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영생은 무슨 맛일까?

본문 : 요한일서 1장 1절~4절

설교자 : 조 정 의

 

요한일서는 적어도 세가지 측면에서 지금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씀이고 유익한 하나님의 진리이다.

첫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세워 준다. 사도 요한은 주님이 승천하시고 자기를 뺀 나머지 사도들이 모두 세상을 떠 난 뒤(AD 90~95년) 각종 이단과 도덕적 타락에 교회가 위기에 처했을 때, 마지막 사도로서 이 편지를 모든 교회가 회람할 수 있도록 썼다(@에베소). 요한일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중 하나는 요한이 그리스도인을 빛과 어둠처럼 극명하게 나눈다는 것이다.

당신은 빛이신 하나님과 사귐이 있거나 없는 사람이다. 당신은 죄를 짓거나 짓지 않는 사람 중 하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진리를 가진 자이거나 계명을 지키지 않는 거짓말 하는 자이다. 성도를 사랑하거나 사랑하지 않는 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이 거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이다. 요한일서는 이렇게 계속해서 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밝혀 소속을 분명히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맞게 씨름하며 살도록 요청한다. 요한일서의 핵심 주제 중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전쟁이다. 적그리스도, 악한 자 마귀, 하나님의 원수인 세상과 맞서 싸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법은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것,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 하나님과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다.

편지에서 요한이 말한 바에 따르면 이미 여러 사람이 이 싸움에서 패배하여 참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떠나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이기적인 사랑으로 교회가 병들고 있는 지금, 개인의 삶이 부패하고 교회가 도덕적 타락으로 무너지고 있는 지금, 요한일서는 반드시 회복해야 하는 잊혀진 명령 거룩과 그리스도와 새 계명을 들려줄 것이다. 그리스도인 답게 살도록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명령할 것이다.

셋째, 요한일서는 방금 소개한 여러 가지 교훈을 반복해서 말해 준다(순환적 구조). 어떤 주석가는 요한일서를 마치 훌륭한 조각 상을 계단을 올라가면서 감상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눈높이와 관점에 따라 같은 조각상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깊이와 풍부함에 놀라는 것처럼 요한은 계속해서 같은 교훈을 반복하며 그 깊이를 더한다. 오늘날 우리는 많고 복잡한 것보다 단순한 진리를 더 자주 오래 묵상할 필요가 있다.

요한은 편지의 저자, 수신자, 인사말 없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데, 위기에 처한 교회에 꼭 필요한 교훈을 기록하여 모든 교회의 성도에게 들려줄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이다(설교문). 참고로 요한은 70년 예루살렘 함락 이후 어느 시점에 마리아를 모시고 에베소로 건너와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며 사역을 했다(직속 제자 폴리캅과 그의 제자 이레니우스의 증언).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설립하고(55년), 디모데가 목회했던 곳이기도 하다(딤전 1:3).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되기 전 요한서신을 썼을 것이다.

오늘 본문(1장 1-4절)에서 우리가 알기 원하는 것은 요한이 영생 을 뭐라고 소개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설교 제목이 “영생은 무슨 맛일까?”이다. 오늘 본문은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놓은 모양의 요한일서 가장 밑바닥에 해당하는 핵심 주춧돌이며, 이 편지를 쓴 목적(5장 13절)에 대한 즉각적인 대답이다.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라고 분명히 편지를 쓴 목적을 밝혔다.

이 편지가 2천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유평교회에서 읽힐 때, 요한은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여, 여러분에게 영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 우리는 알고 있다. 당신의 자녀나 친한 동료가 ‘당신도 영생을 가지고 있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때  그들이  이렇게  묻는다고  생각해보라. ‘영생은 무슨 맛이야?’ ‘영생을 가지면 무슨 유익이 있어?’

우리는 먹어본 과일의 맛을 기억한다. 사과, 포도, 배, 레몬, 딸기. 어떤 과일은 이름만 들어도 입에 군침이 돈다. 시큼한 맛이 느껴지기도 한다. 먹어보지 않은 과일은 아무런 감흥이 없다. 그 맛을 모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맛본 당신은 그 맛을 뭐라고 표현하겠는가? 어떤 맛이 느껴지는가?

많은 사람이 영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생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다 보니 영생을 제대로 맛보지 못하고 누리지 못한다. 두가지 오해를 바로잡고 영생이 무엇인지 어떤 맛인지 본문을 통해 알아보자.

1. 영생은 단지 불멸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영생을 불멸 즉 죽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 땅에서 육신의 죽음을 맛보더라도 그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 몸의 부활을 통해 새로운 육신을 가지고 영원히 사는 것을 영생이라고 본다. 하지만 하나님 아들의 이름을 믿지 않는 이들은 이 땅에서 죽으면 끝인가? 새로운 육신을 입는데 제한된 시간을 사는가?

그렇지  않다.  악한  일을  행한  자도  “심판의 부활”로  나온다(요 5:29). 마귀와 거짓 선지자와 함께 “세세토록”(forever) 밤낮 괴로움을 받는다(계 20:10). 문제는 생의 길이가 아니라 질이다. 생명이냐 심판이냐, 천국이냐 지옥이냐가 중요하지 소멸하지 않고 살아남는 건 차이가 없다.

2. 영생은 오직 사후에만 적용되는 게 아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5장46절에서 말세의 징조를 설명하시고 왕이  군림할  때  왕을  대적한  이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다(마18:8; 마18:9. 그러므로  영생이 예수님의 재림 이후에(혹은 이생 이후에) 더욱 분명하게 누리게 되는 것이 란게 사실이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번 영생에 “이른다”(요 4:36; 롬 5:21; 유 1:21), “마지막”에 얻는다(롬 6:22),영생의 “소망”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딛 1:2; 3:7).

하지만 그전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가? 이 땅에서 영생은 맛 본적  없는  무언가인가?  요한은  이  편지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가 “영생을 가졌다”고 분명히 밝혔다. 예수님도 “아들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고 하셨다(요 3:36).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고  하셨다(요 5:24; 요 6:47; ). 성경의 또 다른 본문에서는 “영생을 취하라”고 요구한다(딤전 6:12). 현재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영생의 맛(유익)이 분명히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영생은 정확히 무엇인가?

3.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요한은 본문의 시작부터 생명을 소개한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 의 말씀”(1절), “이 생명”(2절), “이 영원한 생명”(2절).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요한이 묘사하는 영생은 불멸의 삶이나 사후 세계에만 속한 무언가가 아니다. 요한은 영생을 마치 인격체처럼 소개한다.

요한복음의 시작에서 자신이 사용한 방식에 따라 “태초부터 있는…말씀”이 모든 만물 특히 사람에게 생명의 빛을 불어넣어 준 “생명의 말씀”이며, 하나님과 함께 계셨던 하나님이라고 소개한다(요 1:1-4,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2절). 그리고 요한과 그 동료들이 이 영생의 하나님을 체험했다고 확증한다.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절).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2절, 법정 용어).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시고 나를 먹으면 영생한다고 하셨다. 그때, 제자 중 많은 사람이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떠나갔다. 하지만 열두 제자는 “너희도 가려느냐”는 질문에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라고 대답했다(요 6:22-69). 바로 그들이 영생을 눈으로 보고 자세히 살펴보아 그 영적 의미를 파악하고 손으로 만지고 증언한 이들이다.

결국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이 편지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가리켜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라고 말했다(요일 5:20). 예수님도 내가 곧 길, 진리, 생명이라고 하셨다 (요 14:6). 우리에게 영생이 있다는 말은 곧 우리가 영생이신 예수님과 사귐이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요한이 “사귐”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영생이신 그리스 도)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그래서 예수님은 영생을 다음과 같이 정의하셨다. “영생은 곧 유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경험적인 앎, 사귐). 사도 요한은 같은 맥락에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자 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라고 말했다(요일 5:12).

이제 우리는 영생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다. 예수를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자나 모두 부활하고 영원히 존재하는데 누구는 영벌(영원한 심판), 누구는 영생을 누리는 이유는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단절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원한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영생이 죽음 이후에 더 큰 소망이 되고 이르러야 할 온전한 것이 되는 이유는 그날에 우리가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과 얼굴과 얼굴을 대하는 온전한 기쁨과 사귐을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현재 이 땅에서도 우리가 영생을 취할 수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영생을 맛볼 수 있다는 확신을 할 수 있다. 예수님과 그를 믿는 우리의 사귐은 죽고 나서야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분을 믿는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그 영생을 소개하기 위해 요한복음을  썼다.  그가  말하기를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1). 요한복음 전체를 통해 요한이 내내 소개한 분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을 믿고 사귐을 갖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초등학교 때 한 여배우를 좋아했다. 사춘기니까 뭘 모르고 예쁜 외모와  드라마  속  인품을  보고  사랑에  빠졌다.  ‘나와  격이  다르고 딴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저 사람과 결혼한 사람은 얼마나 행복 할까’ 이런 생각도 했다. 지금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지만, 막강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 대단한 인품을 가진 사람, 명성과 인기가 드높은 사람을 매체를 통해 지켜보면서 그냥 지식적인 앎 이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가 닿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행복할까라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생각해보라. 태초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존재하는 모든 것에 생명을 불어넣는 전능하신 하나님. 모든 인류의 역사와 사건을 주관하시는 전지하신 주권자. 모든 부와 모든 명예와 모든 찬양과 경배를 홀로 받기에 합당하신 분께서 당신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는 것을. 언제든 성경을 통해 당신에게 말씀하시고, 언제든 기도로 당신의 목소리를 들으시며, 당신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함께하시고, 당신이 잘 때도 주무시지 않고 보호하시고, 잊고 살 때도 중보를 멈추지 않으신다는 것을.

당신은 이 놀라운 영생의 맛을 진정 잃어버리고 살지는 않는가? 요한은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4절). 영생의 맛, 충만한 기쁨의 맛을 다시 회복하라는 것이다. 당신이 만일 진정으로 영생을 얻은 사람 곧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는 사람이라면 1772년 윌리엄 쿠퍼가 쓴 이 시에 씁슬하지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처음 주님을 보았을 때

내가 알았던 축복은 어디로 갔을까?

영혼을 새롭게 하는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이 어디로 사라졌을까?

전에 참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었구나

그 기억이 지금은 너무나 달콤하구나

그러나 이제는 세상이 채워줄 수 없는 괴로운 공백만 남았도다

어쩌면 당신은 억울함을 호소할지도 모른다. 사도 요한과 그 동료들은 직접 육신의 눈으로 영생의 주를 보았고, 그분의 말씀을 귀로 들었고, 손으로 그분을 만지고 체험할 수 있는 사귐을 누리지 않았냐고. 하지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알려주시기 전까지 그들은 예수님이 진짜 누구신지도 거의 알지 못했다(심지어 부활하신 주를 봤는데도).

성령은 지금도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의 음성을 우리에게 들려주신다. 기도를 통해 우리 목소리를 그분 귀에 들리게 하신다.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 그리스도의 선하심과 사랑과 은혜를 맛보게 하신다. 영적인 의미에서 떡과 잔을 통해 그분의 몸을 만지게 하시고 그분의 사랑을 오감으로 경험하게 하신다. 물론 감각을 통해 신비로운 방식으로 그리스도와 하나님을 느껴보라고 요구하는 게 아니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가 말한 것처럼 “객관적 계시 의 근거 위에서 성령께서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게 하시고 실제적인 존재가 되게 하”신다는 말이다 (40p).

당신은 영생을 소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 있는가? ‘요즘 그리스도와 사귐이 좀 어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당신의 성경 읽기는 그분과의 사귐을 더욱 깊게 만드는 달콤한 시간인가 아니면 머리에 성경 지식을 집어 넣는 지루하고 형식적인 시간인가? 당신의 기도는 그리스도에게 사랑을 속삭이는 언제 끝날지 모르는 애정이 어린 시간인가? 아니면 메마르고 사랑 없는 독백인가? 성도와의 교제를 통해 그 안에서 발견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맛보며 기쁨과 희락을 누리는가? 아니면 무거운 짐처럼 여겨지거나 상처받기 싫고 게을러서 회피해 도 상관없는 사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은 당신의 모든 것을 기쁨으로 바치는 예배를 드리는가 아니면 저는 것과 눈먼 것을 드리는 예배인가?

어쩌면 우리에게도 사도 요한이 이 편지를 쓴 에베소 교회가 영생의  주님께  받은 책망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 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계 2:4-5).

당신이 매일 새롭게 영생을 맛보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주님과 친밀한 사귐을 이야기할 때 과거를 더듬어 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신이나서 말하기를 그리고 미래의 소망에 기쁨이 가득하길 바란다. 영생의 맛은 곧 가장 영광스럽고 고귀하며 아름답고 놀라 우신 그리스도와 사귐의 축복이다. 그 축복을 이 땅에서 제대로 누리기를, 그래서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에게 영생의 맛이 무엇인지 기록된 말씀과 함께 당신의 경험으로 확실히 말해주고 소개 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