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예수님 몸에 난 영원한 상처

본문: 요한복음 20장 26-29절

설교자: 조정의

상처받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또는 타인에 의하여 몸을 다치기도 하고 또 마음이 상하기도 한다. 흔적만 남는 상처가 있는가 하면, 고통이 따르는 상처도 있다. 때로 그 고통은 육신의 고통이 아니라 마음의 고통인 경우도 있다. 몸은 통증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상처 준 사람을 떠올리면 마음이 여전히 아프고 괴롭고 원망이나 분노가 일어나는 것이다. 솔로몬은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이 칼로 찌르는 것 같이 누군가를 해치거나 양약같이 누군가를 치료할 수 있다고 말했다(잠 12:18). 어떤 말은 정말 각인된 것처럼 잊히지 않는다. 어떤 행동은 머릿속에서 쉴 새 없이 반복 재생되고 꿈에서도 생생하게 재연된다. 무슨 일을 하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찰나의 순간이 주어지면 상처받은 말이나 일이 떠오르고 그렇게 조금씩 우울감과 좌절감에 젖어 든다.

어떤 영화에 등장하는 신비로운 도구처럼 한 번의 섬광에 상처받은 기억이 모두 사라져 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말을 들은 적이 없었던 것처럼,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즉시 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어쩌면 그런 기억 상실을 일으킬 것이라고 우린 기대한다. 하지만 단시 시간이 흐른다고 해서 상처가 회복되는 건 아니다. 단지 잊힐 뿐, 오래 두면 상처는 더 깊어지고 악화된다. 그러면 어떻게 상처를 회복할 수 있을까? 여간해선 잊혀지지 않고 해결되지 않는 나쁜 기억과 칼처럼 깊이 박힌 말들이 우리 삶을 망가뜨리도록 내버려두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어디에서 우린 깊은 상처보다 더 깊은 힘과 은혜를 얻을 수 있을까?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상처에 무관심하거나 무정하신 분이 아니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노래하면서 “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 그들의 상처를 싸매시는도다”라고 감사를 표현했다(시 147:3). 우리는 하나님께서 언젠가 우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확실히 믿고 소망한다(계 7:17; 21:4).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고 했다(히 11:1). 어떤 믿음의 선배들은 하나님께 믿음을 두고 정말 헤아릴 수 없이 깊고 고통스러운 지금의 상처를 아름답고 놀랍게 이겨냈다. 완전히 회복시켜 주실 하나님 약속을 꼭 붙든 것이다.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신 선교사인 스티븐 룽구는 일곱 살 때 10대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다. 쓰레기통을 뒤지며 끼니를 해결하고 모래를 덮고 자는 등 비참한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가출한 또래들과 마약, 살인, 강도를 저지르는 갱단 활동까지 했다. 백인이 자기 나라를 침략한 원수라고 생각하여 천막을 치고 복음을 전하는 백인 선교사 무리에게 폭탄 테러를 시도하는 중, 잠시 시간을 때우려고 예배하는 장소에 앉아 무심코 들은 설교를 통해 놀랍게 회심한다. 그 후 전심으로 하나님의 복음을 돌아다니면서 선포하는 사역을 하던 그는 어느 날 설교 중에 자기 앞으로 나온 늙은 여인을 보고 얼어붙었다. 일곱 살에 자기를 시장에서 버리고 간, 그래서 젊은 시절 많은 고통과 상처로 울부짖게 만든 어머니였다. 그런데도 룽구는 어머니를 끌어안고 눈물로 용서했다. 

코리 텐 붐 여사는 유대인 포로수용소에서 자기 여동생을 죽이고 자기를 고문한 독일 장교를 어떤 집회에서 만나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과거의 상처와 고통이 되살아나는 경험을 했지만, 같은 주님 안의 형제가 된 그 장교에게 손을 내밀며 진심으로 환영하고 사랑한다고 말해주었다. 누군가 자기 남편을 창으로 찔러 죽였다면, 그 사람을 쉽게 용서할 수 있을까? 마음에 사무친 상처가 쉽게 잊힐 수 있을까? 하지만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자기 남편 짐을 창으로 찔러 죽인 에콰도르 원주민을 평생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남편이 죽은 그곳을 어린 자식과 함께 다시 찾았다. 

우리는 성경에서도 자기 상처를 뛰어넘어 타인을(그것도 자기에게 상처 준 이를) 거짓 없이 사랑하는 이들을 만난다. 예수님은 못과 창으로 자기 몸을 찌르고 멸시와 모욕과 비방으로 마음을 칼로 찌르듯 하는 원수들을 위하여 아버지께 이렇게 구하셨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스데반도 돌로 자기 몸에 죽음의 상처를 내는 이들을 위하여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했다(행 7:60).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자신을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려 했던 유대인들, 자기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그들이 회심하기를 원한다고 했다(롬 9:3).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 중에서 ‘나는 절대 이렇게 못 해’라고 선을 긋는 사람을 종종 본다. ‘나는 절대 그 말을 못 잊을 거야’, ‘내가 받은 상처는 평생 사라지지 않을 거야’, ’이제 다시는 상처 준 그 사람을 옛날처럼 대할 수 없어’라고 장담한다. 위에 언급한 믿음의 선배들은 대단한 신앙인이었고, 우리는 평범하니까, 그들은 마음이 강하지만, 우리는 부드럽고 연약하니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성정이 같은 사람”이다(약 5:17). 우리가 약한 만큼 그들도 약했다. 그리고 우리가 받은 상처가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그들이 받은 상처는 정말 크고 고통스러웠던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그들이 그 엄청난 상처와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운 하나님의 은혜와 지혜와 능력이 우리에게 똑같이 풍성하게 부어진다는 것이다. 복음의 능력에 차별은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무궁하다. 우리는 그 사랑으로 우리가 받은 상처를 극복하려고 계속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 과정을 거칠 때에야 상처는 아물고 신앙이 자라난다.

그러면, 어떻게 사랑으로 상처를 극복할 수 있을까? 한 마디로 이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 상처는 그리스도의 몸에 난 영원한 사랑의 상처로 극복할 수 있다. 이제, 본문을 살펴볼 차례다: 26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하신 새로운 몸을 입으셨다. 썩을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것, 죽을 몸이 아니라 죽지 않을 몸을 입으신 것이다(고전 15:42, 53).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예수님 몸에 상처가 남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부활의 몸을 입을 것이다. 참수형을 당하거나 뼈를 갈아 강에 뿌린 자들도 다시 온전한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생명이신 주님의 몸엔 영원한 상처가 보인다.

요한은 천상의 세계를 환상으로 경험하면서 부활하신 어린 양 예수님을 봤다. 그는 예수님을 가리켜 “또 내가 보니…한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라고 묘사했다(계 5:6, 9). 과거에 죽임당하신 흔적이 있었다는 말이다. 놀라운 신비다.

“면류관 벗어서”(찬 25장, 1851년)를 작사한 매튜 브릿지즈는 예수님 몸에 난 영원한 상처의 신비를 묵상하며 다음과 같이 찬송했다:

사랑의 주님을 찬송하라

그의 손과 옆구리를 보라

겉으로 드러난 깊은 상처들이 영광중 아름다운 빛을 낸다

하늘에 천사들 중 그 누구도 그 영광스러운 상처를 보고 있을 수 없기에

그토록 밝은 신비 앞에 그들의 불타는 눈을 가린다

몸의 모든 상처가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사라질 것이고, 마음의 모든 상처로 인해 흘린 눈물은 그날에 모두 씻길 것이다. 그런데 참으로 신비하게 눈물을 닦아주시는 분에겐 영원한 상처가 남아있다. 

상처 하나 없는 새로운 몸과 마음으로 성도가 세세토록 부를 “새 노래” 가사엔 영원한 상처 입은 주님을 높이는 가사가 있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하리로다”(계 5:9). “죽임을 당하신 어린 양은 능력과 부와 지혜와 힘과 존귀와 영광과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하도다”(계 5:12). 우리는 천국에서 우리를 위한 영원한 사랑의 징표를 주님 몸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브릿지즈가 찬송한 것처럼 그 밝은 신비로움 앞에 우리 눈을 가리며 주체할 수 없는 감사와 기쁨과 찬양과 경배를 터뜨리며 세세토록 주님을 예배할 것이다.

극심한 상처를 입은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그 상처를 극복하고 상처 준 이들을 자기 생명을 다해 사랑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예수님 몸에 난 영원한 상처를 바라보았다. 스데반이 보좌에 서 계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돌을 던지는 이들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한 것처럼, 그들 모두는 주님께 남은 영원한 상처, 그들을 위한 헤아릴 수 없는 사랑과 용서의 증거 앞에 굴복한 것이다. 그 아름답고 신비로운 영광의 상처를 볼 때, 자기 몸과 마음에 남은 상처가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가벼운 것으로 여겨진 것이고, 계속해서 자신을 괴롭히고 고통스럽게 하는 상처를 언젠가 주님이 완전히 회복하실 것을 굳게 믿은 것이다. 자기 상처만 바라보면서 주님을 원망하고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몸에 난 영원한 사랑의 상처를 바라보면서 주님과 원수를 사랑한 것이다.

<은혜받는 습관>의 저자 데이비드 마티스는 디자이어링 갓 사이트에 “그의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그는 예수님 몸에 난 영원한 상처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준다고 썼다(링크):

  1. 내가 너희 고통을 안다
  2. 내가 너희를 사랑한다
  3. 내가 너희를 이기게 하리라

주님 몸에 난 영원한 상처를 바라보라. 그 상처가 당신에게 말하는 것에 귀를 기울이라. 주께서 당신의 고통을 아신다. 더 큰 고통을 당한 분으로서 아신다. 주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 그분 몸에 난 상처가 그 풍성한 사랑의 증거다. 주께서 당신을 이기게 하실 것이다. 모든 상처를 극복하고 십자가 사랑을 행하게 하실 것이다. 당신의 상처는 그냥 아물지 않는다. 시간이 저절로 해결해 주는 것도 아니다. 오직 예수님 몸에 난 영원한 사랑의 상처가 당신의 상처를 치료한다. 그러므로 오직 영원한 상처를 지니신 주님만 바라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