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본문: 시편 113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113편은 유월절에 불려졌던 애굽 할렐이라 불리는 소모음의 시작이다. 전통적으로 유대인들은 113편과 114편은 유월절 식사 전에 불렀고, 115-118편은 식사 후에 불렀다. 유월절 식사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예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시편들은 그 예식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또한 계속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섬기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종으로서 기쁘게 살아갈 것을 다짐할 수 있게 하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 중 113편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추셨음을 강조하여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그 하나님을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기를 원한다.
시편 113편은 간단하게 두 부분으로 나눠볼 수 있다. 1-3절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이고, 나머지 4-9절은 그 명령의 합당한 이유라고 할 수 있다.
명령 : 여호와를 찬양하라 (1-3절)
1-3절은 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명령이다. “할렐루야(여호와를 찬양하라)”로 시작된 이 명령은 누가 찬양해야 하는지, 무엇을 찬양해야 하는지, 언제 찬양해야 하는지, 어디서 찬양해야 하는지에 대한 내용을 하나씩 더하면서 명령을 구체화한다.
시 113:1–3 할렐루야, 여호와의 종들아 찬양하라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 2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지로다 3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시리로다
여기에 추가로 4-9절은 그 이유를 자세하게 설명하는데, 이것들을 종합해 보면 ‘어떻게’만 빠진 육하원칙에 따라 찬양의 명령이 주어졌다고 할 수 있다.
“찬양하라”는 명령은 조금 부드럽게 표현하자면 예배로의 초청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초청은 마음대로 거절할 수 있는 초청은 아니다. 반드시 응해야하는 초청이기에 명령이라고 할 수 있다. “찬양하자”가 아니라 “찬양하라”인 것이다.
같은 명령이 1절에만 3번 반복된다. 사실 무언가를 찬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반응이지 명령해서 되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것, 아름다운 것을 보면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감탄도 하고 그것을 칭송한다. 하지만 내가 그런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똑같이 하라고 명령하지는 않는다. ‘위대하다’, ‘아름답다’, ‘가치가 있다’는 말에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찬양을 명령한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옳지 않게 혹은 어색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것이 정상이다. 명령에 따라 찬양을 한들 자발성이 빠진 찬양은 진정한 의미에서 찬양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찬양은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은 상대적인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도 하나님을 위대하지 않다고 하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할 수 없다.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 객관적인 것이다. 그래서 2-3절의 명령은 그런 당위성을 표현하고 있다. 즉, 하나님은 찬양을 ‘받으셔야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찬양을 강요할 수 없다고 말할 때는 그 찬양의 대상이 찬양에 합당하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데, 하나님은 언제나 찬양 받기에 합당하시다. 그래서 이 명령은 강요가 아니다. 하나님께 합당한 반응을 보여야 함을 강조할 뿐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여기서 찬양의 대상은 ‘여호와’보다는 ‘여호와의 이름’이라고 반복해서 강조되었다(1, 2, 3절). 당연히 이 찬양은 궁극적으로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향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는 것은 이름 자체가 멋있다고 칭찬하라는 말은 아니라는 것이다. 혹은 스포츠 선수를 응원하고 환호할 때처럼 “여호와”라는 이름을 반복해서 크게 부르라는 의미도 아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히 호칭 이상의 의미를 가질 때가 많다. 예수님의 이름이 ‘예수’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이 하실 일을 그 이름에 담아 그렇게 지어주셨다. 아브라함,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다. 이름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드러내고 그 어떠함은 그 사람이 하는 일을 통해서 증명된다. 하나님의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언약의 백성으로 삼으시면서 자신을 드러내실 때 ‘여호와’라는 이름으로 드러내셨다(출 3:14-15). 우리가 영어 이름 원하는대로 정하듯이, 발음하기 좋거나 멋있는 이름 중에서 하나를 고르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서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여호와 즉, ‘스스로 있는 자’시다. 영원하신 분으로서 자존하시고 자족하신다. 무엇도 하나님의 존재를 만들어내지 않았고 무엇도 하나님의 존재를 사라지게 할 수 없다. 하나님은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살아가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무엇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고 따라서 하나님께 필요한 무엇을 줄 수 있는 존재도 없다.
이런 면에서 하나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으시다(5절). 그 어떤 피조물과도 같지 않은, 절대적인 위대함과 아름다움이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성경은 아무렇지 않게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명령한다.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반응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찬양의 당위성은 누가, 언제, 어디서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먼저 누가 찬양을 해야하는지에 대해서 1절은 “여호와의 종들”이라고 말한다. 여호와의 종들은 아주 좁게 보면 예배를 위해 성전에서 봉사했던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의미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2-3절을 보면 그렇게 명령의 대상이 좁혀진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소한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종들은 출애굽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경험했던 모든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고, 4절 이후의 말씀을 고려해보면 출애굽을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경험한 사람들을 의미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경험한 사람은 하나님의 구원을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사람을 의미한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종인 것이다.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수였겠지만, 지금은 믿고 구원 받은 모든 자들에게 이 명령이 적용된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모두가 여호와의 종이되어 여호와를 찬양해야 한다. 찬양의 시간과 장소가 이 사실을 말해준다.
시간은 “이제부터 영원까지”다(2절). 이는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변하지 않으시는 속성에 근거해있다. 하나님이 영원하시니 하나님에 대한 찬양도 영원히 드려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 입장에서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니 어떻게 할 수 없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게 할 수 있고 앞으로 어떻게 할 지를 우리는 결심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지금 드려져야 하고 앞으로 계속 드려져야 한다. 오늘 충분히 찬양했으니까, 내일은 좀 쉬자라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어제 너무 영적으로 살았으니 오늘은 좀 육적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 할 수 없는 것이다.
한 때 ‘워라밸’이라는 말이 꽤 유행했던 적이 있다. 일과 삶의 균형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표현이었다. 어쩌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워’는 일(work)이 아니라 예배(worship)일 수 있다. 예배와 삶의 균형을 찾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말씀에 따르면 그런 균형은 없다. 예배에는 퇴근 시간이 없는 것이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계속 드려져야 한다. 우리가 항상 교회에 모여서 찬양만 하고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또한 “이제부터 영원까지”는 ‘항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르게 말하면 ‘어떤 상황에도 관계없이’를 의미한다. 우리는 모든 상황에서 찬양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다. 좋지 않은 상황에서 찬양하지 않는 것을 우리는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런데 감사가 나오냐고 말한다.
그럼 좋은 상황에서는 감사가 잘 나오는가? 그렇지도 않다. 매일 누리는 은혜에 대해서는 은혜인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어떤 일에 대해서 좋은 결과를 얻게 되어도, 하나님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자기가 잘 한 줄 안다. 운이 좋았는 줄 안다. 그게 아니면 도움을 주었던 주변 사람에게만 감사한다.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시니까 없는 줄 아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신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우리가 볼 때 좋은 상황이든 그렇지 않은 상황이든, 하나님은 항상 일하고 계시니 우리의 찬양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추가로 “이제부터 영원까지”는 계속되는 ‘세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나와 우리만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하늘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땅에서도 우리의 아들과 딸들이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그렇게 이 찬양의 명령은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의 여호와의 종들뿐 아니라, 지금 여호와의 종들에게도 적용이 된다.
다음으로 장소는 “해 돋는 데에서 해 지는 데에까지”다. 해 돋는 동쪽에서 해 지는 서쪽까지 여호와의 이름이 찬양을 받으셔야 한다. 이는 여호와의 무소부재하심과 편재하심의 속성에 근거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나 계시니, 어느 곳에서든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 드려져야 한다는 말이다.
개인에게 적용하면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배 시간이 따로 있지 않고 ‘언제나’이었던 것처럼 예배 장소도 따로 있지 않고 ‘어디서나’인 것이다. 예배당은 예배의 장소인데, 가정이나 직장, 학교는 아닌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좀 더 큰 범주에서 이 말은 어느 곳에 있는 사람이든지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는 의미도 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시면서 그에게 복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뿐 아니라 그가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고도 약속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도 그들이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그 복의 도구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시편의 찬양에도 열방과 민족들이 하나님을 찬양해야할 것에 대한 내용이 많다. 그리고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모든 민족”을 제자 삼을 것을 명령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찬양은 민족에 관계없이 드려져야하기 때문이다.
말라기 선지자 시대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예배의 헛됨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참된 예배가 드려질 날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말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다. 여호와의 종들은 언제나 어디서나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해야 한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특권이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섬겨야 하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저마다 섬기는 것이 다른데, 그것들은 다 헛된 것들이다. 참되신 하나님을 알고 섬긴다는 것은 그야말로 사람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특권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의무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아름다움을 아는 자로서 하나님의 종들은 그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언제 어디서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세상 가운데 선포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4-9절에서 시편 기자는 왜 하나님께 이런 찬양이 합당한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힌다. 앞서 간단하게 언급한 것처럼 그 이유는 “여호와의 이름”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그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행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이유 :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4-9절)
그럼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5절의 전반부가 이에 대해서 답한다. 하나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으시다. 하나님은 특별하고 유일하시기 때문에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고 말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무언가를 찬양(칭송, 칭찬, 인정)한다는 행위 자체에 어느 정도 그 대상의 특별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다 똑같으면 찬양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마치 참가상과 같다. 참가한 데 의의가 있다고 말하기도 하지만 사실 사람들은 더 좋은 결과를 원하고 그것을 얻었을 때 받는 상에 훨씬 더 큰 의미를 두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참가상은 격려의 의미가 있다면 대상은 찬양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똑같은 휴대폰을 두고 그 중 하나를 칭찬할 수는 없다. 서로 다른 휴대폰을 가져다 놓아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찬양에는 특별함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도 그런 하나님의 특별함이 이유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의 특별함은 다른 무엇과 비교할 수 없기 때문에 유일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유일함은 두 측면에서 드러난다. 하나는 그분의 높으심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의 낮추심이다. 이 둘이 함께 하나님의 유일한 위대하심을 드러내고 그것이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이유가 된다.
먼저 하나님은 높으신 분이시다(4-5절).
시 113:4–5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 5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4절 전반부는 “여호와는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며”라고 말한다. 모든 나라는 세상의 모든 권세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의 권세자들보다 높으신 분이시다. 그들이 세상에서 가지고 있는 영향력이 얼마나 크고 높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이 그들 위에 계신다.
다니엘서는 이런 하나님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해주는 성경이다. 특히 느부갓네살 왕이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은 그를 들짐승처럼 만드셔서 누가 진짜 왕인지를 보여주셨었다. 그런 하나님을 경험한 후에 느부갓네살 왕은 이렇게 고백했다.
단 4:34–35 그 기한이 차매 나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보았더니 내 총명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지라 이에 내가 지극히 높으신 이에게 감사하며 영생하시는 이를 찬양하고 경배하였나니 그 권세는 영원한 권세요 그 나라는 대대에 이르리로다 35땅의 모든 사람들을 없는 것 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에게든지 땅의 사람에게든지 그는 자기 뜻대로 행하시나니 그의 손을 금하든지 혹시 이르기를 네가 무엇을 하느냐고 할 자가 아무도 없도다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높으심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느부갓네살 왕은 하나님을 “하늘의 왕”으로 부르며 찬양하고 칭송하고 경배했다(단 4:37). 땅에 많은 왕들이 있고, 어쩌면 느부갓네살 왕은 자신이 그들 중에서도 뛰어나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께 비할 바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던 것이다. 이것은 느부갓네살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깨달아야할 사실이다. 하나님은 모든 나라보다 높으시다.
또한 4절의 하반절은 “그의 영광은 하늘보다 높으시도다”라고 말한다. “그의 영광”은 피조물과는 다른 하나님의 특별함을 의미한다. 다윗은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고 말했다(시 19:1). 하늘은 사람이 생각할 때 가장 높고 위대한 것 중 하나다. 우주는 지금도 우리가 극히 일부만을 알고 있을 뿐, 여전히 모르는 것이 태반이다. 그런 하늘조차도 자신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하나님의 영광의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후에 이렇게 기도했다.
대하 6:18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하나님의 크심을 생각할 때 자기가 건축한 성전은 너무나 작고 초라한 것이었다. 인간으로서는 멋진 건축물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 비할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겨우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지을 수 밖에 없었던 자신의 한계가 솔로몬은 한탄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늘도, 하늘들의 하늘도 다 감당할 수 없다.
오늘날의 사람들이 무엇에 열광하면서 찬양하는지를 보라. 예쁘고 잘 생긴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 노래 잘하고 춤 잘추는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를 잘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 말을 기 막히게 잘하는 강연자에게 그렇게 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런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 어떤 영광보다 하나님의 영광은 높고 크다.
그래서 5절 말씀은 이렇게 묻는다.
시 113:5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 높은 곳에 앉으셨으나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무도 없다”이다. 그것이 유일한 정답이고, 모두가 그렇게 답해야 한다. 하나님은 누구와도 같지 않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때로 하나님을 끌어 내리거나 무언가를 끌어 올려서 하나님과 같은 것을 만든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서 숭배했던 것은 그것을 끌어 올려 하나님과 같게 만든 것이다. 이방인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한 유명인 숭배를 비롯한 오늘날의 우상 숭배도 마찬가지다. 무언가를 하나님의 자리로 끌어 올리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을 끌어 내리는 경우도 많다. 요즘 하나님이 얼마나 낮아져 계신지를 보라.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복음을 들어보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구원 좀 받아달라고 애걸복걸하고 계시다. 하나님은 내 친구고 조력자이긴 하지만 왕은 아니시다. 나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하나님은 괜찮지만, 나를 질책하고 주관하려는 하나님은 싫은 것이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그래도 있지만 점점 진정한 의미에서의 (하나님을 높이는) 찬양은 교회 안에서도 줄어든다. 하나님이 그만큼 우리에 의해 낮아져 계신 것이다.
“여호와 우리 하나님과 같은 이가 누구리요”라는 이 질문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사건을 기억나게 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그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영광을 확실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바로와 타협하지 않으셨다. 그에게 자기 백성을 보내라고 명령하셨을 뿐이고, 순종하지 않은 바로를 심판하셨을 뿐이다. 굳이 이런 일을 하셨던 이유를 하나님은 이렇게 설명해 주셨다.
출 9:14–16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너와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네가 알게 하리라 15내가 손을 펴서 돌림병으로 너와 네 백성을 쳤더라면 네가 세상에서 끊어졌을 것이나 16내가 너를 세웠음은 나의 능력을 네게 보이고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였음이니라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애굽을 심판하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것으로 증명해 보이셨던 것이다. 그래서 홍해를 건너고 애굽의 군대가 홍해에서 멸망하는 것을 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했다.
출 15:11, 18 여호와여 신 중에 주와 같은 자가 누구니이까 주와 같이 거룩함으로 영광스러우며 찬송할 만한 위엄이 있으며 기이한 일을 행하는 자가 누구니이까 18여호와께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도다
무엇도 하나님과 비교할 수 없고 따라서 하나님만이 높은 곳에 앉으셔서 영원무궁 하도록 다스리시는 왕이시다. 아무리 사람들이 가치있게 여기고 숭배하는 것이라고 해도 이 하나님에 비할 수 없다. 무엇도 하나님과 같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유일한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이것만으로도 하나님은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지만, 하나님의 유일한 위대함은 그분의 낮추심으로 더욱 그 빛을 발한다.
시 113:6 스스로 낮추사 천지를 살피시고
여기서 시편 기자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그림은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몸을 굽혀서 아래를 내려다 보고 있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그렇게 높으신 분이시지만, 이 땅에서 일어나는 일에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고 계신다. 돌보고 계신다. 그리고 우리 삶에 개입하신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이어지는 7-9절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은혜를 베푸시는 두 예를 제시한다. 먼저 7-8절은 가난한 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시 113:7–8 가난한 자를 먼지 더미에서 일으키시며 궁핍한 자를 거름 더미에서 들어 세워 8지도자들 곧 그의 백성의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시며
여기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는 제대로 된 집에 거하지 못하고 있다. 먼지 더미가 그들의 집이고, 그들은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거름 더미를 헤치고 다닌다. 괴롭고 고통스러운 삶이다. 소망을 찾을 수 없다. 누구도 그들을 돕지 않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은혜의 손길을 내미시는 것이다. 아무도 돕지 않는 그들을 높으신 하나님께서 스스로 낮추셔서 살펴보시고 도우시는 것이다. 그렇게 그들을 지도자들과 함께 세우신다. 마치 다윗이 므비보셋을 불러 자기 상에서 먹게 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궁핍한 자들에게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다음 예시는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시 113:9 또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를 집에 살게 하사 자녀들을 즐겁게 하는 어머니가 되게 하시는도다 할렐루야
고대 이스라엘에서 여자는 남자보다 대접받지 못했다. 더구나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서 그렇게 된 것으로 인식되어 사회적 죄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런 자들에게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들에게 자녀를 주셔서 그 집에서 행복하게 살게 하신다.
이 말씀은 약속의 말씀이 아니다. 즉, 하나님께서 항상 그렇게 하신다는 말씀이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세상에 가난한 자가 없고 임신하지 못하는 여자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낮은 자를 돌보시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사실의 예로서 제시된 것 뿐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기 말씀은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의 기도를 인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상 2:5–8 … 전에 임신하지 못하던 자는 일곱을 낳았고 많은 자녀를 둔 자는 쇠약하도다 6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7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8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한나는 자신의 경험을 통해 높으신 하나님께서 낮은 자들에게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스스로 낮추어 낮은 자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시편 113편의 저자는 그것이 한나에게만 있었던 매우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하시는 일임을 묵상하며 이 시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보다 높으시지만 동시에 자신을 낮추어 낮은 자들을 바라 보시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찬양 받아 마땅한 분이신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은 이것이 자기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임을 알고 유월절에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이 시편으로 찬양을 드렸다고 할 수 있다. 높으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낮추셔서 낮은 자를 구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바로 그 구원을 경험한 자들에 의해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도전
시작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시편은 ‘어떻게’가 빠진 육하원칙에 따라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명령을 제시하고 있다. ‘누가’는 여호와의 종들이다. ‘언제’는 이제부터 영원까지다. ‘어디서’는 해 돋는 데에서부터 해 지는 데에까지다. ‘무엇’은 하나님을 찬양 해야 한다다. ‘왜’는 높으심과 낮추심으로 드러난 하나님의 유일함이다.
그럼 ‘어떻게’에 대한 답은 무엇일까? 시편은 이 질문에 대해서 다양한 답을 준다. 방법적인 측면에서 악기를 가지고 큰 소리로 그렇게 할 것을 말한다. 태도적인 측면에서 즐겁게 전심으로 그렇게 할 것을 말한다. 오늘은 동기적인 측면에서의 ‘어떻게’에 대해서 끝으로 함께 생각해 보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이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까? 두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로 모든 좋은 것을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다.
7-8절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가 그 삶에서 벗어난 것을 사회 제도나 혹은 그에게 도움을 준 어떤 사람 덕분이라고 생각한다면 그에게 있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사라진다. 9절에서 임신하지 못하던 여자도 마찬가지다. 한나가 아이를 가졌을 때 운이 좋았다고 생각했거나 그동안의 노력이 드디어 이렇게 결실을 맺었다고만 생각했다면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나의 기도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관하시고 하나님께서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한다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한나의 기도의 앞부분을 보면 한나는 그것을 “주의 구원”이라고 표현하면서,
삼상 2:2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라고 고백했다. 삶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보니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볼 수 있었던 이유는 한나가 기도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를 바라볼 때 우리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기도로 내 삶을 하나님께 맡기고 내 삶에서 선한 일을 행하시는 구원의 하나님일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찬양할 수 있다.
둘째로 우리의 궁극적인 구원을 기억하는 것이다.
바로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시편 113편은 한나의 경험과 기도에 대한 묵상이 그 바탕에 있다. 그 기록을 통해 저자는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을 묵상하면서 그 유일하심을 찬양했다. 그리고 이 시편 113편을 유월절에 부르면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구원의 경험인 출애굽을 기억했다. 그 출애굽에 나타난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을 기억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을 기억해 본다면 우리도 언제나 어디서나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편은 유월절 식사 전에 불려지던 시편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시기 전에도 분명 이 시편으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을 하셨을 것이다. 이제 곧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죽으실 것을 알고 계셨다. 구약에서 사람들을 구하시기 위해 스스로 낮추셨던 하나님의 모습은 모두 이 궁극적인 구원의 그림자였다. 시편 113편도 예수님을 통하여 그 진정한 의미가 선포될 것이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낮추셨다. 하나님으로서 인간의 몸을 입으심으로서 이미 충분히 낮아지셨던 예수님은 이제 곧 사람들의 손에 죽기까지 낮아지실 것이었다. 이 노래가 끝나고 이 식사가 끝나면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질 것을 예수님은 알고 계셨다. 그 사실을 알고 계시던 예수님은 이 찬양을 제자들과 함께 부르면서 하나님을 예배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또한 하나님을 예배하셨다.
우리가 경험한 하나님의 높으심과 낮추심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먼지 더미와 거름 더미에서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일으키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영생을 주셨다. 그렇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은 사람이 되어 사람 손에 죽으셨다. 이것이 내가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찬양할 이유가 되지 못한다면, 다른 그 무엇도 합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행하신 그 큰 구원을 더 자주 더 깊게 더 넓게 묵상해야 한다. 내 삶에서 모든 것을 잃어도 그 큰 구원은 내가 하나님을 언제 어디서나 찬양할 합당한 이유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