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언약의 말씀, 언약의 삶(2)

본문: 시편 119편

설교자: 최종혁

 

알레프: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1-8절)

복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사실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복을 받고 화를 면하려고 한다. 그래서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을 하기도 한다. ‘미신’이라고 하는 것들이 다 근본적으로는 화를 피하고 복을 받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에서 시작된 것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미신 같은 것들이 아니어도 살면서 복을 받고 싶은 것은 당연한 사람의 본성이라 할 수 있다. 주식이 대박나면 좋겠고, 시험 공부 안해서 찍은 것이 다 맞았으면 좋겠다. 그런 특별한 것이 아니더라도, 가족이 다 건강하고 하는 일이 잘 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살아간다. 오죽하면 공식적인 새해 인사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겠는가. 사람들은 정말로 복 받기를 원한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

성경에 대한 큰 오해 중 하나는, 성경을 ‘복’과는 전혀 상관 없는 책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성경을 ‘도덕경’으로 생각해서 그런 말씀만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혹은 무엇을 하라 혹은 하지 말라는 명령만 가득한 법전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 면에서는 도움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 삶의 행복과는 크게 관계 없는 것처럼 생각한다. 오히려 그런 도덕적 명령들이 행복을 방해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의 가장 큰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복’이다. 처음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신 후에 하신 것이 바로 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이었다(창 1:28).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하셨던 말씀도 “너는 복이 될지라”와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였다(창 12:2-3). 예수님도 산상수훈의 시작을 ‘팔복’이라고 불리는 말씀으로 시작하셨다(마 5:1-12).

물론 성경이 말하는 복이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복과 일치한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복은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 받고 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들린다. 표면적으로 분명히 그렇다. 우리는 어느날 갑자기 돈이 많이 생기는게 복이라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그런 것을 복이라고 말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동일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가장 유익이 되는 것이 ‘복’이라 할 때, 성경은 바로 그 복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말로 복을 원한다면 성경이 복에 대해서 말하는 바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봐야 한다.

오늘 시편이 바로 그런 복에 대한 말씀이다. 진짜 성경적인 ‘번영복음’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시편은 그 시작에서 복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했었다. 그리고 지난 주에 언급했던 것처럼 시편 119편의 저자가 바로 시편 1편이 말하는 복 있는 사람의 좋은 본보기다. 오늘 말씀에서 복 있는 사람인 시편 저자는 복 있는 삶의 원리를 먼저 밝히고(1-4절), 그런 복 있는 삶을 위한 기도를 한다(5-8절).

복 있는 삶의 원리(1-4절)

먼저 시편 119편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경”에 대해서 다양한 표현을 사용한다. 오늘 본문에서듣“율법”,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판단”이 사용되었다.

시편 119편 전체를 보면 8개의 단어가 주로 사용되었다. 율법(25x), 말씀(다바르, 24x), 증거(23x), 판단(규례, 23x), 계명(22x), 법도(21x), 율례(21x), 말씀(임라, 약속, 19x)가 주요 8단어이다. 각 연이 8절인 이유가 이 8 단어와 연관이 있을 것 같지만, 기계적으로 그렇게 되어 있지는 않다. 즉, 각 절에 이 단어들이 하나씩 순서대로 사용되었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8 단어가 모두 등장하는 연도 22연 중에 3개 밖에 되지 않는다. 즉, 시편기자는 그런 면에서 규칙성을 두고 시를 기록하는데 큰 관심이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이 단어들이 강조하는 바는 조금씩 다르다. 하지만 시편 기자가 그 차이를 염두에 두고 특정 단어를 절마다 선정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결국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의 다양한 측면을 다양한 표현을 통해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떤 단어가 어느 구절에서 사용되었을 때, 그 단어의 의미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 모든 단어들이 함께 나타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특징을 생각해야 한다.

필요 시에 말씀 강해를 하면서 좀 더 자세하게 단어의 의미를 설명하겠지만, 그전에 간단하게 정리하면 각 단어는 이런 의미를 가진다.

  • 율법(토라): “가르치다”, “가리키다”를 의미하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본적으로는 “가르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가르쳐 주신 삶의 원리가 율법이다.
  • 말씀(다바르): 가장 일반적인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
  • 증거: 하나님 자신에 대한 증언(하나님의 본질, 성품, 그로 인해 요구하시는 것들)
  • 판단: 재판관으로서 하나님의 판단(결정)
  • 계명: 명령을 내리고 복종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직접적 권위가 강조된 표현
  • 법도: 지정된 일, 책무(권위자가 지시한 것)
  • 율례: 명령의 구속력과 지속성을 강조
  • 말씀(임라): 입에서 나온 말로서 약속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고 하나님의 뜻을 드러낸다. 무엇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이 어떠한지를 알게 한다.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알게 한다. 더 나아가 그에 따라 우리가 어떤 일을 해야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도 알게 하고, 그에 따른 순종을 요구한다. 또한 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있음도 알게 한다. 시편 119편에서 위의 표현들을 만날 때는 이런 의미가 함축되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에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중요한 것은 이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시편 119편에서는 말씀을 나타내는 표현 앞에 거의 항상 “주의(your)”가 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기 때문이다. 나와 관계 없는 누군가의 말이 아니다. 나와 관계는 있지만 내 삶에 별로 영향은 없는 누군가의 말이 아니다. 온 우주의 왕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내 삶의 구원자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 절대적인 무게감을 알아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시편 119편은 복 있는 사람, 복 있는 삶의 원리를 이렇게 말한다.

119:1–4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히브리어는 1, 2절의 시작 단어가 동일하다. “복이 있다”는 선포다. 크리스토퍼 애쉬는 이에 대해 “출발점에 ‘복을 받고 싶은 자는 이 길로 오라’는 커다란 전광판이 설치되어 있는 셈”이라고 표현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복 받기 원하는 사람들에게 정말로 어떤 사람이 복을 받을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한편으로 복을 누리고 있는 시편 기자의 주관적인 경험이기도 하고 또한 성경이 일관되게 선포하는 객관적인 진리이기도 하다.

성경은 복을 얻는 ‘유일한 길’을 말한다. 사람들은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복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각자가 원하는 복이 있고 그것을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찾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정답은 없고 각자가 자기 답을 찾으면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면 좋겠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정답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리고 그 정답은 단 하나다.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의미에서의 복이 있고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방법으로만 얻을 수 있다.

1:17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좋은 것은 전부 하나님에게서 온다. 하나님이 모든 복의 근원이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에게 좋은 것을 찾을 수 없다. 일시적인 만족이나 기쁨을 주는 것은 있다. 그것들이 모이면 결국 그게 복 아니냐는 생각을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우리가 복이라고 생각하는 것, 우리에게 복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들이 바로 우리 스스로 판,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다. 우리는 그런 웅덩이의 물로 만족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복을 찾으려고 노력만 하는 것이다. 생수는 하나님께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참된 복을 주신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파산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4:13–1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14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오직 하나님이 복이시고 복의 근원이시기에 다윗은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했다(시 16:2). 아삽도 “하나님께 가까이 함이 내게 복이라”고 동일한 고백을 했다(시 73:28).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복’이고 ‘복음’이기도 하다. 죄로 인해 복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와 복을 누릴 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께만 복이 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복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포기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1-4절은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을 설명한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약의 관점에서 보면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고 말한 것과 동일하다(요일 1:7). “빛 가운데 행하는 것”에 대한 구약의 묘사가 1-4절이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4절까지 말씀은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따라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주목할 만한 부분이 있다.

먼저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 복이 있다(1a절). “온전하다”는 말에서 이미 나는 복 받기는 틀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 수 있다. 혹은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에게 주신 신분에 대한 말씀으로 생각하고 쉽게 넘어갈 수도 있다. 온전하게 하는 복을 받은 사람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행위”가 온전한 사람이다. 실제로 삶이 온전한 것을 말한다.

그럼,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사람인 이상 어떻게 그 삶이 온전할 수 있을까? 전혀 죄를 범하지 않는 상태가 될 수는 없다는 측면에서는 당연히 온전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그렇게 어떤 죄도 범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기서 “행위”는 ‘길’을 의미한다. (우리말(한자이긴 하지만)의 ‘행’도 다닌다는 의미.) 그리고 이어지는 1절의 뒷부분도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다. “행하는 것”은 ‘걷는 것’이고 “행위’는 ‘걷는 길’이라고 할 수 있다. “걷는 것”, “걸음”은 성경에서 ‘삶’을 지칭하는 표현이다. 따라서 “행위”는 어떤 행동 하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행동 하나 하나를 점으로 표현한다면, 그 점들이 모인 것을 멀리서 보았을 때 그것은 선이 되어 길처럼 보일텐데, 그 길이 어디를 향하느냐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3절도 동일하게 ‘길’과 ‘걷는 것’이 언급되어 있다. 복 있는 자는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한다. 불의라는 것은 결국 주의 도(길)을 벗어난 행위를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길, 걸으라고 하신 그 길을 벗어나지 않고 그 위로 걷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인 것이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은 자기가 상상한 것을 원하는대로 잘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잘 그려진 그림을 보고 그려야 하고, 그마저도 안되는 사람은 대고 그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알아서 잘 살아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행복한 삶에 대해서 말씀해 주셨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사는 삶이 복 있는 삶이다. 우리의 길이 하나님의 길과 완벽하게 동일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린 아이가 아무리 좋은 작품을 대고 그린다고 해도 똑같이 그릴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엇나갈 때가 있다. 하지만 똑같이 그리려고 노력을 한다면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비슷해 질 것이다. 그런 과정이 성경이 말하는 복 있는 자의 온전한 삶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고 말씀하셨다(창 17:1).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했다고 성경은 말한다(욥 1:1). 아브라함이나 욥에게는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그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라는 성경의 말씀이 틀렸다는 실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도 죄를 범했다. 다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해서 따르는 삶이었을 뿐이고, 그런 면에서 그들도 복 있는 자들이었다.

성경이 우리의 삶을 이렇게 길을 걷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참 흥미롭다. 우리 삶을 어디에서 ‘사는 것(거주하는 것)’으로 표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삶’이라는 단어와 더 잘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걷는 것과 사는 것은 그 강조하는 바가 다르다. 사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한 반면, 걷는 것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는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하니 뭘 하면 안된다. 뭘 하면 거기서 벗어나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걷는 것은 어디로 향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니 뭘 해야 한다. 계속해서 해야 한다.

복 있는 사람은 계속해서 걷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길을 걷는 사람이다. 지금의 모습에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온전함을 바라보며 걷는 사람이다.

다음으로 주목할 부분은 복 있는 사람은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라는 점이다(2절). 사실 이것이 복 있는 사람이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켜서 주의 길로 행하는 궁극적인 동기이자 목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 말씀하신 하나님이 중요하시기 때문이다. 단순히 겉으로 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따르는 것 같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전심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결과여야 한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길을 함께 걷기 원하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얘기했던 것처럼, 이 부분이 없으면 순종의 삶은 그저 종교 생활이 되고, 결국 율법주의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수고와 희생을 하든지 상관 없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의 책망을 들었던 유대인들은 나름 억울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들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렸고, 열심히 무언가를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고 안식일에는 음식도 해먹지 않고 병자도 치료하지 않았다. 그런 것들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부정하셨다. 아무런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말씀하셨다.

사람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 있지만, ‘어쨌든’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순종은 정말로 그 마음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시작된다.

죄인의 상태에 대한 성경의 묘사 중 하나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죄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고 하나님을 부르지 않는다(시 14:2-4).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죄인은 하나님이 싫다. 어둠이 빛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빛 가운데 있는 자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찾는다. 열심히 찾는다. 만나기 원한다. 말씀을 듣기 원하고 그 말씀에 따르기 원한다. 혹 그렇게 하지 못했을 때에도 다시 하나님을 찾는다. 그렇게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끝으로 복 있는 사람에 대해서 주목할 만한 점은 4절에서 찾아 볼 수 있다. 4절의 번역이 조금 어색하게 되어 있는데, 좀 더 원문의 의도를 살려서 자연스럽게 바꾸자면 “주께서 친히 주의 법도를 잘 지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시편 기자는 성경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성경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신 말씀이다. 그냥 그 책을 잘 보관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잘 읽고 그 말씀에 따라서 살라고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도 살아 보면 괜찮을거야라고 하신 제안이 아니다. 다른 방법도 있지만 그래도 이게 제일 나을거야라고 설득하는 것도 아니다. 이렇게 해야 한다는 명령이다. 즉, 앞서 말한 것처럼 복을 얻으려면 이 방법 밖에는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렇게 하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때로 우리는 더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낼 때가 있다. 내가 발견한 터진 웅덩이가 더 나아보일 때가 있는 것이다. 사울이 그랬다.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기 보다는,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방법을 택했다. 그는 사무엘이 와서 제사 드리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기가 제사를 드렸다. 그 결과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왕이 망령되이(어리석게) 행하였도다”라고 말하며 사울의 왕국이 더 이상 이어지지 못할 것을 말했다(삼상 13:13-14).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도 사울은 자신이 보기에 더 나은 방법을 택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아말렉 왕인 아각을 살려 주었고, 다른 좋은 것들을 남겼다. 그의 말에 따르면 좋은 것들로 하나님께 제사하려고 했다고 한다. 아마도 변명하려고 한 말이겠지만, 혹 그것이 진심이었다고 해도 사울은 정말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는 없다. 사무엘은 그에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답했다(삼상 15:22). 그리고 이 사건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시는 결정적인 사건이 되었다.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자기 생각을 따랐을 때 그는 복 있는 사람이 아닌 화 있는 사람이 된 것이다.

하나님보다 내가 더 지혜로울 수 없다. 하나님은 친히 말씀을 주셔서 우리에게 그 명령을 지키게 하셨다. 4절에 사용된 “법도”는 권위를 가진 자가 지시한 말을 의미하는 단어로서 듣는 자는 따라야 할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2절에서 살펴봤던 것처럼 궁극적으로 우리가 원하는 일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렇게 해야하는 일이기도 하다.

다시 “복이 있다”는 1-2절의 표현으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 성경은 결국 유일한 길, 유일한 복을 말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더 복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복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많이 있지만 그래도 이게 더 좋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시편 1편에서 분명히 말했던 것처럼 둘 중 하나다. 복이 아니면 화가 있다. 1-3절은 좀 더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유일한 복 있는 사람에 대한 묘사다. 4절과 같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주셔서 이 말씀을 지키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복 있는 삶의 원리다. 유일한 원리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것, 이것이 유일하게 참된 복을 누릴 수 있는 원리다.

복 있는 사람의 기도(5-8절)

5-8절은 바로 이런 원리에 기초한 기도다.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의 너무나 당연한 기도다.

119:5–8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

5절은 순종에 있어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다. 119편을 읽어 보면 시편 저자는 충분히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언약의 백성으로서 본이 되는 사람이라 할 만하다. 앞으로 자세히 보게 되겠지만, 그는 계속해서(밤낮으로)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다. 반대로 죄에서는 자신을 멀리 한다. 고난을 당해도 하나님을 배울 수 있음에 감사한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한다. 사람의 기준에서 볼 때, 이미 충분히 잘 하고 있고, 또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사실 이 시편 전체가 그런 기도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도우심 없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굳게 하지 않으시면, 언제든 하나님의 길에서 자신이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언제든 내 의지와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절은 이 기도의 영역이 일부에 한정되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결국 부끄러움(수치)을 당하지 않기를 원한다. 이 수치는 사람들 앞에서 당하는 것일 수도 있고 하나님 앞에서 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의미상 큰 차이를 만들지는 않는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모두” 주의하지 않은 것에 대한 결과로서 당할 수치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어떤 말씀에 계속 둔감했다고 가정해 보자. 부부 관계에 대한 말씀이다. 아내를 사랑하고 남편에게 순종하는 부분에 대해서 내가 계속해서 귀를 막고 눈을 감고 있었다. 그러면서 다른 영역, 예를 들어 자녀 양육이나 복음 전도에 대해서 열심히 다른 성도를 가르쳐왔다고 해보자.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부부 관계가 바로 잡을 수 없을 정도로 갈등이 생겨 성도들이 알게 된다면 큰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혹은,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부끄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존 오웬은 “죄를 죽이지 않으면 죄가 당신을 죽일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충분하여 내 모든 영적인 삶에 대해서 말씀한다. 따라서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해야 한다. 어떤 말씀이 나를 불편하게 한다고 해서 그 말씀을 무시하면 안된다. 그 말씀이 다루어야 할 내 삶의 영역이 있다. 시편 기자는 모든 말씀에 주의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한다.

7절은 이 기도의 목적을 언급한다. 그것은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리기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 가능하다. 시편 119편에는 이렇게 배우고 가르치는 것이 자주 등장하는데, 단순히 지식적으로 아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는 것은 단순히 지식의 교환이 아니라 삶의 변화가 따르는 일이어야 한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을 배우고 그에 따라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 바른 마음으로 감사의 예배를 드릴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알면 알수록 그 삶이 더 깊어지고 예배는 더욱 풍성해 지는 것이다.

8절은 이 기도의 절박함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고 싶은 시편 기자의 마음은 가볍지 않다. 그는 치열한 싸움 중에 있다. 지난 시간에 말했던 것처럼, 시편 기자는 실제적인 고난 중에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그를 버리신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중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들고 이렇게 간절하게 기도하는 것이다. “제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비록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 떠나지 마소서.” 정말로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사람의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싶은, 하나님 곁에 항상 머물고 싶은 사람의 기도인 것이다. 참된 복을 누리고 싶은 사람의 기도다.

그러기 위해 이 사람은 “주의 율례를 지키”겠다고 다짐한다. 그리고 하나님께 그렇게 할 수 있게 가르쳐 주시기를, 그리고 도와 주시기를 구한다. 지혜와 힘을 구하는 것이다. 자심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의 정직한 기도다.

도전

우리에게 이런 기도가 필요하지 않을까? 정말로 복 있는 삶을 원한다면 우리도 이런 간절한 기도가 필요할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기도하지 않는다면, 혹은 기도는 하는데 이런 간절함이 없다면, 어쩌면 우리가 원하는 복 있는 삶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것과 달라서 일지도 모른다.

  • 그래서 굳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차라리 주식에 관한 동영상 찾아보고 성공에 관한 책 한 권 더 읽어보는 것이 더 나은 것이다.
  • 그래서 굳이 모든 계명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 봐야 죄책감만 더 생기고 그만큼 오히려 더 불행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굳이 명령을 지키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 봐야 손해보는 일만 많아지고 사람들에게 이상한 사람 취급만 받기 때문이다.
  • 그래서 굳이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어차피 내 생각대로 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수를 찾은 사람이 그 앞의 생수를 마시지 않고 여전히 그 옆에서 웅덩이를 파서 빗물을 받아 먹고 있으면 참 안타까울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런 모습은 그 사람이 생수 가까이에 있지만 여전히 생수를 찾지 못한 모습일 수도 있다. 복 있는 사람은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고 그 생수를 마시는 사람이다. 더 그렇게 하려는 사람이다. 만약 내가 그렇지 않다면, 나 자신을 정직하게 점검해 봐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 이 시편의 기도가 필요하다. 복 있는 사람이든, 복을 원하는 사람이든, 정직하고 간절한 기도가 필요하다. 끝으로 함께 이 기도를 드리고 말씀을 마치겠다.

119:1–8 행위가 온전하여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들은 복이 있음이여 2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3참으로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하는도다 4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 5내 길을 굳게 정하사 주의 율례를 지키게 하소서 6내가 주의 모든 계명에 주의할 때에는 부끄럽지 아니하리이다 7내가 주의 의로운 판단을 배울 때에는 정직한 마음으로 주께 감사하리이다 8내가 주의 율례들을 지키오리니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