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2
본문: 시편 115편
설교자: 최종혁
1-2절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진심이 어떠한지, 어떠해야 하는지를 배웠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진심은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자신이 영광을 받기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진심으로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기가 해야할 일을 다 하고서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겸허한 태도로 말하는 사람이 참된 종, 주인을 섬기는 자인 것이다. 영광의 자리에 자신이 나서지 않는다. 그 삶의 최우선순위, 가장 중요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반대로 하나님이 영광 받지 못하시는 상황을 그냥 보고 있지 못한다. 어쩌면 시편 115편의 배경이 그런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2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방 나라들이 실제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조롱할만한 상황들이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많이 있었다. 유월절에 기념하는 출애굽의 역사가 그저 과거의 일처럼만 느껴졌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사사 시대에 그런 일들이 반복해서 있었다. 다른 민족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했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느낄 수 없었던 때가 있었던 것이다.
기드온의 말에서 이런 상황을 엿볼 수 있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을 찾아와서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라며 인사했을 때(삿 6:12), 기드온은 아마도 매우 냉소적인 어투로 이렇게 답했었다.
삿 6:13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오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일어났나이까 또 우리 조상들이 일찍이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올라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우리를 넘겨 주셨나이다 하니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 출애굽의 하나님이 아니시라고 그 백성들이 느꼈던 때가 있는 것이다.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패하여 그들이 정복했던 땅을 잃고 다시 이방 나라의 종이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본인들도 하나님에 대한 의심이 생겼을 수 있고, 그 모습을 본 주변의 다른 나라와 민족들은 2절과 같이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라며 조롱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과거야 그랬다고 해도 이제는 그 하나님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냐고 조롱했을 것이다. 그들의 신은 신전에 가면 볼 수라도 있는데, 하나님은 그런 신상도 없다. 시편 115편의 정확한 역사적 배경을 알 수는 없지만, 이런 상황에서 참된 하나님의 종들은 항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웠고, 시편 115편은 그들의 시편이라 할 수 있다.
1-2절에서 저자는 “여호와여”라고 하나님을 부르며 하나님께 구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함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셔야 함을 종의 입장에서 구한 것이다. 그리고 3절부터는 이제 사람을 대상으로 말한다. 대상은 두 부류다. 첫째로 3-8절에서는 조롱하는 우상 숭배자들을 향해 말한다. 그리고 9-15절은 그런 상황 속에서 어쩌면 좌절해 있고, 어쩌면, 불안해 하고, 어쩌면 원망하고, 어쩌면 그저 가만히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향해서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16-18절은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을 끝으로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우상 숭배자들에게 : 하나님의 수치에 대한 반박(3-8절)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2절의 질문에 대한 답부터 한다.
시 115:3 오직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
먼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선포한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답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늘은 종종 하나님의 거처로서 언급되지만, 우리가 집에서 사는 것처럼 실제로 물리적인 하늘에 하나님이 거하고 계신 것은 아니다. 우주의 어느 한 별에 하나님이 살고 계신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솔로몬도 하나님의 집이라 할 수 있는 성전을 짓고 나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라고 기도했었던 것이다(대하 6:18).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이 물리적인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어느 곳에도 계시지 않다. 하지만 시편 139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반대로 말하기도 했다.
시 139:7–8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8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하나님은 어디를 가든 그곳에 계시다. 모든 곳에 계시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다는 말은 다른 곳에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신 것이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하나님은 물리적 장소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어느 곳에서나 그 존재를 나타내시는 편재하신 분이시다.
그럼 실제로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신 것이 아닌데, 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다고 말할까? 첫째는 하나님이 땅에 사는 우리와는 다른 세계(차원)에 계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말한다. 또 다른 이유는 하나님의 높으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렇게 말하는데, 이 경우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하늘은 하나님의 ‘보좌’와 함께 언급되는 경우도 많다.시편 103:19는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라고 말씀한다. 예수님은 맹세하지 말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5:34). 여기 시펀 115:3에서 시인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라고 말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높은 곳에서 다스리는 분이시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지만 ‘존재’하신다. 유명무실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어느 곳에든 다스리는 분으로서 계신다.
그런데 여기서 시편 기자가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다”는 사실이다. 단순히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권세’가 있으신 분이심을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모든 것을 하지 않으실 권세도 하나님께는 있다. 누구도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일을 하시게 만들 수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못하시게 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
느부갓네살 왕은 그런 하나님을 직접 경험한 후에 이렇게 고백했다.
단 4:35 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늘의 군대는 천사를 의미한다. 천사나 사람은 자기 뜻을 가지고 행하는 인격적인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조차다 하나님의 뜻에 제한을 받는다. 그들은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신다. 그 누구도 그런 하나님께 도전할 수 없는 것이다. 욥도 이 사실을 깨달았다. 알 수 없는 고난을 만나 고민했던 욥에게 마침내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고 놀라운 창조의 질서에 대해서 욥에게 물으셨다. 감히 자신이 말할 수도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깨달은 후에 욥은 이렇게 고백했다.
욥 42:2–3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하나님은 직접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 46:9–10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 이가 없느니라 10내가 시초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옛적 일”, 즉 역사가 증언하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하나님께서 뜻하신대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최종 결과만 그런 것이 아니다. 결과까지 가는 모든 과정도 하나님의 뜻대로 된다. 하나님께서 예언하신 모든 것들이 그대로 이루어졌던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역사가 이것을 증명한다. 그 이전과 그 이후의 모든 역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이 아닌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해 어떤 일을 하게 되거나 하지 못하게 되거나 하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신다.
이런 하나님이 지금은 마치 존재하지도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래서 다른 나라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있느냐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하나님의 원하시는 계획 안에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어쩔 수 없는 침묵이 아니다. 아무 것도 하실 수 없어서 침묵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침묵도 “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시는” 모습 중 하나일 뿐이다.
그러면서 시편 기자는 그렇게 조롱하는 자들의 신인 우상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들의 신은 어디에 있는지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신이야말로 눈에 보이기만 할 뿐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존재였다.
시 115:4–7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5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6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며 7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이 있어도 작은 소리조차 내지 못하느니라
이방인들이 봤을 때 이스라엘의 종교는 특이한 면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신의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어떤 종교든 고대의 종교인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형상을 만들었다. 대부분 그 형상(우상) 자체가 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겠지만, 실제적으로는 우상과 신이 구별되지는 않았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할 때, 이스라엘이 언약궤를 전장에 가져왔다. 그러자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소리를 내며 사기가 치솟았고, 반대로 블레셋 사람들은 “신이 진영에 이르렀도다”라며 두려워했었다(삼상 4:7). 언약궤가 마치 우상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언약궤가 오자 그동안 그곳에 없었던 하나님이 오신 것처럼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에는 이스라엘 사람이나 블레셋 사람이나 똑같이 그런 우상 숭배자들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본래 이스라엘은 우상을 만들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면서 십계명을 주실 때 분명하게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이다(출 20:4). 하나님은 사람이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계셨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상을 만드는 순간, 사람들에게 있어 그 우상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은 많은 신들 중 하나가 되어 버린다. 하나님은 그 우상의 모습에 제한되신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신을 나타낼 수 없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을 만들지 말 것을 명하셨고,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의 우상이 없었다. 그리고 이것을 두고 이방인들은 오히려 너희 하나님은 어디있느냐며 이스라엘을 조롱하기도 했던 것이다.
4-7절 말씀이 그런 조롱에 대한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대응이었을 것이다(cf. 시 135:15-18). 이 말씀은 우상 숭배의 모순을 지적한다. 먼저, 사람들의 우상은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만든 것들이라는데 모순이 있다. 우상들이 아무리 값진 은과 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해도, 그것들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들일 뿐이다. 그 자체가 사람보다 뛰어난 어떤 존재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더욱 그 모순성을 지적하셨다.
사 44:15–17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우상을 만들어 섬긴다는 것이 이렇게 비상식적인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
다음으로 시편 기자가 지적하는 우상 숭배의 모순은 사람들이 자기보다도 못한 존재를 섬기고 있다는 점이다. 우상은 겉으로 보기에 입이 있고 눈이 있다. 귀도 있고 코도 있다. 손과 발도 있다. 목구멍도 있다. 모든 것이 다 있다. 그런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상에 해당 되는 단어가 ‘헛된 것’, ‘텅빈 것’을 의미한다. 뭔가 있는 것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이는 기관은 있지만 실제로 그것들이 기능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한다. 코는 냄새 맡지 못한다. 손은 만지지 못하고 발은 걷지 못한다. 그럼 하나님은 하시는가?
시 94:9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 눈을 만드신 이가 보지 아니하시랴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시고 그들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그 능력의 팔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하셨다. 그리고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 기둥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다. 앞서 걸으시고 또한 같이 걸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흠향하셨다. 사람이 만든 우상은 할 수 없는 이 모든 것들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
시편 기자는 우상이 할 수 없는 것의 목록의 시작과 끝에 입과 목구멍을 언급해서 우상이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강조했다. 우상은 말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 어떤 소리도 내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시고 알게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분명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우상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그들이 섬기는 신의 뜻을 알기 위해 온갖 애를 다 쓴다. 엘리야를 대적했던 바알 선지자들의 모습이 그러했다. 그들은 종일 큰 소리를 지르며 칼과 창으로 몸을 상하게 했다. 하지만 바알은 응답하지 않았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바알은 그들에게 응답할 수 없었다. 그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도 바알은 그를 찾는 자들에게 응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할 수 있는 일을 사람이 섬기는 신은 하지 못했고, 그것이 우상 숭배의 모순이다.
그러면서 8절 말씀은 우상 숭배자들에게 치명적인 사실을 선포한다.
시 115:8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그와 같으리로다”에서 “그”가 무언가 싶을 수 있지만, 앞서 말한 “그것들” 즉 우상들을 의미한다. 우상들을 만드는 자와 그 만들어진 우상들을 의지하는 자들은 모두 우상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의미다.
일반적인 원리로서 이 말씀은 사실이다. 사람이 그냥 심심해서 우상을 만들지 않는다. 사람은 우상에 자신의 바람이나 욕망을 투영한다. 자신이 하고 싶지만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우상을 만든다는 것이다. 그 우상을 의지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그 우상을 의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그 우상을 동경하고 닮고 싶어 한다. 그 우상이 할 수 있다고 믿는 그 일을 자신도 하려고 한다. 따라하는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우상을 닮아간다. 결국 자기 욕망을 우상에 투영하고 그 욕망을 우상을 섬기면서 이루어 가는 동시에 키워 간다. 그렇게 우상의 모습을 계속해서 닮아가는 것이다.
지금 우상을 대상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이 부정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실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을 닮아간다는 것은 중립적인 원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하는 존재로 창조하셨고, 우리는 예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예배의 대상을 닮아간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자들로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을 닮아갈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구원 받은 자에게 그리스도를 본 받으라고 신약 성경에서는 명령한다. 그것이 창조의 원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대상을 우상으로 삼으면 우상의 형상이 될 뿐 아니라 결국 우상과 같은 상태가 되어 버린다. 이것이 여기 8절 말씀이 직접적으로 의미하는 바다. 우상을 만들거나 우상을 의지하는 자는 5-7절에서 묘사한 우상과 같은 모습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렇게 될까? 신체에 장애를 가지게 된다는 말인가? 차라리 그게 나을 것이다.
사 44:18–20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들의 눈이 가려서 보지 못하며 그들의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니라 19마음에 생각도 없고 지식도 없고 총명도 없으므로 내가 그것의 절반을 불 사르고 또한 그 숯불 위에서 떡도 굽고 고기도 구워 먹었거늘 내가 어찌 그 나머지로 가증한 물건을 만들겠으며 내가 어찌 그 나무 토막 앞에 굴복하리요 말하지 아니하니 20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롬 1:21–23, 32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32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우상을 섬기는 자는 결국 우상처럼 된다. 영적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가 된다는 것이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제대로 생각하지도 못한다. 그렇게 결국 우상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우상은 본래 아무 것도 아니니 사실 아무 상관 없지만, 그 우상을 섬긴 사람은 영원한 멸망에 실제로 처하게 되는 안타까운 결말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 한 가지 점검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우상 숭배는 결코 무해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오늘날 이름만 바꾼 우상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안믿으면 안믿었지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 요새 어딨냐는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위에서 말했듯 사람은 예배하는 존재로서 대상이 다를 뿐 무언가는 예배하고 있다. 돌이나 나무로 만든 우상이 아니더라도 무언가는 섬기고 있다는 말이다.
예배나 섬긴다는 표현이 그렇다면 이런 것들을 생각해 보라.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 내가 삶의 큰 가치로 생각하는 것, 내가 얻고 싶어 하는 것, 내가 함께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그래서 내 시간을 쓰고, 내 돈을 쓰고, 내 에너지를 쓰고, 내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그것이 곧 나의 우상이다. 내가 만든 것일 수도 있고 남이 만든 것을 내가 의지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어떤 경우든 결과는 동일하다. 나는 그것을 예배하면서 그것을 닮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사실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로마서 1장의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피할 수 없는 진노가 언젠가 임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나의 것으로 삼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은혜의 때를 마감하지 않고 계신 지금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란다.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성도에게도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성도는 언젠가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변화하겠지만 이 땅에서도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야 한다. 이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너무 당연한 얘기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닮아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내가 ‘다른 것들’도 예배하고 있다면 나는 그것들도 닮아갈 것이다.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그것들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그것들은 내가 그리스도를 닮는데 방해가 되는 것들이다.
그것은 죄악된 습관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 자체로서는 죄가 아닌 것일 수도 있다. ‘죄도 아닌데, 믿는 사람이라고 이런 것도 못해?’라고 생각할만한 그런 것들일 수도 있다. 취미 생활이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내가 추구하는 꿈이 그런 것이 될 수 있다. 결혼이 그런 것이 될 수도 있고, 자녀가 그런 것이 될 수도 있다. 무엇이든 그리스도가 아닌 그런 것들을 예배하면 결국 나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라 그런 우상들의 형상을 닮게 될 것이다.
그것이 아무렇지 않다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하고 그것에 방해가 되는 것들은 내 삶에서 제거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삶이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의 삶이다. 그 삶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세상 속에 보여주어 “하나님이 이제 어디있느냐”고 묻는 자들의 입을 막고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삶이 된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바로 이런 삶을 살아야 할 것에 대해서 당시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호소한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9-15절)
시 115:9–11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0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11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이것이 참된 예배자의 삶이 되어야 한다. 이 명령은 전혀 복잡하지 않고 오해의 소지도 없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여호와를 의지하라고 명한다. 그가 도움이시고 방패이시기 때문이다. 우상을 섬기는 자들은 우상을 의지하지만, 그 우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자신을 섬기는 자를 도울 수도 없고 보호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만 다르시다. 우상을 의지하는 자들은 우상과 함께 멸명하겠지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시는 일은 이렇다.
시 115:12–13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을 주시며 13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리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중심 사상이 반복되어 강조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생각하시고 그들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관계없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이런 복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기를 축복한다.
시 115:14–15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5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을 받는 자로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은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무슨 공식처럼 우리가 이떻게 행동하면 어떤 복을 받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3절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가 따라야할 일반적인 원리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원하시고 그런 우리에게 복주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기댄다는 의미다. 삶의 무게 중심을, 삶의 기초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너지면 나도 무너지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의 의미다. 내 삶에서 하나님을 빼도 별로 달라질 것이 없다면,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우리 삶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걸어야 한다. 여기저기 보험을 들어두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신뢰가 오직 하나님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은 우리 삶에 필요한 복을 주시고, 그렇게 할 때 모든 영광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나님께서 일하셨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도 받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도 의지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2절에서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실은 그 백성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우상인 것처럼 의지하지 못하고 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마치 하나님으로는 부족한 것처럼 다른 무엇도 함께 의지하려고 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정말 하나님으로는 부족한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은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하나님과 다른 무엇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의견도 들어보고 세상 전문가의 의견도 들어보고, 둘 중에서 더 괜찮아 보이는 것을 선택하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영광을 함께 받지 않으신다. 오직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셔야 한다. 그것이 내 삶의 궁극적인 목적이 맞다면,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다른 것을 버려야 한다. 그런 삶에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고 영광을 받으신다.
끝으로 시편 115편의 저자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할지를 말한다.
결론 : 할렐루야(16-18절)
시 115:16–18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도다 17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나니 적막한 데로 내려가는 자들은 아무도 찬양하지 못하리로다 18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두 가지 의문이 생길 수 있는 표현들이 있다. 하늘은 여호와의 하늘이라도 땅은 사람에게 주셨다는 말은 무슨 말일까?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한다는 말은 또 무슨 말일까? 좀 어렵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시인은 지금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늘의 하나님은 이 땅을 사람에게 주시고 좋은 청지기가 되어 섬기게 하셨다. 이 땅이 곧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터전인 것이다. 지금 시편 기자는 내세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지 않다. 지금 이 땅에서의 삶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죽으면 여호와를 찬양하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적막한 데, 즉 무덤에 내려가는 자는 아무도 찬양하지 못한다. 죽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는 것, 할렐루야를 힘차게 부르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드려야할 예배다.
이 예배는 출애굽 때에 끝나지 않았다. 다윗 왕 때에 끝나지 않았다. 계속해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하나님만을 섬기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의해서 지금까지 지속되어 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속해서 복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영원 속에서도 그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지금 내가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이 땅에서의 삶 동안,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우리 모두가 살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