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원 안의 순간

본문: 시편 90편

시편 모음의 3권을 마치고 이제 4권이 시작된다. 4권은 90편에서 106편까지로 17편의 시편만 포함되어 있어서 3권과 편 수는 동일하지만, 분량을 기준으로 보면 4권이 3권보다 조금 더 짧다. 전반적인 내용을 보면 3권까지는 탄식에 대한 내용이 많았지만, 4권부터는 찬양과 감사에 대한 내용이 많다. 3권까지는 질문이 많았다면 4권부터는 답이 제시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오늘은 그 첫 시편인 90편을 함께 살펴보자.

세상에는 많은 문제가 있고 사람들은 그 문제의 답을 알고 싶어 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은 어떻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 할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는 다음 회차 로또 번호 같은 것을 알고 싶어 할 수도 있다. 어떻게 하면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답을 알고 싶어한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결혼을 잘 할 수 있을지, 어떻게 공부를 잘 할 수 있을지 등 저마다 자기 삶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 한다.

그래서 여전히 사주팔자나 타로 점 같은 것들이 유행을 한다. 그렇게라도 답을 찾고 싶은 것이다. 조금 더 합리적인 사람들은 열심히 관련 책을 찾아 보거나 영상 같은 것을 찾아 본다. TV의 교양 정보 프로그램의 단골 주제들이 이런 것들인 것은 당연하다. 사람들이 관심이 있어 궁금해 하니, 조금이라도 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 무슨 무슨 박사님들을 모셔와서 얘기를 듣는 것이다.

삶을 더 잘 살기 위해 그런 질문들을 하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어쨌든 이 삶의 중요성은 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질문(“어떻게”)을 하기 전에 보다 근원적인, 그래서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질문(“왜”)을 하고 바른 답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하는 모든 질문들은 아무 의미가 없거나 혹은 잘못된 답을 낼 수 밖에 없는 질문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사는지, 왜 죽는지에 대한 바른 답을 먼저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이런 중요한 질문을 무시한다. 그냥 뜬구름 잡는 얘기라고 생각한다. 오늘, 내일을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하지 내 삶의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은 실제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태어났으니까 사는거고 때가 되면 다 죽으니까 죽는건데, 거기에 무슨 이유나 목적이 있느냐고 묻는다. 혹은 그건 어차피 모르는 것이라고 미리 결론을 내린다. 답이 없는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기보다 그나마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에 대해서 고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그나마 이런 중요한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될 때다. 죽음에 가까이 갈수록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더 간절히 알고 싶어 한다. 잘 알지 못하는 누군가의 죽음보다는 잘 아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장례식에 참석하면 죽음에 대해서 또한 삶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더 생각해 보게 된다. 잘 아는 정도가 아니라 나와 아주 가까운 관계라면 죽음은 뜬 구름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생생한 현실로 느껴진다.

하지만, 나 자신이 나이, 질병, 혹은 어떤 사고로 죽음에 가까이 가게 되면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삶과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된다. 자신의 모든 삶을 돌아보게 되고 죽음 이후에 대해서도 실제적인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삶에 대한 정말 진지한 고민을 그때가 되어서야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래도 괜찮은 걸까? 평생을 그냥 눈 앞에 보이는 것만 보고 살다가 그렇게 두려움 속에 세상을 떠나도 괜찮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답이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하나님을 부인한 세상은 그럴 수 밖에 없지만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그렇게 살 수 없고 그렇게 죽을 수도 없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주시기 때문이다.

시편 90편은 바로 이런 삶과 죽음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람 모세를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답이라고 할 수 있다. 1-10절은 “왜”에 대한 부분으로서 우리가 알아야할 우리에 대한 매우 중요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11-17절은 “어떻게”에 대한 부분으로 그 사실에 대해서 우리가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이 시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사람 모세라고 되어 있고 내용은 기도다. 전체적으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서 말하고 13절 같은 경우는 우리가 탄식시에서 자주 보던 표현인 “언제까지니이까”가 나오기 때문에 탄식시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어조는 고통이나 괴로움은 아니다. 오히려 굉장히 담담하게 그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기록하면서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기도의 형식으로 기록했다.

모세가 언제 이 시편을 기록했는지를 특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하나님의 진노와 그 두려움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보면, 40년의 광야 생활이 마무리되던 때가 가장 적합한 시점으로 보인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은 그들의 반역으로 인해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를 방황하다 죽어야 하는 심판을 받았다. 출애굽한 세대가 모두 광야에서 죽었기 때문에 당시 이스라엘의 인구를 고려해 보면 연평균 거의 4만명 정도가 광야에서 죽었다는 말이고 하루 평균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100명이상이 죽었을 것이다. 광야에서의 삶은 사실 커다란 장례식이었고, 그야말로 계속되는 장례의 행렬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모세의 경우, 이런 상황을 계속해서 지켜봐야 했다. 그와 가까웠던 사람들이 그렇게 하나 둘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일한 혈육들이었던 미리암과 아론도 광야에서 죽었다. 그렇게 매일 마주하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단지 인생의 허무함만을 느낀 것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그 답을 후대에 전하기 위해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지혜는 지금 이 땅을 사는 우리가 배워야할 지혜이기도 하다.

우리가 알아야할 사실 – 왜(1-10절)

우리가 왜 이 땅에 존재하고 왜 때가 되면 죽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라는 것이 성경의 답이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도 사람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된다.

영원한 주권자 하나님(1-2절)

90:1–2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모세는 하나님의 주권과 영원성을 강조한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으로 인해서 산다는 사실도 암시적으로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주여”(1절) – 모세는 먼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른다. 모세 자신의 주인이기도 하시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구원하신 주인이기도 하시며,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모든 세계를 만드신 분으로서 만물의 주인이기도 하시기 때문이다. “주”라는 표현은 하나님께 가장 합당하다.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1절) – 모세는 그런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 민족의 거처가 되어 주셨음도 언급한다. 지금 이스라엘은 정처 없이 광야를 방황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애굽에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왔다. 그 이전으로 가도,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기 고향을 떠난 후로 야곱의 때까지도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살아야만 했다.

그들이 거할 안정된 장소, 거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셔서 그들의 거처가 되어 주셨다. 어디에 있든지 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그들은 항상 가장 안전한 곳에 거하며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2절) – 그런 주권자이신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불변성’이다. 즉,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신다는 말이다.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어 오셨던 하나님이 이제는 약해지셔서 더 이상 우리를 보호할 수 없게 되지 않는 것이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3절) – 심지어 사람들이 ‘불변’의 상징처럼 생각하는 산이나 땅도 원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조성’하셨다. 여기서 사용된 표현은 출산과 관련된 표현이다. 세상에 없던 존재가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존재하게 되는 것처럼, 산이든, 땅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셨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하나님은 창조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언제나 계신 분이시다. 그 모든 것들이 생기기 전 영원 전부터 하나님은 하나님이셨고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질 영원 후에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오직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 만이 영원하신 것이다.

이런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첫단계이고 가장 중요한 단계다.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답을 만들어야 한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계속해서 “너의 인생은 네가 만드는거야”라고 말하며 인생의 답을 만들어야 할 것을 강조하는 것도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들기 전부터 우리 삶에 대한 계획과 뜻이 있으셨고, 이미 우리를 만드실 때 삶의 의미를 알게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 삶의 의미이고 그럴 때 우리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 지어진 물건은 그 목적에 맞게 사용될 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갈 때 가장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아니 ‘가장’이 아니라 ‘유일하게’ 의미있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럴 때에 우리의 영원한 거처이신 하나님 안에 거하며 평안히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이 “주”가 되시기를 그치지 않는 이상, 그 의미는 사라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의미는 내가 부정한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종의 의미, 그에 따른 역할은 주인이 정하는 것이지 종이 정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 사무를 보는 종이 답답하다고 나가서 농사하는 종이 되겠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게 ‘말’ 할 수는 있고 해볼 수도 있겠지만, 주인이 그것을 인정해 주지 않는 이상 그는 사무 보는 종이 되어야 한다. 그 반대로 마찬가지다.

바울은 로마서 9:21에서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고 물었는데, 당연히 토기장이에게는 그럴 권한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함한 모든 피조물에 대하여 영원한 권리를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내가 주인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인이시며 그 하나님이 변하지 않는 영원하신 분임을 인정하는 것이 우리 삶의 근본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시작에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이는 어떤 삶에 대한 설명도 의미가 없고 옳을 수 없다. 하나님을 제외하고 우리끼리 모두가 동의하는 답을 찾아낸다고 해도 그것은 답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진리는 다수결로 정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알게 하신다. 그럼, 하나님께서 알게하신 사람의 죽음에 대한 진리, 진실은 무엇일까?

유한한 사람(3-10절)

90: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사람이 티끌로 돌아가는 것은 죽음에 대한 표현으로서 지금도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그런데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사람을 죽게 하신다는 것이다.

사실 좀 이상하다. 1절에서 모세는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고 매우 긍정적으로 묘사했었는데, 그런 하나님이 우리를 죽게 하신다는 것은 ‘왜’라고 물어 볼 수 밖에 없게 만든다.

아무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3절 말씀만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처음부터 그렇게 만드셨나보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7절부터 이어지는 말씀만 봐도 사람의 죽음이 사람의 죄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심판)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을 때,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만들지는 않으셨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드셔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을 하게 하셨다. 하지만 사람은 그 역할에 만족하지 않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것이 최초의 죄다. 세상의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과 하나 따 먹은 것이 죄가 아니라, 사람은 하나님께서 금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따 먹었다. 종이 자기 역할을 거부하고 스스로 주인이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 열매를 따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먹자 마자 쓰러져서 죽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죄의 결과로 세상에는 죽음이 들어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창 3:19). 그래서 그 후로 모든 사람은 죽었다.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모두 죽었다. 누구도 죽음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었다. 모두가 죽으니까 나도 죽겠거니라고 생각할 뿐이었다. 본래 그들이 죽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 사람에게 정해진 것”(히 9:27)이라는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한채 그저 죽어 갔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원래부터 우리는 죽어야 하는 존재는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죄를 선택한 우리의 선택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그 선택에 대한 결과로 하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정하셨고, 그것은 절대 우리가 피할 수 없다. 그것이 죽음이다.

“티끌”(3절) – 창세기를 기록한 모세는 여기서도 동일하게 “흙”에 해당되는 단어를 쓸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개역개정 성경은 “티끌”에 각주 표시가 되어 있고 다른 번역으로 “파멸”을 제시하는데, 본래 이 단어가 ‘부서짐’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모세는 여기서 보다 강력한 단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로 우리가 다 부서져서 티끌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말씀하시기를”(3절)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권자로서 명령하셨음을 강조한다. 사람이 죽는 것은 다른 동물도 다 죽으니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세상의 모든 것들이 유한한 것처럼 인간도 당연히 유한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유한성은 분명한 죄의 결과임을 성경은 말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 다음으로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실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고 우리의 유한성이 그것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이제 모세는 그런 인생에 대해서 묘사한다.

90:4–6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4절은 하나님이 느끼는 시간과 사람이 느끼는 시간의 차이를 강조한다. 천년은 우리에게는 엄청난 시간이다. 사실 10년만 해도 ‘강산도 바뀐다’고 할만큼 우리는 긴 시간으로 생각한다. 100년을 의미하는 ‘세기’는 우리에게 일생의 단 한번을 의미한다. 그래서 ‘세기의 …’라고 하는 것들이 있으면 뭔가 더 특별함을 느끼고 놓치면 안될 것 같은 생각을 한다. 그럼 1000년은 어떨까? 천년은 사람 하나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다. 물론, 노아 홍수 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1000년 가까이 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모세도 10절에서 당시의 수명에 대해서 7-80이라고 말한다. 모세 자신은 120세까지 살았지만, 그것은 특별히 장수한 경우이지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다. 하물며 1000수는 상상할 수도 없는 숫자다.

우리에게 1000년은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1000년은 지나간 어제처럼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시간이다. 그저 밤의 한 순간과 같을 뿐이다. 그러니 겨우 100년을 사는 사람들은 잠깐 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은 마치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신다.

인류의 역사를 봐도 그렇게 사람들은 계속해서 죽었다. 그런데 여기서 모세는 아마 광야에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것이다. 출애굽한 세대는 말 그대로 홍수처럼 쓸려갔다. 하루에도 수십 명이 죽었고 우상숭배와 음행으로 인해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은 일도 있었다. 정말 홍수처럼 사람들이 죽어 나갔던 것이다.

또한 모세는 사람이 아침에 돋는 풀 같다고도 비유했다. 아침에 이슬을 먹은 풀들은 싱싱하고 힘이 넘친다. 하지만 잠시만 그렇다 저녁이 되면 시들어 말라버린다. 이 비유가 우리에게 딱 와닿지는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뜨겁고 건조한 중동에서는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화무십일홍’을 말한다. 열흘 붉은 꽃이 없다는 것이다.

꽃이나 풀만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도 그렇다. 10-20대만 해도 자기 몸에 대한 자신이 있다. 나도 그랬다. 어디 아픈데도 없고 마음만 먹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고 실제로 그렇기도 했다. 하지만 30대만 되어도 몸이 다르고, 40대가 되니 요즘에는 친구들하고 모이면 어디 몸이 고장난 얘기만 한다. 기억력이 떨어지고 뭐가 잘 안보인다.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다. 전에는 머리 스타일이 어떻고 하는 얘기를 했다면 요즘은 머리 심는 얘기를 한다. 모르긴 해도 하나님 다음으로 많이 얘기하는 것이 건강 얘기인 것 같다. 다른게 아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을 향해서 가고 있는 것 뿐이다. 지금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첫 사람 아담 이후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살다가 죽어간 것이다. 죄의 결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도 말한다.

90: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는 말이 아니다. 그저 그가 보고 있는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도 이것이 사실이고, 모세의 상황에서 생각해 보면 더욱 그렇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 그들은 광야에서 소멸되어 가고 있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그 일에 놀랄 수 밖에 없었다. 8-9절도 이런 죄와 심판의 관계를 분명하게 말한다.

90:8–10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인생이라는 것이다. 10절 말씀은 인류의 수명에 대한 성경의 견해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90살 넘어서도 사는 사람 많으니까 성경에 오류가 있다고 말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모세 자신도 120세를 살았으니, 80이상을 살 수도 있다는 것을 몰랐을리 없다. 모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70이든 80이든 혹은 120, 그 이상이든 우리의 인생은 날아가는 것처럼 빠르게 지나가고 그 세월은 수고와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지금까지 말하고 있는 것처럼 아주 분명하다. 죄의 결과인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없는 죄의 결과로 우리는 수고로운 삶을 살아야 하고 결국은 죽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것이 우리 모든 사람의 인생이다.

새로운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전혀 새롭지 않다. 우리 모두가 수고와 슬픔의 삶을 살고 결국은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이 땅을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고 있을 뿐이다.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해야 다음 단계로 나갈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이 이러하다는 것을 인정해야 진짜 지금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사는 것은 우리 죄의 결과이며 그것이 주권자이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심판이다. 따라서 답도 하나님에게서만 찾을 수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모세는 이 사실을 담담해 받아들인다. 어떻게 우리에게 이렇게 하실 수 있느냐고 원망하거나 불만을 말하지 않는다. 다만 이 사실을 받아드리고 영원하신 주권자 하나님께 구할 뿐이다.

아는 사실에 대한 반응 – 어떻게(11-17절)

지혜를 구함(11-12절)

먼저 모세는 지혜를 구한다.

90: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1절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일 것이다.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 두려워하는 사람이라면 죄를 지으면서 살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연결짓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죄를 짓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기도한다.

90: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우리가 스스로 깨달아서 알 수 없으니, 하나님께 알게 해달라고 구한다. 다른 것이 아니라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쳐 주시기를 구한다. 이 말은 우리가 얼마나 살 수 있는지 알 수 있게 해달라는 기도가 아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결국 우리의 날이 언젠가는 끝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냥 나이가 들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주권자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의 삶과 죽음이 정해진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의 삶이 짧게 지나간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하면 결국 수고와 슬픔 뿐인 인생을 살 수 밖에 없다. 나름 세상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것이 참된 즐거움은 되지 못한다. 그래서 모세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긍휼을 구함(13-17절)

90:13–15 여호와여 돌아오소서 언제까지니이까 주의 종들을 불쌍히 여기소서 14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15우리를 괴롭게 하신 날수대로와 우리가 화를 당한 연수대로 우리를 기쁘게 하소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그 인자하심을 나타내시면, 그제야 인생은 즐겁고 기뻐할 수 있다. 그렇게 할 때에 수고와 슬픔만이 가득한 인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해 괴로움을 당한 날만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는 날동안 우리는 기뻐할 수 있다.

그리고 모세는 그렇게 기쁨을 누리는 삶에서 더 나아가서 본래 하나님께서 계획하고 뜻하셨던 인생을 살 수 있게 되기를 구한다.

90:16–17 주께서 행하신 일을 주의 종들에게 나타내시며 주의 영광을 그들의 자손에게 나타내소서 17주 우리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에게 내리게 하사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우리에게 견고하게 하소서 우리의 손이 행한 일을 견고하게 하소서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도하는 자신과 그 세대의 사람들 뿐 아니라 그 자손들에게도 그러한 하나님의 은총이 내려지기를 구한다. 이렇게 사는 것이 참된 삶이고, 이것에 삶의 참된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도전

우리는 ‘순간’을 산다. 일찍 삶을 마감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지만, 사실 몇십년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모두 ‘순간’일 뿐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우리가 ‘순간’을 산다는 것을 먼저 인정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모두 ‘순간’만 살아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즉,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인 것처럼 살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살면 우리의 순간은 의미 없는 순간이 된다. 우리의 순간을 의미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영원 안의 순간’을 산다는 것을 인지할 때다. 이 땅에서의 삶은 끝이 나지만, 그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사실 영원을 산다. 문제는 그 영원을 어떻게 살 것이냐다. 그저 순간만 산다면 우리의 영원은 더 없이 어둡고 참담할 것이다. 정말 개똥밭에 굴러도 이 땅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영원을 인정하고,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으며, 영원 안의 순간을 산다면 우리의 이 땅에서의 삶은 그저 시작일 뿐이다. 더 없이 밝고 기쁜 삶의 시작이다. 모세의 기도처럼 이 땅에서도 그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지만, 장차 누리게될 복과는 비할 수가 없다.

순간의 선택이 몇 십년을 좌우한다는 예전의 광고 카피가 있었다. 사실 순간의 선택은 몇 십년이 아니라 영원을 좌우한다. 어떻게 살기 원하는가?

특히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다시 한번 마음의 중심에 견고하게 두어야 한다. 마치 이 땅에서의 순간이 전부인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의 말처럼 광야의 이스라엘은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순간 순간만 살지 말고 영원을 바라 보며 살라. 영원을 인정하며 살라. 그러면 지금 순간을 더욱 잘 살 수 있다.

5:15–17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