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를 따르면서 거짓을 믿어도 될까?①
본문 : 요한일서 2장 18절~29절
설교자 : 조 정 의
신자가 관상을 보고 혈액형에 따라 팔자를 정하는 건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사람의 인생을 계획하시고 주관하신다는 진리를 믿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철저히 배제하고 오직 얼굴 생김새와 혈액형만 가지고 운명을 결정하는 거짓이 상충하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신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따르면서 세상의 거짓을 함께 믿을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과 영원한 사귐을 누리는 자 곧 영생을 가진 자들이 통과해야 할 여러 가지 시험을 언급했다: 1) 죄를 자백, 2) 계명 순종, 3) 성도 사랑, 4) 세상을 미워함. 본문은 한 가지 시험을 추가하는데, 바로 교리적 시험이다.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자는 반드시 건강한 교리(참 진리) 안에 신실하게 거해야 한다.
요한의 편지를 받는 독자는 이미 교리적 시험에 실패한 많은 사람을 목격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 공동체 한 식구였으나 거짓에 속아 많은 성도를 미혹하고 결국 교회를 떠났다.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고 성도와 어느 정도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그들 속에 있던 거짓이 마침내 그들을 진리 밖으로 끌고 나온 것이다. 요한은 남겨진 이들에게 그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고 경고한다. 주님께 받은 교훈, 처음부터 그들이 들은 진리를 굳게 붙잡으라고 권면한다. 오늘 사도의 경고와 권면이 우리에게 꼭 필요하다. 그 어느 때보다 거짓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1. 예수를 따르면서 거짓을 믿었던 이들(18-9, 22-3)
사도 요한은 여전히 자기의 돌봄과 보호가 필요한 하나님 자녀를 “아이들아”라고 부르며 새로운 가르침을 시작한다(18절). 요한은 예수를 따르면서 거짓을 믿었던 이들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이는 다니엘서나 계시록에 나오는 종말에 나타날 인간 지도자,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을 대적할 사탄의 최종 도구를 말하는 게 아니다(단 7; 계 12-13). 적그리스도가 독자가 편지를 받았던 “지금도 많”이 일어났다고 했다.
“적그리스도”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적대자”(새번역),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사람”(우리말 성경)인데, 요한이 독자에게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라고 말한 것처럼 그들은 여러 번 교회에 그리스도를 대적할 이들 그것도 교회 안에서 일어날 그리스도의 적대자가 있을 거라는 경고를 들었다(행 20:29-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예수님도 말씀하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마 7:15).
결국 적그리스도는 진리의 말씀을 들었으나 거짓에 속아 결국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사람을 거짓으로 미혹하는 이들이다(히 6:4-8). 거짓의 아비 사탄의 도구라는 점에서 종말에 나타날 적그리스도를 닮았다(요 8:44). 마지막 때, 곧 예수님의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기간에, 우리도 이런 종류의 “적그리스도”를 기독교 안팎에서 많이 본다.
예수를 따르면서 거짓을 믿었던 이들은 결국 진리 공동체와 함께할 수 없었다. 자의든 타의든 교회를 떠났고 요한은 그들이 원래부터 교회에 속한 자들이 아니었다고 분명하게 말한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19절)
거짓을 믿는 자는 누구도 하나님의 교회에 속할 수 없다. 현재 교회 안에 있든 결국 못 견디고 밖으로 나가든 그들은 영적으로 교회에 소속될 수 없다. 지역 교회 등록한다고 해서 생명책에 기록되는 건 아니다(브루스). 예수님은 이것을 알곡과 가라지로 설명하셨다(마 13:24-30). 그들이 믿었던 거짓은 무엇인가?
거짓말하는 자가 누구냐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가 아니냐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그가 적그리스도니(22절)
그들이 믿고 또 전한 거짓말은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보내신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하여 예수님을 따르다가 어떤 계기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부인하면서 유대교로 돌아갔다. 당시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의 인성이나 신성을 부인했는데, 예수님이 온전한 인간처럼 보이게 나타났을 뿐이지 인간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거나(가현설), 인간 예수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신성을 입었다가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직전에 신성이 빠져나갔다고 말하기도 했다(케린투스, 영지주의 교부). 뭐가 됐든 성경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과 다르게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받아들인 것이다(요일 4:3; 요이 1:7). 잘못된 교리, 거짓을 믿고 따른 것이다.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견해만 조금 다를 뿐이지 하나님은 부인하지 않았다고 주장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요한은 이들이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부인하는 적그리스도라고 정죄한다. 왜 그런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23절)
예수님을 부인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자 하나님 아버지를 부인하는 자와 같다. 반대로 예수님을 시인하는 자, 즉 예수님을 말씀 그대로 믿고 따르는 자는 아버지와도 올바른 관계를 맺는 자다.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시면서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고 선언하셨다(요 14:6).
잠긴 문을 열기 위해 꼭 맞는 열쇠가 필요한 것처럼 아버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성경과 예수님 그리고 사도들이 가르친 예수님과 꼭 맞는 예수님을 믿고 따라야 한다. 내 생각, 누군가의 가르침, 예수님을 대체하거나 보충할 대상을 함께 믿는 것은 결국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며 아버지는 그런 자를 반드시 거절하신다.
오늘날 수많은 이단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교회, 신천지, 몰몬교 등은 성경의 예수님과 십자가 대속을 말하긴 하지만 자신들의 교주를 재림 예수라고 말한다(행 4:12,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여호와의 증인이나 천주교는 기독교의 친척인가? 그렇지 않다(원수다). 예수님을 하나님이 만든 피조물로 여기거나(JW) 예수의 십자가 대속이 충분하지 않아 마리아(무오설)나 성인의 중보 기도 혹은 신자의 공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C).
그들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이웃으로 사랑하는 것과 별개로 그들과 한 신앙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을까?(WCC 세계 교회 협의회). 결코 그럴 수 없다. 왜 그런가? 예수를 따르면서 거짓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백성이 급속한 타락과 우상 숭배에 빠진 이유는 성경이 말하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부정했기 때문이 아니다. 거기에 이방 우상과 그 가르침을 섞기 시작하면서 결국 진리이신 하나님을 떠나버린 것이다. 한 방울의 독약이 컵 속의 물 전체를 치명적으로 오염시키듯, 거짓은 진리를 훼손한다. 생수에 독약을 타면 사약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신자가 진리 가운데 거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2. 예수를 따르면서 진리를 믿었던 이들(20-21, 26-27)
요한은 독자에게 이 편지를 쓰면서 그들이 진리를 모르는 게 아니라 알고 있다고 확신한다(21절,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그래서 요한은 그들이 거짓에 속지 않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을 미혹하는 자들에 관하여 경고한 것은 그들이 어떤 거짓에도 속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26절). 그 어떤 거짓도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순수한 진리가 거짓으로 훼손되기를 원치 않았다(21절).
예수를 따르면서 진리를 믿었던 이들이 진리 안에 거하고 있음을 확신할 수 있는 두 가지 증거가 있다. 첫째는 바로 그들이 처음부터 들은 것, 말씀이다(24절). 그들은 예수님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이 필요 없었다.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해, 사도들을 통해 들었던 말씀이면 충분했다. 예수님이 분부한 모든 것을 알고(일부가 아니라) 예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갈 필요가 있었지만, 그 외의 새로운 지식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다(도마, 유다 복음).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겐 단 한 권의 책만 필요하다.
둘째는 21, 27절에서 강조하고 있는 “기름부음”이다. 기름부음은 성령이 신자에게 내주하여 거룩한 일을 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성령의 역사로 신자는 21절에 말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안다.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안다는 말이 아니다. 신자라면 모두가 다 진리를 안다는 것이다(참 신자의 특징). 성령께서 모든 신자 안에서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주신다는 것이다(성령의 내적 증언). 27절엔 보다 자세히 이것이 설명되어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27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는 문맥 안에서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요한도 이 편지를 통해 무언가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은 27절 말씀을 통해 주님께 받은 기름부음 곧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모든 것을 분별하여 거짓 없이 참된 것만을 가르치신다고 말한다. 예수님은 성령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이를 분명히 말씀하셨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요 14:26)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요 16:13)
거룩하신 성령께서 사도의 삶에 어떤 일을 행하셨나? 먼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리고 그 들은 것의 참 의미, 진리를 가르쳐 주셨다. 예수님이 누구시고 어떤 일을 하셨으며 무엇을 가르치셨는지 기록하게 하셨다(성경). 오늘날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은 신자 안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기록된 성경을 통해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고(조명), 깨닫게 하시고(고전 2:12-3), 진리에 따라 살도록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신다(빌 2:13). 예수를 따르는 이에게 진리의 말씀(내용)이 있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성령)가 계신다. 이로써 우리가 진리 안에 있음을 안다. 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없는가? 있다!
3. 예수를 따르면서 진리에 거하란 명령(24-5, 28-9)
요한은 성도들을 권면하면서 “처음부터 들은 것을 너희 안에 거하게 하라”고 명령했다(24절). 28절에서는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라고 명령한다. 그의(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을 알고 그 말씀에 순종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요 15:10). 그래서 29절엔 “의를 행하는 자”라고 말했다.
예수를 따르는 자는 마땅히 진리에 거하기 위해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순종해야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24-5절에서 말하듯 신자가 진리 안에 거하는 것으로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알고 순종하는 것을 통해 우리는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25절). 당신은 진리를 멀리하고 행하지 않으면서 영생을 누릴 수 없다. 최소한 거짓에 속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멀어지게 되거나 최악의 경우 진리를 아예 떠나 가라지 였음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28절에 요한이 말하는 것을 보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요한은 예수님이 강림하실 때를 묘사한다. 그때 주님께서 나타나셔서 우리를 만나실 때 담대하게 그분을 만나려면 진리를 알고 그 가운데 거해야 한다. 신실하게 진리 가운데 거하고 있을 때 우리는 거룩하고 공의로우신 주님과 친밀하고 확실한 관계 안에 있음을 알고 두려움 없이 담대하게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 부끄러움을 당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부끄러움은 단순히 삶을 낭비했다는 부끄러움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7장 23절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심판의 말을 들을 때 그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다.
그러므로 현재 영생을 충만하게 누리고 주님 오실 때 담대하게 그분을 만나려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처음부터 들은 말씀을 부지런히 찾고 알고 순종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그 말씀을 밝히 깨닫게 하시고 행하도록 도우실 것이다. 그것이 현재 우리가 아들과 아버지 안에 거하고 있다는 증거, 영원한 생명을 약속받은 증거, 의로우신 하나님에게서 난 자라는 증거가 된다.
이레니우스는 사도 요한의 일화를 들려준다. 하루는 요한이 에베소의 목욕탕에서 우연히 케린투스를 만났는데, 목욕도 하지 않고 목욕탕을 빨리 빠져나오면서 “빨리 도망치자. 목욕탕이 무너져 내리기 전에. 진리의 대적자인 케린투스가 이 안에 있다”고 외쳤다고 한다(WBC, 217p).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요한은 그리스도의 교회에 막중한 책임감을 가진 마지막 사도였다. 히브리서 기자가 말한 것처럼 모든 교회의 성도를 위하여 자신이 청산할 자인 것처럼 경성하였다(히 13:17).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주께서 강림하실 때 거절당하기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형제를 위하여 차라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한다고 했다(롬 9:3).
목회는 때로 옳은 말만 하는 인기 없는 일처럼 보인다. 성도의 자유로운 생각과 생활을 통제하고 바로잡고 교정할 때가 많다. 그런데도 그 일을 해야 한다. 때론 원수의 이름을 외치고, 도망치라고 소리를 높이고, 정신 차리고 똑바로 살아야 한다고 꾸짖고, 가지고 있는 그 생각은 위험하다고 경고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거짓을 경계해야 한다. 왜 그런가?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기를 바라고, 주님 만날 때 담대하게 그 품에 안기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자기 말이 아니라 처음부터 들려진 말씀을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가르친다.
성도가 진리에서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내려앉는다. 성도의 자녀가 거짓에 속아 점점 교회를 떠나고 있는 것이 분명할 때 그 영혼의 장래를 생각하며 눈물이 난다. 데이비드 잭맨은 “진리에 열중하는 것이 거짓에 대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했다(BST). 자녀에게 부지런히 진리를 가르치라. 날마다 마음과 생각을 말씀으로 채우라. 자녀의 손을 붙잡고 예배의 자리로 나와 말씀을 듣게 하라. 진리를 듣지만 삶에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거짓이 마음에 뿌리내리기 전에 당신의 마음 밭을 갈아엎어라. 성령께서 역사하실 수 있도록 겸손히 순종하는 자세로 말씀을 들어라.
우리 모두가 주님 나타나실 그 날에 담대함으로 그분을 만나 영원한 생명을 더 풍성히 누리게 되기를, 그 영생을 지금 여기서 미리 풍족하게 누리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