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8)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자인: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49-56절)

시편 119편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론적이라기 보다는 실제적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다는 식으로 말하기 보다는 실제로 저자가 말씀을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했는지를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객관적인 사실을 말할 뿐 아니라 그에 대한 주관적인 사실들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 119편을 읽는 우리도 말씀에 대해서 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 면에서 시편 119편은 고난에 대한 언급이 계속된다. 물론, 시편의 다른 탄식시들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시편 119편의 배경에는 저자의 고난이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시리즈 말씀의 제목처럼 언약의 말씀에 따라 언약의 삶을 사는 자에게 고난은 이상한 것이 아니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신약에서 바울은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했고(딤후 3: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도 믿음 뿐 아니라 고난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도 말했다(빌 1:29). 베드로도 불시험 당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하기도 했다(벧전 4:12-13). 신약이든 구약이든,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게는 고난이 있고 그것이 언약의 삶의 일부인 것이다. 작은 일부가 아니라 큰 일부다.

오늘 본문인 49-56절에서도 이런 고난에 대한 언급을 볼 수 있다. 49절은 “소망” 혹은 “기다림”에 대해서 언급한다. 지금 아무 문제가 없다면 소망은 필요하지 않다.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우리는 더이상 ‘소망’하며 살지 않을 것이다. 소망했던 것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소망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다. 시편 기자가 49절에서 소망을 언급한 이유도 그렇다. 거의 현실은 소망이 필요한 상황이다.

50절은 그 상황을 “고난”이라고 분명하게 표현했다. 단순히 감정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이 아니라 어떤 힘에 의해서 억압 받는 상황이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이 고난은 수치를 당하는 것과도 연결되는데, 51절을 보면 시편 기자의 상황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교만한 자들”(53절, “악인들”)에게 조롱을 당했다. 그들은 시편기자와 그의 믿음, 그의 믿음에 따른 삶을 조롱했을 것이다.

이런 조롱은 항상 있다. 골리앗은 자신의 힘을 믿고 이스라엘 군대를 조롱했었다. 지난 시간에 간략하게 살펴봤던 것처럼 산헤립도 비슷하게 히스기야와 그의 믿음을 조롱했다. 시편 79편에서 아삽은 이스라엘의 패배가 곧 하나님에 대한 조롱으로 이어졌음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도 했다.

79:9–10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의 영광스러운 행사를 위하여 우리를 도우시며 주의 이름을 증거하기 위하여 우리를 건지시며 우리 죄를 사하소서 10이방 나라들이 어찌하여 그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말하나이까 주의 종들이 피 흘림에 대한 복수를 우리의 목전에서 이방 나라에게 보여 주소서

시편 137편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당했던 조롱과 수치를 기록했다.

137:1–4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2그 중의 버드나무에 우리가 우리의 수금을 걸었나니 3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우리를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로다 4우리가 이방 땅에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얼마나 치욕적인 상황인가. 이 상황은 마치 승리를 장담했던 다윗이 골리앗에게 패한 것과 같다. 다윗의 물맷돌은 빗나갔고, 골리앗이 다윗을 어린아이처럼 데리고 놀다가, 다윗을 살려두고는 너 악기도 잘 다루고 노래도 잘 하니까, 니가 아까 말했던 그 하나님 찬양하는 노래 한번 해보라고 하는 상황과도 같다.

실제로 블레셋 사람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던 삼손을 붙잡은 후에 축제를 벌이면서 “우리의 신이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라며 그들의 신 다곤을 찬양했고, 삼손을 불러다가 그들 앞에서 재주를 부리게 했다(삿 16:23-25). 정말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상황이었다.

시편 기자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이런 조롱을 당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삼손처럼 자신의 오만함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히려 교만한 자들, 악인들 때문에 그런 고난을 당했다. 54절에서는 그가 “나그네 된 집”에서 살고 있다고 말한다. 19절과 비슷한 의미다. 시편 기자는 주변의 사람들과는 다른 정체성을 지키며 살았다. 그것이 그를 이방인으로 만들었다. 실제로 이방인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과 관계없이 영적인 의미에서 그는 이방인이었고 그런 그를 사람들은 조롱했던 것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의 고난이었다. 그리고 이 고난은 크든 작든 우리도 당하는 그리고 우리도 당해야 하는 고난이다. 중요한 것은 이 고난을 우리가 어떻게 당하느냐(헤쳐 나가느냐)다.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고난을 준비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을 만났을 때 당황한다.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본문의 시편 기자는 좋은 본을 보여준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자들로서 어떻게 고난을 헤쳐 나가야하는지를 배울 수 있다. 오늘 본문에서 총 5가지(기도, 위로, 분노, 노래, 교훈)를 함께 배워보기 원한다.

고난 중의 기도(49절)

119:49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시편 119편은 전체적으로 ‘기도’이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여기 49절의 “기억하소서”가 유일하게 구하는 기도다. 일반적으로 고난 중에 우리는 이 고난을 끝내달라는 기도를 많이 한다. 이미 많은 시편에서 우리는 고난 중에서 구원을 구하는 기도를 살펴봤었다. 때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억울함 혹은 정당함에 호소하기도 했고, 자신의 고통을 세세히 표현하면서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했었다. 고난 중에 그런 기도를 하는 것은 당연히 옳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기도 하다.

사실 여기 “기억하소서”도 단지 어떤 ‘사실’을 기억해 달라는 기도는 아니다. 그 안에는 ‘지금의 상황에서 저를 건져주십시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정말로 하나님이 무언가를 잊고 계셔서 기억하게 하려고 하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내일 저녁 7시에 만나기로 한 것 잊지마’라는 말은 7시까지 약속 장소로 나오라는 의미이지, 집에서 7시에 그 생각을 하고 있으라는 의미가 아닌 것과 동일하다. 시편 기자는 분명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 방식, 그 안에 녹아 있는 태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고난의 상황 중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생각하며 기도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하나님께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자신을 낮춤과 동시에 하나님과 자신의 언약적 관계에,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에 호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상황을 먼저 두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먼저 두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에서도 같은 태도를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의 말씀을 기억해 달라고 구하는데, 이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약속의 말씀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일 수도 있고, 일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복, 은혜)을 지금 자신의 상황에 적용해 주시기를 구하는 기도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이 지금 자신이 소망을 가지고 이 상황을 견디고 있는 이유라고 말한다. – “주께서 내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나이다”

이 말은 시편에서 일반적으로는 “내가 그 말씀에 소망을 둡니다” 혹은 “내가 그 말씀(의 성취)을 기다립니다”와 같이 표현되는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주어를 “주”, 즉 하나님으로 두고 말한다. 즉, “내”가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소망을 두고 있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셔서 나에게 소망을 가지게 하셨다고 말하는 것이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야할 이유를 하나님에게서 찾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평소에는 그렇지 않았던 사람도 고난 중에 있을 때는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상황을 바라보고 판단하기 쉽다. 괴로운 사람은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 중심의 기도를 하기 쉽다. 내가 제일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 제가 힘듭니다. 하나님 제가 무슨 큰 잘못을 했습니까?’와 같은 기도만 하기 쉬운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런 기도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지켜야 할 중심이 있다는 것이다. 시편 기자도 물론 억울하고 힘든 마음이 있었고 그런 마음이 시편 119편의 곳곳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 중심을 잃지는 않았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고, 그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시다. 나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말씀이 있고 소망의 말씀이 있다. 이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고난 중에 겸손하게 그리고 간절하게 “하나님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생각하면 기도할 이유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우리가 기도해야할 가장 큰 이유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의 말씀을 통해 예루살렘의 황폐함이 70년 만에 마치게 될 것을 깨달은 후에 그냥 그 일이 이루어지겠거니 가만히 있었던 것이 아니라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소망을 가지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시면서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62:6–7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의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주야로 계속 잠잠하지 않게 하였느니라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말며 7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

여기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 여호와로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러면서 기도하기를 쉬지 말고 또한 하나님으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같은 원리가 우리에게도 적용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하나님이 기억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찬송 받으시기까지, 우리도 비록 고난 중에서라도 쉬지 않고 기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사실 다른 기도가 필요하지 않다. “주의 종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소서”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소망 가운데 기도하면 충분할 것이다.

고난 중의 위로(50-52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가 무엇을 통해 고난 중에서 위로를 얻었는지 살펴보자.

고난 중에는 위로가 필요하다. 고난 중에 사람은 낙심하고 슬퍼하고 또 힘을 잃기 때문이다. 여기 시편 기자와 같이 말씀에 따라 사는 삶 때문에 고난을 당하는 상황이면 억울하고 분한 마음도 있을 수 있다. 궁극적으로는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다시 일어서서 바른 길로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그전에 그렇게 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돕는 것을 위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지 우는 자와 함께 우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그 사람의 사정을 잘 들어주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그 상황을 바르게 바라볼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드물지만, 한번 제대로 혼나는 것이 위로가 되기도 한다. 사람마다 상황마다 위로는 다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이 하나가 언제나 궁극적인 위로가 되어야 한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고백한다.

119:50 이 말씀은 나의 고난 중의 위로라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

시편 기자는 고난 중의 궁극적인 위로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고 있었다. 그동안 그를 ‘살게했던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게 고난이 처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른 고난이 있었지만, 그 고난에서 그를 살게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로 넘어진 자리에서 일어나게 했고, 그의 피곤한 무릎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로 힘차게 달려갈 수 있게 했다. 50절에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이 나를 살리셨기 때문이니이다”라고 말하여 이것이 그가 이론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경험을 통해 확인해 온 사실임을 분명히 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말에 ‘아멘’으로 화답할 수 밖에 없다. 애초에 죄 가운데 죽었던 우리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살리셨다. 그리고 그 생명의 말씀이 우리로 계속해서 생명력있는 삶을 살게 한다. 특히 고난 중에 우리를 살린다. 두려움 중에 있었던 아브라함에게 용기와 힘을 주었던 것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이었다(창 15:1).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던 엘리야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일하게 했던 것도 그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말씀이었다(왕상 19장).

예레미야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재앙”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고난 중에 낙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내가 진실로 너를 강하게 할 것이요 너에게 복을 받게 할 것이며”라며 위로와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렘 15:11). 이에 대해 예레미야는 이렇게 응답했다.

15:16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

히브리서 11장은 우리가 ‘믿음 장’이라고 부르지만, 한편으로는 여기 50절 말씀에 대한 증언들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믿음의 사람들은 나그네로서 세상을 살았고 그래서 고난을 당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은 붙들었고, 그 말씀이 그들을 살렸다. 진짜 삶을 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이기도 하다.

시편 기자도 그가 배운 것과 경험한 것을 통해 이것이 사실임을 알았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를 살린다. 그래서 심히 조롱을 당했어도 주의 법을 떠나지 않았다(51절).

119:51 교만한 자들이 나를 심히 조롱하였어도 나는 주의 법을 떠나지 아니하였나이다

조롱을 당하는 상황에서 크게 두 가지 이유로 말씀을 떠나고 싶어질 수 있다. 첫째는, 당연히 그 자체가 힘들기 때문이다. 말씀 때문에 조롱을 당하고 그것이 나에게 힘들다면 당연히 말씀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둘째로는, 힘든 것을 떠나서 이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말씀을 떠나고 싶은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수익이 없으면 그렇게 사업하지 말아야 하나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친구들처럼 교회에 다니지 않고 토요일이든 일요일이든 공부에 매진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다 즐기는 쾌락, 나도 좀 즐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는 것이다.

시편 기자에게도 이런 유혹과 시험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확신했던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나를 살린다는 것이다. 악인들의 꾀를 따르고 죄인들의 길에 서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는 것은 결국 멸망으로 나를 이끈다(시편 1편). 그래서 그는 말씀을 떠나지 않았다. 오히려 옛 규례들을 기억하여 위로를 얻었다(52절).

119:52 여호와여 주의 옛 규례들을 내가 기억하고 스스로 위로하였나이다

여기서 “옛 규례”는 예로부터 있어 왔던 말씀을 의미한다. 시편 기자가 읽을 수 있었던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이해하면 될 것이다. 우리에게 있어 “옛 규례”는 성경 전체가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시편 기자가 지금의 위로를 위해서 새로운 말씀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에게 이미 주어진 말씀이 있었고 그것이 충분히 고난 중에 위로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시간이 지난다고 해서 그 의미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옛적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믿을 수 있다.

따라서 예전에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말씀은 지금 나에게도 위로가 된다. 지금 내가 그것을 기억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단지 말씀을 가지고 있거나, 들고 있거나, 혹은 알고 있는 것으로만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 그 말씀을 “기억하소서”라고 구하는 사람은 동시에 스스로 그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말씀을 읽고 자신에게 적용해야 한다는 말이다. 시편 기자는 그렇게 말씀으로 고난 중에 위로를 얻었다.

이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다.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옛 규례는 여전히 지금 우리에게 위로를 준다. 우리가 그 말씀을 기억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이 있다. 말씀을 기억할 때, 두 극단의 잘못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한쪽 극단은, 말씀을 ‘그 때 그 얘기’로만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전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것은 알지만, 지금도 그렇게 하실 것이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홍해를 가르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신 것은 믿지만, 오늘날 하나님께서 어떤 놀라운 일을 하실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 경우다.

반대로, 말씀을 ‘무조건 내 얘기’로만 받아들이는 극단도 있다. 성경에 기록된 어떤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 마치 그것이 오늘 나에게 그대로 반복될 것이라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처럼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로, 여리고 성을 정복했던 사건을 생각해 보라. 정말 말도 안되는 전략으로 이스라엘은 여리고 성을 정복했다. 이스라엘은 우리가 영화 등에서 보는 것 같은 공성전을 벌이지 않았다. 거대한 통나무나 돌덩이 같은 것으로 성문을 파괴하지 않았다. 여리고 성을 포위하고 오랜 시간을 버텨서 항복을 받아냈던 것도 아니다. 그들은 그저 여리고 성을 6일 동안 하루 한바퀴씩 돌았고, 7일째에는 7바퀴를 돌고 난 후에 다 함께 큰 소리로 외쳤을 때에 성벽이 무너졌고 여리고 성을 점령할 수 있었다.

이 말씀을 어떤 문제가 있을 때,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고 그저 매일 기도하다가 7일째 간절히 기도하면 그 문제가 해결될 것에 대한 약속처럼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이것은 모든 성을 그렇게 정복할 수 있다는 약속도 아니었다. 당장에 이어지는 아이성 전투만 해도 이런 방식으로 되지 않았다. 믿음이 없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심지어 나중에 다시 여리고 성을 정복해야할 일이 있다고 해도 같은 방식으로 하면 된다는 말씀도 아니었다. 그러니,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그와 관련된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그저 매일 기도만 하라는 말씀은 전혀 아니다.

비슷한 예로 야베스의 기도가 있을 것이다. 야베스의 기도는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을 벗어나게 하시고 근심이 없게 하시고, 나의 지경을 넓히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이 아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야베스에게 그렇게 응답하셨다는 것을 기록한 것 뿐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복주시는 은혜이지, 야베스의 기도 내용이나 태도가 아니다.

“옛 규례”는 바르게 기억되어야 한다. 내가 원하는대로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대로 기억해야 한다. 옛 규례를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해야 하고, 그 진리를 지금 나에게 적용해야 한다. 그것이 바르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래야 그 교훈도 참되고, 그 위로도 참되다.

고난 중에 참된 위로를 찾는다면 말씀을 펴라. 그리고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갖고 말씀을 읽어 보기 바란다. 모두가 틀렸다고 해도 하나님께서 맞다고 하시면 그것이 맞는 것이다. 결국은 하나님이 옳다는 것이 증명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그 말씀으로 나를 살리셨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고난 중에 말씀을 떠날 생각을 하지 말고, 오히려 더 말씀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리고 시편 기자의 기도처럼 눈을 열어 놀라운 것을 보기를 구하고 하나님께 배우기를 구해야 한다. 그 때 고난 중의 위로를 찾을 수 있다.

고난 중의 분노(53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고난 중에 그의 분노에 대해서 언급한다.

119:53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로 말미암아 내가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

고난 중에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 상황에 대해서 분노한다. 특히 여기서 시편 기자가 언급하고 있는 상황을 고려해 보면 그를 조롱하는 악인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특히 그는 “맹렬한 분노에 사로잡혔나이다”라고 표현하여 분노의 감정이 매우 격했음도 강조한다.

그런데 여기서 좀 더 주목해서 봐야 할 것은 그 악인들에 대한 시편 기자의 묘사다. 당연히 “나를 조롱하는 악인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조롱하는 행동이 시편 기자를 괴롭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주의 율법을 버린 악인들”이라고 말한다. 물론 이 악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는 시편 기자를 조롱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린 것과 그들의 조롱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분노한 지점은 그들이 자신을 조롱했다는데 있지 않았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데 있었다. 또 다시 고난 중에 시편 기자의 중심에 무엇이 있는지를 볼 수 있는 말씀이다. 그는 자신이 조롱 당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 당하는 것을 더 참을 수 없었다.

이렇게 분노 하는 것은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마땅한 분노이기 때문이다. 때로 우리는 고난 중에 잘못된 이유로 분노한다. 단순히 괴로워서, 어떤 사람이 미워서, 어떤 상황 때문에 분노한다. 그리고 때로는 그렇게 시작된 분노는 주권자이신 하나님을 향한다. 이런 상황을 허락한 하나님께 분노하는 것이다.

나 중심으로 상황을 보다 보면 나타나는 결과다.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상황을 보면 분노의 방향도 달라진다. 하나님이 높임 받으시지 못하는 이 상황에 대해서,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분노하는 것이 고난 중의 분노가 되어야 한다.

고난 중의 노래(54절)

같은 맥락에서 고난 중에 기쁨을 주는 노래는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

119:54 내가 나그네 된 집에서 주의 율례들이 나의 노래가 되었나이다

앞서 포로된 자들이 억지로 “시온의 노래”, “여호와의 노래”를 하도록 조롱을 당했던 상황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여기서는 다른 상황에서의 노래를 말하고 있다. 이것은 억지로 부르는 노래가 아니라, 고난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서 위로를 얻고 그 기쁨에서 나오는 자발적인 노래다. 시편 1편이 그의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시편 18편이 그의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시편 23편이 그의 노래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 시편의 말씀으로 노래 하면서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것이다.

34:1–4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2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3나와 함께 여호와를 광대하시다 하며 함께 그의 이름을 높이세 4내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내게 응답하시고 내 모든 두려움에서 나를 건지셨도다

40:1–3 내가 여호와를 기다리고 기다렸더니 귀를 기울이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셨도다 2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3새 노래 곧 우리 하나님께 올릴 찬송을 내 입에 두셨으니 많은 사람이 보고 두려워하여 여호와를 의지하리로다

이 모든 노래는 나그네가 부르는 나그네의 노래다. 세상과는 다르게 사는 이방인의 노래인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로를 얻고 기뻐하는 자의 노래인 것이다.

때로 우리는 나그네로 살면서 나그네의 노래가 아닌 다른 노래를 부를 때가 있다. 가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것에서 위로를 찾고 기쁨을 누리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 하나님의 말씀보다 다른 것을 먼저 찾고, 거기서 어떤 위로와 기쁨을 누리려고 한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이 애초에 터진 웅덩이였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살게 한다. 우리에게 소망을 주고 위로를 준다. 기쁨을 준다. 다른 데서 이것들을 찾지 말아야 한다.

이어지는 55절과 56절은 이런 면에서 우리에게 지금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고난 중의 교훈(55-56절)

먼저 56절을 보자.

119:56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

이 말씀은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이것이 나를 향한/위한 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가 된다. 즉,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시편 기자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다. 이것이 고난 중에 그가 얻은 교훈이다. 말씀 때문에 받는 고난이라고 해도 결국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앞서 말한 모든 좋은 것을 주기 때문에, 그것이 나를 위한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고난 중에 우리는 이에 대한 확신 가운데 거해야 한다. 고난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나쁜 것이라고 나에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를 괴롭게 하니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고난은 나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끝으로 55절 말씀이 중요하다.

119:55 여호와여 내가 밤에 주의 이름을 기억하고 주의 법을 지켰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공의로운 분이신지, 얼마나 사랑하시는 분이신지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백성을 돌보시는지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시고 기다리시는지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신실하신 분이신지 잊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좋은 분이신지 잊지 않는 것이다.

고난 가운데 이런 하나님을 잊으면 결국 고난은 나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할 뿐 아니라 돌아서게 만들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다. 우리는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고난 중에 하나님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럴 때, 하나님의 이름을 기억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그 공의와 사랑을 기억해야 한다. 밤에도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시려는 모든 복을 고난 중에서도 누릴 수 있다. 고난 중에 소망을 가지고 위로를 받으며 잘못된 분노를 하지 않고 기뻐할 수 있다. 주의 법도들을 지키는 것이 곧 나를 위한 것이기에 고난 중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

도전

앨런 로스는 이 시편 본문에 대한 주석을 마치면서 감옥에서 바울이 기록한 이 말씀이 이 본문의 정신과 내용을 대변한다고 말했다. 그 말씀은 이것이다.

3:16–17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17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어떤 상황에 있든 말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풍성히 거할 때, 우리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 여전히 의심이 든다면, 끝으로 이 말씀을 기억해 주기 바란다.

8:31–32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