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1
본문: 시편 115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5편은 유월절에 불려졌던 애굽 할렐의 셋째 시편이다. 113편과 114편이 유월절 만찬 전에 불려졌고, 115편은 만찬 후에 불려졌다. 내용적으로 보면 113편은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사람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로 인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말했다면, 114편은 구원의 구체적인 예인 출애굽 사건을 기억하게 했다. 출애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증명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으로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실 때 그 어떤 것도 막아설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리고 시편 115편은 바로 그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할 것과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한다. 하나님이 유일하게 살아계신 참된 신이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셔야 함을 말한다.
사실 이런 표현들이 오늘날 사람들에게 익숙하지 않다. 오늘날 사람들은 내가 무언가(혹은 누군가)를 의지하고 산다는 생각도 잘 하지 않고 무언가를 섬기거나 예배한다는 생각은 더욱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필요에 따라 도움을 받거나 사용한다는 생각을 한다. 단순히 표현만 익숙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 다른 누구를 의지하고 찬양하며 그에게 영광 돌린다, 섬긴다는 개념 자체가 낯설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원래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가치관이 달라졌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특히 우리나라는 매우 짧은 시간에 경제 성장을 이루면서 함께 매우 빠르게 이런 가치관의 변화를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렇게 빠르게 달라진 가치관 중의 하나가 권위를 보는 시각이다. 수직적이었던 사회가 평등이 강조되면서 빠르게 수평적으로 바뀌었다. 그러면서 모든 관계가 수평적인 관계가 되었다. 그러면서 권위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어떤 면에서는 성경이 말하는 관계의 바른 위치로 찾아간 부분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부분도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부모(특히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일 것이다. 과거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매우 수직적이었다. 그래서 자녀를 자기 소유물처럼 대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내 자식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생각이 있었다. 부모의 권위가 절대적이어서 결혼이나 직장 선택과 같은 것도 자신의 의견보다는 부모의 의견이 절대적인 경우도 많았다.
‘권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연히 옳은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세상은 귄위 자체를 제거하는 쪽으로 해결해왔다. 부모에게 자녀에 대한 어떤 권리가 있지 않다고 말하고, 따라서 자녀들에게 더 이상 ‘순종’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다만 부모는 자녀에게 부탁할 수 있고 설득할 수 있지만 명령은 할 수는 없게 된 것이다.
오늘날은 이것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아졌지만, 성경의 기준에서는 이역시 반대쪽으로 치우친 모습이다. 부모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권위가 있고 부모는 이것을 자녀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다. 당연히 사랑으로 모든 것을 해야하지만, 때론 자녀 입장에서는 ‘사랑’이라고 느끼지 못하는 부분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권위가 무엇인지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워야한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이런 관계를 잘못된 관계로 말한다. 그래서 부모들도 그런 잘못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권위와 순종을 가르치기 보다, 아이의 자율성을 키워주고 원하는대로 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은 자라면서 ‘권위’가 무엇인지, ‘권위에 대한 순종’이 무엇인지를 배우지 못한다. 그래서 알지 못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그대로 영향을 준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점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이 다 그렇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을 나름대로 재정의한다. ‘권위적’이라고 들릴 수 있는 것들은 모두 제거한다. 성경의 명령을 순종해야할 의무가 있는 명령으로 받아들이지를 않는다. 그저 조언이나 제안으로 생각한다. 내 상황과 맞지 않거나 혹은 내가 원하지 않으면 따르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어차피 다 순종하지 못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이나 전지하심과 같은 속성도 뭔가 내가 좋은 장비 하나 착용한 것처럼 생각한다. 하나님을 통해서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해주실 수 있는 것만 생각하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한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혹 하더라도 그것에 대한 어떤 댓가를 항상 생각한다. 내가 이만큼 했으니 하나님이 이정도는 해주셔야한다는 식이다. 내가 해야할 일을 한 것이 아니라 안해도 되는 일을 하나님을 위해서 해드렸으니, 그에 대해 하나님이 갚아주셔야 한다는 식의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다. 이건 하나님이 나를 섬기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야말로 종교 생활이다. 애굽에서 이스라엘은 이런 종교 생활의 모습을 익숙하게 보았을 것이다. 그들은 수많은 우상을 만들어 섬겼다. 사실 자기들을 섬겨줄 우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스라엘도 그런 신을 섬기는데 익숙해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이 애굽에서 나왔듯, 그들의 예배도 애굽에서 나와야했다. 유월절에 이 찬양을 부르며 그들은 자신들이 이제는 정말로 참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들이 되었다는 사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시편 115편은 정말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주는 시편이기 때문이다. 오늘은 1-2절을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자의 진심이 어떠한지를 살펴보고 교훈을 얻기 원한다.
기도 : 섬기는 자의 진심 (1-2절)
먼저 1-2절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의 진실된 마음을 볼 수 있다.
시 115:1–2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2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첫 단어가 잘못된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여호와여”가 아니라 “이스라엘아”가 되어야 할 것같다. ‘이스라엘아, 우리에게 (혹은 너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고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라’가 우리에게는 더 익숙하다. 그런데 이 시편은 하나님께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다. 그것도 반복해서 두 번 말한다. 마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려고 하시는데, 그러지 말라고 극구 사양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시는가? 그렇지는 않다. 하나님은 언제나 자기 영광을 위해 일하시고 그 누구에게도 그 영광을 주지 않으신다.
사 42:8 나는 여호와이니 이는 내 이름이라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내 찬송을 우상에게 주지 아니하리라
이것은 자기 백성이라고 해도 마찬가지다. 모든 최종적인 영광은 하나님께로 간다. 그래야만 한다. 하나님 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기에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고넬료가 엎드려 절할 때 베드로는 그를 일으키면서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행 10:24). 같은 이유로 바울과 바나바도 루스드라의 사람들이 그들을 신으로 여기고 제사하며 예배하려고 했을 때 옷을 찢고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했던 것이다(행 14:15).
계시록의 놀라운 예언의 말씀을 환상으로 보았던 요한은 그것을 보여주었던 천사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렸었다. 한 번 그랬던 것이 아니라 두 번이나 그랬다(계 19:10; 22:8-9). 형용할 수 없는 경이로움 앞에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했을 것이다. 이런 요한에게 천사는 이렇게 말했다.
계 22:9 그가 내게 말하기를 나는 너와 네 형제 선지자들과 또 이 두루마리의 말을 지키는 자들과 함께 된 종이니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 하더라
피조물들은 아무리 아름답고 뛰어나더라도 예배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다른 어떤 피조물에게도 주지 않으신다. 그가 하나님을 위해 어떤 대단한 일을 하고 어떤 대단한 희생을 치뤘는지도 여기서는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시편의 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런 수고에 복을 주시는 분이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 영광을 나누시지는 않으신다. 모든 영광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 만약 우리의 예배에 오직 하나의 불빛만 있다면 그 불빛은 우리 중 가장 뛰어난 어떤 사람이나 대단한 일을 한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비추고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왜 이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를 할까? 어차피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시는데,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할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으시는데, 우리는 영광을 받고 싶어한다는데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홍해 바다가 갈라지고 마른 땅으로 바다를 건너는 경험을 했다면, 우리는 뭐라고 말하고 싶을까? “하나님께서 하셨지, 근데 내가 지팡이를 들고 담대하고 바다 위로 손을 내밀기도 했어. 언제 다시 바다가 합쳐질지 모르는데 바다 한가운데로 행진해가는 것도 꽤 무섭더라구.”
여리고 성이 무너지면 뭐라고 말하고 싶을까? 만약 정말 우리가 그런 경험을 했다면 온갖 무용담이 쏟아져 나올지 모른다. 하루 한바퀴씩 아무 말 없이 성을 도는게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말하고 싶을 것이다. 성벽이 무너졌을 때 그 위로 달려 올라갈 때 두려움을 이기고 용감하게 싸웠던 했던 것도 말하고 싶을 것이다.
열심히 전도를 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으면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 내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노력했는지 말하고 싶을 것이다. 밥을 사 먹이고 경조사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교회 복음 집회 데리고 오고 했던 모든 노력들에 대해서 말하고 싶을 것이다. 시간을 얼마나 썼는지 돈을 얼마나 썼는지도 말하고 싶을 것이다. 교회도 잘 나오지 않던 성도가 회복되어 열심히 섬기면, 내가 그것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 남들에게 말하고 싶은게 우리들이다.
모두 칭찬 받아 마땅한 일들이다. 잘한 일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그렇게 말하는 의도가 어디에 있는가? 칭찬 받고 싶은 것이다. 잘했다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영광을 받고 싶어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 나도 영광을 같이 받고 싶은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나도 같이 그 영광의 조각을 공유하고 싶은 것이다.
이런 마음은 좀 더 은밀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사람들이 나를 높일 때 그것을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나를 주목할 때 그냥 그렇게 하게 두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을 걷게 했을 때, 사람들은 놀라며 그 일을 했던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했다. 베드로와 요한은 어떻게 했는가. 그 시간을 즐겼는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이 일을 자기들의 힘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행 3:12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놀랍게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행 3:16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사람들의 오해를 그냥 둘 수도 있었다. 혹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지만 자신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할 수 있었던 일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도 있었다. “제가 보니까 그 사람이 고침 받을 만한 믿음이 있어 보이더라구요. 제가 못 알아봤으면 큰 일 날뻔 했죠”라고 자기 공을 내세울 수도 있었다. 자기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렇게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노골적’이든 ‘은밀하게’이든 결국 영광을 받고 싶은 마음이 우리에게는 있다.
그래서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는 반복되는 기도는 참된 예배자의 마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이 예배자의 마음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높이지만 나도 높임 받아서 나쁠 것 있나’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마음이 참된 예배자의 마음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던 세례 요한의 마음이 바로 그 마음이다. 그가 흥할 때 나도 같이 흥하면 좋지가 아닌 것이다. 어떻게든 하나님을 드러내고 나는 감추는 것, 그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의 의미다.
‘섬긴다’는 말의 의미를 잃은 오늘날 이 말씀은 정말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 교회 안에서 우리는 ‘섬긴다’는 말을 정말 자주 사용한다. “오늘 말씀은 누가 섬겨주시겠습니다. 오늘은 누가 찬양 인도로 섬겨주셨습니다. 오늘 애찬 봉사(섬김)은 몇 조입니다”와 같은 말들을 한다. 이런 말은 적절하다. 예수님은 제자들 주에서 “섬기는 자”로 계셨고, 제자들에게도 서로 “섬길 것”을 명령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금 함께 묵상하고 있는 고린도전서도 은사를 통한 ‘섬김’을 강조한다. 교회로 모이는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서로를 섬긴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섬기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섬기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그냥 ‘일한다’는 단어를 사용하면 된다. 내가 ‘섬기는 자’라는 말의 의미는 내가 ‘종’이라는 것이다. 종은 일을 하지만 자기를 위해 하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차이다. 그래서 섬긴다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다.
오늘날 직장인들이 예전의 종과 역할적인 면에서는 비슷하다고 할 수 있지만, 동일하지는 않다. 일단 직장인들은 궁극적으로 남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물론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표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 회사의 유익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을 유익을 생각하고 있을 뿐이다. 과거에는 ‘평생 직장’ 같은 말도 사용되면서 회사에 대한 ‘충성심’ 같은 것들이 있긴 했지만, 지금은 많이 없어졌다. 그리고 그 때라고 해도 궁극적으로 나의 유익과 회사의 유익이 충돌되면 나의 유익을 선택하는 것이 당연했다. 회사가 나에게 유익이 되는 한 회사를 위해 일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주인과 종의 관계는 그렇지 않다. 종에게 있어 주인을 섬기는 것은 일이 아니라 삶이었다. 출퇴근을 하면서 하루 중 일부 시간 동안만 주인을 섬기지 않았다. 예외가 있긴 하지만 종은 기본적으로 평생을 종으로 주인을 섬기며 살았다. 평생을 주인을 위해 일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자기 영광이 아니라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이 일을 해서 다른 사람에게 내가 칭찬 받고 인정 받는 것을 고민하지 않고, 주인의 명령에 따라서 충성스럽게 자기 할 일을 하는 사람이 종이다. 아무리 큰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자신을 내세울 수 없다. 그 일은 결국 주인이 한 일이기 때문이다. 내가 설교 준비를 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컴퓨터가 이 일을 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설교를 하면서 마이크를 사용하지만 마이크가 이 일을 했다고 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나에게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종은 주인을 그렇게 섬기는 존재인 것이다.
사실 정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가 이렇다.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눅 17:7–10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힘들게 밖에서 일하고 온 종에게 밥도 안주고 자기 혼자 먹으면서 수종까지 들라고 하는 주인이 참 못된 주인처럼 보이는가? 아마 그럴 것이다. 우리는 지금 귄위와 순종의 의미를 모르는 시대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주인과 종’의 관계의 측면에서는 옳은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종은 명령에 따라 해야할 일을 하고 당당하게 나도 밥 먹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고 말하며 또 다른 주인의 명령에 따른다. 그렇게 종은 철저하게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이다. 주인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여기 예수님의 비유에서 종이 마지막에 이렇게 말한 이유, 그리고 시편 115편의 저자가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한 이유는 동일하다. 그들은 자신이 종인 것을 알았고 그것을 기뻐했기 때문이다.
종의 신분인 것 자체를 기뻐했다는 말은 아니다. 하나님의 종인 것을 기뻐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종이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전혀 기쁨이 되지 않았다. 벗어나고 싶은 신분이었다. 그들은 억지로 바로를 섬겨야 했다. 바로를 위해서 사는 것은 고통이었다.
그런 고통에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셨다. 유월절이 이를 기념하는 날이고 시편 115편은 그 유월절에 불려졌던 시편이다. 그런데 이 시편은 여전히 이스라엘이 종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들은 여전히 그들 자신을 위해 살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기들이 한 일에 대해서 영광을 받지 않는다. 여전히 종이었다. 다만 주인이 달라졌다. 하나님이 그들의 주인이 되셨다.
레 25:55 이스라엘 자손은 나의 종들이 됨이라 그들은 내가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내 종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하여 자기 백성을 삼으셨다. 자기 종들이 되게 하셨다. 그렇게 구속받은 참된 하나님의 종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기꺼이 그렇게 한다. 모든 수고를 하고 나서도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실 그 영광을 제가 조금이라도 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의 관심도 자기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있다. 이어지는 기도를 다시 보라.
시 115:1–2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 2어찌하여 뭇 나라가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 말하게 하리이까
시편 기자가 염려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이다. 이스라엘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인자하고 진실하신 분이시다. 자기 백성에게 변함 없는 사랑을 나타내시는 분이시다. 출애굽 사건이 그것을 증명했다. 하나님의 능력이 그 모든 역사를 통해서 드러났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신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통 당하던 이스라엘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셨다. 광야에서 그들을 배부르게 하셨고 목마르지 않게 하셨다.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셨고, 그 땅에서 그들이 하나님을 떠날 때마다 다시 부르셨다. 이 시편이 언제 기록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언제가 되었든 그 전까지의 역사는 하나님이 정말로 좋은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 하신 모든 일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도 하나님은 그런 분으로서 선포되셔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종들의 마음이다. 다른 나라들이 “그들의 하나님이 이제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해서는 안된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든지, 혹 존재하더라도 이스라엘을 돌보고 있지 않든지, 혹 돌보고 있더라도 힘이 약해서 그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의미가 내포된 말이다. 그런 하나님은 없는거나 마찬가지 아니냐는 조롱이다. 하나님이 그런 수모를 당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고 계속해서 역사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직접적으로 시편 기자를 향한 조롱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종으로서 자기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기에 이런 조롱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 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자라면 누구나 이러해야 한다. 내가 영광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이 영광 받지 못하실 때 그것이 그냥 남의 일처럼 느껴져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가장 먼저 생각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내 것으로 취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수치는 마치 내 것인 것처럼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3절부터의 말씀은 이런 진실된 마음에서 나오는 말이다. 3-8절은 하나님께서 당하신 수치에 대한 반박이고, 9-18절은 하나님이 받으실 영광을 위한 삶에 대해서 말한다. 하나님은 이런 수치를 당하실 분이 아니시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고 도전한다.
그 전에 1-2절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을 다시 정리해 보자. 1-2절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기 원하는 종들의 진심이 담긴 기도라고 정리할 수 있다.
적용을 위해 던져야 할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종인가? 아니라면, 이 말씀은 우리와 상관 없다. 맞다면, 이 말씀은 우리를 위한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시면서 그들의 주인이 되셨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산 하나님의 종들이다.
벧전 1:18–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 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고전 7: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이스라엘 민족이 바로에게서 벗어난 것만 생각할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도 구원에 대해서 생각할 때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된 것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을 주고 사셨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면에서는 자유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여전히 종이다. 주인이 바뀐 종이다. 이 사실을 잊으면 안된다. 구원 받은 자는 죄에서 자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마음대로 죄를 지으면서 살아도 되는 사람들이 아니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벧전 2:16 너희는 자유가 있으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우리도 하나님의 종이기에 우리의 삶도 하나님을 섬기는 삶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한다.
엡 6:6 …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이것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인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이다. 이 명령이 옳지 않다고 여겨지거나 시편 115:1-2와 같이 진심으로 기도할 수 없다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애초에 하나님의 종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이런 상태라면, 내가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말은 사탄의 종임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내가 왜 사탄의 종이야! 난 아무의 종도 아니야!”라고 말하겠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사실이다. 사탄의 종이 너무 과격하게 들린다면 죄의 종이라고 생각해도 괜찮다. 결과는 다르지 않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중립은 없다. 죄에게 순종하는 종이든, 의에게 순종하는 종이든, 둘 중 하나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면 사탄의 종, 죄의 종으로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 이 정해진 길을 따라가지 말기 바란다. 지금은 끝이 보이지 않으니 괜찮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 끝은 멸망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회개하고 돌이켜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약간의 오해나 무지함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종’이라는 말을 그저 믿는 사람을 지칭하는 다른 표현으로만 생각하고 있다면, 그리고 믿음을 지옥가지 않을 수 있는 구원을 얻을 방법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었다면, 내가 아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은 뭔가 다른 얘기처럼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결국 무릎을 꿇을 것이다. 성령님께서 그 안에 계시다면 자기 영광을 위해 사는 삶이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고 책망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알면서, 꼭 그래야만 하나하는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어느 정도는 노력하겠지만 안되는건 안되는거지라는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다고 지옥가는 것도 아닌데 너무 빡빡한 것 아니냐는 생각을 가진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내가 그렇다면, 나를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치르신 희생을 다시 묵상해 보라.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으셨는가? 시편 115편을 부르시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종으로서 죽기까지 순종하셨다. 그렇게 하여 믿는 자들을 사탄에게서 해방하시고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셨다. 그 목적을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고후 5:15 그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살아 있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그들을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이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라
다시는 우리에게 영광을 돌리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셨다. 따라서 나의 기도가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가 아니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 된다. 이것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시편 115편 1-2절의 기도가 나의 진심어린 기도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기쁘게 하나님의 종으로 하나님을 위하여 살고 싶게 하기 때문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해 계시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을 위해 있다.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라고 진심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