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아는 자들의 세상보기
본문: 시편 36편 1~6절
설교자: 최종혁

 

세계관은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입니다. 우주의 근본,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와 같은 철학적이고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각자의 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 안 해봤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누구나 저마다의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아주 깊이까지 고민하고 생각하지 않더라도 어느 정도의 세계관은 가지고 있고, 그 세계관은 실제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는지에 큰 영향을 줍니다. 조금 다르게 말하면 삶의 철학의 근본에 있는 것이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돈이 제일 중요해”, “사람이 살면서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봐야지”, “미래보다 현재가 중요해”, “건강이 최고야”, “인간관계에 실패하면 끝이야”와 같은 말들도 다 세계관의 일종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문제는 이 세계관이 얼마나 정확한가하는 것입니다. 삶의 아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가 정말 중요합니다. 만약 이 세상 외에 다른 세상은 없다고 믿는다면, 다음 세상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됩니다. 반대로 지금 이 세상은 임시적이고 또 다른 진짜 세상이 있다고 믿는다면, 이 세상에 무언가를 투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시편 36편에서 우리는 어떻게 성경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표제에는 “여호와의 종 다윗의 시”라고 되어 있습니다. 저자인 다윗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주를 아는 자”(10절)로서 이 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람(1~4절), 하나님(5~6절), 자신(7~9절), 그리고 현실(10~12)을 어떻게 봐야하는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1. 사람 보기(1~4절)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에 대한 올바른 관점입니다. 사회에는 여러 문제, 사회악, 범죄들이 있는데 사람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합니다. 이런 문제의 해법은 대부분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을 막을 수 있을까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사람을 올바르게 양육합니다. 강력한 법, 처벌을 통해서 범죄를 방지하고 사회 제도를 개선하려고 합니다. 이런 노력들은 어느 정도의 효과는 있지만 모두 한계가 있습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밖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고, 해결은 우리 안이 아니라 우리 밖에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문제와 그 해결에 대한 올바른 관점입니다.

먼저 우리 안에 있는 문제를 보겠습니다.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1절) 바른 성경에서는 “죄가 악인의 마음속에서 말하기를”, 쉬운 성경에서는 “악한 자들의 죄에 관하여 주님께서 내게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서는 “악인의 죄악이 내 마음에서 말하기를”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쉬운 성경의 번역이 가장 옳다고 봅니다. 악한 자들의 죄에 대한 계시(신탁)가 내 마음에 있었다는 의미입니다(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의 죄에 대해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즉,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서 말씀하신 죄인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악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는 것입니다. “눈에는 ~가 있다”는 표현은 태도나 의견을 의미합니다. 여기처럼 부정형으로 사용되어서는 ‘무시한다’, ‘생각하지 않는다’, ‘상식이 아닌 것으로 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UBS handbook). 악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따라서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가 됩니다. 하나님은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고,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비상식적이라 믿습니다. 그런 믿음에 따라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삽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말하거나, 혹 있다고 해도 우리 삶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시는 우리와는 상관없는 하나님을 말합니다.

“두려움”은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말할 때는 ‘경외’를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두려움은 경외가 아니라 정말로 무엇을 무서워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무서워하는 것들이 있고 그것을 만나게 되면 평소와 동일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그것 때문에 뭔가 다른 행동을 합니다. 가던 걸음을 멈추기도 하고 돌이키기도 합니다. 말을 못하기도 하고 목소리가 떨리기도 합니다. 마음속의 두려움은 실제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다르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악인은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그렇게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때문에 어떤 일을 하거나 하지 않거나 하지 않습니다. 마치 하나님을 없는 것처럼 여기고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합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기에 그 자체가 크게 잘못되었거나 비도덕적인 일은 아닐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주권자의 자리에서 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에 올라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죄의 기초이며 시작입니다. 이런 생각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2절)

로마서의 시작에서 바울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고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부러 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합니다.

죄인은 본능적으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합니다. 그것이 죄의 본성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창조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죄에 대한 심판자이신 하나님도 인정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자가 있다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죄 짓기를 멈추든지, 아니면 심판 받을 것을 각오하고 그냥 찜찜한 마음으로 죄를 짓든지 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찜찜하지 않은 마음으로 죄를 계속 지을 수 있는 방법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됩니다. 하나님을 두렵지 않은 분으로 만들면 됩니다. 방법은 많습니다.

조나단 에드워드, “The Vain Self-Flatteries of the Sinner”에서 8가지를 말했습니다. 크게 4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는 방법’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고, 천국이나 지옥은 없습니다. 성경이나 하나님이나 다 사람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결론 내리면 당연히 심판에 대해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방법은 ‘나중 회개 방법’입니다. 아직 살 날은 많고 따라서 회개할 날도 많습니다. 굳이 지금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할 것 없는 것입니다. 또는, 난 기독교나 하나님에 대해서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때가 되면 알아서 하나님 믿을 거라고 말합니다. 이 경우는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직접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에 있어서는 동일합니다. 지금은 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세 번째 방법은 ‘공로 의지 방법’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해 끼치지 않고 충분히 도덕적으로 살았고 따라서 심판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했던 큰 좋은 일, 그것 때문에 심판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또는 하나님 믿는 경건한 가정에서 태어나 무리 없이 잘 자랐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많은 종교인들은 이런 함정에 빠져 있습니다. 어쨌든 내가 잘한 것이 있으니까 심판은 나에게 해당되는 말이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또는 누군가의 공로가 잘못들을 덮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네 번째 방법은 ‘잘못된 확신 방법’입니다. 구원 받았다는 잘못된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씩 태도가 다르기는 하지만 공통점은 ‘지금 상태 그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변하기를 원하지 않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은 지금 태도와 행동의 변화를 가져오는데, 이런 저런 이유들을 대면서 지금 상태 그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실제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이것이 죄인들의 긍정적인 사고방식입니다. 죄에 대한 심판에서 자유로워지기 위해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것을 아시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시는 심판자 하나님이 없다면 혹은 그 심판과 내가 무관하다면, 나는 내가 원하는 삶을 살 수 있고 그 결과에 대해서 걱정할 이유도 없습니다. 죄악은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미움을 받을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참 편리한 생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생각들은 그저 현실을 부인하여 자신을 위로하는 것 뿐이고 자신을 속이는 일일 뿐입니다. 문제는 전혀 해결하지 못합니다. 죄악은 해결하지 않으면 결국 드러날 것입니다. 내가 감춘다고 감춰지는 것이 아닙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낱낱이 그 죄가 드러날 것입니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여전히 자신이 원하는 죄에 거하고자 하는 자가 어떤 모습인지를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1, 2절이 마음의 상태였다면, 3절과 4절은 그것이 겉으로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말합니다. 다윗은 어떻게 사람이 점점 더 어둠에 익숙해지고 빛을 멀리하게 되는지를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없이도 충분히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이웃을 사랑합니다. 반대로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이웃에게도 그런 모습을 드러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3절) 먼저, 그 입으로 죄악된 말과 속이는 말을 합니다. 죄가 가장 쉽게 드러나는 통로가 바로 우리의 언어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이 입으로 나온다고 하셨고, 야고보도 혀를 길들이는 사람은 다른 몸의 지체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말은 우리 속에 있는 것을 가장 먼저 드러냅니다. 속에 죄를 품고 있으면 그런 말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혜와 선행은 그칩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선택인지, 무엇이 옳은 것인지를 분별하지 못하고 그렇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일에 있어서는 여전히 지혜롭고 뛰어난 분별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일에 있어서 그렇지 못합니다. 4절은 여기서 한 단계 더 어둠으로 나아갑니다.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4절). 침대에서조차도 어떻게 죄를 범할 수 있을지 계획을 세운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않습니다. 침대에서 계획한 일들을 실제의 삶 속에서도 행한다는 말입니다. 악이라는 것을 알고도 그것을 거절하지 않고 행합니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습니다. 모두가 다 이런 정도의 죄악성을 동일하게 보인다는 말은 아닙니다. 누군가는 정말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속이며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합니다. 때로는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모두가 다 연쇄 살인범이 되거나 사기꾼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들의 모습입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다윗은 특별히 그 중에서 자신이 경험한 사람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의 죄악된 모습을 서술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일부의 정말 악한 사람들만이 악인에 해당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시편 36편 1절을 인용하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선포하였습니다(롬 3:9, 18). 우리는 사회적인 악인들을 보면서 그들이 행하는 악한 일들에 대해서 비난하고 벌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나 역시 하나님 앞에서 그런 악인이라는 사실을 잊습니다. 나는 아무 죄도 없다거나 의인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상대적으로 의로운 사람이 되어 마치 나의 죄는 드러나지 않을 것이고 그래서 심판도 없을 것처럼 생각하고 삽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지금의 죄의 길에서 돌이키지 않으면, 회개하지 않으면, 망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 대한, ‘나’에 대한 성경의 관점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볼 때, 가족, 친구, 동료, 그리고 나를 볼 때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합니다.

그럼, 이제 시선을 돌려서 하나님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2. 하나님 보기(5~6절)

이 말씀에서 다윗은 크게 하나님에 대한 5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시다, 진실하시다, 의로우시다, 심판하신다, 구원하신다,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5절) 여기서 인자하심은 헤세드, 언약에 신실하신 사랑입니다. 상대에 따라 절대 변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상대에 따라 변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특별히 상대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하는 상대라고 생각할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서 헌신적인 사랑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자녀는 내가 사랑하는 만큼 나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아서 일 것입니다. 하지만 남편이나 아내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런 사랑을 잘 못 합니다. 주는 만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불편하고 손해보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렇지 않습니다. 언제나 동일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도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고 기다리셨고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랑도 변하지 않으십니다.

“진실하심” 믿을 수 있고 신실하고 성실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거짓이 없습니다. 3절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거짓을 말하지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진실을 말하시고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고 말합니다. 땅에는 없고 하늘에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이 드넓은 하늘을 채울 만큼 풍성하고 한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에 대해서 우리가 조금의 의구심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사람에 대해서는 우리가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되어도 때로는 의심을 하고 의심을 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앞뒤 사정을 다 알아봐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분의 인자하심에 기댈 수 있고 진실하심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런 모습은 누구나 좋아하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라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굳이 부인하지 않을 것입니다. 두려워할 이유도 없고 하나님의 존재를 원하지 않을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전부는 아닙니다.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6절)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셔서 분명한 기준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기준은 산들과 같이 높고 견고합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니, 이 기준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심판은 하나님께서 그 의에 따라 내리시는 결정을 말합니다. 그 결정은 큰, 혹은 깊은 바다와 같습니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든 것을 보시고 아시는 분께서 공의에 따라 심판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심판이 분명하게 드러났던 사건은 노아의 홍수입니다. 하나님은 물로써 모든 산들을 잠기게 하셨습니다. 말 그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 심판이 큰 바다와 같이 내렸던 사건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을 싫어합니다. 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목사는 ‘사랑이 이긴다’고 말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영원한 심판을 하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모든 사람을 받아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관점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도 한없는 사랑과 거룩한 공의를 동시에 가지고 계신 분이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좋은 소식일까, 나쁜 소식일까요?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서 한 가지 더 말할 것이 남아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여기에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구하시는 분’, 구원자십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분은 구원하시는 분으로서 구원을 베푸십니다. 심판에서 구원 받을 길을 보여주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은혜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십니다(롬 3:23~24).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십니다(엡 2:1, 5). 그리스도를 통한 속죄로서 자기의 의로움도 나타내시고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도 의롭다고 하십니다(롬 3:26).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면서 동시에 공의로우시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성경적인 관점에서 사람과 하나님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를 생각해 봤습니다.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내가 여전히 어떤 식으로든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꼭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오직 사랑하기만 하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도 아니고, 심판하기만 하는 엄한 재판관만도 아닙니다. 하나님은 회개하지 않는 자를 공의로 심판하시지만, 회개하는 자는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상관없이 받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적당히 지금 순간을 모면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원한 삶을 사랑하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받은 구원에 대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만 악인이 아니고 우리가 악인이었습니다. 지금도 악한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원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하게 여기시고 구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떤 자들인지 알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 또 어떤 분이신지 안다면, 우리에 대해서 자랑하고 기뻐할 것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을 자랑하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그 분에게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한 무신론자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친구에게 쓴 편지 중 일부입니다. “당신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정말 맞다고 칩시다. 심판하는 하나님이 계시고 그 하나님이 구원의 길도 만들어 놓았다고 합시다. 그럼,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까?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습니까? 당신은 어떻게 밤에 그렇게 잘 잘 수가 있죠? 당신이 나하고 대화를 나누고 있을 때, 당신은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는 고통의 장소로 향하고 있는 사람과 대화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한테 그런 것에 대해서 아무 말도 안할 수 있죠? 당신 말처럼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이 지옥을 향해서 가고 있고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면, 당장에 밖에 뛰쳐나가서 미친 듯이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요? 당신이 말하는 것을 당신이 정말 믿고 있다면 그러면서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정말 무정하고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사랑과 은혜에 대해서 말할 자격은 없습니다.”

물론 전도라는 것이 미친 듯이 구원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말 하나님을 아는 자들로서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에 대해서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면 그와 함께 멸망을 향하는 자들에 대한 긍휼과 자비의 마음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그들에게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길, 그것은 우리가 믿는 바 대로 살아갈 때 가능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