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
본문: 시편 99편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생각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사랑이나 전능하심 같은 것일 것이다. 아마 그런 하나님의 속성이 우리에게 더 와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찬양도 그런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많다. 하지만 ‘거룩’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모르거나 부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그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잘 와닿지 않기도 하고 혹은 오히려 그것이 좋은 것처럼 느껴지지 않아서 그럴 것이다. 죄인인 우리에게 있어 거룩한 하나님은 멀게만 느껴지고 두렵게 느껴지는 것이다.
성경에서 ‘거룩’은 기본적으로 ‘분리, 구분, 구별’ 그래서 보통이나 일반이 아닌 ‘특별함’을 의미한다.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말은 다른 날에는 죄를 지어도 괜찮지만 안식일에는 죄를 지으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안식일을 다른 날과는 다르게 보내야 한다는 의미다. 성전에 드려진 물건이 거룩하다는 의미도 그렇다. 물건이 도덕적으로 죄가 있거나 없을 수는 없다. 물건이 구별되었다는 의미다.
하나님께 이 단어(‘거룩’)가 사용될 때는 크게 두 가지 용도가 있다. 하나는 우리에게 익숙한 도덕적인 거룩하심이다. 죄에서 완전히 분리되어 계신 온전하신 분, 정결하신 분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존재적 초월성 혹은 위대함을 나타내는 용도다. 하나님의 위엄을 나타내는 거룩하심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구별되는 분이심을 말할 때 성경은 하나님을 거룩하신 분으로 표현한다는 것이다.
출 15:11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모세나 한나가 그들의 찬양 중에 갑자기 하나님의 정결하심을 말할 이유는 없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을 놀랍게 경험했고 그에 따라 하나님과 같은 분이 없다는 의미로 ‘거룩’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주와 같은 자가 누구이니까”,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와 같은 표현도 여기 사용된 ‘거룩’이 그런 ‘구별됨’, ‘유일함’을 의미함을 알 수 있게 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거룩’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수식할 수 있는 단어다. 하나님의 사랑은 거룩한 사랑이다. 무엇도 하나님의 사랑과 같지 않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능력은 거룩한 능력이다. 무엇도 하나님의 능력과 같지 않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지식, 하나님의 인내, 자비 등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른 무엇과도 같지 않기에 거룩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도 마찬가지다. 시편 93편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대한 시편을 보고 있는데,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다른 어떤 왕이나 주권자의 다스림과 같지 않음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시편 99편은 바로 그 점을 직접적으로 찬양한다. 3, 5, 9절의 끝에 보면 후렴처럼 비슷한 말씀이 반복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는 것이다. 여기서의 거룩은 ‘다름’의 의미다. 즉, ‘하나님은 다르십니다’의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다르고 그러하기에 높임을 받으셔야 한다는 것이 시편 99편의 메시지다.
위엄(1-3절)
먼저 1-3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그 위엄에 있어 다름을 말한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만민이 떨 것이요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 땅이 흔들릴 것이로다”(1절)
이제는 익숙해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선언으로 이 시편도 시작된다. 같은 의미로 “여호와께서 그룹 사이에 좌정하시니”라는 표현도 추가되었다. 이는 분명 이스라엘의 입장에서 언약궤 위에 그 임재를 두시고 자신을 나타나셨던 하나님을 염두에 둔 표현일 것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언약궤(증거궤)를 만들게 하셨고 그 안에 언약의 상징인 십계명 돌판을 두게 하셨다. 그리고 뚜껑에 해당되는 속죄소를 만들고 그 위에 그룹(천사)을 만들어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라고 명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출 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이 후로 하나님은 종종 ‘그룹 사이에(위에) 계신 분’으로 불려졌다(삼상 4:4; 삼하 6:2).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선지가가 세워지든, 사사가 세워지든, 혹은 왕이 세워지든, 심지어 그들이 이방 세력의 지배를 받을지라도 그들의 진정한 왕은 그룹 사이에 좌정하신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역시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하나님은 그저 예뻐보이라고 속죄소 위에 그룹을 만들라고 하시고 그 사이에서 임재를 나타내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하시기 때문에 그 사실을 기억하게 하시려고 그렇게 만들라고 하신 것이다. 에스겔의 말씀을 보면 우리는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그룹들의 섬김을 받으시면서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것이 실체이고 언약궤는 그 실체를 보여 주었던 것이다. 언약궤 위의 그룹들을 보면서 또한 그 위에 임재를 나타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단지 그들에게만 나타나고 그들만 다스리시는 왕이 아니라 온 우주의 왕이심을 알아야 했던 것이다. 2절이 이 사실을 상기시킨다.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위대하시고 모든 민족보다 높으시도다”(2절)
시온에 계시는 여호와는 시온에만 제한되지 않으신다. 크고 높은 건축물은 멀리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위대하심도 그렇다. 여호와의 위대하심은 시온을 채우고도 남는다. 그 영광의 빛은 이스라엘만 비추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를 밝힌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셨기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지만,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되시는 것은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실 때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기도 하셨지만, 그를 통해 모든 민족이 복을 받게 될 것도 약속하셨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이 약속이 성취날 날을 이렇게 묘사했다.
렘 3:17–18 그 때에 예루살렘이 그들에게 여호와의 보좌라 일컬음이 되며 모든 백성이 그리로 모이리니 곧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예루살렘에 모이고 다시는 그들의 악한 마음의 완악한 대로 그들이 행하지 아니할 것이며 18그 때에 유다 족속이 이스라엘 족속과 동행하여 북에서부터 나와서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기업으로 준 땅에 그들이 함께 이르리라
모든 민족의 모든 백성이 가장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그 권위 아래 기쁨으로 모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아직은 사람들이 마음의 악한대로 행하고 있고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서 오래 참으시며 그들이 회개하기를 기다리고 계시지만, 더 이상 이렇게 말할 수 없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시편 98편의 마지막 말씀처럼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러 오셔서 그 주권을 온전히 나타날 날이 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선악을 아는 것)에 따라 살기를 선택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왕이 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이 반역은 절대 성공할 수 없는 반역이다. 하나님의 왕권은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왕권은 모두 상대적이다. 아무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왕도 시간이 지나면 반역으로 인해 왕위에서 쫓겨나기도 하고 온갖 조롱과 수치를 당하기도 하지만,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해 보라. 반역이 성공하려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있어야 한다. 왕보다 강하거나 왕보다 지혜로워야 한다. 그래서 힘으로 왕을 끌어내리거나 계략으로 끌어내려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왕이시다. 다른 모든 왕과는 다르다. 가장 강하고 가장 지혜로운 왕이시다. 그러니 반역이 성공할 수 없다. 천사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통치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어쨌든 그들이 하나님께서 원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자기들이 원하는 일을 하고 있으니, 하나님의 통치에 약간의 균열은 간 것처럼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저 하나님께서 그 정하신 계획대로 행하시며 때를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사탄은 그 정해진 패배를 알면서도 여전히 반역하고 있는 것이고 사람들은 그 정해진 패배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반역하고 있을 뿐이다. 그 모든 반역조차도 하나님의 계획과 주권 아래서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98편에서 봤던 것처럼, 하나님은 이 모든 일들을 통해 구원하는 하나님과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서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것을 바로 잡으실 것이다. 지금은 힘이 없어서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기다리고 계신 것 뿐이다.
그래서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가 아니다. 오히려 절대 흔들리지 않는 위엄 있으신 하나님의 통치에 모든 사람은 두려워하고 떨어야 한다(1절). 그것이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우리보다 크고 높고 강하고 지혜로운 존재, 이전에는 보지도 경험해보지도 못한 다른 존재 앞에서 우리가 그렇게 하듯,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해야 한다. 하지만 이 두려움과 떨림은 하나님에 대한 공포 혹은 분노나 절망으로 이어져야할 것은 아니다. 찬송으로 이어져야 한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지니 그는 거룩하심이로다”(3절)
여기 사용된 “찬송할지니”에 해당되는 단어(‘야다’)는 주로 ‘감사하다’나 ‘찬송하다’로 번역되었는데, 비슷한 의미를 가지는 다른 단어에 비해 어떤 사실에 대한 인정이나 공적인 선포를 강조하는 단어다. 그래서 ‘사실을 숨김 없이 말하다는 의미’로 ‘고백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다윗이 시편 32:5에서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이기도 하다.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크고 두려운 이름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은 무엇에도 비할 수 없이 높고 위대한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에는 그 무엇과도 같지 않은 위엄이 있다.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권위가 있다. 가볍게 여길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우리에게 둘 중 하나의 선택을 요구한다. 누구도 이 선택을 거절할 수 없다. 선택에 대한 책임이 있고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한다. 성경의 요청은 한결같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하라는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하라는 것이다. 나 한사람이 그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하나님께 더 위엄이 생기고 권위가 높아지고 무게감이 더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다. 절대적 왕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한번 더 기회를 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만 할 수 있는 일이지만, 모든 민족이 해야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는 그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공의(4-5절)
다음으로 4-5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 공의에 있어서 다름을 말한다. 1-3절이 하나님의 거룩한 위엄에 대해서 말하면서, 우리와는 다른, 그래서 두려운 하나님에 대해서 말했다면, 이제는 그 하나님께서 조금 더 우리와 관련하여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말한다.
“능력 있는 왕은 정의를 사랑하느니라 주께서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시고 주께서 야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나이다”(4절)
여기서 말하는 정의와 공의는 우리가 지금 세상에서 계속해서 보고 있는 불의와 차별에 반대되는 단어들이다. 하나님의 통치는 공정하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대로 하실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지만, 그것을 남용하여 악하게 사용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역사 속에는 아예 정의와 공의는 상관하지 않는 권력도 있었다. 겉으로는 정의와 공의를 말해도 실제로는 전혀 그것과 관계없이 통치했던 권력도 있었다. 어떤 경우는 정말로 그것을 원해도 그것을 실현할 수 없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를 통해 그 어떤 권력도 공의를 세우고 정의를 행하지는 못했다. 사람은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 우리는 제대로 이해조차 하지 못하는 정의를 하나님은 분명히 아실 뿐 아니라 사랑하신다. 그래서 그 능력으로 공의를 세우시고 또한 행하신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부당함이 없고 불의가 없다. 옳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어떤 상황에서 그것은 좀 부적합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계시록에 기록된 심판의 말씀을 보면서 굳이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느냐고 묻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불신이다. 어떻게 가나안의 어린아이들까지 죽이라고 명령하실 수 있느냐,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께서 영원한 지옥을 만들어 회개할 기회도 없이 영원히 사람을 벌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런 질문들이 의미없는 것은 아니다. 믿음 가운데 던지는 이런 어려운 질문을 통해 우리는 성경을 더 주의깊게 보게 되고 그에 따라 하나님과 우리에 대해서 더 잘 알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정해져 있고 우리는 그 답을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이지 않거나만 선택할 수 있을 뿐이다.
그 답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 공의에 있어 다르시다’는 것이다.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했던 공의를 하나님은 행하고 계신다. 우리가 보기에 어떠하든 그렇다는 것이다. 이것을 답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결국 하나님보다 내가 공의를 더 잘 안다고 말하는 것이다.
사실 앞서 언급했던 아담과 하와 이후로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해오고 있다. 모두가 선악을 알고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 모두가 스스로 하나님보다 공의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의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5절)
발등상은 왕의 발받침이다. 그 앞에서 경배한다는 것은 왕의 권위를 인정하면서 그 앞에서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역대하 28:2에서 언약궤를 “하나님의 발판”이라고 표현했다. 크고 높으신 하나님을 생각할 때 언약궤는 하나님께서 발을 올려두시는 곳 정도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언약궤만 그런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는 시온을 “그의 발판”이라고 표현했다(애 2:1).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땅이 “나의 발판”이라고 말씀하셨다(사 66:1).
1-2절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이 땅의 것들은 그 역할로 인해서 귀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자체를 하나님의 전부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을 떠올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 그렇다. 우리는 더 크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을 높여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높이기 위해 우리는 낮아져야 한다. 내 생각이 어떻든, 내가 볼 때 얼마나 말이 되든, 하나님의 생각과 다르다면 (이렇게 혹은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틀린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정의를 하나님은 아시고 사랑하시며 행하신다. 모든 일에 있어 그 사실을 인정하고 믿음으로 그 앞에 겸손히 반응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르시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공의를 말하는 왕들과 다르다. 하나님이 세우시고 행하실 공의가 참된 공의다. 우리가 사랑하고 원하는 공의도 그것이어야 하고 결국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공의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이 보이지 않는 지금도 우리가 할 일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다. 불의를 경험할수록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 불의를 경험할 때 ‘하나님 믿는 것도 별 것 없네(똑같네)’와 같은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때 이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다르시다.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시고 공의를 견고하게 세우신다. 지금도 그렇게 하고 계신다. 모든 불의는 바로 잡힐 것이다. 그렇게 하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높이고 나를 낮추어야 한다.
용서(6-9절)
마지막 셋째 단락은 더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어떻게 다스리시는지를 말하면서, 특히 하나님이 용서하시는 분이심을 강조한다.
“그의 제사장들 중에는 모세와 아론이 있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 중에는 사무엘이 있도다 그들이 여호와께 간구하매 응답하셨도다”(6절)
여기서 모세와 아론, 사무엘이 언급된 이유는 그들이 대표적으로 백성들을 위한 중보자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론은 대제사장으로서 계속해서 그런 일을 했다. 모세는 이스라엘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께 이스라엘을 위하여 기도했었다. 사무엘도 마찬가지다. 사무엘은 공적인 자리에서 물러나면서도 백성들을 위한 기도를 쉬는 죄를 범하지 않겠다고 공적으로 선언했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시지만 동시에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렇게 하시는지 우리는 다 이해할 수 없지만,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신다. 우리가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이 주권을 가지고 통치하신다고 말하면 기도가 무의미하게 여겨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한다. 기도를 들을 수도 있는 하나님, 기도에 응답할 수도 있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말씀해 주신다.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니 그들은 그가 그들에게 주신 증거와 율례를 지켰도다”(7절)
우리가 출애굽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구름 기둥 가운데서 백성들에게 나타나 말씀하셨고 백성들은 그 말씀에 따라 살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는 백성의 올바른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백성은 듣는 것이다.
하지만 이 땅의 하나님 백성은 완전하지 않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하나님처럼 거룩하지 않다. 그런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주께서는 그들에게 응답하셨고 그들의 행한 대로 갚기는 하셨으나 그들을 용서하신 하나님이시니이다”(8절)
행한 대로 갚는 것과 용서는 상반되는 개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둘을 동시에 하신다. 몇 가지 생각해 볼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첫째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반역했을 때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민 21장). 백성들이 길로 인해 마음이 상해서 먹을 것과 물이 없다며 하나님을 원망하는 죄를 범했을 때 하나님은 불뱀을 보내서 그들이 행한 대로 갚으셨다. 하지만 모세가 백성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은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달아 그 놋뱀을 보는 자는 다 살 수 있게 하셨다. 행한대로 갚으셨지만 그들을 용서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모세와 아론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므리바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따르지 않아 이스라엘 앞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는 죄를 범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갈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여전히 모세와 아론이 하던 일을 할 수 있게 하셨다는 면에서 그들은 용서 받았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최종 열매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점에서는 행한 대로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죽음으로 행한 대로 벌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즉시 멸망을 당하지 않았던 것은 모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셔서 그들을 용서하신 것으로 볼 수 있다.
사실 가장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행한대로 갚으시는 대상과 용서하는 대상이 다른 경우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면 제사장을 통해 희생 제물을 드릴 것을 명령하셨다. 그렇게 해서 제물을 드린 사람은 용서를 받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형벌대로 주어지게 하셨다. 이것이 대속의 원리다.
죄를 지었지만 용서 받은 대상과 죄도 짓지 않고 형벌을 받는 대상이 다른데, 이것을 공의라고 할 수 있을까? 용서 받은 사람이야 좋겠지만, 형벌 받는 사람은 무슨 죄가 있냐고 우리는 반문할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공의라고 하신다. 그리고 우리는 그 궁극의 공의를 십자가에서 볼 수 있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스스로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받은 곳이 바로 십자가다. 그렇게 해서 모든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게 하신 것이다. 누구도 이 하나님의 공의에 반문할 수는 없다. 그저 감사함으로 그 용서를 받아들이면 된다.
왜 만물을 두려워 떨게하는 위엄의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까? 왜 정의를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실까? 하나님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출 34:6–7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7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
이것이 하나님의 통치의 또 다른 거룩함, 즉 차이다. 힘을 가진 왕은 그 힘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를 원한다. 백성을 그 힘 앞에 굴복시키기를 원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심판하기 좋아하는 분이 아니시다. 피조물들을 창조하고 그들을 멸망시키면서 기뻐하는 그런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용서하는 분이시다. 스스로 자신을 낮추고 낮춰서 피조물의 모습이 되면서까지도 용서하기를 기뻐하는 분이시다. 그런 분에게 합당한 반응은 이것이라고 시편기자는 말한다.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이고 그 성산에서 예배할지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심이로다”(9절)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모든 왕과 다르다. 그분이 가지고 계신 위엄이 다르고, 그분이 행하시는 공의가 다르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분의 용서가 다르다. 그분의 낮아지심이 다르다. 용서하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시고 낮아지셨다.
사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즉시 심판하지 않으신 것만 해도 놀라운 일이다.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다. 그들의 죄악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들을 인도하고 약속의 땅에서 살게하신 것도 놀라운 일이다. 하나님께서 성막과 성전을 통해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자신을 나타내신 것도 하나님의 높으심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놀라운 일이다. 높으신 하나님은 그렇게 스스로를 낮추어서 우리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도 우리를 용서하기 위해 자신을 낮추신 모습에는 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바로 이렇게 자신을 낮추신 예수님을 통해 용서를 받았다는 말이다. 그런 무엇과도 비할 수 없는, 무엇과도 같지 않은 용서를 받았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할 일, 그리고 지금의 우리가 할 일은 우리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냥 멀리 계신 높으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용서하기 위해 나보다도 낮은 자리까지 내려오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나는 낮아져야 한다. 내가 낮아져야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신다.
도전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다스리신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다르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 위엄이 다르다. 어떤 사람만 그 다스리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그 대상이 된다. 그 위엄 앞에 우리는 두려워 떨어야 한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 공의가 다르다. 우리는 다 이해못할 공의를 하나님은 세우시고 행하신다.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그 용서가 다르다. 우리는 절대 할 수 없는 용서를 하나님은 하신다. 용서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간구할 수 있고 용서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내 삶을 다스리신다고 말할 때, 우리는 너무 우리 입장에서 좋은 것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생각과 조금이라도 다른 모습이 보이면 하나님께서 정말 내 삶에서 그렇게 하시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곤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셔서 그분의 다스리심도 거룩하다. 우리의 생각과는 달라서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우리에게 절대로 해가 될 일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다르심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이며 복으로 돌아온다. 그러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항상 인정하며 예배하는 것이다. 내가 낮아져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그것이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반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