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예수님께 긍휼을 배우다
본문 : 마가복음 1장 40~42절
설교자 : 이 병권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필립 얀시의 책에 소개된 내용입니다. 몸을 파는 한 여성이 상담가를 찾았습니다. 그녀가 털어놓은 이야기는 듣기 힘든 비참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녀는 찢어지게 가난했고, 몸은 마약으로 인해 병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을 먹여 살릴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뿐만 아니라 딸을 팔아서 힘겨운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상담가는 그 고백을 듣고 할 말을 잊고 말았습니다. 기가 막힌 심정으로 물었습니다.
“가까운 교회라도 가서 도움을 받아 볼 생각은 안 해보았습니까?” 그 때 그 여자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지더니 말합니다.
“교회요? 거긴 뭐 하러 가요? 그렇잖아도 비참해죽겠는데 거기 가면 그 사람들 때문에 더욱 비참해질 거예요.” 그 상담가는 세월이 한 참 지난 후에도 그 때 그 여자의 표정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그녀에게 "우리 교회로 오세요"라고 말 할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 교회에 짙은 화장을 하고 코를 찌르는 화장품 냄새를 풍기며 마주하기 부담스러운 옷차림의 여성이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험상궂은 얼굴로 몸에는 문신을 그려넣은 사람이 들어온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니면 에이즈 환자나 동성애자 같은 함께 하기가 껄끄러운 사람이 우리 가운데 와서 함께 하기를 원한다면 어떻겠습니까?
말씀을 준비하면서 과연 나는 어떻게 그들을 대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인가?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가 주인으로 따르며 우리가 닮기를 원하는 예수님. 내 삶의 목표가 되고 모든 면에서 나의 모델이 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저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살펴보고 오늘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을 닮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지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예수님을 닮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또 한 번 배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충만하셨던 예수님,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사람들을 향한 긍휼이 충만하셨던 분이십니다. 우리 모두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으로부터 긍휼을 배워서 삶에 실천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예수님께 긍휼을 배우다”입니다.
오늘 본문은 한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오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에 사용했던 개역성경에는 문둥병이라고 했었는데, 개정되면서 순화된 말인 나병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나병은 하나님의 저주로 여겨졌습니다. 나병에 걸리면 더 이상 자신이 살던 곳에서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쫓겨났고, 격리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과는 절대로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율법에서 명한대로 나병환자들은 찢어진 옷을 입고 머리를 풀고 “부정하다 부정하다”라고 외치면서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람들과 접촉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존재를 알려서 사람들이 곁에 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의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살아있지만 산 사람으로 여겨지지 않은 것입니다. 마치 걸어 다니는 송장, 움직이는 시체와도 같았습니다. 온전한 사람과는 누구와도 관계를 맺지 못하고 외로이 지내야 했습니다. 그 누구도 함께 하기를 싫어하는 가장 혐오스러운 대상이 된 것입니다. 나병환자가 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고,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이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나병에 걸리는 순간, 그는 사랑하는 가족들로부터 떨어져야만 합니다. 사랑하는 아내도 귀여운 자녀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가족과 함께 나란히 의자에 앉아서 예배드릴 수 없습니다. 가족이 함께 마트에 장을 보러 가는 소소한 행복도 누릴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꿈꿔왔던 미래, 계획했던 목표, 그 모든 것이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가 지금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엎드려서 간청합니다.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40). 그의 모습이 어떠할지, 과연 어떤 냄새를 풍길지 생각해보십시오. 코가 뭉개져있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있습니다. 머리는 지저분하게 헝클어져있고, 역겨운 냄새가 진동합니다. 그 사람을 바라보는 것조차 너무 불쾌하고 힘든 일입니다. 아무도 가까이 가기를 원하지 않는 그 사람이 지금 예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아마도 이 나병환자는 34절에 기록된 것처럼 예수님께서 병든 사람들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신다는 소문을 들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마지막 희망인 예수님께 절박함으로 왔던 것입니다. 너무도 간절했기 때문에 그는 무릎을 꿇어 엎드립니다. 눈가에는 눈물이 맺혀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 간청합니다. “선생님 저를 좀 고쳐주세요. 저도 사람답게 살고 싶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선생님 저를 살려주십시오. 선생님이 하고자 하시면 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이에 대해서 예수님은 어떻게 반응하셨을까요? 예수님은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긍휼의 마음으로 함께 할 수 없는 이 사람에게 가까이 가십니다. 한걸음 또 한걸음 조용히 그에게 다가가십니다. 그리고는 사랑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시며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십니다. 여러분 이 사람은 더럽기 그지없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을 만지면 이스라엘 정결예법으로 부정하게 됩니다. 가까이 할 수 없는,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너무도 불편한 존재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지금 그 사람에게 손을 대셨습니다.
사람들은 지금 놀라운 장면을, 믿을 수 없는 장면을 지켜보고 있습니다. 숨을 죽이며 극도로 긴장한 상태로 바라봅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41). “그래 내가 그것을 원한다. 내가 그렇게 해주마. 깨끗하게 되어라.” 예수님은 사람들이 소름끼치게 싫어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잘못하면 옮을 수도 있는 무서운 병에 걸린 사람, 나병으로 뒤덮인 그 사람의 몸에 손을 대셨습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것처럼 예수님은 말씀만으로 병을 고칠 수 있는 분이십니다.
복음서를 보면 많은 경우에 예수님께서 말씀만으로 기적을 베푸시고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굳이 이 나병 환자에게 손을 대시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손대지 않아도 고칠 수 있는데, 굳이 그를 만질 필요가 있었을까요? 저 같으면, 손을 대더라도 나병을 낫게 한 다음에 손을 대겠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오랫동안 사람의 따뜻한 손길을 경험하지 못했음을 아셨기에 예수님은 그에게 손을 내미셨습니다.
손대서는 안 되는, 정결예법에 어긋나는, 심지어 옮을 수 있는, 더럽고 냄새나는 그 사람에게 손을 댄 겁니다. 이런 행동으로 인해 예수님은 공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어려운 지경에 처할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손을 대셨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긍휼의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셨기 때문에, “이 사람이 얼마나 외로웠을까?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사람의 손길에 굶주려있을까?” 예수님의 마음이 긍휼과 자비로 끓어올랐습니다. 그래서 손대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이 열정이었다면,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 그것은 불쌍히 여기시는 긍휼의 마음입니다. 성경에 보면 불쌍히 여기셨다는 표현이 여러 번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불쌍히 여기셨다로 번역된 단어는 복음서에만 사용된 것으로 그 의미가 사람의 내장, 창자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쌍히 여긴다는 것은 문자적으로 내장에서부터 우러나온다. 내장이 움직인다. 내장이 아프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보면 애간장이 탄다. 애간장이 녹는다. 는 말이 있는데, 그것처럼 사람의 마음을 내장에 비유해서 표현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피상적이거나 스쳐 지나가듯이 느끼는 슬픔이 아닙니다. 그 긍휼은 우리 인간의 가장 깊은 부분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히브리 사람들에 의하면 이 내장은 인간의 감정의 중심이고 가장 깊은 부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봤을 때 그 분의 가장 깊은 부분이 움직인 것입니다. 창자가 끊어지는 것 같은, 내장이 움직이는 것 같은 아픔을 느낀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예수님의 긍휼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무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것을 보시고 자신의 존재 중심으로부터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자들이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는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지치고 배고픈 것을 보시자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말씀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예수님을 큰소리를 부르며 따라갔던 맹인 두 명에 대해서도, 오늘 본문의 예수님 앞에 나와서 무릎을 꿇었던 나병환자에 대해서도, 외아들을 장사지내던 나인 성의 과부에 대해서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친밀한 감성으로 그들의 슬픔의 깊이를 아셨습니다. 그분은 상실감에 젖은 자들과 함께 상실감을 느끼셨고, 배고픈 자들과 함께 배고파하셨으며, 아픈 자들과 함께 아파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마음인 긍휼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나병 환자 뿐만 아니라 눈먼 자들, 귀신들린 자들, 배고픈 자들, 자식을 잃은 과부, 지도자가 없이 헤매는 이스라엘 사람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 꿈도 희망도 없이 멸시당하면서 사람들에게 배척받던 죄인들에 대해서 예수님이 품었던 마음이 바로 이 긍휼의 마음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이 긍휼의 마음으로 친히 사람이 되셨습니다. 예수님이 자유로운 선택으로 사람의 고통을 온전히 겪기로 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진정한 사람됨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만나는 예수님은 긍휼이 충만하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닮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예수님을 닮은 교회가 된다는 것을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긍휼의 모습을 그분을 따르는 우리도 그분을 닮아서 긍휼을 나타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얼마나 그분을 닮았는지 한번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저희 집의 막내는 밥을 먹여주는 것보다 스스로 밥을 먹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밥을 국에 말아서 주면 절반은 다 흘리면서 밥을 먹습니다. 그렇게 밥을 먹고 나면 입었던 옷이 엉망이 되는데, 그 상태로 저에게 안아달라고 할 때가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딸이지만, 안기가 좀 꺼려지기도 하는데 특별히 제가 어떤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제가 외출복을 입고 있을 때는 웬만하면 그대로 안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집에서 입는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을 때는 그냥 안아줍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누군가가 여러분에게 다가왔을 때 여러분은 어떤 옷을 입고 계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입고 있는 옷은 어떤 옷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긍휼의 옷을 입어서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며 안아주십니까? 아니면 내가 입은 옷이 더러워질까봐 주저하며 외면하십니까? “나는 깨끗해, 나는 저 사람보다 나아, 나는 저 사람과는 함께 할 수 없어. 저 사람은 가까이 해봐야 득이 될 것이 없지. 나만 손해야” 이렇게 다른 사람과 나를 구분하고 있지는 않으십니까?
긍휼의 마음은 자기만을 위하고 자기만을 살찌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를 돌아보는 것입니다. 자기만이 옳고 자신의 생각이 최선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외된 자들 약자들 죄인들을 멸시하고 판단하고 정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운 사람들의 외침에 귀를 막는 것이 아닙니다.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딱딱한 마음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며 할 수 있는 대로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러한 긍휼의 사람이 되어 긍휼을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긍휼을 베푸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 누군가를 향해서 그 마음이 움직이는 자. 아픈 자를 보고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자를 두고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전혀 무관심하고 늘 내가 중심이고 나만을 위하고 삶의 모든 목적과 태도가 나 자신에게만 초점이 맞춰있는 사람, 그러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사람은 정말로 불행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이 복 있다고 말씀하신 긍휼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을 닮아가기를 원하십니까?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긍휼의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여러 가지로 말씀을 드릴 수 있겠지만, 저는 오늘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사람에 대해서 예수님처럼 보십시오. 오늘 본문에는 구체적으로 안 쓰여 있지만, 예수님께서 누군가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표현이 있으면, 많은 경우에 그 앞에는 예수께서 보시고 라는 표현이 함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에 대해서 무엇을 보셨을까요? 단지 그들의 고통만을 봤을까요? 그들의 겉모습,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셨을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 이상을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을 볼 때 더 중요한 것을 보는 분이십니다. 마치 전문가들이 보통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림의 전문가는 일반 사람이 볼 때 도통 알 수 없는 그림을 보고 훨씬 더 많은 것을 느끼고 그 그림의 가치를 압니다. 자동차의 전문가는 자동차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내부가 어떤지 압니다. 그리고 고장이 난 차는 어디가 문제인지 찾아냅니다.
예수님은 사람은 만드신 분이십니다. 사람에 대해서 온전히 다 아시는 예수님. 그분은 사람의 전문가, 인생의 전문가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가 자주 놓치게 되는 더 중요한 것을 보십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가치를 아시고 그 가치를 보십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간에, 비참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서도 그 가치를 보십니다.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십니다. 그 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소중한 존재가 죄나 질병이나 가난이나 굶주림이나 소외나 또는 다른 고통으로 망가져 가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그것이 그분의 깊은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볼 때 겉모습만 봐서는 안 됩니다. 더 깊이 봐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그 사람의 본질적인 가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사회적 신분과 같은 외적인 것을 보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존중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무시하고 소홀하게 대합니다.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그래서 그 기준에 미달된 사람은 하찮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사람의 참된 가치는 그 사람의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습니다. 사람의 외적인 모습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생각하시는 가치 있는 존재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서 이 깊은 진실을 볼 수 있을 때, 그 사람 안에 있는 이 깊은 가치를 볼 수 있을 때, 우리는 그들을 존중할 수 있고, 그들을 마음으로 대할 수 있고,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긍휼은 단순한 감상이 아닙니다. 일시적인 감정에 따라 흔들리는 마음이 아닙니다. 긍휼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알고 그 가치를 인정함으로 나오는 사려 깊은 자비의 행동입니다. 누군가를 보고 안타까워하는 감정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처럼 행동으로 나타나는 진정성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마음으로 행하는 작은 실천이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내가 누군가에게 베푼 긍휼이 놀라운 변화를 낳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을 닮은 자가 되는 겁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가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긍휼의 마음이 가득한 교회가 될 때, 그럴 때 우리가 주님을 닮은 교회가 되는 겁니다.
1930년 어느 날 빵 한 조각을 훔친 죄로 한 노인이 재판을 받았습니다. 판사는 빵을 훔친 이유를 물었습니다. 그 노인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고, 3일을 굶고 나니 배가 너무 고파서 참지 못하고 빵을 훔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판사는 잠시 후에 판결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사정이 딱할지라도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은 잘못입니다.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고 예외가 없습니다. 따라서 피고인에게 법대로 10달러의 벌금형을 선고합니다.”
노인의 사정이 너무 딱해서 선처를 기대했던 사람들은 판사가 너무한다고 술렁거리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판사의 논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이 노인은 법정 밖을 나서게 되면 또 빵을 훔칠 것입니다. 이 노인이 빵을 훔치는 행위는 노인의 잘못만은 아닙니다. 이 도시에 살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따라서 시민의 한 사람인 저에게도 10달러의 벌금형을 내리겠습니다. 동시에 이 법정에 참석하신 시민 여러분들께도 50센트의 벌금형에 동참해주시기를 권고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지갑에서 10달러를 꺼내어 모자에 담았습니다. 판사의 놀라운 이 판결에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노인은 벌금을 내고 남은 돈을 손에 쥐고 눈물을 흘리면서 법정을 나섭니다. 이 판결을 통해 유명해진 판사는 훗날 3번이나 뉴욕 시장에 당선되었고 시민들에게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합니다.
교회는 서로를 정죄하고 판단하는 곳이 아니라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의 부족함을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영적인 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영적인 법정이 되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부족함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은 순식간에, 금방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평생에 걸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긍휼의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공사 중입니다.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그 공사는 계속 됩니다. 그러니 서로를 볼 때 눈에 보이지 않는 안내판을 마음의 눈으로 보십시오. “공사 중, 불편을 끼쳐 죄송합니다.” 우리가 서로를 긍휼의 마음으로 본다면 이 안내판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긍휼이란 인생이라는 길고 단단한 연필 끝에 달려 있는 작고 부드러운 지우개입니다. 하얀 종이 위에 사람들이 각자의 연필을 가지고 많은 이야기들을 씁니다. 그러다 보면 때로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지우개가 필요합니다. 긍휼은 우리의 인생의 실수를 지워줍니다. 연필 끝에 달린 지우개가 종이 위의 실수를 지워 주듯이 말입니다.
우리가 긍휼의 사람이 되어서 다른 사람의 실수를 용납하고 긍휼을 베풀어야 하는 것은 우리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죄라고 하는 고칠 수 없는 병에 걸려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우리를, 추악하고 더러운 죄로 썩어 냄새나는 역겨운 우리의 마음을, 그 분은 외면하지 않으시고 긍휼의 눈으로 바라보시고 우리에게 손을 내밀어주셨습니다. 사람 앞에서 우리는 나 자신은 어느 정도 가릴 수 있습니다. 그 누구도 죄로 얼룩진 나의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나의 모습 그대로를 보시는 분이십니다. 나의 모든 죄악을 온전히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그 분께서는 그런 나를 그냥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놀라운 희생의 사랑으로 우리는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분의 긍휼하심 앞에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경험한 주님의 긍휼 앞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겠습니까? 긍휼을 받은 자로서 긍휼을 나누는 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주님이 보는 것을 나도 보고, 주님이 아파하시는 것을 나도 아파하고,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것을 나도 불쌍히 여기고, 주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서로를 바라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상상해보시오. 우리가 예수님을 닮아서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우리를 통해서 누군가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누군가가 다시 꿈꾸게 되고, 누군가가 주님을 바라보고 힘을 얻는다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입니까?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서로를 긍휼히 여김으로, 연약한 자를 품어주고, 낙심한 자를 위로하고 격려하며, 넘어진 자를 세워주고, 서로를 돌아보며 필요를 채워주고, 함께 우리 주님을 닮아간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물론, 우리에게도 많은 필요들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에게도 아픔이 있고 어려움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을 넘어서 서로를 돌아보고 긍휼을 베풀 때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주님 안에서 더욱 복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서 긍휼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