로서 서로를 대할 때 예수 안에서 대하고, 악한 세상과 마귀와 맞설 때 예수님 안에서 얻은 능력으로 싸운다. 한 마디로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예수님 안에 살아간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는 것이라”(갈 2:20). 에베소서를 통해 성령께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소원과 능력을 더하시길 간구한다.
1. 저자: 사도 된 바울(1절)
저자인 바울은 국제도시 다소 사람으로 혈통으론 히브리인(유대인) 베냐민 지파 사람이었고(롬 11:1), 법적으론 로마 시민이었다. 난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빌 3:5)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서 정통 바리새파 율법 교육을 그것도 가말리엘이라는 유명한 랍비 문하에서 엄하게 받았다(행 22:3). 그는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빌 3:6).
또한 바울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이 대단하여(행 22:3), 하나님을 모욕한다고 여겨진 그리스도인 남녀를 옥에 가두고(행 22:4), 죽일 때 찬성 투표를 하였으며, 회당에서 강제로 그리스도를 모독하게 심문하고(행 26:10-11), 외국 성까지 가서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고 멸했던 사람이다(갈 1:13).
그의 열심은 다른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올바른 지식을 따른 열심이 아니었다(롬 10:2). 하나님이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행 9:5). 그는 오히려 죄인 중에 괴수로서 하나님을 대적했다(딤전 1:15).
한때 그리스도 예수의 원수였던 바울은 이제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1절). 그리스도 예수를 박해하고 그 몸된 교회를 비방하고 폭행했던 그가 그리스도 예수의 보내심을 받은 자, 그분의 사명을 맡은 사도가 되었다. 어떻게 바울이 그런 자가 되었는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1절).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서는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이라고 소개했다(갈 1:1).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님께서 바울이 바울 됨의 근거라는 것이다(행 9, 22, 26장, 다메섹 회심 사건).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말했다.
12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14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15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2-15)
고린도 교회 쓴 편지엔 이런 고백도 있다(고전 15:9-10).
9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10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바울이 말한 것처럼 그는 받은 은혜를 헛되게 만들지 않았다. 회심한 순간부터 이 편지를 쓰는 순간까지 다메섹, 예루살렘, 다소, 갈라디아, 길리기아, 마게도니야, 아시아, 아가야 그리고 땅끝 로마까지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 위해서라면 목숨도 불사했다(행 20:24).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인해 바울은 새사람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2. 수신자: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1절)
에베소서의 수신자는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이다(1절). 그들은 항구도시 드로아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와 내륙에 있는 골로새, 라오디게아를 잇는 서부도로의 교차점에 위치한 정치, 상업, 종교의 중심지, 인구 약 25만의 대도시에 살던 자들이다. 도시의 주 수입원이었던 아데미 숭배뿐만 아니라 50여 종의 우상을 함께 문란하게 섬기고, 황제숭배를 통해 정치적 입지를 다졌으며, 마술이 성행하고 2만 5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원형극장에서 온갖 잔인하고 불경한 일을 즐겼던 이들이다.
바울은 2장에서 그들이 과거에 허물과 죄로 죽었던 상태였고(1절), 세상 풍조와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르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냈다고 평가했다(2,3절). 그런 그들을 성도로 부르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그 큰 사랑으로 그들을 사랑하셔서 성도가 되게 하셨다(4절). 바울은 이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며 은혜라고 말했다(8절).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로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구별된, 하나님께 속한 무리가 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원수였으나 하나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19절). 하나님 나라의 외인과 나그네였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성도, 시민이 되었다(19절).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의 신분이 완전히 바뀌었다.
바울은 또한 그들을 가리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이라 불렀다(1절). 앞에 있는 일반 성도들과 구분된 신앙심 좋은 무리를 따로 불러 말한 것이 아니다. 같은 대상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로 이해할 수 있다.
‘신실한’에 해당하는 단어(헬: 피스토스)는 “충성된”으로 해석되기도 하고(눅 16:10; 마 25:21), “믿는 자”로 해석되기도 한다(요 20:27; 딤전 5:16). 여기서는 성도의 충성도를 나타내기보다 그들이 믿음을 둔 대상 곧 그리스도 예수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새번역 성경의 번역대로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의미로 보는 것이 좋다.
우리의 믿음은 아주 가끔 견고할 때가 있고 자주 연약해진다. 하지만 작은 믿음이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둔 믿음이라면 엄청난 은혜를 받는 통로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라. 주님께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에게 믿음이 겨자씨 한 알 만큼만 있어도…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 17:20).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은 하나님의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우리 삶에 가져오는 축복의 통로다(딤전 1:14).
3. 인사: 은혜와 평강이 있을지어다(2절)
바울은 당시 히브리어, 헬라어, 아람어 편지 형식에 따라 보내는 사람과 받는 사람에 이어 인사말을 남겼다.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2절). 일반적인 축복의 인사말이지만 앞에 언급한 축복의 근원 때문에 완전히 차원이 다른 인사말이 됐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바울과 에베소 교회 성도 모두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를 그들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받았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이 받은 은혜는 그들의 정체성을 완전히 바꾸었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한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주인,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 성도와 성도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무는 평강을 누리게 되었다(빌 4:7).
바울은 편지의 시작부터 자신과 에베소 성도들이 받은 은혜 그리고 평강이 계속해서 그들에게 넘치기를 간구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은 일회성 축복이 아니라 영원한 축복이다. 흥미롭게도 구약시대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을 이렇게 반복하여 축복해야 했다.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4-26)
여호와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보혈로 우리와 언약을 맺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계속해서 축복하신다. 그분의 얼굴을 우리에게 비추사 은혜를 베푸시고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사 평강을 주신다. 우리를 지키시며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신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독교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에 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다(요 15:5).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 이름에 담긴 비밀, 그 이름에 담긴 사랑, 그 이름 안에서 우리에게 부어지는 풍성한 은혜, 평강, 그 이름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기업과 축복. 당신은 충분히 알고 맛보고 있는가?
믿지 않는 자에게 예수는 건축자들이 버린 돌같이 아무 쓸데 없거나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에 불과하지만, 믿는 우리에게는 보배가 되신다(벧전 2:7). 예수 그리스도께서 정말 당신의 참 보배가 되시는가?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아는 것이다. 그분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보배롭게 여기는 것, 마땅히 돌려야 할 감사와 찬송을 돌려 드리는 것, 그분의 영광에 사로잡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