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5)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달레트: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25-32절)

앞 연(17-24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나그네로서 이 땅에서 살아야 하기에 그에 따르는 고난이 있고 그 고난 중의 즐거움과 충고자가 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꼭 필요함을 말했다. 특히 그는 비록 고난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확신과 간절함과 순종하고자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오늘 본문(25-32절)에는 이런 문맥의 연장선에서 특히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기 원하는 마음이 잘 표현되어 있다.

119:25–32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26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27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8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29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30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31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32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여기서 두 말씀에 특히 주목할 것이다. 31절의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와 32절의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이다. 32절은 고난 중에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기 원하는 사람의 가장 소극적인 기도, 혹은 가장 시작에 있는 기도라면, 31절은 가장 적극적인 기도로서 계속해서 추구해야할 기도라고 할 수 있다. 먼저 시편 기자의 상황을 살펴보고, 32절의 소극적 기도와 31절의 적극적 기도를 중심으로 관련 말씀들을 살펴보자.

선택이 강요되는 (것 같은) 상황

우리 삶이 항상 선택의 연속이기는 하지만, 고난의 시간은 우리에게 한쪽의 선택을 더 강요한다.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고난 중에 평소와는 다른 선택의 압박을 받게 되고 이것은 한편으로는 유혹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야고보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죄를 짓게 유혹하지는 않으신다. 하지만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의 죄성은 죄를 선택하고 싶고 사탄과 세상은 그런 우리를 부추긴다. 이것이 우리가 고난 중에 받게 되는 압박이다. 하나님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하고 싶은 것이다.

고난 중에 우리는 연약해 지고 공격에 더 취약한 상태가 된다. 건강할 때는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도 쉽게 이겨내지만, 몸이 약해졌을 때는 같은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와도 이겨내지 못하는 것과 비슷하다. 외부의 고난은 영적으로도 우리를 연약하게 만들고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잘못된 선택에 대한 유혹에 더 쉽게 넘어갈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택은 선택이다. 나의 책임이라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도 핑계할 수 없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도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이다(약 1:14).

존 파이퍼 목사는 설교에서 ‘중독’에 대해서 말하면서 중독은 상대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중독은 통제가 불가능하여 다른 선택을 할 수 없는 상태라고 생각하는데, 그조차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음란물에 중독된 사람은 너무 그 욕구가 강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데, 만약에 어떤 테러리스트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목에 칼을 대고 그 영상을 클릭하면 이 사람을 죽이겠다고 협박을 하고 있다면 그 욕구를 통제하지 못하겠느냐는 것이다. 당연히 그런 상황에서는 통제할 수 있다. 만약 1주일 동안 스마트폰을 보지 않으면 1000만원만 준다고 해도 스마트폰에 대한 통제력은 자동적으로 생겨날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은 결국 음란물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고, 스마트폰 사용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어쩔 수 있는 것, 즉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렇게 하기를 선택해 온 것 뿐이다.

‘분노조절장애’라는 말이 있다. 분노를 통제하지 못하고 거칠게 표출하는 성격 장애를 지칭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을 정말 ‘장애’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떤 물리 화학적인 이유로 정말로 분노가 통제되지 않는 경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오히려 많은 경우 그것은 분노 조절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 면죄부를 주는 표현일 수 있다. 실제로 ‘분노조절장애’가 어떤 경우에는 쉽게 ‘분노조절잘해’로 바뀌기 때문이다. 내가 화를 낼 수 있는 상황, 그렇게 해도 괜찮은 사람에게는 화를 내고, 내가 화를 낼 수 없을 것 같을 때, 화를 내면 손해 볼 것 같을 때는 화를 내지 않는다면, 그것은 장애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그건 그냥 죄의 문제일 뿐이다. 자기 선택이고 그에 대한 책임도 자신에게 있다.

내부의 문제이든 외부의 문제이든, 나에게 어떤 선택을 더 강요하는 상황은 있다. 그 압박이 클수록 내가 더 연약하게 느껴지고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냥 이 압박에 저항하기를 포기하고 무릎 꿇어야 할 것 같다. 나에게 선택할 힘은 없는 것 같다. 선택은 나의 몫이 아니고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 같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우리는 선택할 수 있다. 심지어 예수님은 눈이 나를 범죄하게 하면 눈을 빼버리고, 손이 범죄하게 하면 손을 자르라고 까지 말씀하셨다. 극단적으로 들리겠지만, 당장의 안이함이 영원히 돌이키지 못할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안다면 어렵더라도 옳은 선택을 하라고 하신 말씀이다.

어쩌면 이런 말이 정말로 힘든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는 상처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라고 좋아서 이러고 있는 게 아닌데, 어떻게 그렇게 다 내 선택이고 내 책임이고 내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따지고 싶을 수도 있다. 당신도 이런 상황이면 똑같은 선택을 할거라고 말하고 싶을 수 있다. 내가 얼마나 힘든지 알면 그런 얘기 못 할거라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성경의 말씀이 또 다른 폭력이자 가해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비난하고 정죄하려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정말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행복에 이르는 길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 기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묘사한 표현을 보라.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

겉으로 보기에는 괜찮아 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 영혼”이라고 표현된 진짜 그 자신은 괜찮지 않았다. 그는 진토에 붙어있는 것 같았다. 스스로 땅에 납작 엎드린 것과는 다른 의미다. 성경에 보면 겸손의 의미로 스스로 그렇게 땅에 엎드리는 경우가 있지만 이 경우는 아니다. 시편 기자는 외력에 의해서 진토에 붙게 되었다. 진토에 달라 붙어서 빠져나오기 힘든 상황이었다. 수치를 당하고 있는 모습이고 죽음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모습이다. 스스로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모습이다. 28절의 묘사도 이와 유사하다.

119:28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

여기 “녹사오니”라고 번역된 단어는 “떨어진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욥기에서는 눈과 연관되어서 눈물을 흘린다는 의미가 되었다(욥 16:20). 여기 시편도 그런 슬픔과 관계 되어 있기 때문에 “슬픔으로 눈물을 흘린다(운다)”고 번역한 성경도 많다. 틀린 번역은 아니지만 이 문장에서 ‘떨어지는 것’은 눈물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다. 따라서 “녹아 내렸다” 혹은 “무너져내렸다”라고 번역하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슬픔”을 “눌림”으로 번역한 것도 적절하다. 여기서 말하는 슬픔은 아주 큰 슬픔을 말한다. 특히 상실로 인한 슬픔이다. 그런 슬픔은 우리가 느낀다기 보다는 우리를 짓누른다. 거대한 슬픔이 시편 기자를 짓눌러서 그는 무너져내린 것이다. 스스로 일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있었을 것이다.

앞서 말했던 정말로 힘든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시편 기자를 어떤 선택으로 이끌었을까? 그는 어떤 선택을 강요 받았을까? 그는 어떤 압박을 받았을까? 우리가 그런 상황에서 받았을 압박을 동일하게 받았을 것이다. 나는 아무 선택도 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이 상황이 끝나지 않는 한, 나는 그냥 이 상황이 이끄는대로 끌려갈 수 밖에 없는 것 같은 무력감을 느꼈을 것이다.

선택은 강요되지 않는다. 어렵다면 먼저 기도하라(32절 외).

분명 그럴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정말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은 아니다. 시편 기자는 이 상황에서 선택을 하고 있다. 그가 보여주는 모습은 나약함이나 무력함이 아니다. 그는 고난 중에, 그를 짓누르는 압박 속에서 올바른 선택을 하기 원했다. 여전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어떤 상황이라고 해도 선택은 강요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상황에 압도되기 보다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고 이렇게 기도한다.

119:25 내 영혼이 진토에 붙었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119:28 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고난 중에 정말로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게’ 아니라면, 최소한 이런 기도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주의 말씀대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 죽음의 위협, 완전히 무너져내린 상황에서도 삶의 주권자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의 도우심을 진심으로 구하는 것이다.

이런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바탕에 있다. 그래서 그는 “주의 말씀대로” 그렇게 해달라고 구한다. 하나님께서 약속해 주셨으니 그렇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많은 말씀이 있지만, 대표적으로 시편 기자가 의지했던 말씀은 이런 말씀이었을 것이다.

30:19–20 내가 오늘 하늘과 땅을 불러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20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 여호와께서 네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주하리라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에게 생명을 약속하셨고 복을 약속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죽음이 눈 앞에 있는 것 같은 무너짐을 경험하던 시편 기자는 바로 이 말씀대로 살아 나게 해달라고 세워 달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시편 37편에서 다윗도 악한 자들의 형통을 보며 불평하거나 부러워하지 말라고 하면서 이런 말씀을 기록했다.

37:3–6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 땅에 머무는 동안 그의 성실을 먹을 거리로 삼을지어다 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5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6네 의를 빛 같이 나타내시며 네 공의를 정오의 빛 같이 하시리로다

37:23–27 여호와께서 사람의 걸음을 정하시고 그의 길을 기뻐하시나니 24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25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26그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 그의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27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고 구할 수 있는 것이다.

당연히, 이조차도 고난 중에서는 쉽지 않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모르거나 믿지 못해서는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이 나를 변함없이 사랑하고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을 읽어도 화가 난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말씀에도 화가 난다. 지금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 상황이 하나님의 사랑하고는 전혀 관계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 간증을 하면 그 사람이 나를 놀리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무너져내린 마음이 그렇다. 하나님을 향하여 좁아진 마음이 그렇다.

하지만 그때도 여전히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있다.

119:32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이것이 정말 살고 싶은 사람의 기도다. 정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삶을 누리고 싶어 하는 사람의 기도다. 그는 하나님의 길로 걸어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달려가고 싶다고 말한다. ‘빠르게’ 가고 싶다는 의미보다는 ‘기쁘게’ 가고 싶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정말 그가 원하는 삶이다.

그러기 위해서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을 넓혀주소서”라고 기도한다. 지금은 그의 마음이 좁아져 있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 뜻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여기 내가 쓰러져 있는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지는 않는다. 하나님께 어디 한번 나를 움직여 보라고 떼쓰고 있지도 않다. 그는 하나님의 계명의 길로 달려가고 싶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사는 삶을 원한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잘 안생긴다. 그래서 이렇게 구하는 것이다. “주여, 내 마음을 넓히소서”

내가 지금 당하는 어려움이 아무리 크다고 해도, 그 압박이 아무리 강하고 무겁다고 해도, 선택은 강요되지 않는다. 여전히 우리는 하나님의 길 따르기를 선택할 수 있다. 최소한 그것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불평하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은 언약의 말씀을 받은 자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다. 하나님을 겨우 그런 분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때의 모습이 정확히 그러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을 받았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그들에게 주실 것이라고 분명히 약속하셨다. 하지만 그곳 백성들이 얼마나 크고 강하며 그곳의 성벽이 얼마나 크고 견고한지에 대한 보고를 듣자, 그들의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갈 틈이 사라졌다. 그들은 울며 원망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불신했다고 말씀하셨다(민 14:11).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응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우린 글로 이 역사를 읽고 있지만, 그들에게는 현실이었다. 목숨을 걸고 전쟁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자기만 죽는 것이 아니라 자기 ‘처자’들까지도 죽거나 사로잡힐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무너졌을 것이다. 그 상황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불신’과 ‘멸시’를 강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마음이 좁아졌다면 하나님께 마음을 넓혀 달라고 구할 수 있었다. 정말로 하나님의 길을 달려가고 싶었다면 그렇게 구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광야에서 모두 멸망했다. 그들은 삶을 선택했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그들이 선택한 것은 죽음이었던 것이다.

상황이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하지만 하나님의 길을 걷고 싶다면, 최소한 이 기도를 해야하는 것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서 지금 바른 선택을 해야하고, 그러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야 한다.

배우길 기도하면서 지금 바른 선택을 하라(31절 외)

119:31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여기 “매달렸사오니”는 25절의 “붙었사오니”와 동일한 단어다. 그의 영혼은 지금 진토에 붙어 있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에서도 떨어지지 않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서 시편 기자는 수치 당하는 삶이 아니라 자랑할만한 삶을 원한다. 지금의 상황은 자신이 진토에 붙어서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여전히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도 붙어있기 때문에(매달리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살아나게 하시고 다시 세워 주실 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명예보다 하나님의 명예를 생각하고 있다. 그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린 이상, 그의 길이 곧 하나님의 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의 수치는 하나님의 수치가 된다. 시편 기자는 지금 그렇게 되지 않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는 모습은 본문에서 두 가지로 나타난다. 26-27절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기 원하고, 29-30절에서는 그 말씀대로 선택하며 살기를 원한다.

119:26–27 내가 나의 행위를 아뢰매 주께서 내게 응답하셨사오니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27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26절은 흥미롭다. 앞부분에서 시편 기자는 과거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에 응답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여기서 “아뢴다”는 표현은 지나간 일을 하나 하나 기억하면서 하나님께 말씀드렸다는 의미다. 그가 잘한 것 잘못한 것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말씀드렸고, 하나님은 그에게 응답하셨다는 말이다. 이것이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경험에 기대에서 지금 기도하는 내용은 이것이다. “주의 율례들을 내게 가르치소서”

당연히 지금의 고난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그렇게 되기만을 원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다. 27절도 비슷하게 “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라고 구한다. 그가 구하는 것은 단순한 정보나 지식이 아니다. 인생을 오래 살면 얻을 수 있는 지혜도 아니다. 그가 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별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했다. 그래야 상황이 좋아졌을 때 그것이 단지 시간이 지나서 혹은 운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놀라운 일을 행하셔서 그렇게 되었음을 알고 묵상하며 예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

하지만 그전에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아야 그 길을 선택하기 쉬워진다는 사실이다. 마음이 좁아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문제 못지 않게, 눈이 어두워서 깨닫지 못해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올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고난이라는 어둠 속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주의 율례를 가르쳐달라고 구하고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으로 이 상황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린다.

다음으로 시편 기자가 말씀에 매달리는 모습은 29-30절에서 볼 수 있다.

119:29–30 거짓 행위를 내게서 떠나게 하시고 주의 법을 내게 은혜로이 베푸소서 30내가 성실한 길을 택하고 주의 규례들을 내 앞에 두었나이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구하는 것은 올바른 길을 걷는 것이다. 고난 중에 거짓 행위, 즉 잘못된 길을 걷고 싶은 유혹이 있다. 특히 고난의 원인이 바른 길을 걷기 때문이라는 것이 명확할 때 더욱 그렇다. 그럴 때 우리는 쉬운 길을 걷고 싶다. 그리고 그 쉬운 길은 거짓 길이다. 시편 기자는 그런 길을 걷기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을 은혜로이 베풀어 두시기를 구한다. 그 법에 따라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며 걷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시편 기자가 지금까지 선택한 길이었다. 그는 성실한 길을 택하고 하나님의 규례들을 앞에 두었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그가 선택하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가 말씀을 읽으면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지금 상황을 다 이해하고 있지는 못하다. 욥이 경험했던 상황, 다윗이 경험했던 상황을 그는 경험하고 있다. 성실한 길을 택한 결과가 예상하고 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 상황에서 멈춰 서기를 원하지 않는다. 예상과 다른 결과 때문에 거짓 길을 선택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로 성실한 길,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기 원하고 그렇게 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모든 상황을 이해해야지만 순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우리는 거의 순종을 선택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영적인 삶을 위한 충분한 말씀을 주셨다. 이것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우리 삶에서 만나는 모든 세부적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말씀해주신 것은 아니지만, 우리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원리를 알려주셨고, 성령을 주셔서 말씀에 따라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신다. 이것이 우리가 믿는 성경의 충분성이다.

우리가 직면한 상황(고난)에 대해서 더 알면 순종이 좀 더 쉬워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모른다고 해서 순종하지 않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말씀에 매달려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모르기 때문에 쉬운 선택은 아닐 수 있다. 오히려 어렵고 두려운 선택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드러내주신 말씀에 기초한 선택이라면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고, 우리는 계속해서 담대하게 그런 선택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린다, 혹은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알기를 구하면서 또한 지금 보여주시는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려고 하는 사람의 자세다. 말씀에 대해서 “지금은 힘들어서 안됩니다. 지금은 몰라서 안됩니다. 지금은 어려워서 안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겠습니다”라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도전

‘누칼협’이라는 신조어가 있다. 누가 칼들고 협박했냐는 뜻으로 다른 사람의 어리석은 선택과 그 결과를 조롱하는 의미가 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은 심지어 진짜 ‘누칼협’이라고 해도 우리는 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한다고 말해준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은혜 받기를 선택하는 것이고 복 받기를 선택하는 것이다. 너무나 단순하고 당연한 말이지만 실제 우리 삶에서 이러한 선택을 계속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는 않다. 특히 고난 중에 있을 때는 더욱 그렇다. 진토에 붙은 상태, 눌려서 무너져내린 상태에서는 그냥 있고 싶고 그래야 할 것 같다. 아무 것도 못할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 특히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으면, 너무 쉽게 우리는 죄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사실 나는 선택하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길을 선택하지 않는 자체가 죄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 앞에 있는 길은 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위기가 곧 기회라는 말은 이런 경우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오히려 고난은 나의 나약함과 무력함을 보게 하고 나를 도우실 수 있는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저절로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그 역시 나의 선택인 것이다. 하나님의 길로 달려가고 싶다면 그렇게 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내 좁아진 마음을 넓히셔서 하나님의 뜻을 보게 하시고 이해할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혹, 다 이해하지는 못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심을 믿고 하나님의 길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구해야 한다. 누가 칼을 들고 협박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길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려야 한다. 이 길만이 참된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119:31–32 내가 주의 증거들에 매달렸사오니 여호와여 내가 수치를 당하지 말게 하소서 32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