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고난 중의 기도

본문: 시편 5편

설교자: 최종혁

[1]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관악에 맞춘 노래]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 [2]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 [3]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 [4]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 [5]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 [6]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 [7]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 [9]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 [10]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 [11]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 [12]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

 

어려움이 있을 때 사람마다 반응하는 것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고난이 있으면 그것에 대해 불평하고 심지어 하나님께 원망을 하기도 합니다. 제가 아는 사람 중에 불만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 있었는데, 세상의 나쁜 일들은 모두 그에게만 생기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저 역시 괴로웠던 기억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어려움이 있을 때 자신만의 동굴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을 만나려고도 하지 않고 교회도 나가지 않으며 인간관계를 멀리하는 것으로 그 어려운 상황을 보내는 사람입니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어려움이 왔을 때 더 주님을 찾고 더 열심히 교회에 나가며 간절히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는 자라면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기도로 아뢰며 슬픔을 내려놓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늘 우리는 다윗의 시편을 통해 고난 중에 어떤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배우기를 원합니다.

시편 5편은 3편과 같이 ‘아침시편’으로 분류되지만(3절) 사실 내용상으로는 4편과 더욱 유사합니다. 4편에도 등장하는 악인들, 대적들로 인한 어려움이 5편에도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 4편을 통해 어려움 중에서도 어떻게 평안히 눕고 잘 수 있는 지 말씀드렸는데, 오늘은 5편을 통해 우리가 그런 어려움 중에 있을 때 어떤 기도를 드릴 수 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먼저 1-3절에서 기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1),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2). 1절에서 다윗은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여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 앞에 이와 같이 기도를 드립니다. 또한 그는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우리도 어려움 중에 뭐라 표현을 해야 할 지 모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에도 나의 심정을 헤아려 달라는 기도입니다.

여기서 ‘심정’이라는 단어는 한숨, 탄식으로도 번역할 수 있고, 중얼중얼 하는 것으로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한나가 소리를 내지 않고 중얼거리며 기도를 할 때 엘리 제사장이 그를 보고 술에 취했다고 생각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중얼거리며 기도할 때 소리가 나지 않으니 다른 사람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탄식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더라도 제 마음을 헤아려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2절에는 “부르짖는 소리를 들으소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때로 감정이 너무 크고 상황이 너무 절박해서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걷다가 비바람을 보면서 물에 빠져 들어갈 때 그는 주님께 “나를 구원하소서”라고 소리쳤습니다. 이것은 아주 짧지만 자신의 필요를 구하는 절박한 기도였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는 말을, 그 탄식을, 잘 표현하지 못하더라도, 절박하게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표현들은 매우 순화하여 번역되었는데, 사실 다윗이 기록한 것은 명령형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 명령형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그만큼 절박한 마음 상태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의 간절한 마음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부릅니다. “여호와여”(1)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여”(2), “여호와여”(3). 그는 특별히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면서 하나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언급합니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그 자신이 왕이었는데 하나님을 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주권을 가지고 행하시는 진정한 왕이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아침에 주께서 나의 소리를 들으시리니 아침에 내가 주께 기도하고 바라리이다”(3). 하나님은 아침 뿐만 아니라 언제나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다윗이 모를 리 없습니다.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7),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내가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시 119:164). 그러나 그가 특별히 아침을 언급한 것은, 아침에 매일 제사를 드리는 시간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 시간을 기억하고 이른 아침에 기도하겠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하루의 처음이자 가장 귀한 시간에 기도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또한 3절에서 “기도한다”는 표현은 ‘정렬한다’, ‘준비한다’라는 뜻입니다. 무엇을 정리하거나 준비한다는 것이 기도라고 번역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군인들이 정리를 한다면 그것은 싸우러 나갈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이 정리를 한다면 나무를 준비하고 단을 정리하는 것, 제사를 드릴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법정에 나갈 정리를 한다면 잘 정돈된 말을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욥기에는 “사정을 진술하다”(욥 13:18), “호소하다”(23:4)로 번역되었고 시편50:21에서는 “낱낱이 드러내다”라고 번역되었습니다.

즉, 아침에 하나님께 나가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 자신의 사정을 낱낱이 고하겠다는 말입니다. 잘 준비해서 다 털어놓겠다는 말입니다. 그의 간절한 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또한 그는 “기도하고 바라리이다”라며 하나님 앞에 기대를 가지고 나아가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다윗의 기도의 태도는, ‘간절함’입니다. 우리는 때로 ‘이 기도를 하나님이 들어주시기나 하려나’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예 기도를 하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까? 우리가 간절하게 기도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얼마나 절박하고 중요한 일인지 그 필요를 잘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처해있는 상황이 얼마나 심각하고 위급한 상황인지 느끼지 못할 때 그렇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이 약할 때 우리는 간절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물에 빠져 들어갈 때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습니다. 베드로의 절박하고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비가 쏟아지고 파도가 이는 상황에서 그의 도움은 배도 동료도 아닌 오직 앞에 계신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얼마나 간절하고 절박했겠습니까? 다윗도 그런 간절함으로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기도에는 이런 간절함이 있으십니까?

4-7절에서는 ‘기도의 근거’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 번 강조했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자녀가 아버지에게 나가서 구하는 것은 둘 사이에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통령이 아무리 힘이 많다고 해도 제가 그에게 가서 무엇인가를 요구할 수가 없습니다. 그와 저는 아무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의 아버지나 어머니께 나아가서 부탁할 때는 들어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는 단순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거나 하나님의 원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사람이거나 미워하는 사람, 의인이거나 악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함께 할 수 없는 사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이나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기준은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에 있습니다. “주는 죄악을 기뻐하는 신이 아니시니 악이 주와 함께 머물지 못하며”(4). 악이 하나님과 함께 머물지 못한다고 했는데 여기서 “머문다”는 것은 잠깐 들르는 것을 말합니다. 즉, 악은 잠시도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만한 자들이 주의 목전에 서지 못하리이다 주는 모든 행악자를 미워하시며”(5). 오만한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서있을 수도 없습니다. “거짓말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시리이다 여호와께서는 피 흘리기를 즐기는 자와 속이는 자를 싫어하시나이다”(6). 하나님은 죄인을 싫어하십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신다’라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죄를 없애시고 사람을 구하시지, 죄 있는 상태의 사람(죄인)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무엇을 구하지도 못합니다.

“오직 나는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가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오직”은 강한 대조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앞에서 언급한 악인들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눅18장의 바리새인은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기를, 자신이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토색하고 간음하는 자들, 특히 세리와 같지 않음에 감사하며, 자신이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리는 것에 대해 강조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도 자신이 죄인들과 다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그들과 다른 것은 자신의 행위가 아닌, “주의 풍성한 사랑을 힘입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풍성한 사랑”은 인자, 또는 인애, 은혜, 긍휼, 자비 등으로 번역되는 단어입니다. 이 “사랑”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헤세드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맺은 언약, 그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가리킵니다. 즉,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신실하신 은혜, 사랑’입니다. 그냥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아주 특별한 사랑인 것입니다. 그 변하지 않는 사랑은 언약을 기초로 한 것이므로 하나님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도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늘 신실하셨던 하나님과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에브라임아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유다야 내가 네게 어떻게 하랴 너희의 인애가 아침 구름이나 쉬 없어지는 이슬 같도다”(호6:4). 여기 “인애”도 같은 단어입니다. 이스라엘의 인애도 하나님의 인애처럼 변하지 않았어야 했습니다. 다윗은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힘입어 담대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언약의 신실하심을 힘입어 주의 집에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다윗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를 경외함으로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리이다”(7). “경외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순종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없이 예배할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죄악 가운데 거하면서 예배할 수는 없습니다.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사 1:15).

믿는 자들은 하나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죄악 중에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짓는다고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 자는 관계 회복되고 나서 기도할 수 있습니다. 기도의 기초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입니다. 지금 죄로 인해 멀어졌다면 회개하고 돌이킨 이후에 기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8-12절에서는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다윗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구한 것이 없습니다. “여호와여 나의 원수들로 말미암아 주의 의로 나를 인도하시고 주의 길을 내 목전에 곧게 하소서”(8).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원수들은 그 길을 힘들게 만들지만 다윗은 그 길을 곧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하나님의 길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궁극적으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천’입니다. 하나님의 정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입에 신실함이 없고 그들의 심중이 심히 악하며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 같고 그들의 혀로는 아첨하나이다”(9). 특별히 악인들의 입으로 범하는 죄를 열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그들을 정죄하사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고 그 많은 허물로 말미암아 그들을 쫓아내소서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10). 시편을 읽어보면 이와 같이 악인이 망하기를 바라는 기도가 종종 등장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런 기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고민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이 이런 기도를 한 이유는, 다윗의 대적들이 했던 일 때문입니다. “그들이 주를 배역함이니이다”(10).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배반했으며, 악을 행하고 자신을 높여 오만한 자로 섰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다윗은 개인적으로 복수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직접 제거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다윗은 하나님이 정하신 때에 해주시리라 믿고 맡겼습니다. 다윗은 개인적인 복수심에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서 실현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기뻐하며 주의 보호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 외치고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11). 이 표현은 사실 청유형이나 기도문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즉, “주께 피하는 모든 사람을 다 기쁘게 해주십시오.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한 것입니다. 악인은 공의의 심판이 이뤄지기를 바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들이 기뻐할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12). 의인에게 복을 주시기를, 방패로 그들을 보호해주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기도는 고난 가운데서 도움을 구하면서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공의가 나타나기를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걷기를 바라고, 하나님의 공의가 드러나기를, 악인이 마땅한 벌을 받고 의인이 복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죄악된 세상에서 비리와 부정부패를 보지만 그런 세상을 뒤엎을 수는 없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께서 때가 되면 하실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가운데 드릴 수 있는 기도이며,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기도는 호흡과 같다고 합니다. 호흡과 같이 꼭 필요한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또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기도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그렇습니다. 건강한 사람은 숨을 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쉴 수 있습니다. 기도 역시 그리스도인들에게 호흡과 같이 자연스러운 것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하나님이 필요합니다. 만일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에게 하나님이 필요 없다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들 중에 하나님이 필요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교만이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다윗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까? 다윗과 같은 기도를 우리 모두가 드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