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세상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

본문 : 시편 65편

설교자 : 최종혁

 

사람의 말로 하나님을 표현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다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이해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표현들이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들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는 신중할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신 속성들을 우리는 성경을 통해 많이 알고 있다. 전지하시고 전능하시다. 편재하시고 영원하시다. 이런 하나님의 다름을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무한하심이 이런 속성들의 근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지식에 있어 무한하시기 때문에 전지하시고 능력에 있어 무한하시기 때문에 전능하시다. 공간에 있어 무한하심은 편재하심으로, 시간에 있어 무한하심은 영원하심으로 드러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와 공유하시는 속성 혹은 도덕적 속성이라고 불리는 속성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우리가 수요일에 로마서를 배우고 있지만, 로마서에서 핵심적으로 다루는 ‘하나님의 의’는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자에게는 영원한 형벌이 합당한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도 무한하다. 따라서 하나님의 긍휼, 사랑, 은혜, 자비도 무한하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다르시다는 것은, 우리는 유한하지만 하나님은 무한하시다는 사실에 기초해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은 특별히 시편 65편에서 그런 하나님의 무한한 은혜의 일부를 살펴보려고 한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운데, 특히 우리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은혜다. 시편 65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두 가지 모습을 그린다. 하나님의 다가오심(1-4절)과 하나님의 다스리심(5-13절)이다. 다가오심의 은혜와 다스리심의 은혜, 그안에 있는 풍부함을 말씀을 통해 살펴보고, 그 은혜에 우리가 어떻게 화답해야하는지 교훈을 얻기 원한다.

 

다윗의 시편에는 거의 대부분 대적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65편은 그런 요소가 전혀 없는 소수의 시편 중 하나다. 시의 배경은 추수철이라 할 수 있다. 후반부에 묘사된 모습을 보면 봄의 무교절에 가깝지만, 초반부 3절의 속죄에 대한 언급이나 11절에 나오는 “한 해를 관 씌운다”는 표현을 보면 아마 가을의 대속죄일과 초막절을 배경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더 높은 것 같다. 전반적인 내용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복과 물질적인 복에 대한 감사다. 영적인 복은 하나님의 다가오심과 관련되어 있고, 물질적인 복은 다스리심과 관련되어 있다.

 

하나님의 다가오심(1-4절)

1-4절은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성막에 나아가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습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다가오신 모습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면, 어떤 사람도 이렇게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4절,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 그래서 이 구절들에서는 계속해서 “주”라는 말이 강조된다. 즉, 다른 누군가, 사람이든 다른 우상이 되었든 다른 누군가가 아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 강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이여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리오며 사람이 서원을 주께 이행하리이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1-2절)

“찬송이 시온에서 주를 기다린다”는 표현은 신선하다. 62편 1절에서 다윗이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라고 말할 때 사용했던 표현과 유사한 표현으로 “찬송” 자체가 의인화되어서 표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땅히 하나님께 드려져야할 찬송이 하나님이 계신 곳, 시온에 준비되어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 찬송은 이어지는 말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서원과 기도와 관련이 되어 있다. 즉, 기도 중에 서원한 것을 하나님께서 계신 곳으로 나아와서 이행하는 것이다. 예물을 드리며 찬송하는 것이 그것이었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릴 수 있는 예배의 특권이다.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고 하나님께서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셨을 때, 감사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직접 하나님께 감사하며 찬송하는 것, 즉 예배하는 것은 마땅한 일일 뿐 아니라 특권이다.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4절과 같이 고백하는 것이 당연하다.

 

“주께서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하사 주의 뜰에 살게 하신 사람은 복이 있나이다 우리가 주의 집 곧 주의 성전의 아름다움으로 만족하리이다”(4절)

하나님께서 삶에 내려주시는 은혜에 우리는 감사해야하지만, 거기서 멈추면 우리는 그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잊을 수도 있다. 그저 복을 구하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삶에서 누리는 은혜는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

 

사실 진짜 은혜는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낮추시고 사람들 가운데 거하시며 사람들이 하나님께 나아올 수 있게 하셨다는 사실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신 것이다. 후에 솔로몬이 성전을 지으면서 기도했던 것처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하나님을 다 담을 수는 없다. 무한하신 하나님은 어떤 장소에 제한될 수 없으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광야의 성막에, 다윗의 장막에, 그리고 솔로몬의 성전에 거하시면서 특별한 임재를 나타내셨고 그곳을 하나님의 집으로 삼으셨다. 사람들은 그곳으로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났다. 하나님께서 세상 민족 가운데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이 이런 특권을 누렸다. 특별히 모세오경이 이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했고, 그것을 기록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 33: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

 

옛언약, 모세의 율법을 생각할 때 구약의 이스라엘은 그저 무미건조하게 의식적으로만 하나님을 예배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다수의 이스라엘이 그런 오류에 빠졌지만, 그 안에는 참된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그래서 여기 다윗도 모세와 동일한 고백을 하는 것이다(4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복이고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는 것, 즉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하나님은 무한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가오시는 은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을 택하고 가까이 오게 하시면서, “내가 이 정도 했으니, 너희는 이 정도는 해야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선택은 절대적이어서 선택 받는 자의 상태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죄악이 나를 이겼사오니 우리의 허물을 주께서 사하시리이다”(3절)

율법에 익숙한 다윗을 비롯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죄’가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방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사 59:1-2 1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2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 놓았고 너희 죄가 그의 얼굴을 가리어서 너희에게서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라

 

사람의 죄악이 하나님과 사람의 사이를 갈라 놓는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하나님의 얼굴을 가리어서 기도를 듣지 않으시게 한다. 그럼, 죄에 패배한 사람은 어떤 하나님의 은혜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3절의 하반절은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유무죄를 선고하는 장면처럼 긴장감있게 표현이 되어 있다. 우리가 허물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주께서는 이것을 어떻게 하실까? 그대로 갚으실까? 심판하실까?

 

“사하시리이다” – 속죄하다. 덮다(가리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죄를 가리고 다시 하나님의 얼굴에 가득한 은혜와 영광을 빛을 우리에게 비추이게 한다. 여기서 다윗은 그 속죄의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사실도 강조했다. 사람이 죄사함을 위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들의 중보자로서 제사장들이 죄를 속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죄를 덮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께서 택하고 가까이 오게 하는 자들의 죄를 하나님은 덮으시고,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그래서 다윗이 시편 32편 1절에서 말한 것처럼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다가오시는 은혜는 이것도 끝이 아니다. 2절 말씀을 보라.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2절)

다윗은 하나님의 속성으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을 언급한다. 이것이 지금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시는 것은 택하시고 가까이 오게 한 자들에게 주시는 은혜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나아오게 하시는 은혜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은 마태복음을 함께 읽고 있고 그전까지 모세오경의 말씀을 읽었는데, 아브라함 언약과 관련하여 계속해서 강조되었던 것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하나님의 복(은혜)는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손, 즉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머물고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창 12:3,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그들에게 은혜를 주시는 모습을 그 주변의 민족들이 보게될 때에 그들도 역시 하나님께 나아와 은혜를 누릴 수 있게 하는게 목적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그런 일들이 있었다.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올 수 있도록 하나님은 다가오신 것이다.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부분적으로 보았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그런 하나님의 다가오시는 은혜를 더욱 극적으로 보고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막으로 나아갔고, 그것은 그냥 텐트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가 나아가는 성막은 텐트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나타내셨다. 그 영광에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다. 그리고 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시는, 덮으시는 흠없고 죄없는 희생 제물이 되어 주셨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모든 사람에게 미쳤는지를 우리는 분명하게 보고 있다. 사실, 우리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갈 3:28-29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우리가 하나되어서 함께 예배하는 것이 바로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다. 외국에 나가서 같은 믿음을 가진 성도들과 함께 예배할 때 참 감격이 있다. 하늘나라에서 정말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이런 은혜 입은 자들이 모여 함께 찬양할 때, 우리는 그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새삼 실감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다가오시는 은혜는 세상에 가득 찰 뿐 아니라 넘친다. 그러니 그 은혜를 가장 가까이 경험한 우리는 여기 다윗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그 은혜에 만족하며 우리가 복 있는 자임에 감사하고 하나님께 마땅한 예배를 드려야할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부족하지 않다. 따라서 우리가 드리는 예배에 절대 과할 수 없다.

 

하나님의 다스리심(5-13절)

5-13절은 1-4에 기록된 예배의 직접적인 원인이자 감사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크게 보면 5-8절은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고, 9-13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의 결과를 말한다.

 

다스리시는 사실(5-8절)

“우리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땅의 모든 끝과 먼 바다에 있는 자가 의지할 주께서 의를 따라 엄위하신 일로 우리에게 응답하시리이다”(5절)

먼저 5절은 하나님을 구원의 하나님으로,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의지해야할 하나님으로 말한다. 다신론이 일반적이던 때에 사람들은 하나님도 단지 ‘이스라엘의 신’으로만 여길 수 있었지만, 하나님이 그런 분이 아니심은 출애굽과 가나안 정복을 통해 이미 분명하게 증명되었다. 출애굽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애굽 신들에 대한 심판이었다면, 가나안 정복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이시고, 그 하나님은 능력으로 다스리신다.

 

여기서 다윗은 그렇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의롭고”, “엄위한 일”이라고 표현하였다. 하나님은 공의로 다스리시고 그 일은 경외를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일이다. 누구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할 수 없다. 욥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주권을 나타내실 때, 그 누구도 하나님께 훈계할 수 없다. 6-7절은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피조세계에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묘사한다.

 

“주는 주의 힘으로 산을 세우시며 권능으로 띠를 띠시며 바다의 설렘과 물결의 흔들림과 만민의 소요까지 진정하시나이다”(6-7절)

산과 바다는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에게 가장 많은 두려움과 경외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래서 사람들은 각각을 다스리는 신을 만들고 그 신을 섬기는 것으로 산과 바다의 위험은 피하고 유익은 누리려고 했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산이든 바다든 하늘이든, 모두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 아래 있다.

 

하나님은 마치 힘센 장사처럼 그 능력으로 산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냥 두신 것이 아니라 띠를 띠고 그것을 붙들고 계신다. 바다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바다의 경계를 정하셨고 다스리신다. 때로 하나님께서 바다가 흔들리게 하시고 경계를 넘게하실 때, 우리는 그 엄청난 힘을 느낄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더 큰 힘으로 지금 세상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계신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도 하나님은 그 다스리심 아래 두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알 때, 그에 따르는 긍정적인 반응은 이렇게 나타난다.

 

“땅 끝에 사는 자가 주의 징조를 두려워하나이다 주께서 아침 되는 것과 저녁 되는 것을 즐거워하게 하시며”(8절)

두려움과 즐거움이 함께 나타난다. 마치 시편 2편 11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울다가 웃는 것하고는 다르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으로 행하시는 일은 5절의 표현처럼 ‘엄위하신 일’이다. 우리가 볼 때 두려운 일이라는 것이다. 그 엄위하신 일을 하나님의 반대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심판이고 따라서 공포에 떨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편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놀라운 구원이고, 따라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또한 5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더 나아가 그 하시는 일로 인해 오히려 기뻐하게 된다. 아침이 되는 것, 저녁이 되는 것을 즐거워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스리시기에 언제나 안전과 평안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곧 돌아보심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9-13절의 말씀이다.

 

다스리심의 결과(9-13절)

다스리심의 결과는 돌아보심이다.

 

“9 땅을 돌보사 물을 대어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하나님의 강에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 이같이 땅을 예비하신 후에 그들에게 곡식을 주시나이다 10 주께서 밭고랑에 물을 넉넉히 대사 그 이랑을 평평하게 하시며 또 단비로 부드럽게 하시고 그 싹에 복을 주시나이다 11 주의 은택으로 한 해를 관 씌우시니 주의 길에는 기름 방울이 떨어지며 12 들의 초장에도 떨어지니 작은 산들이 기쁨으로 띠를 띠었나이다 13 초장은 양 떼로 옷 입었고 골짜기는 곡식으로 덮였으매 그들이 다 즐거이 외치고 또 노래하나이다”(9-13절)

다윗이 묘사하고 있는 이 풍요로움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라. 충분한 비가 내려 땅에 물이 가득하고 부드러운 땅에 싹이 나고 곡식이 무럭무럭 자란다. 들의 풀들도 푸르게 자라서 들판은 마치 양떼로 옷을 입은 것처럼 양이 가득하고 곡식은 넘쳐난다. 그런 풍요로움을 누리는 모든 피조물들은 즐겁게 노래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다윗의 이 아름다운 묘사에서 강조되는 것은 두 가지다. 첫번째는 풍성함이다. 물은 부족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넘쳐 흐른다. 9절은 “심히 윤택하게 하시며”, “물이 가득하게 하시고”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다. 10절에서도 “넉넉히 대사”라고 말하고, 11절은 “기름 방울이 떨어진다”라고 표현한다. 너무 많아서 넘친다는 의미다.

 

다음으로 가장 강조되는 것은 “누가” 이런 일을 하느냐다. 다름아닌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묘사하는 것처럼 비가 내려 땅에 물이 가득하여 곡식이 자라고 풍년을 맞았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9절의 시작에서 “땅을 돌보사”라는 표현을 사용했는다.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돌보시기위해 찾아오신다는 말이다. 땅에 비를 내리는 것은 요정들이 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래서 강도 하나님의 강이다. 그렇기 때문에 먹을 곡식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물을 대고, 이랑을 평평하게 하고, 땅을 부드럽게하는 일들은 농부가 하는 일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한 해를 하나님은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채우신다. 사실 그 길에 기름 방울이 떨어지고 들의 초장에도 그러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가득 차고 넘친다.

 

우리가 이런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잘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들이 몇 가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우리가 지나치게 인위적인인 것에 둘려쌓여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비가 오고 눈이 오는 것은 조금 불편할 수는 있지만 생계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비가 그리 감사하지 않다. 우리 눈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물과 땅과 하늘을 보기보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귀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보다 이어폰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만 듣고 있는 것 같다. 우리 발은 흙 대신 콘크리트를 밟고 있고, 우리 손이 만지는 것들도 흙과 나무가 보다는 플라스틱과 금속들이다.

 

물론 그런 것들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맞다. 하지만 그런 것이 우리를 더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지 생각해 봐야한다. 어쩌면 우리는 우리 시대의 바벨탑에 살고 있으면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지 못하는 어리석음 가운데 살고 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다들 농사 지으면서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은혜를 기억해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또 다시 우리는 예수님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골 1:13). 누군가의 다스림을 받는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점점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예수님의 다스리심은 절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자기 양들을 위해 스스로 생명을 버린 목자이시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으로서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이시다. 우리를 종이라하지 않으시고 친구라고 하신다. 그분의 다스리심 안에 있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피난처에 있는 것이다.

 

내 삶은 내가 살아가는 것 같지만 사실 하나님께서 살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을 보며, 내 삶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선물들을 보며, 특별히 예수님을 기억하시면서,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은혜가 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즐거워하며 노래하고 의지하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다.

 

도전

주일말씀 : “영생은 무슨 맛일까?” 영생은 “충만한 기쁨”의 맛.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오늘 시편 65편의 다윗이 바로 그런 영생을 맛을 누리며 살았던 사람이다. 다윗은 지금의 우리가 아는 것처럼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것을 알지는 못했다. 하나님에 대해 기록된 계시를 더 많이 가지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예수님을 그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그가 이 땅에서 살면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데 부족한 것은 없었다. 그는 세상에, 그리고 그의 삶에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기 때문이다.

 

때로 구약의 성도들이 부러운 면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차고 넘치는 은혜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가오시는 은혜를 예수님을 통하여 더욱 분명히 알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시는 은혜 또한 예수님을 통해 더욱 잘 이해하고 있다. 이 세상에 그리고 우리 삶에도 하나님의 은혜는 차고 넘친다.

 

그럼, 마지막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시편의 다윗처럼 차고 넘치는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기뻐하고 만족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의지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충분하다. 겨우겨우 짜내서 “이 정도면 되지 않아?”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이제 더 이상은 은혜를 줄 수 없다고 하지도 않으신다. 얼마든지 우리는 그 은혜를 구하고 누릴 수 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 만드신 이 세상을 통해, 그리고 내 삶을 통해 계속해서 하나님의 차고 넘치는 은혜를 바라보고, 그 하나님께 언제나 부족하지만 우리의 진실된 마음으로 예배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