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가짜 속에서 진짜로 살아가기

본문 : 사사기 17장 1-6절

설교자 : 이병권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가짜가 많습니다. 교묘하게 진짜를 흉내 내며 사람들을 속이고 피해를 주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잘 분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로 인해 큰 피해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변하지 않는 진짜, 진리를 가지고 세상의 수많은 가짜들과 맞서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따르고 있는 가짜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가짜 성공, 가짜 만족, 가짜 종교, 가짜 행복, 온통 가짜투성이입니다.

그런데 더 심각한 문제는 가짜를 진짜로 생각할 때 일어납니다. 가짜를 가지고 있으면서 가짜인 줄 모르고 진짜로 착각할 때 문제는 더 커지고 더 비참하게 됩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 사이비 종교에 빠진 사람들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가짜를 진짜로 생각합니다. 정말 불쌍한 일입니다. 복을 받기 위해 애쓰며 온갖 수고를 다하지만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따지고 보면 예수님을 모르는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하나님을 떠난 인생에게 남는 것은 수고와 슬픔뿐입니다.

그럼 진짜를 믿는 우리는 가짜로부터 안전할까요? 어떻게 안전을 지킬 수 있을까요? 계속되는 가짜의 도전과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지키려면 우리는 계속해서 진리로 무장하고 계속해서 말씀으로 내 삶을 살펴야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짜에게 영향을 받아서 진짜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와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얼마나 빨리 진리에서 떠나는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동시에 얼마나 쉽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일을 하는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만큼 가짜로부터 영향 받지 않고 살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도 온통 가짜로 가득한 세상을 살고 있는데 어떻게 가짜 속에서 진짜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했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은 그 방법을 생각해보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 17장부터는 사사기의 새로운 단락이 시작됩니다. 지난주까지 살펴봤던 삼손의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사사기의 본론이라 할 수 있는 12명의 사사 이야기가 끝이 났습니다. 그리고 17장부터는 사사기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사사기의 결론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사기 서론이 두 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었는데 사사기의 결론도 두 번에 걸쳐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사기의 구성을 보면 두 번의 서론과 두 번의 결론이 있고 중간에 사사들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의 결론 중에 첫째 결론에 해당되는 것이 17장과 18장인데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타락이 주된 내용입니다. 종교적으로 이스라엘의 타락이 어떠했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사기에서 반복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서 악을 행했다라고 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론 부분에서 이스라엘의 악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그들의 타락한 모습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마치 책 마지막에 추가되어 있는 부록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책을 보면 책의 마지막 부분에 추가로 설명되는 내용들이 있습니다.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자료들이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사사기의 마지막부분도 그런 역할을 합니다.

특별히 결론을 보면서 주의할 점은 결론에 나오는 사건들은 삼손 다음에 있었던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이나 인물의 연대 등을 생각해봤을 때, 그리고 지파들의 정황들을 고려해봤을 때 결론에 나오는 사건들은 사사기 초기에 있었던 일입니다. 그래서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를 생각하면 사사기는 16장 삼손의 이야기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론은 뒤에 나오고 있지만 시간적으로는 더 먼저 있었던 일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결론에서 주의해야 할 점은 마음의 준비가 필요합니다. 이스라엘의 타락한 모습에 충격을 받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두 번째 결론에는 정말 잔인하고 끔찍한 사건들이 나옵니다. 어찌되었든 그동안 본론에서는 타락해가는 사사들을 볼 수 있었다면 결론에서는 타락한 백성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백성들의 모습을 보기 위해 본문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에는 에브라임 지파에 속한 한 가정이 나옵니다. 모든 이스라엘 가정이 이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 모습이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브라임 산지에 미가라 이름하는 사람이 있더니 그의 어머니에게 이르되 어머니께서 은 천백을 잃어버리셨으므로 저주하시고 내 귀에도 말씀하셨더니 보소서 그 은이 내게 있나이다 내가 그것을 가졌나이다 하니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하니라(1-2)

에브라임 산지에 살고 있는 미가라는 사람이 소개됩니다. 어느 날 미가는 자신의 어머니가 저주하는 것을 듣게 됩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저주한 이유는 은 천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돈을 잃어버린 것은 자신의 실수가 아닐까요? 자기가 잃어버려 놓고 지금 누구를 저주하고 있는 걸까요? 그 돈을 주은 사람을 생각하며 저주하는 걸까요?

우리 성경에 잃어버렸다고 번역이 되어 있어서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는데 여기 잃어버렸다는 말의 원래 뜻은 ‘취하다, 잡다’는 말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돈을 들고 나갔다가 깜빡하고 두고 왔다는 말이 아닙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한다면 뭐라고 신고를 해야 할까요? 분실 신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절도 신고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자신의 돈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했던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얼마의 돈을 도둑맞았습니까? 은 천백입니다. 노동자가 100년을 넘게 일해야 모을 수 있는 엄청난 액수의 돈입니다. 혹시 은 천백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것이 있지 않으십니까? 이전에 블레셋 지도자가 들릴라에게 약속했던 돈과 같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미가의 어머니를 들릴라 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은 천백이 괜히 나온 금액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블레셋 지도자 각각에게 은 천백을 받았으니 실제로는 천백보다 훨씬 더 많은 금액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의 배경은 사사시대 초기이고 삼손보다 훨씬 전의 일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들릴라가 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우리가 이를 통해서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미가의 집안이 그만큼 재력이 있는 부유한 집안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미가의 어머니가 큰돈을 도둑맞은 것으로부터 문제는 시작되는데 이 문제에는 숨겨진 진실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사건의 진짜 문제는 돈을 도둑맞은 것이 아닙니다. 돈을 도둑맞은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돈을 훔쳐간 것이 다름 아닌 미가라는 사실입니다. 미가는 어머니의 돈을 훔쳤다가 어머니가 저주하는 것을 듣고 두려워서 다시 돈을 돌려준 것입니다. 미가의 어머니가 어떤 말로 저주를 했는지 모르지만 미가의 마음을 바꿀 만큼 효과적인 저주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미가가 돈을 훔쳐간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미가가 사실을 털어놓자 어머니는 미가를 축복합니다. “내 아들이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미가의 어머니는 돈을 훔쳐간 사람을 저주했다가 그 사람이 아들인 것을 알고 축복으로 바꿉니다. 그러고 나서 아들의 죄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하지 않습니다. 정말 넓은 마음을 가지고 아들을 사랑하는 어머니라서 그러는 걸까요?

이 가정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는 장면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자녀의 죄를 다루지 않습니다. 왜 자신의 돈을 훔쳤는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일이 어떤 잘못인지, 하나님이 어떻게 말씀하셨는지 언급하지 않습니다. 돈을 훔쳐간 아들의 죄를 다루지 않는 엄마는 더 큰 문제입니다. 문제는 더 큰 문제를 부르고 더 큰 문제는 또 더 큰 문제를 부릅니다.

부모가 자녀의 잘못을 보고 무조건 정죄하며 지적하는 것은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녀의 잘못을 보고도 다루지 않고 항상 봐주고 용납하는 것, 잘못을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입니다. 자녀의 잘못을 보며, ‘아들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세상이 잘못된 거야!’ 이런 말이 자녀를 망치는 겁니다. 삐뚤어진 사랑입니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잘못을 깨닫고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모의 책임입니다. 죄에 대해서 묵인하고 넘어가면 자녀는 그릇된 길로 빠집니다. 다윗이 그러한 실수를 했습니다. 자녀의 죄를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을 겪으며 고통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물론, 죄를 다루는 과정은 언제나 힘이 들고 어렵습니다. 그냥 생략하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우리의 본성은 그런 힘든 과정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생략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정말 사랑한다면 힘든 과정을 직면해야 합니다. 죄를 제대로 다루고 분명히 가르쳐야 합니다. 단호하게 죄의 결과를 가르치되 그와 함께 그 모든 것을 덮는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를 함께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과 그 은혜의 크기를 알려주어야 하는 겁니다. 그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정말 사랑한다면 엄한 사랑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가의 가정에는 그런 엄한 사랑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다루지 않은 더 큰 문제는 더 큰 문제를 부릅니다. 미가의 어머니는 미가에게 돌려받은 돈으로 뜻밖의 일을 합니다. “미가가 은 천백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매 그의 어머니가 이르되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한 신상을 새기며 한 신상을 부어 만들기 위해 내 손에서 이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리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제 이 은을 네게 도로 주리라 미가가 그 은을 그의 어머니에게 도로 주었으므로 어머니가 그 은 이백을 가져다 은장색에게 주어 한 신상을 새기고 한 신상을 부어 만들었더니 그 신상이 미가의 집에 있더라“(3-4)

미가의 어머니는 되찾은 은을 여호와께 거룩히 드린다고 말합니다. 그 돈을 구별해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신상을 새겨 만들고 그 신상에 은을 부어서 우상을 만듭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내가 내 아들을 위하여

아들을 위하겠다고 우상을 만듭니다. 자기 아들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며 우상을 만든 것입니다. 아마도 자신이 했던 저주가 아들에게 불행을 가져올까 불안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은을 부어 드리면서 하나님의 호의를 얻으려한 것입니다.

내 마음대로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명하셨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무엇을 금하셨는지, 무엇을 미워하시는지, 무엇이 죄인지 상관없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생각대로, 다른 사람이 하는 대로 그냥 따라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명령하신 제2계명을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형상이든지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가증스러운 행위입니다. 하지만 이 집안은 그 일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든지, 얼마나 아름다운 작품을 만들든지, 그로 인해 사람들이 얼마나 감탄을 하든지 관계없습니다.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이 금하신 일입니다. 사람이 만든 것으로 하나님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사람은 그 어떤 것으로도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상으로 표현할 수 없을뿐더러 사람이 형상을 만들면 하나님의 한 부분을 표현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순간 하나님의 다른 부분은 왜곡시키고 하나님이 아닌 것을 표현하거나 오해되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 가을이 되었으니까 단풍과 잔디가 어우러진 교회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린다고 한 번 상상해보십시오. 정말 멋지겠죠? 그런데 그 그림을 제가 그립니다. 어떨까요? 여러분은 제 그림을 보고 가을을 맞은 교회의 풍경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에게 한계가 있기 때문에 저는 보는 것을 제대로 나타낼 수 없습니다. 제가 눈으로 본 것을 그리는데 이렇다면, 한 번도 본적이 없고 볼 수도 없는 것을 표현한다면 어떨까요? 어떤 방법으로 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형상으로 만들면 그 순간 그것은 하나님을 왜곡하며 하나님을 잘못 나타내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조각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하지만 미가의 어머니는 우상을 부어 만들었고 그 우상은 미가의 집에서 그들의 하나님이 됩니다. 그리고 미가는 집안에 추가로 뭔가를 계속 만듭니다. “그 사람 미가에게 신당이 있으므로 그가 에봇과 드라빔을 만들고 한 아들을 세워 그의 제사장으로 삼았더라”(5) 미가에게 신당이 있었습니다. 신당이라는 것은 문자적으로 신들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미가에게는 신들을 모셔두고 제사를 드리는 장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리기 위해 하나님이 정하신 성막에 갈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제사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미가에게 은으로 만든 따끈따끈한 신상이 생겼습니다.

신당과 신상이 있는 미가가 또 무엇을 만듭니까? 에봇과 드라빔을 만듭니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옷으로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데 사용했습니다. 그리고 드라빔은 점을 치는데 사용했던 우상입니다. 하나, 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추어 가는 미가에게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미가는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하나님은 제사장의 직무를 레위 자손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미가는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아들을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미가가 하나님 말씀을 몰라서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후에 보면 미가가 레위 청년을 제사장으로 고용하는 것을 보면 레위 자손이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가에게는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하면 좋고 안 해도 별 문제 없는 그런 정도의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미가는 온통 가짜로 만들어진 가짜 신앙을 세웁니다. 그럼에도 미가는 자신의 섬기는 우상에 대해서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지만 무늬뿐입니다. 진짜는 없고 가짜만 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것과 관계없이 모든 것을 자기 마음대로 합니다. 이런 미가를 두고 성경은 이렇게 평가합니다.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었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6)

이스라엘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자기 눈에 좋아 보이는 대로 행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계셨지만 그들은 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왕이신 하나님을 무시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합니까? 말씀이 아니라 자기 생각대로 합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제사장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우상을 만들고 내가 원하는 대로 신당을 세우고 내가 원하는 대로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고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신이 만든 가짜 신입니다. 눈에 보이는 좋은 것을 좇아서 가짜가 주는 만족과 유익과 편함을 좇아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그렇게 이스라엘은 가짜를 좇아갔습니다.

여러분, 가짜가 가득한 세상에서 말씀을 따르지 않으면 진짜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처럼 가짜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따르십시오. 말씀을 선택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짜 속에서 진짜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선택사항으로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명령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선택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선택사항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내 생각대로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섬기는 하나님을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아니라 내가 만든 가짜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가짜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 아니에요.’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해요.’ ‘비록 순종하진 않지만 하나님도 나의 마음을 이해하실 거예요.‘ ‘하나님이 금하신 다구요? 그런 하나님을 나는 받아들일 수 없어요.‘

하나님이 나에게 명하신 것들은 선택사항이 될 때, 내가 기분 좋으면 들어주고 아니면 무시합니다. 내가 할 만한 것은 순종하지만 좀 어려운 것은 거절합니다. 내가 손해가 될 만한 일은 넘어갑니다. 내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순종하지 않아도 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가짜를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 섬겼던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비록 우리가 눈에 보이는 우상을 만들지는 않지만 하나님을 내 입맛대로 바꾸며 우상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든지 내가 만든 가짜를 섬기면서 진짜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금하신 것들을 행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이 명하신 것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혹시 하나님 말씀을 의도적으로 걸러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이러한 태도로 말씀을 내 마음대로 선택하면서 하나님을 섬긴다면, 만약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더 편하고 쉬운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하나님은 내가 만들어낸 가짜일 뿐입니다. 내 입맛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가짜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정말 진짜로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선택으로 만들지 마십시오. 하나님 말씀을 온전히 따르며 내 마음대로 바꾸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만든 가짜 하나님을 버리고 진짜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거짓된 이 세상에서 진짜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