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가 복이 있도다

본문: 시편 112편

설교자: 최종혁

 

어떤 목사에게 한 성도가 찾아와서 이런 하소연을 했다고 한다. 직장 동료가 기독교는 현실의 고난을 회피하려는 나약한 자들의 손쉬운 도피 수단이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난 그 성도는 “그럼 어디 한 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보라. 육체의 욕망과 싸우고 낯선 땅에서 외국인처럼 살아 보고 나서 기독교가 손쉬운 도피 수단이라고 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성도의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아마도 그 말에 직장 동료는 이렇게 쉽게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힘들면 안 믿으면 그만 아닌가. 누가 교회 다니라고 강요하는 것도 아닌데, 왜 사서 고생인가.”

남이 이런 말을 하면 발끈하겠지만, 어쩌면 스스로도 이런 질문을 할지 모른다. ‘왜 사서 고생하고 있는지. 예수님 믿는다고 뭐 대단하게 바뀌는 것도 없는 것 같고, 삶에 크게 도움 되는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오히려 하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만 많아서 살기 더 힘들기만 한데, 왜 믿고 있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도 죽어서 지옥가면 안되니까 믿는걸까?

어쩌면 믿는 자들에게 어느정도 이런 생각과 태도가 있기 때문에 전도가 더 어려운지 모른다. 스스로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확신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믿음조차 막연할 수 있고, 그렇지는 않더라도 하나님이 지금 내 삶에서 딱히 뭔가를 하고 계신 것 같지 않은 것이다. 매체를 통해 듣고 알게되는 간증은 참 놀랍지만 나에게 그런 일은 (잘? 거의?) 없고 그냥 하루하루 살고 있을 뿐인 것 같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딱히 다른게 없다.

성도들과 나누는 삶의 간증이라고 하는 것들도 사실 세상 사람들도 경험하는 비슷한 것들을 하나님이 하셨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술, 담배 같은 것 안하고 일요일에는 교회 나가고 교회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정도가 차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건 동호회 열심히 하는 사람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그나마 동호회는 정말로 좋아서 그렇게 하는데, 나는 교회 나가는 걸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예전에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습관적으로 나갈 때가 더 많다.

이런 상태라면 당연히 전도는 생각하기 어렵다. 가까운 사람에게 전도하는 것은 훨씬 어려운 얘기가 된다. 내 신앙 생활을 옆에서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뭐가 잘못된 걸까, 아니면 원래 그런걸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당연히 원래 그런거라고 말할 것이다. 종교라는 것은 원래 그런거고 적당히 마음의 평안과 위로를 얻을 수 있으면 그걸로 된거라고 말할 것이다. 별로 도움이 안되면 기독교 말고 다른 종교 찾아보는 것도 좋다고 할 것이다. 정말 나약한 자들의 현실 회피 수단으로 종교를 보고, 기독교도 그 중 하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원래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다. 뭔가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삶이 그렇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시편 112편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복된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시편 112편은 111편과 쌍을 이루는 시편이다. 111편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일들로 인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마땅함을 말했다. 그래서 결론이 이러했다.

111:10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이라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다 훌륭한 지각을 가진 자이니 여호와를 찬양함이 영원히 계속되리로다

112편은 바로 이 10절의 말씀을 받아서 이렇게 선포하며 시작된다.

112:1 할렐루야,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할렐루야”는 111편의 시작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이 드려져야 할 것에 대한 명령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1절은  주제 선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2-10절은 이 주제에 대한 상세 설명이다.

주제 선언(1절)

1절의 주제 선언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이 시편은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복’은 행운의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행복이나 만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이 시편은 누가 행복한지, 누가 만족스러운 삶을 사는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복이 있도다”는 표현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가장 유명한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팔복’일 것이다(마 5:3-12). 예수님은 누구도 복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심령이 가난한 자”나 “애통하는 자” 등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가난과 슬픔이 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마음에 대해서 말씀하셨고 그들에게 어떤 참된 복이 약속되어 있는 지를 말씀하셨다.

시편 1편도 “복 있는 사람은”으로 시작하여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는지에 대한 말씀이었다. 시편 2편은 여호와께 피하는 모든 사람은 다 복이 있다고 선포했다(12절). 시편 32편은 허물의 사함을 받은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1절). 84편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128편 1절은 오늘 본문과 거의 유사하게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다. 시편에서만 비슷한 표현을 30번 정도 찾아 볼 수 있고, 이런 표현은 지혜 문학으로 분류되는 말씀의 특징이기도 하다.

앞서 교회에서는 하라는 것, 하지 말라는 것이 많다고 생각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히 어떤 명령의 집합이 성경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이 무엇인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는지를 말씀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삶은 괴롭고 힘든 삶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을 원하시고 우리가 만족하며 기쁘게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사람에게 “복”을 주셨다(창 1:28). 생육하고 번성하게 하셨고, 땅을 정복하고 모든 생물을 다스리게 하셨다. 마음껏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지금도 이렇게 할 수 있다면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 안에서 사람은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을 깬 것이 죄다. 사람은 참된 복을 버리고 다른 복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사람의 본질 자체가 달라진 것은 아니기에 여전히 참된 복은 하나님 안에 있다. 그래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한다. 죄로 타락한 세상이지만, 여전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이다.

그 방법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것이다. 둘 다 ‘순종’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순종이 따라오는 마음의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경외’는 대상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포함되어 있지만, 공포스러운 것과는 다르다.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것 앞에서 압도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가까이 하고 싶지만 가까이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이다. 그렇게 하면 안될 것 같은 마음이다. 그 위대함과 아름다움에 내가 합당하지 않다고 느껴지는 것이다. 그 앞에서 나 자신이 작게 느껴진다. 낮아진다. 그런데 그게 싫지는 않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크고 아름다움 앞에 내가 무릎 꿇는 것을 의미한다. ‘respect’라는 말이 요즘 가볍게 쓰이긴 하지만, 가볍지 않은 의미에서 하나님을 respect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 중요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것, 두려우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것이 경외한다는 말의 의미다.

그런데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이 싫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기도 한다. 계명은 명령이다.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의 집합이다. 그런데 그런 계명을 크게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이 짐이 아니라 기쁨이다. 짐이어서 할 수만 있으면 벗고 싶은 것이 아니라 반대로 기쁨이어서 할 수만 있으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즐거워한다고 했지만, 사실 그 근원에는 ‘하나님’ 자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계명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이다.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것은 반드시 복스러운 삶,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으로 나를 이끌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그 계명을 즐거워할 수 있다.

처음 하나님의 명령을 어겼던 아담과 하와가 바로 이런 면에서의 확신이 없었다. 뱀은 하나님의 명령을 부정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고 유혹했었다(창 3:5). 하나님의 명령을 어길 때 더 큰 행복과 만족이 있을 것처럼 아담과 하와를 속인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면 이 뱀의 말에 확실히 “아니라”고 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못했다. 하나님의 명령은 그들이 지키고 싶지 않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들의 행복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성경은 일관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를 위한 명령이다.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은 괴롭고 힘든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그것이 정말로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위한 명령이다. 따라서 그 명령을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다.

당연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즐거워하는 자는 하나님께 순종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외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즐거움이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 자체로 모순이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을 존중하고 귀하게 여긴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실 ‘말’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말’은 오히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고 즐거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더욱 증명하는 말이 될 뿐이다.

오래전 학교를 다닐 때, 지금처럼 선생님께 선물 같은 거 하면 큰 일 나는 때가 아니었을 때, 스승의 날을 맞아서 반 친구들끼리 돈을 모아 선생님께 선물을 했던 적이 있다. 노래를 불러드리고 선물로 멜빵을 드렸었는데, 선생님도 아주 좋아하시고 그래서 우리들도 다 뿌듯해 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나서 시험을 봤는데, 우리 반이 전체에서 꼴등을 했다. 그날 그 선생님께서 우리가 드린 멜빵을 하고 오셨었는데, 멜빵을 풀어서 쓰레기통에 버리시고는 화를 내면서 하셨던 말씀이 “이런 거만 해주면 무슨 소용이냐. 학생이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공부는 하지도 않고 이런거만 해주면 내가 좋아할 줄 알았냐”였다.

아마 선생님도 후회하실 말과 행동이었겠지만, 논리는 틀리지 않았다. 선생님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학생들이 수업을 잘 따라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지 멜빵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 부모들도 비슷한 감정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자녀들이 어버이날이라고 무슨 선물을 주면 고맙긴 한데, 속으로는 ‘평소에 좀 잘 하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어떤 자녀가 일년 내내 부모의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면서 어버이날이라고 선물과 함께 ‘사랑하고 존경한다’는 내용의 카드를 준다면 고맙기도 하고 그 순간 내일부터는 얘가 달라지려나 보다라는 기대를 할지 모른다. 그런데, 그 뒤로 일년 내내 똑같이 부모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어버이날에 같은 선물과 같은 내용의 카드를 준다면 고마움과 기대보다는 오히려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선물과 카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와 일치하지 않는 평소의 삶이 문제인 것이다. 그 삶에 부모에 대한 어떤 존중도 없다는 것이 문제다.

앞선 111편에서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에 대해서 생각해 봤었다. 우리는 기이한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전심으로 적극적으로 예배 드려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런 하나님께 순종으로 삶의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가 복이 있다고 1절 말씀은 선포한다. 그러니, 이제 2절부터 상세하게 설명할 복을 누리는 사람은 우리가 가볍게 말하곤 하는 ‘교회 다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다 이런 복을 누리지 못했다. 진정한 의미에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사람이 이런 복을 누릴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참된 만족이 있는 삶을 살 수 있었다.

시편 기자는 이제 이 복된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이 이런 삶을 누리는지를 말한다.

한가지 여기서 말하는 복에 대해서 먼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지금까지 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말한 복을 반드시 항상 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원하시는’ 복된 삶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복된 세상이 죄로 타락하지 않았다면, 이런 삶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항상 누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다. 처음 예시에서 말한 것처럼, 오히려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더 괴롭기도 하다. 하지만, 여전히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이 있다.

주제 설명(2-10절)

112:2–3 그의 후손이 땅에서 강성함이여 정직한 자들의 후손에게 복이 있으리로다 3부와 재물이 그의 집에 있음이여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

가장 먼저는 후손과 재물의 복이다. 욥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후손과 재물은 하나님께서 복주시는 삶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욥의 회복에 대한 말씀을 보면 모든 재물과 자손을 하나님께서 배로 주신 것을 볼 수 있다.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도 그렇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 주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그 중 하나는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이었고, 실제 그의 삶에 있어서는 풍성한 부와 재물이었다. 자손들의 강성함, 즉 성공과 풍성한 재물을 하나님은 정직한 자들이 누릴 수 있는 복으로 주신다는 말이다.

이런 말씀은 오늘날의 우리에게는 조금은 의아하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을 기대하면 안되고 오직 영적인 것을 기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자녀의 성공이나 재물과 같은 물질적인 것들을 구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누리면 안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 복으로 허락하신 것들을 우리는 누릴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구할 수도 있다. 믿는 자는 항상 세상에서 가장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뿐 아니라 육적으로도 만족하는 삶을 살길 원하신다.

그런데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전제다. 믿는 자에게 하나님은 항상 이런 복을 주시는 것은 아니라는 것과 또 하나는 우리가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여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 말씀에서도 “정직한 자”라는 표현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서 있으리로다”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닮아서 공의롭게 행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 사람은 애초에 세속적인 야망으로 이런 복을 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생각해 보면 말씀에 순종하는 삶 그 자체가 우리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으로 인도하여 복을 얻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쉽게 착각하는 것이 있다. 순종하는 자녀는 장수한다고 했으니까, 13층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놓고 왜 죽었냐고 하나님을 원망한다. 크게 착각한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는 애초에 13층에서 뛰어 내리지 않는다. 물론 어떤 특별한 기적을 통해 복을 주시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이미 주신 말씀을 통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우리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여러 위험을 피할 수 있게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방법이다.

비슷하게, 하나님의 계명을 내가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축소하고 나머지 영역에서 복을 구하는 경우도 있다. 어떻게든 내가 교회 잘 나가고 헌금 잘하고 봉사 열심히 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을 이뤄주실 것이라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자녀를 주의 교훈으로 양육하지 않고 순종을 가르치지도 않았으면서, 내가 교회 열심히 다녔으니까 자녀가 복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뭘 열심히 했으니까, 주식이 오르든 땅이나 집 값이 오르든 어떤 물질적인 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 역시 앞에서 언급한 것과 비슷하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자녀를 양육하는 것이 먼저고, 말씀에 따라 재정 관리를 지혜롭게 하는 것이 먼저다. 말씀이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복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112:4 정직한 자들에게는 흑암 중에 빛이 일어나나니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우리가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음을 전제로 말한다. 복이 있는 의인도 “흑암” 중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욥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욥은 이상적인 세상에서 살고 있는 듯 보였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땅에서의 모든 복을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루 만에 그 모든 것을 잃었다. 그가 무슨 죄를 범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지만, 그가 처한 상황은 괴로움으로 가득한 흑암이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칠흙같은 어둠 가운데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욥에게는 “빛”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흑암 중에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알 수는 없다. 애초에 저자도 그것이 무엇인지 밝힐 의도가 없었을 것이다. 여기 문맥 상 빛은 흑암을 이겨낼 수 있는 무언가일 것이다.

그 무언가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할 수 있다.

7:8 나의 대적이여 나로 말미암아 기뻐하지 말지어다 나는 엎드러질지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에 앉을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

97:11 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

하나님께서 빛이시고 하나님께서 빛을 주신다. 하나님께서 어둠을 이길 수 있게 하신다.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혹은 사람의 생각을 뛰어넘는 최악의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최후의 빛이 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여기 말하는 “정직한 자들”에 대한 표현이다. 그는 “자비롭고 긍휼이 많으며 의로운 이”다. 이 맥락이 아니면 이 표현은 정확히 하나님께 사용되어야 할 표현이다. 사실 3절 끝에 나왔던 “그의 공의가 영구히 성 있으리로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을 지칭한다고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다. 실제로 111편을 보면 3절에서 “그의 의가 영원히 서 있도다”고 말하고 4절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로우시도다”라고 말한다. 즉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여호와의 성품을 닮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하는 일도 여호와를 닮는다.

112:5 은혜를 베풀며 꾸어 주는 자는 잘 되나니 그 일을 정의로 행하리로다

그는 은혜를 베풀고 꾸어 준다. 시편 15:5에서 다윗은 비슷한 맥락의 말씀을 기록했다.

15: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

은혜를 베풀 뿐 아니라 정의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양식을 주시고 기업을 주시듯 그렇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자녀를 주시면 그를 잘 양육하여 복 있는 자가 될 수 있게 한다. 그들이 또한 세상에 강성해서 하나님을 선포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재물을 주면 그는 그것으로 자기 배를 불리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베풀고 꾸어 준다. 9절 역시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면 그 복을 흘려보내는 것, 그래서 다른 사람도 그 복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 자의 모습이다. 그저 누군가가 불쌍해서 도와주는 것과는 다르다.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모습을 닮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모습이다. 그에게 하나님은 필요한 복을 주신다. 혹, 흑암 가운데 있더라도 빛이 되어 주신다.

그렇기 때문에 의인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흔들리지 않는다.

112:6–8 그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함이여 의인은 영원히 기억되리로다 7그는 흉한 소문을 두려워하지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의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8그의 마음이 견고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할 것이라 그의 대적들이 받는 보응을 마침내 보리로다

의인도 사람들이 생각할 때 흔들릴만한 상황을 경험하지만 흔들리지는 않는 것이다. 흉한 소문, 즉 나쁜 소식을 들을 때도 있다. 이 ‘소식’도 특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나쁜 소식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욥처럼 재앙이 닥쳤다는 소식이 될 수 있다. 다윗처럼 누군가의 비방일 수도 있다. 혹은 그렇게 살면 결국 손해만 보게 될거라는 유혹일 수도 있다.

무엇이든 지금의 믿음을 흔들만한 소식이다. 하지만 의인은 그것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 어떤 소식보다 여호와를 의뢰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기로 굳게 정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서 두려워하지 않는다. 잘못 사는 것이 아닐까 무서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결국은 그 믿음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 다른 복이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사람들이 기억할 때(시 111:4), 의인의 믿음도 함께 기억될 것이다. 이것이 그들이 누릴 명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공의를 나타내실 때, 마침내 모든 거짓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때까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두렵게 하는 모든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계명이 진리임을 믿고 그렇게 사는 것이다. 그 끝에는 정말로 약속된, 반드시 현실이 될 소망이 기다리고 있다.

112:9–10 그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구히 있고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리로다 10악인은 이를 보고 한탄하여 이를 갈면서 소멸되리니 악인들의 욕망은 사라지리로다

의인의 의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기억될 것이고 그것은 단지 사람들만 기억해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억하실 것이다. 그래서 그의 뿔이 영광 중에 들리게 된다. 승리자로서 서게 될 것이다.

반대로 악인은 한탄하며 절망하게 된다. 이 땅에 있는 동안은 승패가 불명확해 보일 수 있다. 정말 하나님이 계신지, 하나님을 믿으면 정말 뭐가 다르긴 한건지, 잘 안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명확해질 때가 온다. 하나님을 끝까지 신뢰하고 말씀을 크게 즐거워하여 순종하는 삶을 산 자는 승리할 것이고, 그들을 비웃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산 자는 패배할 것이다. 자기 욕망대로 산 자들은 그 욕망이 끝내 그들에게 참된 삶을 주지 못함을 알게 될 것이다. 그렇게 악인은 끝내 소멸되지만 그 때도 “이를 갈” 것이다. 이는 분노의 표현이다. 끝까지 그들은 회개하지 않을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굳게 의지하여 순종하는 자는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것은 이 땅에서 그리고 다가올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아 자기를 굳게 의지하여 자기 욕망을 따라 사는 자도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을 것이다. 그 역시 이 땅과 다가올 세상에서 이루어진다. 이 사실을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분명하다. 복 주시는 여호와를 경외해야 한다.

도전

끝으로 이 말씀에서 우리가 얻어야할 교훈을 생각해 보자.

첫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에 대해서 생각해 보기 전에, 정말로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크게 즐거워하고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해서 순종하지 못하고, 그래서 약속된 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불안한거다. 진짜 성경에서 말하는 것처럼 살아도 될까 싶은거다.

그래서 머뭇거린다. 중간 쯤에서 헤맨다. 찬송가 가사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넓고 큰 바다와 같은데, 우리는 은혜의 깊은 바다로 들어가지 못하고 해변에만 머물고 있을지 모른다. 정말 저곳에 하나님의 복이 있는지, 혹시 갔다가 없으면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서 그냥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것이 두려워서 머물러 있으니,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도 경험하지 못하고 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정말로 우리가 두려워해야할 분은 하나님이시다. 흉한 소문도 아니고 대적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하고, 그래서 그분을 경외하고 그분의 말씀을 즐거워하여 순종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복 주심을 보고 경험할 수 있고, 그래서 더 순종할 수 있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 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복에 대한 나의 태도가 어떠한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감사하는지, 주신 것을 제대로 나누고 있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마치 원래 내 것이었던 것처럼 자랑해서는 안된다. 또한 하나님께서 주신 것은 나만 가지고 있으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나누라고 주신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고인 물은 썩듯이 고인 은혜도 그렇다. 은혜는 흘러가야 하고 그래야 또 흘러 들어 온다.

여기도 믿음이 필요할 것이다.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해야 한다. 나에게 주신 것이 재물이면 재물로, 시간이면 시간으로, 어떤 재능이면 재능으로, 무엇이든 그것을 나누어야 한다. 그런 자에게 하나님은 또 다른 복을 주심을 기억해야 해야 한다.

끝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결말에 주목해야 한다. 사실 이런 성경의 말씀에 많은 사람이 분노한다. 어떻게 사람에게 “악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어떻게 이런 저주의 말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경멸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진리다. 받아들이지 않고 이 경고의 말씀대로 멸망하든지, 아니면 하나님을 경외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든지, 성경은 우리에게 선택을 요구한다.

이 선택은 내가 해야 한다. 교회에 계속 나오면서 바른 선택을 하고 있지 않다면, 더 늦기 전에 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당신을 미워해서 심판하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히려 정반대다. 사랑해서 복을 주고 싶어 하신다. 그 하나님께 나아오기 바란다.

이에 대해 믿는 자들의 책임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을 살아 정말로 복된 삶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도 볼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만 복 주실려고 구원하신 것이 아니다. 나의 부모, 자녀, 배우자, 친구 등 나를 통해 많은 사람에게 복 주시길 원하신다. 예배에 대한 나의 태도가 그들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해준다. 성도에 대한 나의 말이 그들에게 교회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나의 삶이 믿음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러니 여호와를 정말로 경외하고 그의 계명을 정말로 즐거워하여 순종하며 살자. 하나님의 복이 우리 모두에게 가득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