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
본문 : 사사기 16장 23-31절
설교자 : 이병권
삼손은 이스라엘 사사 중에서는 처음으로 패배를 기록했습니다. 지금까지 사사들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으로 늘 승리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떠나셨고 삼손은 붙잡혀서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지금의 삼손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동안 삼손은 어떻게 살았습니까? 자기 원하는 대로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삼손을 막을 것이 없었습니다. 그랬던 삼손이 지금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블레셋의 곡식을 불태우며 그들을 골탕 먹였던 삼손이 지금은 옥에 갇혀서 노예가 되어 맷돌을 돌리며 곡식을 갈고 있습니다. 거침없이 블레셋과 싸우며 나귀턱뼈로 천명을 무찔렀던 삼손이 지금은 놋줄에 묶여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삼손은 높은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던 독수리였는데 지금은 날개를 꺾여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삼손의 심정은 어떨까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눈앞은 온통 캄캄합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현실에 대해서 어떤 마음일까요? ‘내가 원한 것은 이런 모습이 아닌데,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정말 무슨 일을 한 걸까?‘ 삼손은 할 수만 있다면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시간을 되돌려서 선택을 바꾸고 그 때의 잘못을 돌이키고 싶지 않았을까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정말 되돌리고 싶다! 내가 왜 이런 바보 같은 일을 했나? 또 이런 실수를 되풀이 하다니!’ 나 자신이 너무 싫을 때가 있고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낙심할 때도 있습니다. 시간을 되돌리고 돌아가서 실수를 만회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그런 생각을 하신 적이 없으십니까? 때로 실패를 경험하면서, 때로 말도 안 되는 실수를 하면서 나에 대한 자책과 비관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할 때가 있습니다. 지금 내 모습이 너무 싫은 겁니다. ‘나는 이거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계속 낙심이 되고 마음이 어려워서 그냥 숨어버리고 싶을 때도 있습니다. 내 몸도 마음도 바닥일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나의 부족함을 경험하면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 삼손이 누구보다 그러했을 것입니다. 그런 괴로운 마음일 것입니다. 삼손은 실패했고 그로 인해 깊은 수렁에 빠졌습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 엄청난 능력을 가졌던 삼손인데 이렇게 굴욕적인 모습으로 비참하게 인생을 마감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정말 이것이 끝일까요? 삼손에게는 더 이상 어떤 희망도 없는 걸까요? 우리는 그에 대한 힌트를 22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22) 밀린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합니다. 희망의 불씨가 살아나고 있습니다. 삼손의 인생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지 않습니다. 아직은 끝이 아닙니다. 삼손은 비록 실패했지만, 머리가 밀리고 힘을 잃어버렸지만, 그렇지만 밀린 머리는 다시 자라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사기의 저자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넌지시 알려주기 위해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머리가 다시 자라니까 삼손의 힘도 회복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물론 삼손의 힘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의 힘의 원천은 머리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습니다. 단순히 머리가 자란다고 해서 다시 힘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삼손의 머리가 자라기 시작했지만 삼손은 여전히 힘이 없고 약한 모습으로 붙잡혀 있습니다. 삼손의 머리가 자라는 것은 다시 힘이 생겼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삼손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셨기 때문에 생긴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있습니다.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의 부족함으로 실패를 경험하고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 그렇게 낙심되고 내 마음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우리는 절대로 과거를 바꿀 수 없습니다. 시간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회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문제들을 극복하고 나의 좋았던 때로 돌아가고 싶다면, 그렇다면 내가 먼저 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할 때 우리는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내 삶에 무너진 것을 바로잡으려면 하나님과의 관계를 먼저 회복해야 합니다. 실패와 낙심, 마음의 어려움, 자기 연민, 두려움과 죄책감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뿐입니다.
삼손은 실패했고 비참한 처지에 놓였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래서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일어섭니다. 삼손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은 삼손을 떠나셨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삼손을 완전히 버리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에 삼손은 다시 희망을 품을 수 있습니다. 삼손의 머리는 다시 자랍니다.
삼손의 머리가 자라는 상황에서 삼손을 위한 마지막 무대가 준비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잡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다곤 신전에 모입니다. 그리고 승리에 도취되어서 축제를 벌입니다. 블레셋은 자신에게 승리를 준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합니다.
블레셋이 섬기는 신, 다곤은 농사와 관련된 곡식의 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블레셋은 이 다곤의 도움으로 삼손을 잡을 수 있었다는 생각합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이르되 우리의 신이 우리 원수 삼손을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다 모여 그들의 신 다곤에게 큰 제사를 드리고 즐거워하고 백성들도 삼손을 보았으므로 이르되 우리의 땅을 망쳐 놓고 우리의 많은 사람을 죽인 원수를 우리의 신이 우리 손에 넘겨 주었다 하고 자기들의 신을 찬양하며”(23-24)
블레셋은 삼손에 대해서 원수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땅을 망쳐 놓고 곡식에 큰 해를 끼쳤으며 뿐만 아니라 블레셋의 많은 사람들을 죽인 삼손을 원수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런 원수 삼손을 다곤이 그들의 손에 넘겨주었기에 신전에 모여서 다곤에게 제사를 드리며 다곤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삼손을 블레셋에게 넘겨준 것은 다곤이 아닙니다. 다곤에게는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다곤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우상일 뿐입니다. 삼손이 블레셋에게 붙잡힌 것은 삼손이 불순종한 결과이며 다곤이 아니라 하나님이 허락하신 일입니다.
신전에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 삼천이 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축제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하자고 외칩니다. 그들의 원수를 공개적으로 조롱하며 그들의 흥을 돋우기 위함입니다. 인간의 악함을 볼 수 있는 장면인데 이것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그들은 모릅니다. 블레셋은 축제의 여흥거리로 삼손을 불렀지만 그로 인해 삼손에게는 마지막 복수의 기회가 마련됩니다.
삼손은 자기를 돕는 소년의 안내를 받아 신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찾아 그 기둥을 의지합니다. 엄청난 일이 벌어지기 바로 전의 긴장된 순간이지만 블레셋 사람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삼손을 보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눈에 삼손은 소년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나약한 포로이며 한 때 엄청난 능력으로 감히 대적할 수 없었던 두려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그저 보잘 것 없는 맹인으로 재주를 부리고 있는 처량한 신세의 이방인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혹시 이런 질문이 생기지 않으십니까? 블레셋은 왜 삼손이 다시 회복할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했을까요? 머리가 다시 자라고 있었는데 그에 대한 염려나 의심은 없었을까요? 분명 삼손의 머리가 다시 자라는 것을 봤을 텐데 왜 그냥 뒀을까요? 블레셋이 축제를 벌이고 있을 때 삼손을 부른 것을 보면 삼손이 더 이상 위험 요소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눈이 뽑혔으니까 더 이상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까요?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보기에 삼손은 자신의 신에게 버림을 받은 자입니다. 자신이 섬기는 신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고 그 결과 심판을 받은 자입니다. 신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요? 뭔가를 해서 그 공로로 신에게 인정을 받고 신에게 호의를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삼손은 이제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는 자입니다. 신에게 버림받았고, 신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머리가 자라더라도 두려워할 거리가 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으로 신에게 버림을 받은 자가 회복할 가능성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이 생각하는 신과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삼손의 불순종으로 인해 그를 떠나셨지만 그를 아주 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주십니다. 회복의 기회를 말입니다.
우리가 실패를 경험할 때, 나의 연약함으로 좌절할 때, 반복해서 넘어진 나의 부족함 때문에 나조차도 내가 싫어질 때 그렇게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에도 다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다르고 우리가 세상에서 경험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하는 것과 다르고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다릅니다. 사람과 다릅니다. 사람이 만든 거짓 신들과 다릅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에게 손을 내미시는 분이십니다. 연약한 자를 세우시는 분이십니다. 넘어진 자를 일으키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회복을 허락하십니다. 회복의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하나님을 의지할 때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회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다시금 일어설 수 있고 실패를 딛고 다시 도약할 수 있습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 달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끝은 아니기 때문에, 끝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에 회복의 기회는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은혜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은혜를 누릴 수 있을까요? 정말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 실패와 나의 연약함으로 낙심될 때,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회복하시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28) 삼손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간절히 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삼손의 이 간절한 기도는 하나님의 응답하심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삼손에게 은혜를 베푸셨고 삼손은 힘을 회복합니다. 삼손은 그 힘으로 신전의 기둥을 넘어뜨렸고 신전은 무너져 그 안에 있던 블레셋 지도자들과 백성들은 죽임을 당합니다. 삼손은 큰 승리를 거두며 숨을 거둡니다. 그리고 그의 가족들은 그의 시체를 거둡니다.
성경은 삼손이 마지막으로 죽인 블레셋 사람들이 이전에 삼손이 죽였던 사람들보다 더욱 많았다고 평가합니다. 블레셋 입장에서는 축제를 즐기다가 무방비 상태로 만난 대참사입니다. 삼손은 이렇게 자신과 어울리는 최후를 맞았습니다. 블레셋의 포로가 되어 계속해서 그들의 조롱과 모욕을 당하기보다 그들에게 원수를 갚으며 의미 있는 마지막을 맞은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 고민할 만한 문제가 있습니다. 삼손의 마지막 기도를 어떻게 봐야 할지 논란의 여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삼손의 이 기도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삼손의 기도를 좋게 볼 수 있을까요? 삼손은 자신의 잘못을 회개했고 그것이 기도에 반영되어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그의 뉘우침이 반영된 믿음의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여전히 자신의 욕심만을 앞세운 이기적인 기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먼저 기도를 안 좋게 보는 경우입니다. 삼손의 기도를 보면 회개의 모습이나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거나 자신의 소명에 대한 인식,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며 은혜를 구하는 기도가 아닙니다. 삼손이 그렇게 간절히 구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나의 두 분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자기 두 눈을 뺀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갚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블레셋에게 복수를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 단지 그것뿐입니다. 끝까지 자기중심적이고 욕심에 따라 행하는 삼손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반대의 견해는 어떨까요? 기도를 좋게 보는 경우입니다. 삼손이 기도를 어떻게 시작하고 있습니까?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삼손이 하나님을 주 여호와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삼손은 하나님을 주라고 부른 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삼손은 여기서 처음 하나님을 주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참고로 15장에 삼손의 첫 번째 기도에서 ‘주’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우리말로 표현하면서 ‘주’라고 번역한 것이고 원래는 ‘당신‘이라는 뜻입니다. 삼손의 이 기도는 하나님에 대한 그의 생각이 바뀌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삼손이 하나님께 구합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겸손히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자기 힘으로 뭐든 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압니다. 삼손은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낮아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응답하신 것입니다.
두 견해에 대한 근거였습니다. 어떤 견해가 더 타당할까요? 기도의 앞부분에 무게를 두면 기도를 좋게 볼 수 있고, 기도의 뒷부분에 무게를 두면 기도를 안 좋게 볼 수 있습니다. 두 견해 모두 타당성이 있고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려운 것입니다. 또한 이렇게 견해가 나뉘는 것은 그만큼 그동안 삼손의 삶이 엉망이었으며 그만큼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크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지금까지 삼손의 기도를 안 좋게 생각했었습니다. 끝까지 이기적인 삼손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러다 이번에 말씀을 준비하면서 또 다른 면에서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분명 삼손의 기도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것을 삼손의 부족함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삼손은 지금까지 자기중심적이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갑자기 그의 성품이나 생각하는 것들이 다 바뀔까요?
삼손의 마지막 기도라면 이런 기도가 되어야 할까요?
‘주 여호와여, 나의 죄에 대해서 용서를 구합니다. 눈물로써 회개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여주옵소서!‘
삼손은 그동안 이렇게 한 적이 없었습니다. 삼손은 전혀 훈련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삼손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고 삼손에게는 어울리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삼손의 기도는 부족하고 이기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준을 생각하면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지금 이 장면을 부정적으로만 보면 삼손에게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찾을 수 없습니다. 삼손의 생애를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의 사람이라고 보기 어려운데 그나마 믿음을 볼 수 있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것이 기도하는 장면입니다.
히브리서는 삼손을 믿음의 사람으로 기록합니다. 그런데 여기마저도 빼버리면 삼손의 믿음을 볼 수 있는 곳이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히 11:34)라는 언급이 있습니다. 연약한 가운데 강하게 되었다는 이 말씀을 삼손이라고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삼손에게 잘 어울리는 말씀입니다.
삼손은 낮아질 대로 낮아져서 하나님이 떠난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삼손은 하나님께 마지막으로 간구합니다.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삼손은 하나님께 구합니다. 자신을 주목해 달라고 구합니다. 비록 자신은 하나님이 무시하셔도 되는 그런 일을 저질렀지만,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을 모른다하셔도 아무 할 말이 없지만, 그럼에도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마치 십자가의 강도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간구함으로 은혜를 얻었던 것처럼 그와 같은 모습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강도는 예수님께 이렇게 구했습니다. “나를 기억하소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나의 상황과 처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실패를 경험했는지, 얼마나 비참한 상황인지, 나의 현실이 어떠한지, 그런 외적인 것들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고통도, 사람의 멸시와 조롱도, 두 눈이 뽑힌 상태도,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나를 생각하옵소서!’ ‘주님, 나의 모습이 이러합니다. 주님께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여서 반복해서 실패하고 또 넘어집니다. 그런 저를 생각해주세요. 그런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하나님은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우리가 낮아진 마음으로 상한 심령으로 통회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은 응답하시며 은혜를 베푸십니다. 다시 회복하시는 은혜를 경험케 하십니다. 비록 넘어졌지만 비록 실패했지만, 비록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지만, 그래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만큼 마음이 힘들고 괴롭지만, 그렇지만 하나님은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에게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구하며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길 원하는 자에게 놀라운 회복의 은혜를 허락하십니다.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을 허락하십니다. 하나님은 실패한 자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알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러니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더라도 낙심하지 마시고, 자책하지 마시고, 다시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시고 무엇보다 중요하고 우선되는 하나님의 관계를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날의 실수가 있다면 어제의 실패가 있다면 그 과거를 거울삼아 오늘의 교훈으로 내일의 도약의 기회로 사용하십시오. 과거에 얽매여서 오늘의 시간을 무기력하고 의미 없이 낭비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게는 회복의 은혜가 있고 내일의 기회가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의 순간에 자신의 죽음을 구했던 삼손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지 않습니까?
이제 그만 낙심을 거두고, 좌절을 거두고, 자기 연민을 거두고 주님을 바라보며 구하십시오. 그냥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하나님 나를 생각하옵소서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주님만을 신뢰하게 하소서! 유혹을 이기게 하소서! 낙심을 벗어나게 하소서! 염려를 이기게 하소서! 사랑을 실천하게 하소서! 주님을 닮게 하소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믿음의 선진들도 모두 실패와 좌절을 경험했습니다. 그들도 우리처럼 시간을 되돌리고 싶을 때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간증을 통해 배우는 것은, 우리가 실패를 통해서 배우는 것은 나의 실패와 나의 연약함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다는 것입니다. 나의 실패를 다 덮고도 남을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크기에 우리는 다시 일어나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연약함을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다른 것으로 덮으려 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으로 덮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내 삶을 다시 정비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실패는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그 아픈 경험은 주님의 은혜로 회복되어 여러분을 보다 더 성장하게 할 것입니다. 그 은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