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예배자의 YES or NO
본문 : 시편 26편
설교자 : 최종혁
1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2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
3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
4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5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
6 여호와여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고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7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
8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
9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
10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11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12 내 발이 평탄한 데에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
시편 말씀을 읽다보면 당혹스러운 말씀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성경 전체의 가르침이나 특별히 신약의 가르침과 다른 것 같은 말씀을 만날 때입니다. 다른 사람을 저주하는 시편이 있고, 죽으면 마치 모든 것이 끝나는 것처럼 말하는 시편이 있습니다. 어떤 것은 하나님을 믿지만 죽으면 마치 지옥에 갈 것처럼 말하고, 구원 받은 사람이 구원을 잃어버릴 것처럼 말하는 시편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나눌 시편도 그리스도인들을 당혹하게 만드는 말씀입니다. 특별히 겸손에 대해 많이 배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더욱 그렇습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 여호와여 나를 판단하소서,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양심을 단련하소서”(1-2). 어떻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믿는 자는 겸손히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하는 것 아닐까요? 그런데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을 판단해보라고, 자신이 옳다는 것을 선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앞서 17편에서도 유사한 내용의 기도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편은 무고하게 송사를 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드린 기도로, 자신이 잘못 하지 않았음을 주장하면서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구하는 내용의 기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26편의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꼭 그런 원수들과의 관계를 다윗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나가면서 그 하나님의 평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6-8, 12절). 따라서 이 시편은 ‘하나님, 제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니 저를 살펴보십시오. 저를 용납하시고 찬양을 받아주십시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호와여 나를 살피시고 시험하사 내 뜻과 내 양심을 단련하소서”(2). 시에서 비슷한 단어들을 반복하는 것(살피다, 시험, 단련)은 여러 목적이 있지만, 주로 공통적인 의미가 강조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그냥 ‘저에 대해서 좋게 평가해 주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철저히 검사하고 조사하고 시험해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것(뜻과 양심)까지 그렇게 해보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정말 담대한 기도가 아닐 수 없습니다.
“단련하소서”는 금속을 불로 정제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다윗이 자신의 마음을 그렇게 철저하게 시험하여 불순한 것이 있는지 보시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저는 숨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마음껏 저를 살펴보시고 그에 따라 판단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기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나의 완전함에 행하였사오며 흔들리지 아니하고 여호와를 의지하였사오니”(1).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해 완전함으로 살았다고 말합니다.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은 미끄러지지 않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해왔다는 것입니다.
25편에서 다윗은 좁은 길에서 하나님의 길을 구하는 기도를 했었습니다. 그 길은 크게 보면 시편 1편에서 말했던 “복 있는 자”의 길이었습니다. 그 길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어떤 길을 걸어야하는지를 구하는 기도가 25편이었습니다. 지금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을 걸어 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로 빠지지 않고 완전하게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저를 판단하시고 시험해보십시오. 마음까지 확신해보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떠십니까? 참 교만해보이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밝히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이런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다윗을 교만하다고 말하기에 앞서 그가 말하는 완전함에 행하는 것, 흔들리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엇에 대해 “YES”라고 말하고 무엇에 대해 “NO”라고 말하는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걸음이 어느 길을 향했는지와 관련이 있습니다.
다윗의 걸음
1. 다윗이 걸은 길
“내가 주의 진리 중에 행하여”(3). 다윗은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YES”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단지 구했을 뿐 아니라 그 길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의 길을 보여 달라고 구했던 이유도 그 길로 행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혹은 자신이 좋아하는 길을 걸어갑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주의 진리 중에 행하는 것도 그런 많은 길 중에 하나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말하는 길은 내가 원하는 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 길이 아니면 다른 길을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이나 다른 사람 상관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가야합니다.
2. 다윗이 걷지 않은 길
“허망한 사람과 같이 앉지 아니하였사오니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 내가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오니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리이다”(4-5). 다시 한 번 비슷한 단어들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허망한 사람”, “간사한 자”, “행악자”, “악인”이 반복되고, “같이 앉다”, “동행하다”, “집회” 등의 단어들이 반복됩니다. “허망한 사람”은 헛된 것, 거짓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런 자들과 같이 앉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지 같은 자리에 있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자리에 앉아서 그들의 뜻에 동조하는 것을 말합니다. 헛된 신을 섬기는 일이나, 헛된 세상의 일에 마음을 두지 않았음을 말합니다.
“간사한 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간사하게 겉으로 보이는 것으로 사람을 속이고 자신의 진심은 숨기는 자들입니다. 그들과도 동행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혹시 그들과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어쩔 수 없이 못했다는 말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악한 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가하는 사람들의 집회를 ‘미워한다’고 말합니다. 미워한다는 말은 꽤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집회를 혐오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데 못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싫어서 하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 자들이 모인 곳에 같이 있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행악자”, “악인”, 포괄적으로 말해 하나님을 부인하거나 반대하는 자들과도 함께하지 않습니다. 당연한 말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하는 자가 그에 정확히 반대하는 자와 함께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 자들과 완전히 분리되어서 산다는 말도 아니고, 그런 ‘사람’ 자체를 혐오해야 한다는 말도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있지만, 그들과 뜻을 같이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비유하는 것처럼, 배가 물 위에 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물 가운데 있지만 배의 안은 분명 물과는 분리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해왔고 또 그렇게 할 것임을 동사의 변화를 통해서 보여 줍니다. 허망한 자와 같이 앉지 아니하였고(과거), 간사한 자와 동행하지도 아니하리이다(미래), 행악자의 집회를 미워하였고(과거), 악한 자와 같이 앉지 않을 것이다(미래)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원하기 때문에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 하나, 당연한 말이지만 악한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자신도 악한 길로 행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 악한 일을 하지는 않지만, 혼자서는 해’는 말이 아닙니다. 6절에 “내가 무죄하므로 손을 씻는다”는 말에 내포된 의미가 이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들의 죄에 동조하지도 않고 나 스스로 그런 죄에 빠지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윗은 시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의 손에 사악함이 있고 그들의 오른손에 뇌물이 가득하오나 나는 나의 완전함에 행하오리니”(10-11). 죄인의 길에 대해 “NO”라고 말하고 하나님의 진리에 대해 “YES”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걸어온 길입니다. 결코 쉬울 수 없습니다. 다수의 사람들과 다른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 속에서 함께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나 자신조차도 무엇에 “YES”를 하고 무엇에 “NO”라고 해야 하는지 혼란스럽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렇게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가능한지, 정말 효과는 있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생깁니다. 꼭 말씀대로 하지 않아도 좋은 결과가 있을 것 같을 때도 많습니다. 내가 힘들고 고생하는 것은 그래도 참을만한데, 내가 그렇게 하는 것 때문에 다른 사람도 피해를 받는 것 같을 때도 있습니다. 어렵고 갈등이 많습니다. 이것은 계속되는 싸움입니다. 다윗은 왜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할까요? 그는 무엇을 위해 그런 삶을 사는 것일까요?
다윗의 목적
“주의 제단에 두루 다니며 감사의 소리를 들려 주고 주의 기이한 모든 일을 말하리이다”(6-7). 그가 그렇게 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그분을 높이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면서 하나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로 갈 수는 없습니다. 당연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의 길로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와서 감사의 말을 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놀라운 일들을 선포하길 원했습니다.
여기서 다윗이 자신의 삶을 보는 관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기도가 교만에서 나온 기도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오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성전에 올라간 바리새인처럼) ‘주님 저는 다른 사람과 같이 않음을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과 다르게 저는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없고 의식적으로도 깨끗합니다’와 같이 말하지 않습니다. 다윗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하나님께 감사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입니다. 자신이 진리의 길로 행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높이기를 원합니다.
12절에서는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라고 고백하는데, ‘송축’의 사전적 의미는 ‘경사를 기리고 축하한다’는 뜻입니다. 좋은 일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임을 인정하고 그분을 높이는 것이 다윗의 원했던 일이고 그것을 위해 최선을 다해 그분의 길로 행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충분히 혼자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원하는 것은 그저 혼잣말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 감사의 말을 전하고(“들려주고”),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선포하기를 원합니다. 혼자 하는 개인의 예배가 아니라 함께하는 회중 예배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높이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기 원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정말 원한 것은 사람들 앞에서 나의 평판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평판이 좋아지기를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런 같은 마음을 가진 자들이 함께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삶의 목적이며 완전한 삶의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그의 입술을 통해서도 높임을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시편을 읽다보면 다윗이 정말 그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무엇을 위해 사는가를 생각해봅니다. 반복되는 생활에 정신을 놓고 있다 보면 무엇을 위해 산다는 생각도 사치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마치 쉬기 위해 일하는 것 같습니다. 일주일 중에 금요일쯤이 기쁘고, 연휴라도 있으면 그 주는 사는 것이 즐겁습니다.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그런 연휴와 같은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의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고 찬양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위해 하루하루의 삶을 살았습니다. 왜 그것이 그에게 그렇게 기쁨이 되고 즐겁고 기다려지고 삶의 원동력이 되는 일이었을까요?
다윗의 동기
“여호와여 내가 주께서 계신 집과 주의 영광이 머무는 곳을 사랑하오니”(8). 의무감이 아니라 다윗을 움직였던 강력한 동기는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주께서 계신 집과 머무는 곳을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특정한 장소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곳이 좋은 것은 주께서 그곳에 계시기 때문이고 그분의 영광이 머무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두신 곳이 바로 성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성소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마음은 오늘날 우리가 예배당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마음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대답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친히 성전 되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서 언제 어디서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당이 특별한 것은 우리가 이 곳에 모여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 뿐입니다. 하지만 다윗 시대의 성소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임재를 두셨던 곳입니다. 그들은 그곳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려면 성소로 가야 했습니다. 다윗에게는 너무나 특별한 장소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의 성소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던 것은 그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의 모든 것의 동기였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높이기 원했습니다. 특별히 다른 사람을 앞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을 높이기 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해서도 높임 받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높이기 원하기 때문에 그는 진리의 길로 계속해서 행합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길로 행하고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습니다.
다른 길이 여전히 너무 좋고 그 길을 나도 가고 싶은데 못가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그 길이 싫어서 가기 싫은 것입니다. 유혹에 넘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이 정말 좋은 것은 아닙니다.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흠 없이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고 그 사랑을 내 삶으로 내 입술로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말하는 완전한 삶, 완전한 거룩입니다.
다윗은 유별난 사람입니까? 이것이 믿는 자라면 정말로 그 마음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저 내 삶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될까하여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구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분을 향한 갈망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그분의 말씀에 어긋나는 것을 버리고 말씀에 따라 순종하려 노력하는 삶이, 다윗이 말하는 완전한 삶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자들의 당연한 삶입니다.
실제 삶에서 전혀 죄가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나누이지 않은 마음을 의미합니다. 온전한 헌신입니다. 다윗 이후의 왕에 대한 성경의 평가에서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로 다윗, 다윗의 마음, 다윗의 길입니다. 다윗보다 얼마나 죄를 더 짓고 덜 지었느냐가 아니었습니다. 나뉘지 않은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 그것이 다윗의 그러한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에 대해서 “YES”라고 말하고, 그것에 반하는 것들에 대해서 “NO”라고 말하는 것, 그것이 예배자의 삶입니다.
그 과정에서 넘어질 수도 있지만 아주 엎드러지지 않습니다. 다시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곳을 향해서 갑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삶을 ‘요요’와 비슷하다고 말합니다. 실 끝에 동그란 것이 달려 있어서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그런데 그냥 요요가 아니라 계단을 올라가는 요요입니다. 순간 순간을 보면 오르고 있을 때도 있고 내려가고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멀리서 보면 계속해서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이 근본적으로 달라져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마음이 그렇게 달라질까요? 다윗은 왜 그런 동기를 가지게 되었는지도 잠시 언급합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내 목전에 있나이다”(3). 주의 인자하심,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이 다윗을 먼저 찾아왔습니다. 다윗은 그것을 눈 앞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그분께 감사하고 그분께서 하신 놀라운 일을 찬양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셨고 또 구원받은 자로서 살 수 있게 계속해서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바꿔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을 소원을 주시고 행하게 하셨습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3).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 예배자의 마땅한 삶입니다.
다윗의 합당한 기대
다윗은 이런 삶에 대한 합당한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원에 대한 것이고 하나는 지금 이 땅에 대한 것입니다. “내 영혼을 죄인과 함께, 내 생명을 살인자와 함께 거두지 마소서”(9). 나는 그 죄인들과 다른 길을 걸어왔으니 다른 목적지에 이를 것을 기대합니다. 영원에 있어 그들과 함께 하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이런 기도를 합니다. “나를 속량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 발이 평탄한 데 섰사오니 무리 가운데에서 여호와를 송축하리이다”(11). 이 기도는 지금 다윗이 원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기도는 그 응답에 대한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고 결국 그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를 기대하는 가운데 확신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다윗은 상관없다고 할 것입니다. 다윗은 평안한 삶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런 삶을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를 살피시고 시험하시고 정제하신 후 은혜를 주신다면 그로 인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시는지를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은 결과를 두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또한 하나님을 높일 수 있게 되기를 구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말하는 예배자의 삶이 우리와는 거리가 먼 것 같으십니까? 율법 아래 살았던 사람이 하는 말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동일한 말씀을 우리에게 하십니다.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행하라고 하십니다. 옛 사람을 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고 하십니다. 어둠의 자녀가 아니라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은 다르게 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내가 그동안 사랑해 왔던 것들을 버리라는 말입니다. 결혼을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다른 것들을 버려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의 삶을 길을 걷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참 적절합니다. 두 사람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목적지가 다릅니다. 한 사람은 서울로, 한 사람은 부산으로 갑니다. 근데 두 사람이 정말 가까운 사이이고 서로 사랑한다면 같이 걸어가고 싶어할 것입니다. 그들이 한 길에서 동행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목적지가 다르면 가는 길도 달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어느 순간에 순간이동할 것처럼 살아갑니다. 다른 길을 가다가도 어느 순간 하나님이 나를 휙 이쪽으로 옮겨서 좋은 결과를 주실 것만 같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순간이동하지 않습니다. 목적지가 다르면 가는 길도 달라야 합니다. 같은 길을 걸으면 목적지도 같은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같은 길을 걸어가면서 목적지는 다르다고 말하는 것은 정상이 아닙니다. 지금 무엇에 대해서 “YES”라고 말하고 무엇에 대해서 “NO”라고 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고 인정하고 있으며,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과 불신자 둘 중의 한 명을 선택하는 테스트입니다. 그리고 두 분의 상세한 대화, 인터넷 사용, 옷 입는 방식, 아이팟 플레이리스트, 텔레비전 보는 습관, 취미, 여가 시간, 돈 거래, 패션 감각 그리고 생각과 꿈의 내용에 대해서 각각 두 가지 보고를 받습니다. 저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제가 과연 구별할 수 있을까요? 거듭나지 않은 이웃과 직장 동료, 급우들, 친구들과 다른 점이 있는 당신에 관한 보고서를 찾을 수 있을까요? – C. J. 매허니, <세속주의를 경계하라>, 28
여러분들의 보고서는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말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의 보고서가 믿지 않는 사람과 너무나 달라서 “이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인이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보고서를 하나님께 드리며 “하나님, 제가 이렇게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전에 올라간 세리는 자신을 죄인이라 고백하고 불쌍히 여겨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의롭다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세리는 다음에 또 그렇게 기도할까요? 그 다음에도 또다시 성전에 올라가 기도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세리가 어떻게 그 전과 동일한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입은 사람이 어떻게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다르지 않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 “YES”라 하고 세상에 “NO”라고 말한다면 분명 당신의 보고서는 다를 것입니다. 당신은 주의 진리 안에서 행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진지하게 이 시편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그 길을 끝에서 무엇을 만나기를 기대하고 계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