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 기뻐하라
본문: 시편 97편
설교자: 최종혁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좀 다르다고 느끼는 경우가 있다. 구약은 ‘율법’으로 대변되기 때문에 하나님도 좀 엄하신 분으로 느끼고, 신약은 ‘은혜’로 대변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너그러운 분으로 느끼는 것이다. 구약의 하나님은 진노와 심판, 공의의 하나님이시라면, 신약의 하나님은 인내와 구원,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성경을 읽어 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구약과 신약은 언약이 주어진 때와 성취된 때를 기준으로 나누어진 것 뿐이지, 그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약속을 주신 하나님이나 성취하신 하나님이나 동일한 분인 것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나 구원하시는 하나님이나 같은 분이시다.
사실 구약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보면 항상 그 가운데 구원도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노아의 홍수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어느날 갑자기 기분이 상해서 대홍수를 일으켜 사람들을 죽게 했던 것이 아니다. 먼저 사람들의 죄가 가득해서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어야 했는데, 그 때도 하나님은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하셨고 실제로 비가 쏟아지고 땅의 물이 터져 솟구쳐올라 사람들이 멸망할 때까지 회개의 기회를 주셨다.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죄로 인해 도시 전체가 심판을 받았지만 하나님은 그 중 10명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그들을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었다. 10명의 의인도 없어 도시를 심판하셨지만, 결국 그 안에 있던 롯의 가족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기도 하셨다.
출애굽 사건도 애굽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 외에도 그 중에서 구원은 은혜를 누린 사람들이 있었다. 가나안 정복도 그 땅 민족에 대한 심판의 의미가 있었는데, 그 때도 하나님은 그들의 죄가 가득 찰 때까지 심판을 미루셨고 또한 라합처럼 그 땅의 민족이라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나오는 자들에게는 구원의 은혜를 베푸셨다.
하나님의 심판은 언제나 공의롭고 또한 은혜롭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기록인 계시록을 봐도 동일한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렵지만 그때에도 하나님은 구원을 베푸신다.
이 모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의 역사에서 우리는 동일한 하나님을 보게 된다. 우리가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느냐에 관계없이 하나님은 동일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이해해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만 생각하여 결국은 누구도 심판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혹은 내가 잘못하는 일들을 회개하지 않아도 눈 감아 주실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 경우 방종한 삶으로 나아가게 된다. 반대로 하나님을 공의의 하나님으로만 생각하여서 항상 두려워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고 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이 경우는 죄를 지으면 죄책감은 있지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자백과 회개가 없다. 죄를 감추려고 하고 겉보기에만 의로운 삶을 추구하게 되기도 한다. 균형잡힌 신앙은 결국 하나님에 대한 균형잡힌 이해의 결과다.
이렇게 하나님은 동일하시지만, 개인의 궁극적인 경험의 측면에서 보면 하나님은 다르게 느껴지는 것이 맞다. 하나님은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베푸시지만, 사람은 그 중 하나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크고 작게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모든 사람이 경험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구원 혹은 심판 둘 중 하나를 경험한다는 말이다.
앞서 예로 들었던 사건들을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동시에 경험한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둘 중의 하나를 경험했다. 노아의 방주에 들어간 사람은 구원을, 그렇지 않은 사람은 심판을 경험했다. 그럼,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까? 왜 어떤 사람은 심판을 경험하고 어떤 사람은 은혜를 경험할까? 아니, 애초에 왜 하나님이 심판을 하신다고 우리가 심판을 당해야하고, 왜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은혜가 필요할까?
이런 질문에 대한 답을 오늘 본문인 시편 97편에서 찾을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위엄으로 모든 피조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며 또한 그런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반응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이 시편의 주제문이라 할 수 있는 1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니”(1-6절)
“여호와께서 다스리시나니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1절)
시편 93:1과 같이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절대적인 진리를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성경의 하나님 외에도 “다스린다”고 말할 수 있는 왕들이 있다. 하지만 그 왕들의 통치는 언제나 제한적이다. 위대한 정복자라고 불리는 알렉산더나 징기스칸 같은 사람들도 그랬다. 그들이 다스린다고 해서 다른 왕은 다스리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왕들도 다스렸다. 사람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의 통치에도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다스린다고 할 때는 당연히 특정 대상이 언급되어야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대상을 확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던 것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고 말할 때는 그 의미가 달라진다. 여호와께서 다스리는 것처럼 다스리는 사람이나 다른 존재는 없다. 여호와께서는 만물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온 땅의 주”(5절). 여호와만이 굳이 통치의 대상이 언급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왕이시다. 무엇을 말해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라고 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모든 왕들은 전쟁을 통해 통치의 영역을 넓히고 왕권을 확고히 하려고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신다. 시편 93편에서 봤던 것처럼 큰 물이 아무리 소리를 높이고 그 물결을 높여도 높이 계신 여호와의 능력은 그것들과는 비할 수 없이 크시다. 94편에서 본 것처럼 악인들이 잠시 개가를 부르며 기뻐하고 교만할지라도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행위대로 갚으실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통치하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으신다.
서두에서 언급했던 심판과 구원의 사건들을 생각해 보라. 거기에는 어떤 의미있는 반항이나 저항이 없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기에 어려움을 겪으신 경우가 없고, 구원하실 때도 마찬가지다. 인본주의에 바탕을 둔 신화나 영화들을 보면 신이 인간을 심판할 때 인간들이 힘을 합쳐서 신을 괴롭히고 때로는 이기기도 하지만 하나님께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바벨탑을 생각해 보라. 인간들은 자신들의 지혜와 지식, 힘을 다해서 흩어지지 않으려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을 때 그들은 흩어질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의 생각처럼 다스리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신다. 그저 다스리신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일어나는 일들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이 전적으로 자유의지를 가진 존재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전적으로 주권을 가진 존재가 되면 안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악이 존재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악을 원하지 않으시지만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준 이상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음 아파 하시며, 모든 것을 바로 잡기 위해 지금 열심히 일하시고 계시다고 한다. 그들의 논리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모든 것이 바로 잡힐지는 알 수 없다. 그저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아파하고 있고 나름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얻을 뿐이다.
그런데 그것이 정말 위안이 되는가? 성경의 예언들이 반드시 성취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어떻게든 되게 해보겠다는 말씀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 소망이 되는가? 계시록의 말씀들이 우리 앞에 펼쳐질 확정된 미래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운 계획일 뿐이고 어떻게 될지는 그때가 되어봐야 아는 것이라면 그 말씀이 지금 우리에게 무슨 힘이 되고 격려가 되는가?
하나님의 다스림은 그런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은 여느 왕들처럼 더 잘 다스리기 위해 더 많이 다스리기위해 고민하거나 노력하지 않으신다. 사탄과 그의 추종자들(천사와 인간을 포함한)이 하나님을 대적한다고 말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벗어나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움직일 뿐이다. 하나님의 반대편에 선 자들은 나름 최선을 다해 하나님을 방해하려고 해왔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정해진 때에 정해진 방법으로 정확하게 이루어져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기록을 보라. 예수님의 대적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계획과는 관계없이 혹은 오히려 그 계획을 무너뜨리기 위해 움직였지만, 결국은 그것들조차 하나님의 계획에 있었고 그렇게 정확히 예언이 성취되었다. 심판이든 구원이든 하나님은 원하시는대로 하실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지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계속 보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이 왕이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신다. 상대적인 통치가 아니라 절대적인 통치다.
그래서 1절은 그에 대한 반응으로서 “땅은 즐거워하며 허다한 섬은 기뻐할지어다”라고 말한다. 이는 시편 96편 11절 이하의 말씀에 대한 간단한 요약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기뻐하라”는 말은 “환호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통치,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기쁨으로 영접하라는 명령이다.
“땅”과 “허다한 섬”은 이곳과 이곳에서 가장 먼 곳(땅 끝)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사 42:10 항해하는 자들과 바다 가운데의 만물과 섬들과 거기에 사는 사람들아 여호와께 새 노래로 노래하며 땅 끝에서부터 찬송하라
앞서 말한 것처럼 여호와의 통치는 어떤 지역에 제한되지 않고 전 우주적이기 때문에 이렇게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어느 곳의 누구든 여호와의 다스리심을 인정하고 기쁨으로 화답해야 한다. 시편 기자는 모두가 그렇게 해야하는 이유를 하나님을 위엄을 가지고 심판하는 왕의 모습으로 묘사함으로써 강조한다.
“구름과 흑암이 그를 둘렀고 의와 공평이 그의 보좌의 기초로다”(2절)
구름과 흑암은 하나님의 임재에 자주 동반되어 나타났다. 십계명이 주어지기 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구름과 흑암이 있었다.
신 4:11 너희가 가까이 나아와서 산 아래에 서니 그 산에 불이 붙어 불길이 충천하고 어둠과 구름과 흑암이 덮였는데
이는 그 자체로서 사람들을 두렵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두려워 했었다. 하지만 지금 시편 기자가 묘사하고 있는 상황은 하나님께서 단순히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라 심판하시는 분으로서 나타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심판하는 왕의 자리에 앉아 계시고 그 기초는 의와 공평이다. 하나님은 행한대로 의롭게 심판하신다.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예전에는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학생들을 합법적으로 체벌할 수 있었다. 학생과 학부모를 포함해서 누구도 때리고 맞는 것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때 시험을 보고 나면 틀린 개수대로 체벌을 하셨던 선생님이 계셨다. 시험이 끝난 후 첫 시간에 교실에 앉아 그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던 때의 공기가 아직도 기억난다. 공기는 정말 차갑고 무거웠고, 다들 떨고 있었다. 정말로 덜덜 떨고 있었던 친구들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친구들도 긴장된 마음으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선생님을 기다렸다. 그리고 선생님의 발소리가 들리면 고개를 숙이고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러면서도 선생님의 얼굴 표정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 보이시면 내심 기대를 했었고, 굳은 표정이면 어쨌든 빨리 그 시간이 지나기만을 바랐다.
교사 한 사람의 임재가 수많은 학생들을 두렵게 하는 것이다. 시험을 망친 학생들은 “난 죽었다”라고 말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는 그에 비할 수 없다. 3-5절은 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3불이 그의 앞에서 나와 사방의 대적들을 불사르시는도다 4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니 땅이 보고 떨었도다 5산들이 여호와의 앞 곧 온 땅의 주 앞에서 밀랍 같이 녹았도다”(3-5절)
이 장면에 대한 가장 적절한 반응은 히브리서 12:29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하나님은 그 대적들을 심판하신다. 멸하신다. 시험을 망친 학생은 그냥 과장된 표현으로 “난 죽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의 대적들은 실제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심판하는 자가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피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는 없다. 그의 번개가 세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없는 곳이 없다. 모두가 볼 수 있고 모두가 떨 수 밖에 없다. 그런 하나님의 위엄을 볼 때 사람들이 가장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산들조차도 밀랍 같이 녹는다. 불 앞에 초가 녹아 내리는 것처럼 된다는 것이다. 큰 물이 하나님 앞에서 크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산들도 하나님 앞에서 변치않음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역사의 여러 순간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을 나타내시고 대적들을 심판하시는 모습을 보아왔다. 그리고 계시록에 기록된 최후의 심판이 이 땅에 내려질 때 우리는 의와 공평으로 심판하시는 왕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하늘이 그의 의를 선포하니 모든 백성이 그의 영광을 보았도다”(6절)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심판하실 때 나타나는 모든 현상들을 통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선포될 것이다.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모든 백성(모든 사람들)이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땅에 악을 허용하신 궁극적인 목적이다. 하나님은 악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시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볼 수 있게 하시는 것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나와 관계 없지 않다. 나도 그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외없이 모든 사람을 다스리시고 따라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신다. 우리 삶에 대한 우리의 답안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은 의와 공평으로 채점하시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우리에게 물으실 것이다. 단 하나의 오답도 완전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용납되지 않는다. 세계를 비추는 하나님의 번개가 우리의 모든 것을 드러낼 것이고, 산을 녹이는 하나님의 불이 우리를 불사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은혜는 다른 누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우리를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다.
요 3:14–18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15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17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오답이 가득한 우리의 답안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답안지를 하나님께 가지고 나갈 때, 우리는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 떨림이 아니라 기쁨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앨런 로스는 1절의 “즐거워하며 기뻐할지어다”라는 명령을 확대하면 “믿음을 가지라”는 호소라고 말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모른 척하거나 그 위엄을 부정하면서 그냥 떨리는 마음을 어떻게든 억제하고 즐거워하라는 명령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반대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아 마땅한 자신을 봐야 한다.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앞에 나아가야 한다.
이 명령에 대한 선택이 가져올 차이에 대해서 본문의 나머지 구절이 말해준다.
“기뻐하라”(7-12절)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는 다 수치를 당할 것이라 너희 신들아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7절)
먼저 분명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한 자들의 결국은 “수치”다. 이미 3절에서 “불사르시는도다”라는 표현이 있었고 이어지는 8절도 이들이 “심판”을 받게 될 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한다. 하나님을 거절한 자들은 조각한 신상을 섬기며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신이라고 부르는 것들조차도 사실은 여호와께 경배해야 한다.
‘신들이 여호와를 경배해야한다’는 표현은 사무엘상 5장의 언약궤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블레셋 사람들이 하나님의 언약궤를 빼앗아 다곤 신전에 두었는데, 다음 날 보니 다곤이 언약궤 앞에 엎드러져 그 얼굴이 땅에 닿아 있었다. 사람들은 다곤을 일으켜 다시 제자리에 두었지만 다음날에도 다곤은 그렇게 엎드러져 있었고 심지어 머리와 두 손목은 끊어져 있었다. 하나님은 이를 통해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얼마나 무의미한지를 보여주셨고 오직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만이 경배 받기에 합당하심을 드러내셨다.
그때만 그렇게 하셨던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역사에 개입하시면서 심판과 구원의 일을 행하시는 것은 그렇게 참된 하나님을 드러내기위함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조각한 신상을 버리고 허무한 것으로 자랑하지 않게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을 거절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는 자는 결국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참되고 의미있다고 주장한 모든 것이 거짓인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지금은 반대다. 오히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수치를 당하고 있다. 마치 있지도 않은 신을 섬기는 자들처럼 취급 받으며 조롱을 당한다. 우리의 믿음과 신념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게 이용 당하기 딱 좋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잡힐 날이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고 심판하실 그 때다. 이 심판의 소식은 대적들에게는 절망의 소식이지만, 하나님의 편에 선 자들에게는 기쁨의 소식이다.
“8여호와여 시온이 주의 심판을 듣고 기뻐하며 유다의 딸들이 즐거워하였나이다 9여호와여 주는 온 땅 위에 지존하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시니이다”(8-9절)
시온과 유다의 딸들은 상징적인 표현으로 하나님을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인정하며 그분 앞에 무릎 꿇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 믿는 자들이다. 그들은 주의 심판에 기뻐하게 될 것이다. 심판의 주를 만나는 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운 날이 아니라 오히려 기다리던 날이다. 온 땅 위에 높으시고 모든 신들보다 위에 계신, 유일하신 하나님이 마침내 그 영광을 나타내실 때, 그들도 궁극적인 구원을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10-12절은 그날을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 가지를 요구한다. 하나는 악을 미워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지금 기뻐하라는 것이다.
“10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 그가 그의 성도의 영혼을 보전하사 악인의 손에서 건지시느니라 11의인을 위하여 빛을 뿌리고 마음이 정직한 자를 위하여 기쁨을 뿌리시는도다”(10-11절)
먼저 시편 기자는 이렇게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자들을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이다.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은 사랑의 결과다.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하나이기 때문에 섬김과 예배의 대상도 하나다. 사랑의 헌신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들은 당연히 악을 미워한다. 선이신 하나님을 선택했다면 악은 당연히 거절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전혀 무리한 요구가 아니다. 오히려 자연스러운 변화다. 우리는 자연적으로 악을 좋아한다. 아무도 안그렇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성경의 기준에서 말하는 ‘악’을 우리는 좋아한다. 쉽게 말해 나의 유익을 추구하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더 이상 나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더 알아가면서 자연스럽게 악에서는 멀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명령’으로 주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말한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악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사실이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어떤 사소한 일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별로 해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 그냥하는 경우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계기를 통해서 그 사소한 일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얼마나 큰 상처를 주었는지 알게 되면 더 이상 그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진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하지 않게 된다.
우리에게 이런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 죄가 나에게 좋지 않고 궁극적으로 내가 사랑하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사실을 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죄의 결과만 보면 그것이 별로 해도 없어 보이고 큰 문제가 없어 보인다. 오히려 한번씩 그렇게 하는 것이 억눌린 마음을 해소하는 면에서 긍정적인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죄는 좋은 면이 없다. 우리가 만들어낸 헛된 가치가 있을 뿐이다. 악을 미워해야 한다. 미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를 죄로 이끌고 유혹하고 넘어뜨리는 것이 있다면, 계속해서 그것의 나쁜 면을 생각해서 미워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더 알아가서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을 나도 미워해야 한다.
그런 자들이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경험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쁨을 지금 누릴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들을 “의인”이라 부르며 그들이 추구해야할 삶의 기쁨이 무엇인지를 마지막으로 강조한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할지어다”(12절)
우리들에게 작은 기쁨, 일시적인 기쁨을 주는 것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기쁨은 다스리시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와야 한다. 궁극적으로 의인은 그렇게 기뻐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 인해 기뻐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으로 인해 감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실 것이지만, 지금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사탄의 세상 같을 수 있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세상 같을 수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우리가 사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하나님의 세상이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이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의 삶은 그 삶의 끝이 다를 뿐 아니라, 지금의 삶도 다르다. 우리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다. 항상 기뻐할 수 있다. 그러니 기뻐하라.
도전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이 어떻게 들리는가? 좋은 소식인가, 나쁜 소식인가? 관심없는 소식인가? 앞서 말했듯, 관심 없을 수는 있지만 관심을 두지 않으면 안되는 소식이다. 그렇다면 결국 그 소식은 나쁜 소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호와께서 다스리신다는 말은 나쁜 소식이 되어야할 필요가 없다.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주지 않으셨다면 여호와의 절대적인 통치는 절망적인 소식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그러셨듯 심판하시기 전에 피할 길을 주셨다. 구원의 길을 주셨다. 당신이 그 길을 선택한다면 심판과 수치에서 벗어나 구원과 영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왕이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우리는 마지막 두 명령을 중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는 하나님을 가볍게 생각하는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너무 잘 알고 친밀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불순종은 친밀함의 증거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이 가볍게 들린다면 오늘 말씀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왕이신지를 다시 묵상해 보라. 하나님은 두려운 심판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우리도 그분의 불 앞에 멸망할 자들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통치자이시다. 왕이시다.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기쁨은 순종에서 오는 것이지, 내 맘대로 사는 삶에서 오지 않는다. 만약 나의 즐거움이 거기에 있다면, 내가 정말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인지, 그 발 앞에 무릎 꿇은 자인지 돌아봐야 한다. 내가 그런 자라면, 악을 미워하고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기를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