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영광의 주
본문 : 누가복음 9장 28~36절
설교자 : 조정의
말씀을 전할 때 모든 말씀이 두렵고 떨리지만 오늘 말씀은 더욱 큰 두려움과 떨림이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주님의 변화하신 사건을 볼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래 가지셨던 영광을 드러내보이셨던 장면입니다. 제가 두렵고 떨렸던 이유는 과연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얼마나 상세하고 강력하게 전할 수 있을까하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미국 LA에 있을 때 애리조나 주에 있는 그랜드캐니언에 가보았는데 12시간 운전을 해야 갈 수 있는 거리였습니다. 1시간의 시차가 나고 LA에 비해 훨씬 추운 날씨였지만, 그랜드캐니언에 도착한 순간 그런 수고가 전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멋진 광경이었습니다. 그랜드캐니언 계곡은 깊이가 1600m, 폭이 30km 정도의 규모입니다. 낭떠러지처럼 떨어지는 계곡들이 넓은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데 제주도의 세 배 정도 되는 크기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진과 설명으로 그 광경이 어느 정도일지 짐작은 가시겠지만 두 눈으로 목격한 경험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두려움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습니다. 제가 이 시간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은 성령의 영감으로 쓰인 성경을 통해,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우리가 경험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놀라운 사건의 배경은 예수님이 장차 당하실 일들에 대한 말씀을 하시고 나서 8일이 지난 후입니다. 예루살렘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부활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동일한 것들을 경험해야 한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이제 겨우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아가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시라는 고백이 이제 막 흘러나오는 중이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메시야는 왕권을 가진 자였는데 예수님은 고난당할 메시야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동안 파도도 잔잔하게 하셨고 오병이어로 수천 명을 먹이시고 수천 귀신을 내쫓고 죽은 자를 살리시기도 했습니다. 제자들은 주님이 하신 사역들을 통해 주님이 어떤 분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는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우리는 그가 정말 메시야인 줄 알았다’고 아주 실망스럽게 말했습니다. 그 분이 고난당하고 죽으시는 장면을 봤을 때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광의 주님으로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고난당하시고 부활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때, 그들의 믿음을 확증할 수 있는 주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를 볼 자들도 있느니라 (눅 9:27)” 예수님은 몇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서 왕권을 가지신 예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를 원하셨습니다.
8일쯤 흘렀습니다. 누가복음에는 8일이라고 했고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6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날과 변화되신 날을 추가하여 날짜 계산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특별히 이 사람들을 데리고 다니실 때가 있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리실 때,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이들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기도하러 산에 가셨는데 갈릴리 근방의 한 산이었을 것입니다. 헤르몬산이나 다볼산으로 추정하기도 하나 확실하지는 않고 다만 높은 산이고 인적이 드문 곳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유대인의 법에 따르면 어떤 일을 확증하기 위해서 두 세 사람의 증인을 요구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변화되신 사건의 증인은 완벽하게 채워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느 때처럼 기도하러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기도하셨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을 선출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을 먹이실 때에도 그렇게 하셨습니다. 항상 예수님은 온전히 아버지를 신뢰하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기도하실 때 변화된 사건이 일어납니다.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29)” 이것은 예수님이 원래부터 가지고 계셨던 영광이었습니다. 커튼으로 가린 것처럼 인간의 육신에 의해 가려져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이적들을 보면서도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 인간적으로만 생각해왔습니다. 그동안 영광을 가리고 계셨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과 동일한 영광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마치 출애굽기 34장에서 모세가 얼굴에서 광채가 나던 모습과 같습니다. 모세가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 돌판을 받았을 때, 그 얼굴에 광채가 나서 사람들이 두려워했습니다. 그 영광 옆에 있는 것으로 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면, 그 영광의 본체가 가진 찬란함은 얼마나 위대했을까요?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영광이 찬란하게 빛나서 얼굴뿐만 아니라 옷까지 빛났습니다. 마태는 “그의 얼굴이 해같이 빛났다”고 말하고(마 17) 마가는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희어졌다”고 말합니다(막 9). 유대인 사회에서는 옷도 원래 하얀 것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옷이 중동의 먼지에 항상 더러워졌고 음식을 먹을 때도 바닥에 앉아서 먹어야 했기에 옷이 항상 더러운 상태였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옷을 “빛과 같이 희어졌다”고 표현했습니다(마 17:2).
오늘 아침 QT말씀이었던 시편 104편 1~2절에선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위대하시며 존귀와 권위로 옷 입으셨나이다 주께서 옷을 입음 같이 빛을 입으시며”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너무나 찬란해서 그 분이 입고 있던 옷까지도 그들에게 빛처럼 비춰졌던 것입니다. 주님의 영광을 본 다른 이들의 증언들도 살펴보길 원합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사 6:1-3). 에스겔도 동일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보좌에 앉아 계신 사람의 형상을 한 존재를 발견했는데, 사방으로 광채가 나며 아름답기가 비오는 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았다고 표현합니다(겔 1:26-28). 그것이 바로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이라고 말합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서 다시 그리스도의 영광을 봅니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그의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의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계 1:14-16).
강력한 빛과 에너지, 영광이 예수님에게서 뿜어져 나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세기의 주교인 암브로시우스는 다음과 같이 했습니다. “무한한 신성의 위엄은 우리 육신의 인식을 압도합니다. 육신의 눈이 날카롭다 해도 태양의 빛살조차 정면으로 바라볼 수 없을진대, 하물며 타락한 인간의 지체가 어찌 하나님의 영광을 견뎌 낼 수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고 본 적이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온 땅에 충만한 순수하고 거룩한 빛이 그리스도를 통해 뿜어져 나와서 그분의 옷까지 찬란하게 비추었습니다. 그것은 생명을 가져오고 소생시키는 빛이고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었습니다.
“문득 두 사람이 예수와 함께 말하니 이는 모세와 엘리야라(30) 영광 중에 나타나서…(31)” 1500년 전에 죽은 모세와 900년 전 세상을 떠난 엘리야가 돌연 나타났습니다. 왜 모세와 엘리야일까요?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왜 안 나타났을까요?
모세와 엘리야는 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던 인물입니다(출 24; 왕상 19).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율법을 기록했고, 엘리야는 이세벨을 피해 도망간 산에서 세밀한 소리 안에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습니다. 또한 특별한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신 34:6; 왕하 2:11). 모세는 어디에서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고 엘리야는 불말과 불병거를 타고 회오리바람과 사라졌습니다. 두 인물 모두 구약의 기적이 집대성된 시대의 주인공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이루실 때 이 두 인물을 중요한 역할로 일하게 하셨습니다. 모세는 율법을 기록하는 역할을 맡기셨고 하나님께서 노예였던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실 때 함께 했습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우상숭배에 빠졌을 때 그 율법을 지켜낸 선지자 중의 선지자였습니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에 대한 예언이 있었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신 18:15) 또한 엘리야도 그러했습니다.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세나 엘리야라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 곳 변화산에서 예수님과 함께 그들이 나타난 것입니다.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을 말할새(31)” 그들의 대화 내용은 “별세”는 단지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별세라는 단어(엑소더스-출애굽기)는 구출, 구원을 의미합니다. 모세와 엘리야도 메시야가 죽음을 통해 구원을 이뤄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예수란 이름의 뜻대로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였습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셨고, 죄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나간 자들을 위해서 그들을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그 구원 역사를 위해 그분의 고난과 죽음은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었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대표: 엘리야)”는 구약성경을 가리킬 때 사용 되는데, 하나님은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셨습니다. 왕으로 오실 메시야뿐만 아니라 고난과 죽음을 당할 메시야에 대해서도 예언도 나와 있습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구약성경말씀을 통해 메시야가 고난을 통과해야한다는 것을 설명해주셨습니다.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는 여자의 후손, 그 뱀으로 인해 여자의 후손은 발꿈치를 상하게 될 것’이라는 창세기의 기록을 통해 메시야의 고난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해서 바쳤던 희생제물을 통해 ‘피흘림이 없으면 죄사함이 없다’는 것이 예시되었습니다. 메시야의 죽음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고 그 분의 영광스러운 모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었습니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반드시 요구되는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뜻이었습니다.
“베드로와 및 함께 있는 자들이 깊이 졸다가…(32)” 그들은 왜 이렇게 중요한 순간마다 제자들은 자고 있을까요? 겟세마네 기도에서 힌트를 얻으면 그들은 슬픔으로 인하여 잠들었던 것으로 보입니다(눅 22:45). 고민과 염려, 걱정이 가득한 상태에서 지쳐 잠들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주일 전에 내가 곧 고난 받고 죽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절대 실없는 얘기를 하시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가볍게 하실 리 없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이 실현될 것이라는 것 때문에 근심과 두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들이 온전히 깨어나서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과 그 주위에 있는 두 사람을 보게 됩니다. “두 사람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하되 자기가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33)”. 베드로는 비몽사몽간에 본 것이 아니라 온전히 깨어난 상태에서 주의 영광과 영광 가운데 나타난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두 사람을 어떻게 알아볼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예수님이 모세나 엘리야를 소개해주셨거나, 모세나 엘리야가 직접 자신들을 소개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 사람을 위한 초막을 짓기 원했습니다. 이 때는 마침 초막절 무렵이었습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애굽에서 건져냄을 당하고 광야에서 살 때 초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 수십 년의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의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시고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심을 기념하고, 앞으로 도래할 메시야의 왕국을 기념하는 것이 초막절이었습니다. 베드로가 보기에는 메시야의 왕국이 지금 도래해도 좋을 것 같이 보였습니다. 예수님이 찬란한 영광으로 앞에 서 계시고 모세와 엘리야가 서 있습니다. 베드로는 메시야의 왕국을 지금 시작하면 어떨까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생각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메시야의 왕국을 시작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산 밑의 다른 제자들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먹고 마실 것이 충분한지도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주의 영광에 몹시 두려워했고(막 9:6), 그래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제하지 않고 이야기했습니다.
베드로가 원한 것은 최초에 주가 구원 계획을 말씀하셨을 때 원했던 것과 같습니다. “주여, 고난과 죽음은 주님께 가당치 않습니다!” 지금 베드로는 메시아의 왕권을 보고 있습니다. 찬란하게 빛나는 영광 앞에 서있습니다. “주님 이것이 좋사오니, 초막을 짓고 여기서 메시아의 왕국을 시작합시다!” 그것이 베드로의 본심이었습니다.
“이 말 할 즈음에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는지라 구름 속으로 들어갈 때에 그들이 무서워하더니(34)” 구름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하실 때 임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갈 때 늘 동행했던 구름기둥(출 16:10) 그리고 모세에게 나타났으며(19:9), 성전을 가득 채웠던 것입니다(왕상 8:10). 이것을 쉐카이나 영광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지금 그들 가운데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임재하셨습니다. 유한한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 두려워 떨 뿐입니다. 제자들은 엎드려 심히 두려워했습니다(마 17:6).
예수께서 침례를 받으실 때처럼 아버지 하나님은 직접 그들 가운데 임하셨고 말씀하셨습니다.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되 이는 나의 아들 곧 택함을 받은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고(35)”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모세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신성과 권세와 영광을 동일하게 지니고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고 그 분은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메시야-그리스도)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대로 고통과 죽음과 부활을 성취하려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접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택한, 나의 사랑하는 아들의 뜻을 따르고 그의 말대로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소리가 그치매 오직 예수만 보이더라…(36)” 모든 것이 사라지고 이제 예수님과 그들만 남았습니다. 인간의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님만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어 만지시고 두려워 말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셨습니다(마 17:7). 모든 영광의 찬란함은 사라졌고, 그분은 이제 산을 따라 내려가 골고다 언덕의 갈보리를 향해 걸어가셨습니다.
“…제자들이 잠잠하여 그 본 것을 무엇이든지 그 때에는 아무에게도 이르지 아니하니라” 제자들은 이 사건에 대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아마 말해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해하더라도 오해해서 그분을 왕으로 삼으려고 했을 지도 모릅니다. 이 사건을 목격했던 세 사람은 온전히 이것을 이해했을까요? 지금 당장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주가 부활하시고 나서 그들은 이 경험이 주는 의미를 절대 잊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주의 영광을 맛보고, 주의 십자가 고난의 길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길을 자신들도 걸었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기록을 통해 이를 보고 있습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 1:1).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벧후 1:16-18). 그들이 순교의 삶,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삶을 살 수 있는 힘이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영광의 주를 보았고 그분이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십자가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를 좇아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끔은 힘이 빠질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 형식적으로 느껴지고 예수님이 다시 오실 왕이라고 믿으면서도 삶 속에서는 실망스러운 존재로 여기기도 합니다. 에베소교회도 주를 위해 수많은 일들을 했지만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영광의 주를 기다리면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주님 한 번만 우리에게 나타나주십시오 그 놀라운 영광을 비춰주시면 매일을 힘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싶기도 합니다. 사도바울이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8-19)”라고 기도했던 마음과 같습니다. 이 사건의 목격자인 베드로는 “그러나 그보다 더 확실한 예언이 우리에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의 모든 예언입니다.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진리를 보게 해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직접 보는 것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은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식이고 우리를 날마다 거룩하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해 그분을 붙들고 있을 때 주님의 영광을 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왜 힘들까요? 우리가 말씀을 통해 그 분을 붙들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눈은 볼 수 있는 것이 적습니다. 우리의 눈과 기억은 사라지고 변형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하나님의 나라, 구원, 그 사랑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에 대해 기록되어 있는 이 말씀은 정확하고 예리하고 날카롭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대하고 계십니까? 때로는 하나님이 원하는 뜻과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를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추구하는데 지치고 힘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두 눈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본적은 없지만 말씀을 통해 주님을 보았고 경험했고 사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오실 때까지 계속해서 말씀을 통해 그 분의 영광을 맛보아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따르면 의로운 사람은 항상 이 말씀을 들여다보고 읽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편에서는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며 영원히 그 분을 사랑하는 자가 될지 고민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에 사로잡혀서 매일의 삶을 힘있게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구역모임을 위한 질문들
- “하나님의 영광”이 어떤 것이냐고 묻는다면 어떻게 설명해 줄 수 있을까요?
- “하나님의 영광”을 보기 원했던 때가 있었나요? 언제 그랬나요?
-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분명하게 다를 때 나는 보통 어떻게 반응하나요?
- “하나님의 영광”보다 내가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다면 무엇인가요?
-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더 사모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