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2갓난 아기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3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생명의 탄생은 참 신기하고 놀랍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세포에서 시작되어 호흡하고 걷고 뛰는 인격체가 만들어진다는 것은 참 신기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새생명을 얻은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씨앗이 심겨졌을 때 영원히 살 수 있는 생명이 생긴 것입니다. 불순종의 자녀이고 영원히 멸망 받을 자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로 새생명을 얻게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가 벧전 1장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제 2장에서 “그러므로”라고 말하면서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2절)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영적인 출생에 대해 말했다면 이제는 자라나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1년이 지나고 10년이 지나도 전혀 자라지 않고 그대로라면 그 아이는 살아 있는 아이가 아닙니다. 처음에는 말도 못하고 누워 있기만 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말을 시작하고, 서고 걷고 뛰기도 합니다. 바보 같다고 생각할 정도의 지적 수준이었던 아이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똑똑해집니다. 태어나면 당연히 자라야 합니다. 베드로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도 자라야 한다고 말합니다. 구원받고 나서 영적인 상태가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성경은 구원받은 사람에 대해 ‘이제 끝났다’, ‘천국에 갈 수 있으니 됐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구원받은 것에 대해 “믿음의 경주”라고 표현하고, “싸움”, “길”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완료된 것이 아니라 계속 진행되는 것입니다. 특정한 목표가 있고 그것을 향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구원입니다. 벧전 1:4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고 말하고, 5절에서는 그 구원이 말세에 나타나기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구원을 향해 달려가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성장입니다. 또한 1장 13절에서는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라고 했는데, 이것 역시 장차 올 구원을 바라보면서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 바로 그리스도인의 성장입니다. 모두 그리스도인들이 구원받은 이후에 자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이 자라야 한다는 것에 대한 말씀들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엡 4:15), “너희의 믿음이 더욱 자라고…”(살후 1:3),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가게 하시고”(골 1:10),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그리스도인이라면 영적으로 자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벧전 2:2을 보면 “자란다”는 표현을 “자라게 하려 한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내가 스스로 노력해서 자라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나를 자라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노력해서 키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듯이 누군가 우리를 자라나게 하는 것입니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라나게 하실 때 사용하시는 도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른 어떤 수단이 아니라 이것을 통해 자라게 하십니다(“그로 말미암아”). 이것에 대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자세가 있습니다. “갓난 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2절). 우리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도구는 신령한 젖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1장 23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새생명을 주는 씨앗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구원을 얻게 할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 자라고 성장하는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갓난아기들은 이제 막 태어난 아기입니다. 갓난아기, 즉 생후 1개월 미만의 아기는 하루에 10-12번 젖을 먹어야 합니다. 아기는 계속해서 젖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씀을 사모해 본 적이 있으십니까? 성경에는 그런 사람이 나옵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과 주의 의로운 말씀을 사모하기에 피곤하니이다”(시 119:123), “내가 주의 계명들을 사모하므로 내가 입을 열고 헐떡였나이다”(시 119:131).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사모해서 밤늦도록 자지 않고 새벽에 깨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갈급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왜 우리는 이런 갈급함이 없을까요? 말씀을 읽어야 한다는 부담감만 존재할 뿐입니다. 그것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말씀 없이도 성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굳이 말씀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실히 그리스도인답게 살면 된다고, 남한테 피해 안 주고 성도들과 좋은 교제 가운데 있으면 그저 잘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여러 경험들을 하면 자연스럽게 신앙이 자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씀을 대하지 않아도 어느 정도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죽어도 하늘나라에 갈 수 있으니 특별히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말씀이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왜 잘못되었을까요? 그리스도인이 자란다는 것, 성장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자란다는 것은 ‘지식이 생긴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다른 사람이 볼 때 ‘도덕적으로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영적으로 자란다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어떠하심을 알고 그것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거룩함’입니다. 우리 아버지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우리도 거룩함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벧 2:1에서는 먼저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사모하라고 말하기 전에 이것들을 버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악독”은 모든 악을 포함한 것이고, “기만”은 남을 속이는 것, 거짓된 것을 말합니다. “외식”은 마치 내안에 좋은 것이 있는 것처럼 체면을 차리는 것, “시기”는 남의 좋은 것을 원하는 욕심입니다. 그리고 “비방하는 말”은 입술로 짓는 죄입니다. 이 구절에는 “모든”이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여기서는 어떤 특별한 죄를 지목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악한 것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거룩함입니다.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전에 알지 못할 때에 따르던 너희 사욕을 본받지 말고”(벧전 1:14).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악한 것에서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악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 나아가려면 악이 조금도 없는 순결한 진리가 필요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순전하다”라고 말합니다. 거짓과 결점이 전혀 없는 순수한 것입니다. 영적으로 자랄 필요 없이 그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살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런 사람은 세상에도 참 많습니다. 그리스도인들보다 더 충성스럽게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형제 자매와 교제하면서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생각입니다. 세상 사람들도 자기들끼리 모여 유익을 얻습니다. 개인적인 삶의 경험들을 통해 자랄 수 있다는 생각은 어떻습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들 삶의 희로애락을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웁니다. 그러나 믿는 자로서 악에서 벗어나서 거룩하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은,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밖에 없습니다. 어둔 세상에서 절대 줄 수 없는 것, 절대 맛볼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존재합니다.

부모들은 아이를 키우면서 유해한 것들을 피하게 하려고 노력합니다. 세상의 많은 지식, 학문, 이론들은 우리에게 도움을 줄 것 같지만 진정으로 믿는 자를 영적으로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는 나침반이며,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나는 특별히 자라지 않아도 좋다, 그냥 이대로도 좋다는 자세는 어두운 악독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성장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곧 자신의 악독을 벗어버리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적당히 어둠과 함께 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새생명을 얻은 자라면 조금이라도 더 어둠을 버리고 거룩함으로 나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나는 책 읽는 타입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발의 등이고 빛이며 영생의 양식입니다.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는 유일한 진리인데 그것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자랄 수 있겠습니까? 읽기 힘들다면 들을 수도 있고 다른 방법으로 접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정말 책을 싫어하는 사람이었는데 구원받은 이후에 성경을 읽는 모습을 보고 가족들이 놀랐다고 합니다. 참 진리를 맛본 사람, 진리로 나아가기 원하는 사람은 그가 책을 읽는 타입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말씀을 찾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거룩해질 수 없습니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베드로는 말씀을 ‘읽어라’, ‘묵상하라’고 말하지 않고 “사모하라”고 말합니다. 어떤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그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3절)고 말합니다. 우리가 말씀을 사모하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너희가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 1:8). 우리는 예수님을 본 적도 없지만 사랑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인자하심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받고 새생명을 얻었을 때 주님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34:8에서 인용한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비멜렉 앞에서 미친 척을 하다가 쫓겨나서 지은 시입니다.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가다가 자신의 적인 아비멜렉을 만납니다. 그 때 다윗은 미친 척을 하여 가까스로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온 다윗이 노래한 시입니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34:8). 베드로는 이 말씀을 가지고 와서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다면 그리하라고 말합니다. 우리 역시 다윗처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주님이 없었다면 모든 악독과 기만, 외식, 시기, 비방 가운데 살아갔을 것입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중에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저주하며 멸망 중에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이 구원은 금이나 은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라 흠 없고 점 없는 그리스도의 피로 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자하심 때문에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늘의 기업, 소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 더불어 영광을 누리는 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기다리는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그것을 맛보았다면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말씀을 사모하라는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사모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은 인자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제대로 깨닫지 못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신다면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인자하신 주님을 더욱 알기 원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을 더 알기 원한다면, 주님이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참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거짓이 가득한 세상에서 참 기쁨과 사랑과 화평이 무엇인지 알기 원한다면, 죽도록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을 닮아가기 원한다면, 형제 자매를 거짓 없이 사랑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만이 여러분을 자라게 할 도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