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즐거이 외치라

본문: 시편 98편

설교자: 최종혁

 

하나님은 왜 사람을 만드셨을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셔야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질문이라면 ‘그렇지 않다’고 쉽게 답할 수 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신 분이셔서 어떤 ‘필요’가 있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에 대한 질문이라면 답이 조금은 어려워진다. 답 자체가 어렵다기 보다는 우리 입장에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사실 성경의 답은 어렵지 않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분명히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의 목적이 그러하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궁극적인 목적도 하나님의 영광인 것이다. 이 답을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하지 않을 뿐이다.

사람이 범죄할 것을 알면서 하나님이 왜 사람을 만드셨느냐는 질문이면, 그야말로 간단하게 답하기 어려워진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간단하게 답을 할 수는 있지만 여전히 왜 그게 답인지에 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사람이 범죄할 것을 알면서도 창조하시고 그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의 몸을 입고 사람에게 죽임을 당하시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를 이해하기 쉽지 않다.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은 그 모습 자체로 가장 영광스러우시기 때문이다. 더 높아지셔도 부족할 판에 낮아지심이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사실 선한 천사들이 인간의 구원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궁금해하고 더 알기 원하는 부분도 이 부분일 것이다. 이건 받아들이고 안받아들이고의 문제 이전에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바울도 고린도전서 1장에서 이 문제를 다룬다. 그는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전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는 예수님은 전혀 ‘영광’과는 관련없어 보인다. 하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 즉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났다는 말이고, 이는 곧 하나님께 영광이 되었다는 의미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속성 중 어떤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통해 드러내기 원하셨다. 바로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능력과 지혜가 그것이다.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어 영광 받으시기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다.

하나님의 거룩과 하나님의 영광은 비슷하게 사용되는 단어지만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거룩은 하나님의 위대하신 속성 자체를 의미한다면 영광은 그 위대하신 속성이 드러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과 지혜는 하나님이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심에 대한 조금의 의심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드러나시는 것은 다른 얘기다. 우리가 무언가를 논리적 결론으로서 인정하는 것과 그것을 직접 보는 것은 다르기 때문이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폭포는 나이아가라 폭포일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에 걸쳐있는 폭포이고 양쪽을 합하면 폭은 1km에 달하고 높이는 캐나다 쪽이 더 높은데 약 57m라고 한다. 다른 유명한 폭포에 비해 폭과 높이가 조금 부족하지만 수량이 엄청나서 평균적으로 초당 2,400톤 정도의 물이 쏟아져 내린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떤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긴 할텐데, 큰 감흥은 없을 수 있다. 앞서 말한 수치를 좀 더 바꿔서 설명해 주면 아마 좀 더 와닿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폭이 1km 정도라고 했는데, 교회에서 남사IC정도의 거리다. 높이 57m는 아파트 20층 정도가 된다. 나이아가라의 수량으로 219만 kW 용량의 발전기 13개를 돌린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최대인 충주댐은 41만kW 수준이다. 

아마 실제로 보고 온 사람은 이렇게 건조하게 설명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수치들보다 폭포를 마주 했을 때의 심정을 최대한 표현하려고 할 것이다. 맑은 날이었는데 천둥이 치고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는데 노아 홍수 때 그랬을 것 같다는 식의 얘기를 할 것이다. 가끔 ‘한국의 나이아가라 폭포’라며 소개되는 폭포가 있기도 한데, 실제로 나이아가라를 본 사람은 절대 그런 표현을 쓰지 않을 것이다. 사대주의에 빠져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제로 본 사람은 그 위용을 알기 때문이다. 보고 경험하면 반응이 다른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반응도 그렇다. 그냥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인정하는 것과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은 다르다. 하나님은 성경이라는 글을 통해서 자신을 드러내시지만 글 안에만 계시지 않는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은 우리의 역사 가운데서 역사하셔서 모든 것을 자신의 역사로 만드신다. 그렇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그것을 본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보는 것으로 구분해서 말하긴 했지만, 사실 이 둘은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알기만 하고 보지 못하면 나이아가라에 한번도 가보지 못한 폭포 전문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아는 만큼 보이기도 한다. 나이아가라에 폭포 전문가와 함께 간다면 그 경험은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성지 순례를 혼자 가면 그냥 언덕에 하이킹 하는 것과 다르지 않은데, 전문가와 함께 가면 성경을 4D로 보는 것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보는 것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할 수 있고, 제대로 영광돌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또한 우리 삶에서 역사하신다. 특별히 우리를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역사를 구속사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 드러내시는 영광은 구원하는 능력과 지혜와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은 또 다른 타락한 인격체인 천사는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들을 구원할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실 뜻을 갖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은 절대적인 주권과 공의의 심판이다. 하지만 우리 사람을 통해서는 구원의 은혜를 나타내신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 구원 받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셔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신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기 영광을 위해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우리가 알아야할 중요한 측면이다.

시편 98편이 바로 이 진리를 선포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을 뿐 아니라 그 구원을 알게 하셨고 보게 하셨다. 그리고 그에 합당한 모든 피조물들의 반응을 요구하신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 시편에 “시”라는 아주 단순한 타이틀이 주어졌을 수도 있다. 우리 인간에게 가장 합당한 시가 바로 이것이기 때문이다. 시편 98편은 96편과도 비슷하지만 보다 더 순수한 찬양시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도 단순하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즐거이 외치라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이 이 요구에 화답해야 한다. 특히 우리는 여호와의 구원을 유일하게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피조물들이기에 더욱 그러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특권이자 의무인 것이다.

오늘 시편은 이런 관점에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3절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드러내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나머지 4-9에서는 그(구원)에 합당하게 반응할 것을 강조한다.

드러난 하나님의 구원(1-3절)

먼저 이 시편은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는 명령이자 강력한 초청으로 시작된다. 96편에서 봤던 것처럼 “새 노래”는 세상에 없던 멜로디의 노래가 아니라, 새로운 경험이나 깨달음이 바탕이 되어서 진부하거나 습관적이지 않은 생동감 있는 노래를 말한다. 신앙 생활을 너무 오래해서 더 이상 새로운 기도나 새로운 찬양을 드릴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혹시 있다면, 그 사람은 실제로는 신앙 생활을 하지 않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내 표현 자체는 진부할 수 있고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내 마음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신앙 생활을 오래하면 그만큼 더 새로운 노래를 드릴 수 있는 것이 정상이다.

시편 40:3에서 다윗은 “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라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노래를 주신다. 어떻게 주시는가?

“…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1절)

우리가 보기에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것으로 그렇게 하신다. 여기서 말하는 “기이한 일”은 기괴해서 이상한 일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긍정적으로 놀라운 일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평범하다고 할 수 없는 특별한 일이다. 이 일은 우리가 보기에 큰 일 일수도 있고 별 것 아닌 일 일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주가 하셨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이 의미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신 것이다. 오른손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하고, 거룩한 팔은 그 능력이 다른 무엇에 비할 수 없기에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임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일하신 것이다.

그 능력으로 하신 일을 여기서는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라고 표현했다. 하나님 스스로를 구원할 일은 없기 때문에 구원을 베푸셨다는 표현이 적절하지만, 문자적으로 번역하자면 “그를 위하여 구원하셨다(구원을 이루셨다)”라고 할 수 있다. 즉, 마치 하나님의 손(팔)이 하나님과는 다른 존재처럼 묘사되어서,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구원하였다고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3절을 보면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궁극적으로 이 구원도 하나님을 위한 구원이다.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것이 구원하는 일을 하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드러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직접 구원하실 뿐 아니라 그것을 알게 하신다. 나타내신다.

“여호와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시며 그의 공의를 뭇 나라의 목전에서 명백히 나타내셨도다”(2절)

구원과 공의가 여기서 함께 사용되었다. 지난 시편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과 공의는 함께 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알게 하실 때 하나님의 공의도 명백히 나타난다.

출애굽 사건이 그랬다. 단순히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굳이 열 차례에 걸친 재앙을 애굽 땅에 내릴 필요가 없었다. 굳이 반항하는 바로를 계속 살려둬서 일을 어렵게 만들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그렇게 하셨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방황하다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것도 그렇다.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과정도 그렇다. 구원하고 심판하는 것만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일부러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하셨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하셨고 사람들의 입으로 영광을 받으셨다.

라합의 고백이 좋은 예다.

2: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라합은 이방신을 섬기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구원을 알게 하셨을 때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알게 하시려고 자주 사용하시는 방법 중 하나는 약하고 작은 그래서 누가 봐도 힘이 없는 자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신 이유는 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특출난 부분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렇지 않음에도 그들을 택하심으로 하나님은 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이루어진 일임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이 정말 애굽을 대적해서 이길 정도의 민족이었다면 그들이 애굽을 나온 것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사사 기드온을 통해 미디안을 심판하는 모습에서도 같은 원리를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기드온을 보내시면서 그와 함께 하는 백성이 너무 많기 때문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삿 7:2). 그 이유로 말씀하신 것이 이것이다.

7:2 …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누가 구원하는지를 하나님은 확실하게 알리기 원하셨던 것이다. 그래도 우리 병력이 어느 정도는 되야 이길 수 있지 않을까와 같은 고민은 필요하지 않다. 그래도 300명은 있었으니까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그저 (걸리적거리는) 300명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주셨고 하나님의 구원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던 것 뿐이다. 실제로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에게서 구원하실 때는 단 한 명의 군사도 없이 여호와의 사자가 앗수르 군사 십팔만 오천 명을 송장으로 만들었었다.

골리앗과 싸워서 이긴 사람이 골리앗보다 크고 강한 누군가였다면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인줄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의 갑옷도 입기 어려워했던 다윗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승리를 주시고 누가 구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게 하셨다.

신약에 와서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12제자는 평범 혹은 그 이하의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교회의 기초를 놓으셨다. 그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해 더 드러났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고전 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고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이렇게 구원하신다. 하나님의 구원이 우리의 어떠함이나 행위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 하시는 일임을 하나님은 알리시고 우리도 그것을 알기 원하신다. 그것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든 혹은 지금 삶에서 경험하게 되는 작고 사소해 보이는 구원이든 마찬가지다. 무엇이든 그렇게 하나님은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우리에게 새 노래를 주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말하면 한편으로는 좀 서운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서 구원하신 줄 알았는데, 결국 자기를 위해서 구원하셨다니, 뭔가 이용 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들 수도 있고 더 나아가서 배신감이 생길 수도 있다. 정말 구원 받은 사람이라면 그러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분명히 알 필요는 있다.

그렇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하늘 나라에 와서 직접 하늘 나라를 보고 경험한 후에 다시 이 땅에 내려와서 그 나라에 대해서 말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용당한 것인가?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특권을 얻은 것에 대해서 감사할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것도 그렇다.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어떤 목적을 가지고 계시든, 그 자체로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은혜를 받은 것이다.

나 자신이 어떠한지를 생각해 봐도 그렇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서 감수하시는 희생을 생각해 봐도 그렇다. 3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해서 그렇게 하시는 이유를 “그가 이스라엘의 집에 베푸신 인자와 성실을 기억하셨으므로”라고 말한다. 인자와 성실은 언약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성실하게 지키신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 하나님이 아쉬운게 있어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이 아니다. 그저 사랑하기로 선택하셨을 뿐이고 아브라함에게 그 언약을 주셨을 뿐이다. 그 사랑이 동기가 되어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구원하셨고 그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알게 하셨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하나님의 역사를 통해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라고 선포할 수 있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지금도 계속해서 하나님은 구원을 알게 하시며 공의를 명백히 나타내고 계시지만, 문자 그대로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될 날이 다가오고 있다. 바로 우리가 지금 계시록을 통해서 보고 있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날이다.

52:9–10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10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

하나님은 구원하셨고 구원하고 계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구원을 아무도 모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알게 하신다. 우리가 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기이한 일을 본 우리는 어떻해야할까?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서 우리가 하는 일을 해야 한다. 메시의 플레이를 직관한 우리가 하는 일을 해야 한다. 세계적인 음악가의 연주를 들은 우리가 하는 일을 해야 한다. 환호하는 것이다. 방금 예로 든 그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즐거이 외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이신 구원이 그것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구원에 합당한 반응(4-9절)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소리 내어 즐겁게 노래하며 찬송할지어다”(4절)

“땅 끝까지 이르는 모든 것”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기 때문에, “온 땅”이 여호와께, 여호와로 인해 즐거이 소리쳐야 한다. 시편 기자는 비슷한 표현을 4절에서 시작해서 8절까지 계속해서 반복하며 구원에 합당한 반응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구원을 본 자는 즐겁게 소리치며 찬송해야 한다. 이것은 마땅한 반응이고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개인적으로 인생에서 가장 내가 외적으로 어떤 흥분이나 기쁨을 표현했던 때가 언제였을까 생각해보니, 2002년이었던 것 같다. 군생활을 할 때였는데, 우리나라가 한경기씩 이기면서 끝내 4강에까지 올라갔는데, 그때야말로 계급장 다 떼고 모두가 하나되어 기뻐하며 외쳤던 때인 것 같다.

생각해 보면 참 한심하지 않은가. 사람이 만든 경기다. 네모난 골대 하나 만들고 거기에 둥그런 공 하나를 발로 차서 넣는 게임이다. 그거 좀 다른 사람보다 잘한다고 그게 그렇게 좋아할 일인가. 심지어 다 큰 어른들이 그거 때문에 울고 웃고 한다. 심지어 자기하고 아무 상관 없는 사람들끼리 하는 경기를 보면서도 그렇게 한다. 아이들이 온라인 게임하는 것을 어른들은 한심하게 보는데, 사실 다를게 하나 없다.

누가 더 한심한지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것을 가지고도 그렇게 즐거워하고 소리치는 것이 자연스러운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왜 스포츠를 사람들이 좋아하는지 굳이 과학적으로 원리를 밝힐 필요가 없다. 우리는 원래 그런 것들을 좋아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존재다. 아름다운 꽃을 좋아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아름다운 음악을 좋아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거대한 자연을 좋아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위대한 건축물을 보면 좋아하고 그것을 표현한다. 예쁜 사람, 힘 센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그 자체로서 이상한 일은 아닌 것이다. 우리는 원래 그런 미에 반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나님의 구원은 얼마나 위대할까.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그 조건 없는 희생으로 인해 우리가 아는 사랑 중에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 부족한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녀가 아닌 원수에게 부모 이상의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을 위해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소방관들의 희생도 정말로 위대하다. 평생을 환자를 돌보며 자기를 희생한 의사들의 이야기도 우리의 마음을 뭉클하게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은 그에는 미치지 못하는걸까? 왜 그들의 이야기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하나님의 이야기에는 무감각할까? 내가 너무 대단한 사람이어서? 혹은 하나님이 별로 대단하지 않아서? 그렇지 않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희생은 그들과는 비할 수 조차 없다. 하나님의 구원만큼 아름답고 위대한 것이 없다.

혹시 우리가 매일 보는 하나님의 구원이 별 것 아닌 것은 아닐까? 내 삶에는 별로 ‘기이한 일’이 없는 것 같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 가운데 언제나 거할 수 있는 것이나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용서로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절대로 평범한 일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가 조금이라도 거룩하신 예수님을 닮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은 구원을 알게 하시고 보게 하신다. 하나님이 구원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즐거이 외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일들을 보면서도 아무렇지 않다면, 감사하고 싶지 않고 찬양하고 싶지 않다면, 전혀 그것이 즐겁지 않고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영적으로 맹인이어서 그렇거나, 혹은 지금 어떤 이유로 영적인 눈이 매우 흐려진 상태에 있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래서 제대로 보고 즐거이 외칠 수 있어야 한다. 제대로 보면, 즐거이 외칠 수 있다.

이어지는 5-6절도 같은 요청이다.

“5 수금으로 여호와를 노래하라 수금과 음성으로 노래할지어다 6 나팔과 호각 소리로 왕이신 여호와 앞에 즐겁게 소리칠지어다”(5-6절)

여기서는 어떻게 즐거이 외쳐야하는지가 언급되어 있다. 그냥 의미 없이 소리만 크게 지르는 것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즐겁게 노래하는 것이다. 수금은 현악기고 음성은 노랫소리다. 나팔과 호각은 관악기인데, 노래 중에 계속 사용되기 보다는 사람들의 주목을 끌어 시작을 알리거나 중간에 어떤 신호를 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를 구원하는 왕이신 여호와를 여호와 앞에서 즐겁게 찬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앞에 엄숙하게 무릎 꿇고 경배해야 할 때도 있지만, 이렇게 즐겁게 노래할 수도 있다. 특히나 하나님께서 그 구원을 나타내 보이셨을 때 그렇다. 모세와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나서 다함께 즐겁게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해야하는 것이다.

7절 이하의 말씀은 96편의 마지막과 유사하다. 의인화된 피조물들이 언급되면서 구원하는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져야 하는 아름답고 풍성한 예배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7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8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 노래할지어다”(7-8절)

사람을 제외한 다른 모든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한다. 지금은 피조물도 죄로 인해 탄식하고 있지만 그들도 즐거이 외칠 날이 올 것이다. 큰 물의 부딪힘은 박수 소리가 되고 산악에 부는 바람은 즐거운 멜로디가 되어 하나님께 드려질 것이다. 그렇게 구원자이며 왕이신 하나님을 맞이할 것이다.

이 시를 기록하면서 시편 기자의 마음은 점점 여호와의 구원이 온전한 모습으로 이 땅 가운데 드러나게 되는 그 끝날을 향했던 것 같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으니, 이제는 미래를 기대하는 것이다.

“그가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로다 그가 의로 세계를 판단하시며 공평으로 그의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9절)

의와 공평으로 세상을 판단하고 심판하셔서 이 땅에 진정한 구원을 보여주실 날을 기대하는 것이다. 이 장면은 모든 사람이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는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극명하게 나뉠 것이다. 즐거이 외치거나 두려워 떨거나다.

시편 기자는 그 날에 두려워 떨지 말고, 즐거이 외치라고 우리를 초청한다. 심판의 날을 생각하며 오히려 기대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범죄자에게 경찰이 온다는 소식은 나쁜 소식이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기쁜 소식이다.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반드시 의와 공평으로 판단하고 심판하실 것이다. 나의 행위로 그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자는 두려울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행위로 그 앞에 서는 자는 기뻐할 수 있다. 즐거워 할 수 있다. 두 팔 벌려 그날을 맞이할 수 있다. 심판의 날이 구원의 날이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우리는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도전

서두에서 말했듯 시편 98편은 순수한 찬양시로서 우리에게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즐거이 외치라고 초청한다. 우리가 할 일은 이 초청에 응하는 것이다.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가 타락할 줄 알면서도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다. 우리를 통해, 그리고 우리에게,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나타내시고 영광 받으시기 위함이다. 여호와의 구원을 보고 즐거이 외쳐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구원하셨는지를 기억하라. 성경에 기록된 것을 면밀히 살필 뿐 아니라, 실제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떻게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우연히 만난 누군가를 통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을지 모른다. 평생을 교회에 다녔지만 내가 뭐를 잘 해야 구원 받을 줄로만 알았는데, 말씀을 통해 그것을 깨뜨리시고 은혜로 값없이 구원 받을 수 있음을 믿고 구원에 이르렀을 수도 있다. 누군가 나의 구원을 위해 10년 혹은 20-30년을 기도했을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살리고 구원하셨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지금 어떻게 구원하고 계시는지를 민감하게 눈여겨 보라. 구원은 지나간 일이 아니고 지금도 이루어지고 있다. 다른 성도의 삶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내 삶에서도 그렇다. 내 삶에 있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려고 노력해야 한다. 내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봐야 한다.

끝으로 어떻게 구원하실지를 기대하라. 모든 불의가 바로 잡히고 무너진 질서가 회복될 그날을 기대하라.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놀라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노래로 즐거이 외치라. 우리의 예배가 그런 새 노래로 가득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