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9)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헤트: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이다 하였나이다”(57-64절)
오늘 본문은 어쩌면 지금까지 살펴봤던 시편 119편의 말씀 중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이라는 제목을 가장 잘 설명하는 본문일 것이다. 오늘 본문은 언약의 말씀에 따라 언약의 삶을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오늘 본문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일까?”라는 질문에 답한다. 크게 언약의 백성의 고백, 실천, 그리고 기도에서 그 답을 찾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가 제시하는 답을 통해 언약의 백성으로서 우리를 함께 점검해 보기 원한다.
고백(57절)
시 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우리는 구약의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계약의 관계처럼 생각한다. 이스라엘이 계약을 잘 이행하면, 즉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을 받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당하게 된다는 율법주의적인 관점으로만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런 계약의 관계처럼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우상을 숭배하는 것과 다르지 않게 만든 것은 사실이지만, 본래 하나님께서 의도하셨던 관계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언약의 관계였다. 그리고 그 언약의 기초에 있는 것은 사랑이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여 선택하셨다. 모든 좋은 것을 그들에게 주기 원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을 주시고 언약에 따라 살며 그 복을 누리게 하셨다. 서로 사랑하는 남녀가 결혼 서약을 통해 서로에게 헌신할 것을 약속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은 노력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통해 두 사람은 함께 만족과 기쁨을 누린다. 따라서 결과로서의 만족과 기쁨은 관계와 별개의 것이 아니다. 단지 어떤 일을 한 결과로서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그런 일들이 주는 만족과 기쁨을 누리는 것이다. 쉽게 말해 단지 무엇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누구와 하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어떤 사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것을 위해 내가 해야할 것은 단 하나, 일년에 한번 그 사람을 만나서 얼마나 그 사람이 위대한지 찬양하면 된다. 할 수 있겠는가? 할 수 있을 것이다. 특별한 원한이 있거나 하지 않는 한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년에 한번만 별로 하고 싶지 않은 그 일을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은 모두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계약이다.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어느 정도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과 그것을 주는 사람은 여기서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 사람이 아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면, 더 좋은 조건을 제시하는 사람을 따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다. 언약은 관계에 기초를 둔다. 관계가 중심에 있다. 관계가 먼저다. 관계 안에서 교제를 누리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원하는 것도 그 관계 안에 있다. 그래서 설령 내가 간절히 원하는 좋은 것을 그 관계 밖에서 충분히 누릴 수 있다고 해도, 그 관계를 떠나지 않고 떠나고 싶어하지도 않는 것이 언약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런 언약의 관계로 초대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사실 고민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나님은 이미 그들에게 충분히 자신을 보여주셔 하나님께 모든 좋은 것이 있다는 것을 그들은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자신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셨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셨다. 또한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게 그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신지도 나타내셨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져내신 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언약의 말씀을 주신 것이다.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따르게 하신 것이 아니라, 충분히 보여주시고 당연한 선택을 하게 하셨다. “이런 부족한 나도 사랑해주겠니?”라고 간곡히 요청하신 것이 아니다.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관자이신 하나님, 모든 좋은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 그렇기에 궁극적인 사랑의 유일한 대상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자신을 사랑하라고 하셨던 것이 언약의 말씀이었던 것이다.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단지 계약에 따라 무엇을 하면 복을 받고 무엇을 하지 않으면 화를 당하는 관계가 아니라, 사랑에 기초를 둔 언약의 관계였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상관 없이 복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해서 말씀에 순종하고 그로 인해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체결하면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듣고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라고 결의했는데(출 24:7), 이는 마치 결혼식에서 신랑 신부가 결혼 서약에 대해서 “네, 그렇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언약하는 것과 같았다. 언약의 말씀을 전해 주었던 모세의 마지막 말을 기록한 신명기는 이 사실을 아주 분명하게 증언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기초적인 답은 이렇다. 시편 119:57의 말을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시 119:57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
이렇게 진심으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말에는 앞서 언급한 언약의 관계에 필수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이 들어 있다.
첫째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가장 귀하게 여긴다. 여기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는 고백이 바로 그런 의미다. 분깃은 유산으로 나눠 받은 몫을 의미한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약속의 땅에 정착할 때에 그들에게 분배된 땅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분깃은 그들에게 단지 땅을 의미하지 않았고, 그들의 매우 특별한 혹은 소중한 소유를 의미했다. 분깃은 그들이 거주할 땅이기 때문에 실제로도 소중했지만, 그것이 하나님께서 매우 직접적으로 주신 것이라는 의미에서 상징적으로 특별하기도 했던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 거주하면서 “이 분깃을 하나님께서 주셨다”고 감사하며 기쁘게 살아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분깃에는 더 중요하고 근본적인 의미가 있었다. 하나님은 그 의미를 레위인을 통하여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는 약속의 땅에서 실제 땅으로 분깃을 얻었지만, 레위인은 달랐다.
민 18:20 여호와께서 또 아론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땅에 기업도 없겠고 그들 중에 아무 분깃도 없을 것이나 내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네 분깃이요 네 기업이니라
신 10:9 그러므로 레위는 그의 형제 중에 분깃이 없으며 기업이 없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심 같이 여호와가 그의 기업이시니라
하나님께서 레위인들에게 땅을 분깃으로 주지 않으신데는 여러 목적이 있었겠지만, 영적인 면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잊지 말아야할 교훈을 계속해서 상기하게 하시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땅을 받은 지파들은 땅이 그들의 분깃이고, 레위 지파만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셨을까? 그렇지 않다. 엄밀히 말해 하나님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깃이셨다. 땅을 분깃으로 받은 다른 지파들은 레위 지파를 보면서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했다. 분깃으로 받은 땅이 있다고 해도, 궁극적으로 그들의 분깃은 땅 자체가 아니라 그 땅을 주신 하나님이셨다. 땅이 그들의 필요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고 만족하게 하시는 분이셨다.
그래서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분깃을 주셨습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의 분깃입니다”라고 고백했다.
시 16:5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73:26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애 3: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시편 73:25에서 아삽은 이런 고백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렇게 표현했다.
시 73:25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이다
다윗의 시편 23편에서의 고백,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도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을 가장 소중하게 여긴다. 가장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시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고백한다(시 73:28).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시니”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백성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처음 언약을 체결할 때 다짐하며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지키겠다고 하나님 앞에서약속했었다. 이는 전혀 율법주의적이지 않은 약속이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언약의 관계를 이해하고 이렇게 약속했다면 그렇다는 말이다. 언약의 관계 안에서 약속을 지키겠다는 다짐은 당연히 필요하다. 나는 당신을 평생 사랑할 것이지만, 당신이 하는 말은 듣지 않겠다는 말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 순서도 중요하다. 하나님을 분깃으로 고백하는 것이 말씀을 지키겠다는 약속에 앞서야 한다. 이 순서가 바뀌면 그것이 율법주의고 행위 구원, 기복 신앙이 된다. 즉, 내가 말씀을 지키겠으니 하나님은 나의 분깃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언약의 관계가 아닌 것이다. 관계가 먼저고 순종은 그에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결과다. 예수님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23). 또한 “너희도 내 계명을 지키면 내 사랑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다(요 15:10). 사랑하면 순종하고, 순종이 사랑 안에 거하며 그 기쁨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나는 주의 말씀을 지키리라 하였나이다”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한 고백이고 필수적인 고백이라 할 수 있다. 마음으로 57절의 두 사실을 고백할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 할 수 없다. 여호와는 나의 분깃이라고 하면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려는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반대로 말씀은 지키겠지만 여호와가 나의 분깃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이는 신약의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엡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은 우리 중 누구도 존재하기 전인 창세 전에 이미 우리를 택하셨다. 우리를 사랑하기로 택하시고 복 주시기로 택하셨다. 그렇게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이 우리의 분깃이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라는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는 명령을 받는다(엡 4:1). 사랑으로 행하고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고, 말과 삶으로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라는 것이다. 사랑 받은 자로서, 또한 사랑 하는 자로서 그렇게 하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이다. 기꺼이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하여 그 말씀을 지키겠다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인지는 그의 삶의 실천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는 그의 고백에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그의 고백이 사실임을 실천이 증명한다고 할 수 있다.
실천(59-63절)
먼저 59절은 자기 점검과 그에 따른 참된 회개를 말한다.
말씀에 따라 회개함(59절)
시 119:59 내가 내 행위를 생각하고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약속이 진심인 것은 회개라는 실천을 통해 증명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회개의 중요한 두 요소를 언급한다. 하나는 자기 점검이고, 다른 하나는 돌이킴이다.
먼저 시편 기자는 자신의 행위(길)를 생각했다고 말한다. 실제 자신의 삶을 점검해봤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다는 고백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특히 들은 말씀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과 교제하면서 깨달은 바를 얼마든지 멋지게 말할 수 있다. 조금만 재주가 있다면 감동적으로 말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다. 말재주가 없다면 감정에 호소할 수도 있다. 눈물을 조금 섞으면, 나도 내가 진심으로 말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같은 주제로 교제를 하면 여전히 아무 것도 달라져있지 않은 경우가 있다. 고백(말)은 했지만 실천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 실천의 시작은 자신의 삶을 점검해 보는 것이다. 고백을 점검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을 점검하는 것이다. 고백을 한 이후에 내가 무엇을 선택해왔는지를 점검해 보는 것이다. 그 선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점검해 보는 것이다. 우선순위를 평가해 봐야 한다. 내 시간의 우선순위, 내 재물의 우선순위, 내 재능의 우선순위 등을 점검해 봐야 한다.
이렇게 자기 삶을 말씀으로 점검해보지 않으면, 말씀을 많이 아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점검해보지 않으면 말씀을 말하는 것만으로 무언가 변화된 것 같은 착각만 할 뿐이다. 그러면서 삶을 변화시킬 능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나에게 있어서는 무능력해진다. 때로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삶을 정죄하여 무너뜨리는 일만 하는 무기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먼저 말씀으로 자신의 삶을 실제적으로 점검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향하여 돌이킨다. “주의 증거들을 향하여 내 발길을 돌이켰사오며.” 발길을 돌이켰다는 것은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멈추고, 돌아 서서, 바른 방향으로 걸어갔다는 말이다. 이 때 바른 방향에 있는 것은 “주의 증거들”,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고 좌절하여 그 자리에 멈출 때가 있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후회에 애통할 때가 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러고 나서 다시 그 길을 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잠깐의 슬픔과 후회와 괴로움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또 그 길을 가는 것이다. 그저 쌓여가는 죄책감을 잠깐의 애통으로 덜은 것 뿐이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회개가 아니다. 회개는 단지 애통하고 슬퍼하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다. 가룟 유다도 분명 후회했겠지만, 그는 돌이키지 않았다. 아마도 돌이킬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나님의 은혜를 그만큼 과소평가한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는 결국 돌이켰다. 애통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예수님께로 돌이켰다. 그리고 그때 회복이 이루어졌다. 회개는 잘못을 깨닫고 가던 길을 멈추는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길에서 돌이켜 결국 회복에 이르게 하는 것이 회개다.
그 과정은 고통스럽다. 수치스럽기도 하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비유이긴 하지만, 다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던 탕자를 생각해 보라. 봐주기 힘든 몰골을 하고 자신이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던 아버지를 찾아가, 이제는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종으로 살겠다고 말해야할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냥 이방 땅에서 죽는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는 생명을 위해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그것이 회개인 것이다. 하나님이 생명이시기에 하나님께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것이 회개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은 계속해서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다. 계속해서 자신의 행위를 점검하고 그 발길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이키는 사람이 하나님의 참된 백성이다.
순종을 미루지 않음(60절)
다음으로 60절에서 볼 수 있는 순종의 실천은 신속함과 지체하지 않음이다.
시 119:60 주의 계명들을 지키기에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아니하였나이다
우리는 어떤 일을 신속히 하고 지체하지 않을까? 중요한 일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 우선순위에 둔 일에 대해서 그렇게 한다. 어떤 사람은 만나자고 하면 항상 일이 있는 사람이 있다. 몇 번 만나자고 했는데, 계속 다른 일이 있다고 하면서 약속을 미루면 대충 알아들어야 한다. 그 사람은 나를 만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나를 만나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아마 실제로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만나는데 내가 요청한 시간을 쓰고 있을 것이다. 정말 나를 만나고 싶어하고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면, 혹 실제로 일정 때문에 만나지 못할 상황이 되어도 먼저 가능한 날을 제시한다. 미루는 것은 사실 그것을 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의 표시인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것은 단지 그 일을 순서 상 나중에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선순위에 없다는 말이고, 많은 경우 그렇게 뒤로 밀린 일은 하지 않는다. 나중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순종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대해서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신속하게 했고 지체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그의 분깃이셨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순종을 미루지 않았고,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이다.
지금 하지 않는 것, 지체하는 것, 미루는 것이 영적으로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말해주는 유명한 우화가 있다.
사탄이 악마들을 모아 회의를 했다고 한다. 사람들을 어떻게 지옥으로 끌고 갈 수 있는지에 대한 회의였다. 한 악마는 “하나님이 없다고 말합시다”라고 제안했다. 하지만 사탄은 하나님이 있다는 증거는 이미 많기 때문에 그것은 효과가 없을 것이라며 거부했다. 다른 악마는 “심판이 없다고 말합시다”라고 제안했다. 이에 사탄은 사람들은 이미 행동에 대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끝으로 어떤 악마는 이렇게 제안했다. “하나님도 있고 심판도 있지만, 아직은 괜찮으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말합시다.” 그제야 사탄은 완벽한 계획이라며 그를 칭찬하고 그 제안을 수용했다.
사탄은 똑같은 내용의 회의를 하나님의 백성들을 두고서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가장 쉽고 효율적인 방법은 순종하지 말라고 하는게 아니라, 나중에 순종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지금은 힘드니까 나중에 해야겠다고 생각하면 그 나중은 오지 않는다. 히브리서 3:15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이는 누구에게나 심각한 경고다. 지금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죄에서 회개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순종을 지체하지 않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증명한다.
고난 중에도 오히려 감사함(61-62절)
앞선 본문에서도 살펴봤던 것처럼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시험대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을 때가 그렇다. 시편 기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악인들로 인한 고난을 언급하면서 그때에 어떻게 자신의 고백이 사실임을 증명했는지를 말한다.
시 119:61–62 악인들의 줄이 내게 두루 얽혔을지라도 나는 주의 법을 잊지 아니하였나이다 62내가 주의 의로운 규례들로 말미암아 밤중에 일어나 주께 감사하리이다
악인들의 줄이 두루 얽혔다는 말은 그들이 마치 사냥꾼이 사냥을 하듯 계획적으로 시편 기자를 무너뜨리려고 했다는 의미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잊지 않았고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씀으로 인해서 감사했다고 말한다.
이것이 정말 하나님을 자기 분깃으로 여기는 사람의 반응이다. 고난은 하나님이 분깃이 아니라고 말한다. 하나님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분깃이 될 수 있느냐고 의심하게 만든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여전히 하나님을 신뢰하여 그 말씀을 버리지 않는다. 오히려 그 말씀으로 소망을 찾고 위로를 얻어 하나님께 감사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해되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왜 황금같은 주말을 교회에서 다 보내는지 그들은 이해할 수 없다. 심지어 교회에서 맡은 일도 많아서 평일보다 주말이 더 바쁜 모습을 보면 더욱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런데 시간을 쏟고, 재능을 쏟고, 재물도 쏟는지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이 그들의 분깃이시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다. 만약 그것이 아니라 다른 설명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 것이다. 이런 모든 상황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을 통해, 그의 분깃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렇게 하나님으로 충분하다는 자신의 고백을 증명하는 것이다.
주를 경외하는 자들의 친구가 됨(63절)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그 고백의 진실됨을 증명하는 삶의 모습은 그의 친구를 통해서 드러난다.
시 119:63 나는 주를 경외하는 모든 자들과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자들의 친구라
이 말은 주변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만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사람들이 바로 그와 같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의미다. 좋아하는 것이 같은 사람들이 친밀한 관계가 되듯이, 하나님의 백성은 자연스럽게 다른 하나님의 백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일부러 믿지 않는 자들과의 관계를 끊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믿는 자는 하나님을 전하기 위해서 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지속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그렇게 하기 위해 악한 영향을 받는 상황에 자신을 계속해서 노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고전 15:33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시편의 첫 말씀도 바로 그 말씀이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죄에 매력을 느끼면서 그것을 어떻게든 경험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는 것이 맞냐 틀리냐를 따지는 것은 이미 잘못된 길에 있는 것이다. 애초에 그것을 원하지 않아야 정상이다. 경건에 매력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고자 하는 자를 친구로 만들고 싶어 해야 한다. 또한 그런 사람들이 나를 친구 삼고 싶어 해야 한다. 친구를 통해서도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증명된다.
기도(58, 64절)
끝으로 언약의 백성의 기도를 살펴보자. 오늘 본문에서는 58절과 64절에 기도가 기록되어 있다. 이 기도에서 찾을 수 있는 특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58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한다는 점이다.
시 119:58 내가 전심으로 주께 간구하였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특히 고난 중에서도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결심하고 다짐할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으시면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내가 뭔가 하나님께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결국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것을 돌려드릴 뿐이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함을 안다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데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둘째는 64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신뢰하며 구한다는 점이다.
시 119:64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땅에 충만하였사오니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
시편기자는 온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속성 중에 특별히 ‘인자하심’을 언급한다.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말이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 말씀을 이렇게 설명했다.
크리스토퍼 애쉬,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을 적대하는 수많은 악인들이 이 땅에 있다 해도 주의 언약적 사랑이 미치지 않는 곳에 성도가 있기란 불가능하다. … 우리는 하나님이 사탄에게 창조세계의 일부를 넘겨주실까 두려워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창조세계의 단 한 뼘도 사탄의 것이 아니다. 전 세계 구석구석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으로 충만하다. 아무리 높이 올라가거나 낮게 내려가도 여전히 하나님은 우리 곁에 함께 계신다(시 139편). … 세상은 주의 언약적 사랑으로 가득하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주의 율례들로 나를 가르치소서”라고 구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세상에 가득함을 믿기에 그 인자하심에 따라 살기를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능력의 하나님이 또한 사랑의 하나님이심을 믿는 하나님의 백성의 기도라 할 수 있다.
도전
말씀을 정리하면 이렇다. 오늘 본문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모습을 살펴봤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은 하나님을 자신의 분깃으로 고백하여 그 말씀을 지키는 사람이다. 그 말씀을 지키기 위해 실제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다. 말씀에 따라 회개하고 순종을 미루지 않는다. 고난 중에도 감사하고, 같은 마음을 품은 자들의 친구가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신뢰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한다. 이런 사람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 말씀에 따라 우리가 스스로 던져야할 질문은 이것일 것이다. 나는 참된 하나님의 백성인가? 참된 하나님의 백성처럼 살고 있는가? 스스로 답해 보기 바란다. 끝으로 찰스 브리지스의 말에 귀기울여보기 바란다.
찰스 브리지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의 요점이 있습니다. ‘주님을 자기의 분깃’으로 삼고 ‘주님의 말씀을 자기의 법칙’으로 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 주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소원마다 주 하나님을 섬기는 일로 그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 어떤 소유를 가지고 있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주장할 권세를 가지셨음을 기쁘게 인정하며, 모든 것을 주님의 일에 사용되도록 기꺼이 드립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주님의 구원에 동참함을 증거합니다. … 자신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이렇게 분깃으로 선택하는데 신중하게 생각하고 조금도 미련없이 자원하는 마음으로 한 일인가? 이런 결정을 후회하지 않고 계속 존중하며 견지할 것을 결심하였는가? 죽음이 올지라도 하나님을 분깃으로 삼는 이 즐거움에서 나를 떼어내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결심했는가? 내가 진정 하나님을 구주로뿐만 아니라 주권자로도 받아 기꺼이 모시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