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염려하지 말라
본문 : 누가복음 12장 22~34절
설교자 : 조정의

저는 어릴 때 생선을 잘 먹었는데 먹고 나면 항상 아버지께서 “그게 다 먹은 거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아직 살이 많이 남아있는데 어떻게 그렇게 먹고 버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가끔 아버지가 살았던 시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게 정말 한국의 이야기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흰 쌀밥을 일 년에 한 번 먹었다는 이야기, 지금은 먹을 수 없는 것 같은 것들을 먹었다고 말하는 이야기를 들을 때도 그렇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분들 중에도 두 상반된 시대를 살아오신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를 상상할 수 없었던 시대를 살았던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과거에는 먹을 수 있을까 자체로 염려했던 시대라면 오늘날은 무슨 메뉴를 먹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음식을 먹을까를 고민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물질주의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물질주의가 주는 두 가지 측면의 어려움입니다. 하나는 탐심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더 가지려고 하고 더 얻으려고 하는 탐심의 문제입니다. 또 다른 문제는 염려입니다. 물질을 얻지 못해서, 기본적인 물질을 얻을 수 없을까봐 염려하고 근심하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탐심과 염려는 물질주의가 우리에게 주는 문제의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문제의 본질은 하나입니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더 우선순위에 두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는 명령과 왜 염려하지 않아도 되는지 이유를 제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한 명령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22), 또 하나는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29)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32)입니다.

염려라는 말의 의미는 ‘마음이 산란해진 상태’를 말합니다. 누가복음 10:41에서 마르다가 염려가 되어서 분주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주한 마음, 염려는 목표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 다른 곳으로 끌려가는 것, 일상생활 가운데 나도 모르게 그것으로 생각이 끌려가는 것입니다. 근심이라는 말은 신약성경에서 한 번 나오는데 불확실함, 공중에 붕 떠 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바닷가의 풍랑에 이리저리 밀려 요동하는 배와 같고, 바람에 따라 이리 저리 밀려다니는 구름과 같은 상태입니다.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초조하고 불안해하는 감정입니다. ‘두려움’도 염려, 근심과 유사한 표현인데, 어떤 문제 때문에 마음이 두려운 상태입니다. 이 모든 감정은 한 가지에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입는 것 등의 물질이 그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물질들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말들을 합니다. ‘먹고 살려면…’,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 등의 표현을 사용합니다. 사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들이라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런 것들 때문에 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음식이 없어서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걱정인 분들은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냉장고 정리를 하지 못해서 걱정인 분들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하지 말라고 한 염려를 우리가 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학교에 들어간다면 어떤 준비를 해야 하지, 직장을 옮기면 어떻게 먹고 살까, 은퇴 후에 어떻게 살아갈까로 걱정합니다. J.C.라일은 “근심이나 걱정보다 더 흔한 마음이 없으며, 또 그것보다 성도들의 유익을 좀먹으며 더 나아가서 내적인 평안을 감소시키는 것도 없다”고 했습니다.

주님은 일회적이지 않고 지속적으로 염려하지 않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 근심, 두려움을 물리쳐 내라, 경계하고 이겨내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아무런 이유 없이 이런 명령을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네 가지 염려하지 않을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첫째, 23-24절에서 물질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의복보다 중하다고 하십니다. 15절에서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삶의 질이라는 것이 먹고 마시는 것, 입고 사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교훈을 주시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훈련하셨습니다. 만나를 주실 때 당장 오늘 먹을 것만 보관하게 하셨습니다. 내일이나 며칠을 보관하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일당만 주신 것입니다. 때로는 물이 없는 곳, 풀 한 포기 없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라(신 8:3)” 하나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훈련시키고자 했던 그 교훈은 우리의 인생이 단지 먹고 마시는 것 물질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것에 달려 있다는 교훈을 주기 원하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기 원하십니다. 먹고 마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다가 아니다, 하나님이 더욱 중요하다, 그 분이 너를 돌보시는 분이고 그분을 신뢰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까마귀를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에게 까마귀는 불결한 짐승이었습니다. 그들은 시체를 만질 수 없었는데 까마귀가 시체를 먹기에 불결한 짐승이라고 보았습니다. 주님은 까마귀가 심는 것을 보았느냐, 거두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골방(저장실)을 만들어 추수한 것을 보관하는 것을 본 적이 있냐고 유머러스하게 물으십니다. 비유에 나오는 한 부자는 그런 일을 했었습니다. 소출이 많을 때 창고를 지어 보관하려고 했습니다. 인간이 보기에 하찮은 부정한 까마귀도 하나님이 돌보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허우적거릴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이를 마련하는 이가 누구냐?”(욥 38:41). 그 대답은 하나님이십니다. “(그가)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도다”(시 147:9).

까마귀가 심지도 거두지도 않고 아무 준비 없이 살지만 단지 울부짖는 일밖에 하지 않지만 그 새도 하나님이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새보다 얼마나 귀하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돌보고 기르시겠느냐,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물으십니다. 하나님만 신뢰하고 마음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계획하고 준비하고 노력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려있다, 나의 공급자가 하나님이라는 신뢰를 가지고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돈, 재물, 먹는 것, 입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나에게 주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이 단지 물질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일 무슨 일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갑자기 일어난 화재로, 건물의 붕괴로, 배의 침몰로 생명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존적인 사람입니다. 우리는 이생에서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에서의 삶이 준비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이 땅에서 살아갈 때만 필요한 물질에 마음을 두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염려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번역 성경에는 “너희 가운데서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제 수명을 한 순간인들 늘일 수 있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원어는 두 가지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키가 자라는 것과 수명을 늘리는 것입니다. 키로 본다면, 한 자는 한 규빗을 말합니다. 그것은 대략 50센티미터를 말하는데 키가 그 정도 자라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시간으로 본다면 한 자는 1시간을 말합니다. 수명을 한 시간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고 말하는 것이 더 합당한 번역입니다.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시 139:16). 80년을 산다면 700,800시간을 산다면 거기에 1분 1초도 더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작은 일도 하지 못하면서 왜 다른 일을 염려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다시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백합화는 팔레스타인 여러 산에 피어 있는 진홍색 아네모네 꽃을 가리킵니다. 드문 여름 소나기 이후 산비탈에 온통 진홍빛으로 물들이는 꽃입니다. 그런데 이 꽃은 하루 피었다 시들어 버렸습니다. 당시 팔레스타인은 나무가 귀하여 아궁이에 불을 지필 때 마른 풀과 야생화를 썼는데 그 때 사용했습니다. 꽃이 이렇게 아름답게 피었을 때 얼마나 예쁠까요? 예수님은 그 아름다움에 대해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꽃 하나만큼 훌륭하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솔로몬에게는 큰 황금 방패 2백 개(3.4kg 금), 작은 황금방패(1.7kg의 금), 상아로 만든 보좌에 순금을 입힌 것이 있었습니다. 여섯 층계, 금 발판, 마시는 그릇이 모두 순금, 외양간 4천, 마병 만이천명, 병거가 천사 백 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로 이해한다면, 대저택에서 사는데 책상, 테이블, 그릇이 모두 금, 탱크가 천 대, 자동차 천 대(람보르기니), 집에서 섬기는 사람이 만 명이 되는 사람입니다. 이런 부유함과 들에 핀 꽃을 바꾼다면 어떨까요? 이 말씀은 이렇게 막대한 부를 가진 솔로몬도 이 하찮은 들풀이 입고 있는 옷만큼 화려한 옷을 입지 못했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하찮은 들풀과 꽃도 하나님이 이렇게 아름답게 입히시는데 하물며 너희는 입히지 않으시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고 말씀하십니다. 염려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고 하십니다. 염려는 우리에게 신실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불신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공급에 대한 믿음의 결여가 염려입니다.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세 번째 이유는 아버지께서 너희의 필요를 아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29절에서 구하지 말라는 명령을 주십니다. 우리의 필요를 요구하지 말라는 명령이 아닙니다. 여기서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근심하면서 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불신하면서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세상 백성과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대조하고 계십니다. 세상 백성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사람들, 보이는 것과 물질에 매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질은 하나님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들이 구하는 것입니다. 너희 아버지는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아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아버지가 만수르인데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빌 게이츠인데 물질의 필요가 공급되지 않을까봐 불안해하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만물의 창조자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 13:5). 이것은 우리의 노력이나 계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근면함과 성실함을 버리라는 것이 아닙니다. 주가 주신 지혜와 힘과 능력으로 성실하게 맡겨진 일을 하되 결과는 오직 주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성실한 공급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아버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공급하셨는지 생각해보십시오. 캄캄한 앞날이 걱정될 때 풀 한 포기 없는 광야로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셨던 하나님을 생각해보십시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만나로 먹이고 물을 공급하시고 고기로 배부르게 먹이신 분이십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우리 아버지가 다 아신다, 아버지가 돌보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이미 여러분의 필요를 하십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 37:25). 하나님이 신실하게 우리의 모든 필요를 공급하십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염려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먼저 구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아버지의 나라를 구해야 합니다. 31절에서 주님은 “다만” 이것을 구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구해야 할 것, 마음의 중심을 차지해야 할 것은 “그의 나라를 구하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지금 하나님의 주권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곧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지금 여기 세상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우리의 마음과 세상 속에서 그의 통치를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 땅이 주님의 말씀대로 원하시는 대로 이뤄지도록 구하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구해야 할 마땅한 것입니다. 어떤 학자는 이 말을 ‘물질의 이익, 이 땅에서 얻는 유익 보다 먼저 그의 나라에서 얻을 유익, 그 나라에서 받을 상급, 그 나라의 영광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윈돌 목사님은 ‘능력과 시간과 돈과 세상의 모든 자원을 하나님의 위대한 천국 사업에 쏟아부으라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현재형의 이 표현은 계속해서 이 나라를 추구하라는 것, 지속적인 습관으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며 사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을까? 내가 이렇게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에 어떤 유익을 줄까? 말, 행동, 물질을 사용하는 것과 결정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고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명령을 들은 제자들은 두려움을 가졌을 것입니다. 모든 물질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라고 할 때 어쩔 줄을 몰랐을 것입니다. 주님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무리는 연약한 양을 의미합니다. 말씀에 따라 염려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백성들은 매우 적은 무리일 것입니다.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두가 물질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이를 역행하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고 손해 보는 삶이라 여겨집니다. 그러나 그런 삶을 사는 것을 무서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추구하는 여러 가지 물질, 멋진 자동차, 근사한 집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 썩어지고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우리에게 주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러니 이 땅이 아닌 하늘에 우리 시선을 고정시켜야 합니다. “여호와께서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시 84:11)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다른 것들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중세시대 교부들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세상 것들을 버리고 하늘의 것을 얻으십시오. 나중에 소중한 것들을 잃지 않으려거든 버리고 싶지 않더라도 지금 버려야 할 것들을 버리십시오. 그대의 재물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알렉산드리아의 키릴루스), ‘영혼이 거하는 곳으로 금을 가져가는 것이 금광 속에 영혼을 묻어 버리는 것보다 낫다’(페트루스 크리솔로구스).

33-34절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자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구체적인 적용을 보여줍니다. 너희의 소유를 팔아라, 구제하라, 낡아지지 않는 배낭을 가지라고 말합니다. 스페인 유명한 속담에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천국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주머니를 가져갈 수 있습니다. 낡아지지 않는 배낭이 있습니다. 영원한 주머니입니다. 도둑도 좀도 없는, 그 가치가 사라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보물을 담을 주머니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구제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맡겨주신 물질을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구제할 때 하늘나라에 쌓아지는 보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특징입니다. 웨슬리라는 사람은 자신이 돌보는 시녀와 마주치곤 자신이 시장에서 사온 명품 그림을 보면서 울었다고 합니다. 시녀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어 떠는 것을 보며 자신이 시녀가 입을 옷값으로 그림을 샀다고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자유민주주의 자본주의 시대에 구제를 생각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잘 살수록 구제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내 자신, 내 가족이 우선이지 다른 사람을 잘 생각하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은 어려운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것, 그들을 위해 물질을 사용하는 것이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돈, 소유, 영원’의 저자 랜디 알콘은 재미있는 비유를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서 사람들이 으리으리한 집을 짓고 사는 것을 보고 자신의 집을 기대했는데 막상 자신의 집은 개집과 같았다고 합니다. 천사에게 그 이유를 물으니 당신이 세상에서 보내준 것으로 열심히 지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의 본문과 유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어떤 보물을 쌓고 계신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물질은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염려, 근심, 두려움을 가져오는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 마음을 몰아내고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마음으로 주어진 물질을 다른 일을 위해 사용하라고 하십니다. 구제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내가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고 있다는 분명한 증거, 재산을 움켜주지 않아도 남을 위해 내려놓더라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한다는 의미입니다.

“너희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여러분의 마음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전에 회사에서 모든 사원들에게 로또를 나눠준 적 있습니다. 안 될 것이 뻔한 데도 그것을 받은 이후로 뉴스를 확인하고 만약 당첨되면 어떻게 쓸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쓰는 재물, 물질을 사용하는 방식이 나의 보물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모든 것을 여러분을 위해 내어주신, 모든 것을 공급하실 하나님께 있는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