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7)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와우: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41-48절)

우리말에 ‘염치’라는 말이 있다. 주로 ‘염치 없이 어떤 일을 한다’는 식으로 사용되는 표현으로서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의미한다. 가끔은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께 참 염치없이 이런 기도를 한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기도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염치 생각하면 엄밀한 의미에서는 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는 할 것이다. 당당하게 제가 이렇게 했으니 저에게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하나님께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 최소한의 염치는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조차도 없이 구할 때 참 염치없이 구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마 그런 감정을 가장 많이 느끼는 경우는 같은 죄를 반복하면서 하나님께 회개한다고 말하고 죄 용서를 구할 때 일 것이다. 그나마 내 입장에서 ‘실수’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에서 죄 용서를 구하는 것은 나은데, 이미 수없이 반복했던 죄, 바로 어제 회개했던 죄와 똑같은 죄를 범하고 회개하려고 할 때는 아무리 약속의 말씀이 있다고 해도 입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또 하나 기도할 때 종종 염치가 없다고 느껴지는 상황은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도 하지 않고 기도할 때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때 염치가 없게 느껴지고 이런 기도를 해도 되나 싶을 때가 있는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해서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고,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히 구할 수 밖에 없을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우리가 그런 상황을 만든다. 해야할 일을 하지 않아서(할 수 있을 때 하지 않아서) 결국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을 자초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셨고 그것들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질서 안에서 자유롭게 살게 하셨다. 이것은 다르게 말하면 내 삶에 대해 나에게 책임이 있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만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태도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머리를 주신 이유는 생각하라는 것이고, 손과 발을 주신 이유는 행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지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우리의 자유 안의 책임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할 일을 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한다. 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성실하지 않아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고 그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면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염치 없는 기도라고 해도 기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백번 낫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염치 챙기면서 기도하라고 하지는 않으신다. 우리 연약함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런 것을 전혀 신경쓰지 않는 것은 염치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올바른 태도의 문제가 될 것이다.

바로 앞 연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인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기 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내용을 살펴봤었다. 그는 하나님께 배우기 원했다(33-34절). 그리고 그 말씀에 순종하기 원했다(35절). 그 순종을 방해하는 것들에게서는 멀어지기 원했고 반대로 하나님의 말씀에게는 그 마음이 향하기를 원했다(36-37절).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내적인 확신과(38절) 더불어 외적인 확신도 구했다(39절, “내가 두려워하는 비방을 내게서 떠나게 하소서”). 그렇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을 살기 원했다(40절).

오늘 살펴볼 41-48절은 히브리어의 6째 알파벳인 ‘와우’로 시작하는 절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맥락을 보면 39-40절의 기도의 확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분명 지금 삶에서 경험하고 있는 어려움에서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기를 구하고 있다. 그의 삶에서 실제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염치 없이, 막무가내로 “하나님 이렇게 해주세요”라고 구하지는 않는다. “저는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테지만, 어쨌든 지금은 어렵고 힘드니 좀 도와주세요”라는 식으로 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 기도에도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실 수 있는 분이시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의 합당한 태도는 아니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정말로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추구해야 할 삶의 모습이기도 하다.

본문은 내용 상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41-44절은 신실한 증인의 기도이고, 45-48절은 신실한 증인의 확신이다.

신실한 증인의 기도(41-44절)

먼저 41절은 가장 직접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다.

119:41 여호와여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

시편 기자는 다시 한 번 “여호와여”라고 하여 이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임을 분명하게 한다(기도의 대상).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이 그에게 임하게 해달라는 것이고, 이런 기도의 근거“주의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에 해당되는 단어는 “약속”을 의미하고, “인자하심”은 시편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헤세드’로서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약속(언약)을 내포하고 있는 단어다. 따라서 시편 기자는 지금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근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건져내시면서 “내가 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라고 말씀하셨다(출 6:7). 그리고 시내산에서 그들과 언약을 체결하시면서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고 선포하셨다(출 20:2). 이 언약의 관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라 할 수 있다. 언약의 관계는 계약의 관계와는 달라서 단순히 무엇을 하고 하지 않고 이전에 관계적인 친밀함이 중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통해서 자신의 임재를 나타내셨고 백성들과 함께 하심을 나타내셨다.

이 사실을 정확히 알 수 있었던 사건이 바로 금송아지 사건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그 우상을 하나님이라며 예배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진노하고 심판하셨다. 그리고 모세에게 백성들과 함께 시내산을 떠나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라고 명하시면서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3:3).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 백성을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실 것이고 그 땅의 백성들을 쫓아내겠다고도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전히 그 복은 누릴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약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함께 하심’을 하나님은 거두겠다고 말씀하신 것이고, 모세도 이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께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 곳에서 올려 보내지 마옵소서”라고 구하면서 이렇게 덧붙였다(출 33:15).

33:16 나와 주의 백성이 주의 목전에 은총 입은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주께서 우리와 함께 행하심으로 나와 주의 백성을 천하 만민 중에 구별하심이 아니니이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언약은 바로 ‘함께 하심’이다. 그리고 그 언약을 하나님은 말씀에 기록해 두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은 말씀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함께 하심은 때로는 복으로 때로는 화로 그 모습이 드러난다. 순종에는 복을, 불순종에는 화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41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복을 구한다. 여기서는 “인자하심”“구원”으로 표현되어 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인데, 인자하심이 도우심의 동기를 강조한다면 구원은 도우심의 행위를 강조한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인자한 분이심을 믿고 있고, 또한 하나님이 이 고난에서 그를 구원하실 수 있음도 믿고 있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자신이 그것을 스스로 얻을 수 없음도 알고 있다. 그래서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통해 구원을 임하게 하지 않으시면 그는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 시편 기자는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지금 염치 없는 상황은 아니기 때문이다. 시편 119편 전체를 봐도 그렇고, 오늘 본문에서만 봐도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42절에서 그는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라고 고백한다. 이것은 그가 단순히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가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그가 걸어야할 길임을 믿고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는 의미다.

그래서 43절에서는 말씀을 “진리의 말씀”이라고 표현하면서 그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라고 구하기도 한다. 이 말은 지금까지 그가 진리의 말씀을 입에서 떠나게 하지 않았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그는 48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렸을 뿐 아니라, 46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던 것이다. 그렇게 그의 입에는 항상 진리의 말씀이 있었고, 그는 그 진리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한마디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증인으로서 살아 온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런 시편 기자에게 합당한 복을 주셨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이다. 지금은 그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그의 상황을 보면서 그를 비방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는 그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119:42 그리하시면 내가 나를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 내가 주의 말씀을 의지함이니이다

“그리하시면 … 대답할 말이 있사오리니”라는 말은 뒤집으면 아직 하나님의 구원이 임하지 않은 현재로서는 그가 대답할 말이 없다는 의미가 된다. 비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말하면서 그 말씀에 따라 살려고 하는 시편기자를 조롱하고 비웃었다. 지금의 상황은 그의 선택이 충분히 어리석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을 부인하려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을 의심할 근거를 제공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는 이 사람의 신실함을 의심할 근거를 제공한다.

후자의 대표적인 경우는 욥일 것이다. 욥기의 시작에서 보면 욥은 그야말로 완벽한 삶을 살고 있었다.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그에게 하나님은 합당한 은혜를 내려주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잠시 거두셨을 때, 욥을 비난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잘 아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욥이 하나님께 범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진노하셨다고 욥을 비난했다. 욥은 논리적으로 열심히 반박했지만, 사실 그조차도 답답해 했다. 그들의 입을 막을 “대답할 말”이 그에게는 없었기 때문이다. 욥은 여전히 하나님께 신실했지만, 대답할 말은 그에게 없었다.

전자의 경우는 히스기야 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제 14년에 당시의 대국이었던 앗수르가 침략해 와서 유다의 주요 성읍을 점령하고 수도인 예루살렘까지 진격해 왔었다. 예루살렘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였다. 누가봐도 앗수르를 막아낼 힘이 유다에게는 없었다. 그런 상황을 보면서 앗수르 왕 산헤립의 대사였던 랍사게는 이렇게 조롱하며 항복할 것을 요구했다.

왕하 18:29–31 왕의 말씀이 너희는 히스기야에게 속지 말라 그가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내지 못하리라 30또한 히스기야가 너희에게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그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읍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아니하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1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의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왕하 18:33–35 민족의 신들 중에 어느 한 신이 그의 땅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진 자가 있느냐 34하맛과 아르밧의 신들이 어디 있으며 스발와임과 헤나와 아와의 신들이 어디 있느냐 그들이 사마리아를 내 손에서 건졌느냐 35민족의 모든 신들 중에 누가 그의 땅을 내 손에서 건졌기에 여호와가 예루살렘을 내 손에서 건지겠느냐 하셨느니라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지에 대한 논리적인 조롱의 말이다. 문제는 이 조롱의 말에 ‘대답할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 상황에서 객관적으로 봤을 때 틀린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앗수르는 주변의 나라들을 모두 정복했고, 유다는 그들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 정복 당한 나라들도 각자 자기의 신을 의지했지만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당연히 유다라고 해서 결과가 다를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막연히 종교에 기대느니, 지금 항복하고 앗수르 왕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 훨씬 현명한 선택이다.

상황이 이러했기에 히스기야는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저 슬픔에 자기 옷을 찢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기도했을 뿐이다.

시편 기자는 욥의 상황이었을 수도 있고 히스기야의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그를 비방하는 자들은 이방인이었을 수도 있고 같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둘 다가 해당되는 상황에 있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시편 기자는 자신을 비방하는 자들에게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들을 납득시킬만한 말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지 그는 ‘대답할 말’이 있기를 원했다. 다시 하나님을 증언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그의 기도는 이렇게 이어진다.

119:43–44 진리의 말씀이 내 입에서 조금도 떠나지 말게 하소서 내가 주의 규례를 바랐음이니이다 44내가 주의 율법을 항상 지키리이다 영원히 지키리이다

지금 이렇게 조롱을 당하고 비웃음을 당하는 상황이라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에 대해서 하나님 앞에서 다짐하면서 결국 내 입으로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게 되기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하나님께서 그 약속의 말씀대로 인자하심과 구원을 나타내셔야 한다. 그래서 신실한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대로 주의 인자하심과 주의 구원을 내게 임하게 하소서”라고 구한 것이다.

이런 기도가 교만하거나 당돌한 기도가 아닌 이유는 말씀에 대해서 시편 기자가 보이는 태도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지해 왔다(42절).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바라고 기대해 왔다(43절).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항상 지키며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를 간절히 원한다(44절). 특히 44절에서 그가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표현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율법을 “항상” “영원히” 지키겠다고 말한다. 때로 “영원히”를 말하는 사람은 지금은 아니고 앞으로를 의미할 때도 있는데, 여기서는 그렇지 않은 것이다. 항상 영원히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시편 기자는 그 신실함에 대한 댓가로서 자신을 구원해 달라고 구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증언하기 원하니, 지금도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에스라의 기도에서 같은 마음을 엿볼 수 있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이끌고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 금식을 선포하면서 하나님께 평탄한 길을 구했다. 그 이유를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8:22 이는 우리가 전에 왕에게 아뢰기를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자기를 배반하는 모든 자에게는 권능과 진노를 내리신다 하였으므로 길에서 적군을 막고 우리를 도울 보병과 마병을 왕에게 구하기를 부끄러워 하였음이라

율법에 능숙한 학자였던 에스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잘 알았고 그에 따라 살며, 포로된 땅에서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살아왔다. 그리고 지금 그의 증언을 확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그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에스라는 그와 상관 없이 그 상황에서 왕의 도움을 구하는 것을 수치로 생각했다. 그렇게 할 경우 ‘대답할 말’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이다. 단지 ‘평탄한 길’이 에스라에게 중요했던 것은 아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명예가 달려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에스라는 계속해서 진리의 말씀을 증언할 수 있기를 원했고, 그래서 하나님께 간절히 평탄한 길을 구했던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시편 기자도 지금 에스라와 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단지 자신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니다.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온 자로서 계속해서 그 말씀의 신실한 증인이 되기를 원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다. 말씀의 증인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사실 그의 고난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하나님과 별 관련이 없었을 것이다. 신실한 증인으로 살아오지 않았다면 ‘대답할 말’은 원래부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함을 나타내며 살았고, 그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에게는 ‘대답할 말’이 필요했고, 그것을 위해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다.

우리의 삶이 이러해야 하고 그에 따른 우리의 기도도 이러해야 한다. 41-48절의 가장 첫 글자로 계속 사용되는 히브리어 알파벳 ‘와우’는 접속사로서 문맥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번역될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그리고’를 의미한다. 여기 문맥에서는 확실히 ‘그리고’ 혹은 ‘그래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시편 기자의 기도와 그의 삶은 ‘그러나’ 혹은 ‘그래도’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하나님 제가 비록 이렇지만 그래도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가 아닌 것이다. ‘그리고’로 연결되어 있다. 그의 삶은 하나님의 말씀에 신실한 삶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에 합당한 기도를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을 믿는 자의 삶과 기도가 이러해야 한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이런 삶을 살고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어야 한다.

신실한 증인의 확신(45-48절)

이어지는 말씀에서 시편 기자는 말씀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확신을 표현한다. 이 확신은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는 자유함이고(45절), 다음은 담대함이며(46절), 마지막은 즐거움이다(47-48절).

자유함(45절)

먼저 시편 기자는 자유함에 대한 확신을 표현한다.

119:45 내가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 자유롭게 걸어갈 것이오며

여기서 “자유롭게”는 ‘넓은 곳에서’로도 번역할 수 있다. 따라서 자유롭게 걸어가는 것은 풍성한 삶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은 뭔가 억압받는 것 같지만 그것은 우리의 죄악된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것 뿐이다. 우리는 죄를 즐기는 것을 자유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죄에 종노릇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말로 그렇다. 죄는 우리를 얽매고 종이 되게 한다. 그것이 없으면 살 수 없을 것처럼 생각하게 만든다. 잠깐의 쾌락이 있지만 곧 후회할 것을 추구하게 한다. 정말 중요한 것과 지금 원하는 것 중에서 지금 원하는 것을 선택하게 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놓치게 한다. 죄 안에서 ‘자유’를 추구한 사람들인 결코 자유롭지 못하고 행복하지 못하다.

예수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정말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주의 법도들을 구하였사오니”라고 표현했는데, 이 단어는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기로 결심했다고 할 때 사용된 단어와 같다. 지금 그는 대답할 말이 없는 답답한 상황에 있을지 모르지만, 시편 기자는 그것이 말씀을 따르는 삶의 결론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가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고 말씀에 따라 사는 것이 곧 진정한 자유를 누리는 참된 삶이라는 것이다. 지금의 고난은 이 깊은 확신을 흔들 이유가 되지 못한다.

담대함(46절)

다음으로 시편 기자는 증인으로서의 담대함을 표현한다.

119:46 또 왕들 앞에서 주의 교훈들을 말할 때에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겠사오며

이 말씀은 앞서 언급했던 에스라의 경우에 잘 어울린다. 또한 왕궁에 있었던 다니엘의 경우와도 잘 어울린다. 다니엘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왕의 음식을 거부하기도 하고 왕의 명령에 불복종하기도 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그렇게 했을 때, 오히려 그들은 더 높임을 받았다.

이런 구체적인 사례가 있기 때문에 시편 119편의 저자를 그 두 사람 중 하나로 추정하는 경우도 있다. 충분히 가능한 얘기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우리가 생각해 봐야 할 것은 이런 담대함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귄위의 위협에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에 순종했던 것을 성경 뿐 아니라 그 이후의 역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볼 수 있다.

예수님은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고, 제자들에게 담대해야 할 것을 명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기도 하셨다.

8:38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

예수님의 이 말씀처럼 제자들은 권세자들 앞에 무릎 꿇지 않았다. 베드로와 요한은 공회에 잡혀서 위협을 당했지만 이렇게 담대하게 답했다.

4:19–20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스데반은 담대하게 예수님을 전하다가 돌에 맞아 순교했다. 바울은 죄수의 몸으로 왕들 앞에 섰지만 오히려 그 상황을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있어 진짜 수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고 말씀에 따라 살다가 남들에게 비방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이 되지 않는 것이 우리의 진짜 수치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할 때 고난을 당할 수는 있지만 수치는 당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세상의 어떤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46절에서 확신 가운데 그런 담대함을 표현한다. 지금의 필요를 하나님께 구하고, 그 응답은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오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은 변하지 않고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증인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살아갈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할 것이다.

즐거움(47-48절)

셋째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증인으로서 누릴 즐거움에 대한 확신을 말한다.

119:47–48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스스로 즐거워하며 48또 내가 사랑하는 주의 계명들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주의 율례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지금 시편 기자를 비방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그를 비방한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직면한 고난은 말씀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만들 수도 있고 그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릴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한다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 말씀을 향하여 손을 들고 말씀을 계속해서 묵상한다고 말한다. 손을 드는 것은 여러 의미가 있을 수 있는데, 성경에서 이런 맥락으로 사용될 때는 항상 그 대상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든다’는 식으로 사용된다. 하나님을 찾고 예배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 대상이 “주의 율례”, 즉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곧 하나님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말씀에 대해서 두 번이나 “내가 사랑하는”이라는 수식어를 덧붙인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해 어떤 어려움을 당한다고 해도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사라지지 않는 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이 있다고 해도 오히려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뻐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말씀이 힘을 주고 위로를 주고 지혜를 주기도 한다.

시편 기자는 어쩔 수 없이 말씀을 읽고 어떻게든 순종해 보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신실한 증인으로서 말씀을 사랑하고 즐거워 하며 순종하기 원한다. 이 말씀과 이 말씀을 주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이 확신 가운데 기뻐하며 더욱 그 길로 행해야 할 것이다.

도전

오늘 시편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구하는 시편 기자의 기도와 그 가운데 그가 보여준 확신을 살펴 봤다. 이를 통해 우리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초반에 언급한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염치없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염치없는 기도를 자꾸 할 수 밖에 없는 것 일 수 있다. 앨런 로스는 “하나님 말씀에 담긴 약속이 성취되기를 기도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것은 위선적인 신앙”이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 말씀에 따라 살기 위해 노력하지 않고, 그로 인해 당하는 어려움을 견디려고 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 ‘하나님 이렇게 말씀하셨잖아요.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것은 염치 없는 것을 넘어 위선적이고, 더 나아가면 신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일 수도 있다. 그저 하나님을 나의 이익을 위해 이용하고 싶은 마음만 있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는 말씀으로 인한 고난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에 대한 확신 가운데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말씀에 확실하게 기록해 두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그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여 계속해서 묵상하고 순종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약속이 있고 그 약속을 기록한 말씀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도 시편 기자와 같은 확신 가운데 기도하며 말씀을 붙들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언가 더 말씀해 주셔야 하거나 보여주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을 통하여 이보다 더 확실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사랑과 약속을 나타내셨다. 우리는 이 말씀의 신실한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말씀에 대한 확신 가운데 우리 삶과 우리 말로 신실한 증인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