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 합당한 온 땅의 예배

본문: 시편 96편

설교자: 최종혁

세상의 시각으로 볼 때 ‘기독교’ 혹은 교회의 두드러지는 특징이 몇가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포교 활동일 것이다. ‘포교’라는 말은 어떤 가르침을 널리 퍼뜨린다는 뜻이기 때문에 어떤 종교든 포교 활동을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기독교는 특히나 더 적극적인 포교 활동을 한다.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전도지’를 나눠주기도 하고 집집마다 찾아다니기도 한다. 지하철에서 전도하는 사람들도 과거에는 많이 있었다.

사실 요즘같이 개인의 권리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이런 포교 활동은 ‘포교질’로 비난 받기 쉽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나라니까 본인이 믿는 것 가지고 뭐라고 하지는 않겠지만 왜 그걸 남에게 강요하면서 피해를 주느냐는 식의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너 신천지같은 이단 아니야?”라는 말을 들으면 더 이상 대화를 이어가기가 쉽지 않다. 예전에는 그마나 교회에 오면 이런거 저런거가 좋아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 사람들의 기준에서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부족함 없이 살고 있고 혹 부족함을 느끼더라도 그것을 교회 혹은 하나님을 통해서 채울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포교는 성경적 용어로는 전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그리스도인이라면 실제로 전도를 하든 안하든 해야한다는 마음의 짐은 항상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이 기독교를 자칭하는 이단들이 많은 이유가 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교 활동 혹은 전도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잘못이다. 이 땅에 오셨던 예수님께서 사명을 마치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 바로 모든 민족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것을 ‘지상대명령’이라고 명명하여 기억하고 순종하려고 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지극히 높고 큰 명령으로 우리에게 주어졌고, 또한 복음의 가치를 아는 우리는 그것을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에 항상 마음의 짐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책임과 바람 이전에 우리가 바르게 대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예수님은 왜 그런 명령을 주셨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가치라는 것은 무엇일까? 생각해 보면 성경에서 말하는 제대로 된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득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복음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왜곡하여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고 하지 않는 이상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이득을 볼 사람은 없다. 오히려 손해를 보는 것이 정상이다. 너무 손해를 봐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 뿐 아니라 자기도 복음을 믿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 정상이다. 자기를 부인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에서 고난 당하고 핍박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겨야 한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도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남을 이해하고 용납하고 용서해야 한다. 심지어 복음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려야하기도 한다. 어떤 소수의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라 제대로 된 복음을 믿고 그에 따라 살아간 사람들은 크고 작게 다 이런 일들을 경험한다.

이렇게 좋을거 하나 없는 복음을 예수님은 왜 모든 민족에게 전하라고 하셨을까? 우리가 알고 있는 복음의 가치라는 것은 무엇일까? 이 질문에 대해서 우리는 결과적으로 얻을 것을 답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보다 더 근본적으로 ‘당위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볼 시편 96편이 바로 그 당위성에 대해서 말하는 시편이다. 간단히 말해, 하나님은 만물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한다고 할 수 있다. 마땅히 드려져야 할 예배가 드려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오늘 시편에서 우리는 여호와께 합당한 예배가 무엇인지를 배우게 될 것이다. 1-6절을 통해서는 왜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가 합당한지를 보고, 7-13절을 통해서는 무엇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에 합당한지를 볼 것이다. 그리고 끝으로 그것이 지금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교훈을 생각해 볼 것이다.

왜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가 합당한가(1-6절)

먼저 이 시편은 너무 자연스럽게 이렇게 시작한다.

1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할지어다”

95편도 이와 비슷하게 시작했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95편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오라’고 하며 함께 즐겁게 노래하며 하나님을 예배하자고 말하는 반면, 96편은 “온 땅”에게 명령하고 있다. 여기서 “온 땅”는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즉, 단순히 우리가 발을 딛고 살고 있는 “땅”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 거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사람 뿐 아니라 다른 모든 피조물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 3절 – “백성들”, “만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의미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와 민족을 의미하는 표현. 5, 7절의 “만국”도 마찬가지. 10절의 “모든 나라”도 3절의 백성들과 같은 표현. 즉, 모든 사람들이 명령의 대상.
    • 11절 – “하늘”, “땅”, “바다” + 거기에 충만한 것. 12절의 “밭”, “숲” 등의 표현은 단순히 사람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을 포함

즉, 1절 말씀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모든 사람(+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께 노래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익숙해서 이런 표현이 전혀 어색하거나 낯설지 않지만, 이 시편이 기록될 당시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도 이는 전혀 자연스러울 수 없는 명령이다. 당연히 그들 입장에서는 “내가 왜?”라는 질문이 나올 수 밖에 없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 “왜”에 대한 대답은 4절 이후에 나온다.

“새 노래”로 그렇게 하라고 한다. 항상 새로 작곡한 노래, 모르는 노래로 노래해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는 노래에는 새로움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우리의 삶은 반복되는 것 같지만 정확히 같은 날은 없다. 매일 매일이 다르고 그렇기에 매일 경험하는 하나님도 다르다. 그래서 같은 찬양을 불러도 그날 그날 나에게 다가오는 의미가 다르고 그에 따라 하나님께 드리는 노래도 다른 것이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똑같은 찬양을 불러도, 언제는 “나 같은”에 너무 감사할 때가 있고, 언제는 “살리신”에 감사할 때가 있다. “죄인”이라는 것이 더 크게 와닿는 날도 있다.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 삶에 개입하시고 우리가 그것을 인정할 때, 우리는 성경의 하나님을 새롭게 알게 되고 그로 인해 새 노래로 하나님께 노래하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온 땅”이 그렇게 하나님께 노래해야 한다고 외친다. 모두가, 누구나 그렇게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를 말한다.

2여호와께 노래하여 그의 이름을 송축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전파할지어다 3그의 영광을 백성들 가운데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가운데에 선포할지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앞서 말한 “새 노래”의 가사(내용)가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를 말한다. 그 노래는 “그의 이름”과 “그의 영광”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이 담겨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전능하심, 전지하심, 영원하심, 공의로우심 등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엄밀한 의미에서의 ‘찬송’이라고 할 수 있다. 꽃의 아름다움이나 혹은 어쩐 예술 작품이 나에게 어떤 실제적인 이익이 되지 않아도 우리가 그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자연스럽게 칭찬하는 것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새 노래는 “그의 구원”과 “그의 기이한 행적”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 특히 나에게 하신 일이 새 노래에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구원”이나 “기이한 행적”이라는 표현이 뭔가 거창한 것을 의미하는 것 같고 그래서 나하고는 좀 멀리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약하고 부족한 나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사실 “구원”이며 “기이한 행적”이다. 그 어떤 것도 당연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매일 우리의 삶이 그런 하나님의 역사이기 때문에 이런 노래를 “날마다” 부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매일의 삶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며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알고 인정하는 것이 ‘감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찬송’은 좀 더 공적이라면 ‘감사’는 좀 더 개인적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성경에서 찬송과 감사를 꼭 이렇게 엄격하게 구분해서 사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에 이런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신 일로 인해 찬송하고 감사하는 것이 예배다. 당연히 이런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이시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드리는 노래가 하나님을 향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1-2절은 “여호와께”라고 반복해서 말한다.

그런데 2절의 후반부와 3절의 동사를 보면 그런 예배의 다른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전파”와 “선포”다. “온 땅”이 “여호와께” 드리는 노래가 하나님의 백성 뿐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전하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오해하지 말 것은 여전히 예배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시는 일을 선포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지, 그것을 목적으로 예배가 드려진다는 말은 아니다. 즉, 참된 예배는 그 자체로 전도의 역할을 하는 것이지, 전도를 위해 예배를 드리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어쨌든 예배에 이런 측면이 있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꽤 중요한 측면이다. 우리가 떡과 잔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처럼, 우리가 드리는 모든 예배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이한 행적을 선포하는 공식적인 전도가 되는 것이다. 이 역시 우리가 예배를 생각할 때 잊지 말아야할 요소다. 우리(나)의 예배가 어떻게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행적을 아직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게 선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자, 그럼 미뤄두었던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 보자. 왜 온 땅은 여호와께 이렇게 노래해야할까? 왜 각자가 믿는 신을 예배하면 안될까? 왜 각자가 원하는대로 아무 신이나 섬기든, 혹은 아무 신도 섬기지 않든지 결정하면 안될까? 우리나라에도 처음 기독교가 들어올 때 “왜 서양신, 서양 종교를 믿느냐”는 얘기가 많았었다. 어차피 신을 섬길거면 우리 나라 신을 섬기면 되지 왜 굳이 남의 나라 신을 섬길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의 나라 신’을 섬길 이유가 있다. 굳이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신인 여호와를 섬겨야할 이유가 있다.

4여호와는 위대하시니 지극히 찬양할 것이요 모든 신들보다 경외할 것임이여”

여호와가 위대하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만이 경외함을 받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모든 신들보다 경외”해야 한다는 말이, 다른 신들도 경외하지만 그 중 여호와를 가장 경외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5절이 분명하게 여호와와 그 외의 ‘신’이라고 불리는 존재를 대조하여 말하기 때문이다.

5만국의 모든 신들은 우상들이지만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의 신은 우상들이다. 우상은 문자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것”, “헛된 것”, “실체가 없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상은 존재하지도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실체가 없는 것에 무슨 무슨 ‘신’이라고 이름하여 마치 실체가 있는 것처럼 그것들을 대하는 것 뿐이다.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면 마치 무언가가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우상은 아무 것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무 것도 아니다. 헛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우상 숭배가 얼마나 어이없게 어리석은지를 이렇게 적나라하게 말씀하셨다.

44:14–17 그는 자기를 위하여 백향목을 베며 디르사 나무와 상수리나무를 취하며 숲의 나무들 가운데에서 자기를 위하여 한 나무를 정하며 나무를 심고 비를 맞고 자라게도 하느니라 15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16그 중의 절반은 불에 사르고 그 절반으로는 고기를 구워 먹고 배불리며 또 몸을 덥게 하여 이르기를 아하 따뜻하다 내가 불을 보았구나 하면서 17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이것이 우상이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신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사람이 떡을 굽고 고기 굽는데 쓰는 나무가 어떻게 사람을 구원할 수 있는가. 아무리 그 신을 ‘하늘의 신’이라고 불러도 달라질 것은 없다. 사실 그 하늘조차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하늘이다. 사람이 마땅히 예배할 대상은 자기들이 나무나 돌을 깎아서 ‘신’이라고 이름한 우상이 아니라, 그들을 만난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이사야의 이어진 말씀에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44:21–24 야곱아 이스라엘아 이 일을 기억하라 너는 내 종이니라 내가 너를 지었으니 너는 내 종이니라 이스라엘아 너는 나에게 잊혀지지 아니하리라 22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23여호와께서 이 일을 행하셨으니 하늘아 노래할지어다 땅의 깊은 곳들아 높이 부를지어다 산들아 숲과 그 가운데의 모든 나무들아 소리내어 노래할지어다 여호와께서 야곱을 구속하셨으니 이스라엘 중에 자기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임이로다 24네 구속자요 모태에서 너를 지은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는 만물을 지은 여호와라 홀로 하늘을 폈으며 나와 함께 한 자 없이 땅을 펼쳤고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로서 구원자가 되신다. 시편 93편부터 계속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왕되심을 보게 되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심과 연결되어 있는 것도 보고 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기에 모든 것에 대한 소유권과 주권을 가지고 계신다. 여기서도 그렇다. 하나님이 유일한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유일한 하나님으로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의 하나님이 아니다. 서양 사람들의 신이 아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하나님이시고 따라서 온 우주의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의 사람이든 자기가 만든 신이 아니라 자기를 만드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에는 어떤 예외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또한 하나님을 전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말은 요즘같은 시대에 정말 시대착오적이고, 어이없이 배타적이며, 더 나아가서 어쩌면 법적으로 처벌을 받아야 할 수도 있는 혐오 발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이 예배를 멈출 수 없다. 이 전도를 멈출 수 없다.

우선, 그것이 절대로 혐오가 아니라 사랑이기 때문이다. 때로는 진실을 덮어주는 것이 사랑일 때도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불구덩이를 향해 나아가는 어린 아이가 혹시 마음이 다칠까봐 괜찮다고 말해주는 부모는 없다. 때려서라도 위험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부모이고 그것이 사랑이다. 우리가 참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고 선포하는 것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미워하기 때문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선포하지 않는 것은 예배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한 혐오가 되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멈출 수 없고,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한다고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6절의 말씀을 보라.

6존귀와 위엄이 그의 앞에 있으며 능력과 아름다움이 그의 성소에 있도다”

어느 시간, 어느 장소이든 하나님이 이런 분이심은 변하지 않는다. 존귀와 위엄과 능력과 아름다움이 언제나 하나님께 있기에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사는 사람이든 그런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그렇게 하나님을 예배해서 우리가 무엇을 얻느냐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통해 무엇을 받으시냐가 중요하다. 우리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어떻게 전파되고 선포되는지가 중요하다.

우리에게 날마다 새로운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은 새 노래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한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은 변하지 않는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위대하신 하나님께는 위대한 예배가 합당하다. 그런 예배가 드려져야 한다. 이어지는 말씀에서 우리는 무엇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에 합당한지를 배울 수 있다.

무엇이 여호와께 드려지는 예배에 합당한가(7-13절)

먼저 7절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하든 예배를 통해 무엇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는지를 말한다.

7만국의 족속들아 영광과 권능을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여호와께 돌릴지어다”

이미 지금까지의 말씀에서 “영광과 권능”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런 하나님께 영광과 권능을 돌린다는 것, 즉 드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간단히 말해서 이는 영광과 권능이 하나님께 속했음을 인정하고 그렇게 선언하는 것이다. 본래 영광스러운 분을 영광스럽다고 말하는 것, 본래 능력있으신 분을 능력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없던 영광과 권능이 하나님께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모든 영광과 모든 능력을 가지신 분이심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는 실제로 예배 가운데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 태도를 통해서 드러난다.

8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물을 들고 그의 궁정에 들어갈지어다 9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 온 땅이여 그 앞에서 떨지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예물을 가지고 나아갈 것, 아름답고 거룩한 옷을 입고 예배할 것, 그리고 그 앞에서 떨 것을 말한다. 이 모습은 위대한 왕 앞에 나아가는 종의 모습이기도 하고 또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제사장의 모습이기도 하다. 예배자는 무언가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가지고 예배의 장소로 나아가고, 또한 예배에 합당한 옷을 입고, 낮아진 자세로 하나님 앞에 선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다.

여기서 예배하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예배하는 자처럼 예배의 자리로 나아오고 있는가. 우리는 마치 스포츠 경기나 영화, 혹은 어떤 쇼를 관람하듯 예배하러 올 때가 있다. 돈을 내고 그에 합당한 무언가를 얻기 위해 예배의 자리로 오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는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찬양 인도자는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골라 익숙하게 인도해야 하고, 설교자는 나한테 필요한 말씀,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말씀, 내가 좋아할만한 말씀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를 지루하게 만들면 안되고 불편하게 만들면 안된다. 그 시간에 내가 예배를 드리는 자이며 나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절대로 하나님께 합당한 모습이 아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그러해서는 안되고 예배자의 모습도 그렇다. 7-8절에서 계속 반복되는 표현을 보라. “여호와께(그에게) 돌릴지어다”. 예배는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하시는 일에 우리가 화답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물을 드려야 한다. 꼭 헌금을 해야한다는 말이 아니다. 무엇이든 하나님께 드릴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와야 한다는 말이다. 당연히 그것은 ‘준비’되어야 한다. 귀한 사람에게 주는 선물은 오래 고민하면서 고르고 또 고르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드릴 예물도 그런 것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기도를 하든, 찬양을 하든, 성경을 읽든, 그냥 되는대로가 아니라 잘 준비하여서 해야하는 것이다. 새 것으로 드려야 한다.

그런 준비에는 의복과 같이 외적인 것도 포함되어 있다. 9절은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의 속성을 반영하는 아름답고 거룩한 것을 입고 예배하라는 의미다. 구약의 제사장들이 그렇게 했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옷을 입고 예배해야했고 그렇지 않을 경우 죽임을 당할 수 있었다.

이 말이 우리가 예배할 때 항상 가장 좋고 비싼 정장을 입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하나님에 대한 경외의 마음이 우리의 외적인 부분을 통해서도 드러나야 한다는 의미는 된다. 지난 시간에도 말했지만 우리가 왜 상견례 자리에 트레이닝복을 입지 않는지 생각해 보라. 왜 결혼식에 편하게 무릎이 나온 옷을 입고 가지 않는지 생각해 보라. 우리의 마음이 그렇게 겉으로 표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으로 인한 거룩한 떨림이 우리 예배 가운데서도 그렇게 외적으로도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10절에서 우리는 예배에 합당한 고백을 볼 수 있다.

10모든 나라 가운데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세계가 굳게 서고 흔들리지 않으리라 그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시리라 할지로다”

이것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통해 선포되어야 할 고백(메시지)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다스리시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고 있다. 모든 나라 가운데 아직 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누리면서 감사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그 은혜를 주시고 계시지만, 언젠가 만민을 공평하게 심판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때까지도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그 심판의 날은 두려운 날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게 되겠지만, 안타깝게도 때는 늦게 된다.

하지만 여호와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는 참된 예배자라면 그날을 기쁨으로 맞이한다.

11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며 바다와 거기에 충만한 것이 외치고 12밭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즐거워할지로다 그 때 숲의 모든 나무들이 여호와 앞에서 즐거이 노래하리니 13그가 임하시되 땅을 심판하러 임하실 것임이라 그가 의로 세계를 심판하시며 그의 진실하심으로 백성을 심판하시리로다”

11-12절은 여호와의 온전한 통치가 나타나는 그들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묘사하기 위해 하늘, 땅, 바다, 밭, 숲 등이 언급되어 있다. 디즈니 만화를 보면 어떤 즐거운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주인공이 주변에 있는 동물이나 나무 등과 함께 노래를 하는 장면들이 나오는데, 딱 그런 이미지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처럼 지금 모든 피조물은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이 바로 잡히고 모든 피조물이 기뻐할 날이 올 것이다.

그날은 13절에서 반복해서 말하는 것처럼 “그가 임하시는” 날이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계획하심에 따라 죄의 세력을 멸하시고 모든 불의를 바로 잡으시고 이 땅에 당신의 주권을 그대로 드러내는 날이다. 그 때가 되면 여호와께 합당한 온 땅의 예배를 우리는 보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 가운데 참여하여 그 기쁨을 함께 누리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지금이라도 우리가 선포할 메시지는 동일하다. 왕이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고, 그 하나님만이 예배를 받으시기에 합당하심을 우리는 날마다 새 노래로 노래하고 선포해야 한다.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께 우리는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속성과 행사를 바르게 드러내야 한다. 우리의 말, 행동, 태도 등의 모든 것이 그러해야 한다.

도전

그럼, 이 말씀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우리가 이런 예배를 드려야 함을 요구한다. 서두에 말했듯, 시편 96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온 땅을 대상으로 한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을 대상에서 제외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당연히 이런 예배를 드려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날마다 선포해야 한다.

나는 예배의 자리에 어떻게 오는지를 점검해 봐야 한다. 어떤 수단으로 오는지가 아니라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오는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냥 예배당에 오는지, 예배를 보러 오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러 오는지 점검해 봐야 한다. 그냥 주일이니까, 교회 가는 날이니까 교회 가는 것이 아니다. 일주일에 한번 친한 사람들하고 만나서 얘기도 하고 운동도 하려고 이곳에 모이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다.

집에서는 혼자 예배할 수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사랑하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감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드리는 예배가 하나님께 합당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우리는 모여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해 모인다. 새 노래로 노래하고 그의 구원을 전파하기 위해 모인다.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포하고, 그분의 나라가 임하기를 소망하기 때문에 모인다. 우리가 모일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나라를 지금 맛볼 수 있는 이 땅의 하나님 나라가 된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왕되심을 드러낸다.

우리가 모여서 예배한다는 것은 이런 의미다. 예배를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라. 그리고 이 성경의 명령에 순종하기 바란다.

시편 96편의 일부는 다윗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지고 올 때 드렸던 찬양의 내용과 같다(대상 16장). 시편 96편의 배경이 바로 그 사건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다. 언약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했고, 언약궤가 예루살렘에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왕은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선포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실 뿐 아니라 온 땅의 왕이심을 그는 알았고 그랬기 때문에 그는 “온 땅이여 여호와께 노래하며 그의 구원을 날마다 선포할지어다. 그의 영광을 모든 민족 중에, 그의 기이한 행적을 만민 중에 선포할지어다”라고 외쳤던 것이다(대상 16:23-24).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그냥 우리끼리 좋아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예배가 전도이고 선교다.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로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을 온 땅에 선포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