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선하신 주의 종이 드리는 기도
본문: 시편 86편
설교자: 최종혁
시편 86편은 3권에 기록된 유일한 다윗의 시편으로 우리가 많이 접했었던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탄식시라고 할 수 있다. 도움을 구하는 직접적인 기도가 15번이나 나온다. 아주 구체적으로 어떤 고난인지가 언급된 탄식시들도 있지만 이 시편은 그렇지는 않다. 7절에 ‘환난날’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14절에 그를 대적하여 치는 자들이 언급되어 있을 뿐이다. 다윗의 삶을 생각해 보면 사울과 압살롬으로부터 도망했을 때를 생각해 볼 수 있겠지만, 사실 어떤 고난의 때라도 적용될 수 있는 표현들이다. 시편의 편집자가 이 시편을 다른 다윗의 시편과 함께 두지 않고 여기 따로 둔 것도 아마 그런 일반적인 성격 때문일 것이다. 즉 상황에 대한 탄식보다는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기도할 수 있는지를 이 시편은 가르쳐 준다. 다윗이라는 개인의 탄식시이지만 누구나 비슷하게 이런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시편 86편은 인용구가 굉장히 많다. 많게는 40개의 표현이나 단어가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단순히 비슷한 단어라고 해서 다 인용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1, 2, 11, 14, 16절 등에서는 분명히 다른 시편에서 사용된 눈에 띄는 표현들이 사용되었다. 가장 분명한 것은 15절로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모세에게 나타내실 때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다. 즉 시편 86편 자체가 자신의 상황에 다른 시편이나 성경의 표현들을 적용한 기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시편 86편을 우리가 처한 상황에 적용하여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 마치 고난 중에 기도할 때는 이런 것들을 생각해야 한다고 가르치기위해 기록된 것 같기도 하다.
시편 86편의 또 다른 특징은 하나님과의 주종관계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시편에서는 하나님을 ‘주’로 지칭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은 경우에 ‘너’의 높임말로서 ‘당신’을 사용할 수 없어서 ‘주’가 대신 사용되었다. 그래서 86편에서도 ‘주’라는 표현이 그렇게 읽혀서 특별히 강조된다고 느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86편에서는 ‘주인’을 의미하는 단어로서의 ‘주(아도나이)’가 7번 사용되었다(3, 4, 5, 8, 9, 12, 15절). 그리고 다윗은 자신을 ‘종’으로 3번 지칭했다(2, 4, 16). 그래서 이 시편은 주인에게 드리는 종의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우리가 정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오늘날 우리의 시각에서 보면 종은 존재해서는 안된다. 그들은 차별을 당하고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우리 기준에서는 (자기주도적으로 살지 못하고) 누군가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불행한 일이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 주인과 종의 관계를 꼭 그렇게 이해할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사실 종의 삶은 어떤 주인을 섬기느냐에 달려있을 뿐, 종이라는 신분 자체가 불행한 삶을 의미했던 것은 아니다. 한 나라의 백성의 삶을 생각해 보면 된다. 왕이 아니라 평민으로 태어나면 모두가 불행했던 것은 아니다. 좋은 왕 밑에서 백성들은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었다.
종들도 마찬가지다. 좋은 주인을 만나면 종은 오히려 주인의 애정과 보호 아래서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었다. 행복하고 평안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런 주인의 보호 아래서 종은 주인에게 순종하여 주인이 원하는 일을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주인과 종의 관계다. 따라서, 주인과 종 사이에는 깨뜨려야할 악한 계급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지켜야할 질서가 있고, 그 질서를 지킬 때 함께 복을 누릴 수 있었다.
다윗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확히 그러하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과의 언약적 관계를 상기시키는 ‘여호와’라는 호칭으로 하나님을 부르는 것 뿐 아니라, 더욱 분명하게 ‘주’라고 부르면서 그 관계에 기초하여 기도하는 이런 시편을 기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시편 86편은 고난 중에 드리는 기도이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드리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악한 주인이라면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신 주인이기에 종인 다윗은 담대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고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시편에서는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이렇게 해주십시오’라고 요청(명령형)하는 표현이 15번이나 등장한다. 즉 전체적으로는 반복해서 선하신 하나님께 선하심을 나타내달라고 구하는 기도인데, 그렇게 기도하는 동기가 7절까지 말씀에서 드러나고 목적이 8-13절에서 드러난다. 그리고 14-17절에서는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주께 기도하는 동기(1-7절)
시 86:1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해 달라고 구한다. 자기의 상황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고 그에 따라 응답해주실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의 상황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다윗은 “가난하고 궁핍하오니”라고 자신의 상황을 표현했는데, 여기서는 경제적으로 가난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시편 40:17과 70:5에서도 사용된 표현인데, 외부적인 상황에 의해서 극심한 피해를 받아 간절하게 도움이 필요한 상황을 의미한다. 가진게 없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그런 상황이다.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무엇때문에 그런지는 밝히지 않는다. 14절을 보면 그를 치는 대적들이 그의 영혼을 찾고 있다고 말하는데, 그의 대적들로 인해서 생명까지도 위험한 상황에 놓였고 그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는 두렵고 좌절스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귀를 기울여 응답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동기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런 확신이 표현된 것이 6-7절이다.
시 86:6–7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7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7절을 좀 더 분명하게 번역하면 “주께서 내게 응답하실 것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환난 날에 주께 부르짖을 것입니다”다. 즉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때문에 지금 가난하고 궁핍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의미다.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시 86:2 나는 경건하오니 내 영혼을 보존하소서 내 주 하나님이여 주를 의지하는 종을 구원하소서
스스로 경건하다고 표현하는 것이 부담스러울 수 있는데, 85:8의 “성도”와 같은 단어다.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언약에 성실하신 사랑을 의미하는 ‘헤세드’와 관계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 (언약에) 신실한 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고, 좀 더 확장해보면 85:8처럼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주를 의지하는 종”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앞서 말했듯 다윗은 여호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이 기도를 드리고 있다. 즉, 2절에서 다윗이 말하는 것은 그가 얼마나 경건한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는지가 아닌 것이다. 그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언급하면서 내가 이렇게 했으니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의 기도를 마땅히 들어주셔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윗은 지금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을 “내 주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경건한 것이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언약 관계에 있는 종에게 마땅한 것으로서, 다윗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종임을 보여주는 증거일 뿐이다. 그가 하나님의 종인 것이 확실하다는 증거가 그의 삶에 있었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조금 다른 얘기일 수 있지만,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는 것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구원 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나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리스도의 삶이 중요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완벽한 삶을 사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 거기에 내가 무언가를 더할 수는 없다.
하지만 구원의 확신은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구원 받았을 때만 생각하고 있으면 되는 것이 아니다. 확신은 구원 받은 자로서 합당히 살 때 얻을 수 있는 복이다. 확신에는 주관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다윗이 언약에 신실하게 살았을 때 확신을 가지고 은혜를 구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새언약에 신실하게 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임을 확신할 수 있고, 그런 확신 가운데 다윗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확신 가운데 다윗은 이렇게 구했다.
시 86:3–4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내가 종일 주께 부르짖나이다 4주여 내 영혼이 주를 우러러보오니 주여 내 영혼을 기쁘게 하소서
종일 부르짖는다는 것은 약간의 과장이 들어간 시적인 표현이겠지만, 그만큼 상황을 절박하게 인식했다는 뜻이고 그만큼 간절하게 기도했다는 의미다. 또한 다윗은 그 영혼을 주께 올려드렸다고도 말한다(“우러러보오니”). 나의 모든 것을 주인이신 하나님께 맡겼다는 의미다. 다윗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렇게 온전히 그리고 간절하게 구하니, 은혜를 베푸셔서 내 영혼을 기쁘게 해달라고 구했던 것이다.
이런 확신은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확신에 근거한다. 다윗 입장에서 아무리 이렇다 저렇다 얘기해봐야, 하나님이 그렇게 하기 싫다고 하시면 끝이기 때문이다. 은혜라는 것은 베푸는 사람의 선택에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실 것에 대해서도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속성 때문이다.
시 86:5 주는 선하사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시며 주께 부르짖는 자에게 인자함이 후하심이니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윗의 주인인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속성이 악하지 않으시다. 다른 어떤 존재가 고통 받으며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싶어하는 분이 아니시다. 물로 세상을 심판하실 때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지 않으셨다. 오히려 참고 또 참고 기다리고 기다리셨다. 사람들을 지옥에 보내서 불태우며 축제를 벌이며 기뻐하는 분도 아니시다. 반대로 죄인 하나가 회개할 때 크게 기뻐하시고, 그것을 위해 자기 아들을 세상을 구원할 구세주로 세상에 보내어 죄인들을 대신하여 죽게하신 분이시다.
이런 하나님의 선하심이 사람들이 만들어낸 다른 어떤 신과도 구별되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도 진노하고 심판하시지만 그것은 감정적이거나 충동적이지 않다. 공의로 악을 심판하실 뿐이시다. 심지어 회개할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아니 그 이상으로 주신다. 우리 같으면 진작에 이 세상을 멸망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다리시고 회개하는 자를 용서하신다. 그렇게 하기에 인색함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하나님의 대적들에게도 그런 선하심을 나타내시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종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하신다. 하나님은 사죄하기를 즐거워하신다. 기꺼이 용서하신다. 영어 번역은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다”, “용서가 하나님의 본성이다”와 같이 번역했다. 즉 하나님은 용서하는 일을 하실 뿐 아니라 용서하는 분이시라는 말이다. 복수가 기본인 우리에게 용서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하나님께는 그렇지 않다.
용서와 마찬가지로 그 인자하심도 후하다. 하나님께 부르짖는 하나님의 종들에게 하나님은 인자하심(헤세드)를 아낌없이 보여주신다. 인색하지 않으시다. 가끔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데 인색한 사람들이 있다. 결국 은혜를 베풀기는 한다. 그럴 때 내 입장에서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고맙게 생각해야 하긴 하는데, 뭔가 좀 별로 고워하고 싶지 않은 때가 있다. 사정사정 하니까 겨우 조금 어떤 도움을 주면서 생색은 할수 있는한 최대치로 내는 경우가 그렇다. 마치 평생 갚아야할 은혜라도 베푸는양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 주니까 받기는 하는데 ‘더러워서 안받아’라는 말이 목에까지 차오를 때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후하다. 풍성하다. 차고 넘친다. 언제든 더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고난 중에서 주께 기도하게 하는 동기는 응답에 대한 확신이다. 그리고 응답에 대해서 확신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하나님의 종이며 주인이신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고난 중에 기도하지만 이런 이유에 대해서는 많이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기도 하는 것으로 끝날 때가 많다. 물론 그렇게 큰 고민 없이 어린 아이처럼 기도 하는 것도 중요하고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더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하고 싶어지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그리고 하나님의 선하신 속성을 묵상하며 담대하게 확신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인 우리가 누릴 수 있는 큰 특권이다.
주께 기도하는 목적(8-13절)
다음으로 기도하는 목적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기도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12-13절에 기록되어 있다.
시 86:12–13 주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오리니 13이는 내게 향하신 주의 인자하심이 크사 내 영혼을 깊은 스올에서 건지셨음이니이다
다윗은 여기서 다시 하나님을 “주 나의 하나님이여”라고 부르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강조하며 자신이 하나님의 종으로서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송하고 언제나 그 이름에 영광을 돌리겠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셔서 그 크신 인자하심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즉, 그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 하나님께 합당한 찬양을 드리는 것이 기도의 목적이다.
그럼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시면 그런 찬양을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어떻게 하느냐에 관계 없이 하나님은 그 자체로 그리고 그 하시는 위대한 일로 인해서 찬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8-10절에서 다윗은 이 사실을 말한다.
시 86:8–10 주여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 없사오며 주의 행하심과 같은 일도 없나이다 9주여 주께서 지으신 모든 민족이 와서 주의 앞에 경배하며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리이다 10무릇 주는 위대하사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오니 주만이 하나님이시니이다
8절은 성경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표현이다. 대표적으로는 출애굽기 15:11에서 모세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용했던 표현이고, 다윗과 솔로몬도 같은 표현을 통해 하나님의 유일함과 위대하심을 찬양했었다. 위대하셔서 기이한 일을 행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만이 참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민족이 하나님 앞에 와서 경배하고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더욱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다윗은 11절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시 86:11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
다윗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의 길을 알고 그 길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심으로 즉 나눠지지 않은 마음으로 주를 경외하는 것이다. 세상에 많은 길들이 있는 것 같고 많은 신들이 있는 것 같다. 저마다 자기 길이 옳다고 주장하고 자기 신이 진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길만이 유일한 진리다. 하나님 만이 참된 신이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그냥 한번씩 예배의 장소에 나와서 드려지는 예배에 함께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12절에서 말하는 전심으로 주를 찬송하고 영원토록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11절의 기도처럼 주의 길을 배워 그 길로 행하고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는 삶을 사는 것과 함께 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지 않으실지라도 이렇게 살고 이렇게 예배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신다면 더욱 나뉘지 않은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실 고난 중에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합당치 않은 삶을 살고 그런 예배를 드리기 쉽다. 우리의 마음이 나눠지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이 아닌 상황을 두려워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문제가 우리를 잠식하는 것이다.
그 무엇과도 같지 않은 하나님은 과거에 놀라운 일들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살아계심, 위대하심, 유일하심을 증명하셨었다. 만약 지금 그렇게 하신다면 다윗은 하나님의 길이 옳다는 확신을 가질 것이며 더욱 한 마음으로 다른 사람이나 신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경외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지금 다윗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내가 더 하나님을 배우게 되고 경외하게 되는 것, 그리하여서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기도의 이유를 생각하지 않는만큼 기도의 목적도 우리는 쉽게 간과한다. 기도를 통해서 결국 무엇을 얻기 위한 것인지 생각지 않고 그냥 쇼핑 목록을 읽듯이 기도를 한다. 그냥 이 상황이 싫고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을 목적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삶의 목적을 기억해야 한다. 내 삶에 하나님의 위대하심이 나타나는 은혜를 통해 내가 얻는 것은 하나님의 길을 배우고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더욱 하나님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것이 합당한 종의 자세다.
주께 기도하는 내용(14-17절)
마지막으로 14-17절은 다윗이 좀 더 구체적으로 기도하는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먼저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기도다.
시 86:14 하나님이여 교만한 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내 영혼을 찾았사오며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아니하였나이다
이 말씀은 시편 54:3과 유사하다. 여기서도 다윗은 자신의 상황을 아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교만하고 포악한 자의 무리가 다윗을 치고 그를 죽이려고 하고 있는 상황임을 알 수 있다. 당연히 어느 정도 그들의 뜻대로 상황은 흘러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다윗과는 전혀 다르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 앞에 두고 있지 않다. 유일한 살아계신 하나님이 그들에게는 그저 많은 신들 중 하나일 뿐이고, 지금 이 상황에서는 죽어 있든지 잠들어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인 다윗이 자신들에게 이렇게 패배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앞서 다윗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응답을 구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지금 상황은 하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하시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마치 죽어 있거나 무력한 분으로서 보여지고 있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음을 알기에 지금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더 강해야 하거나 더 높은 위치에 오르셔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미 비할 수 없이 강하시고 누구보다 높으시다. 지금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지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께서 직접 선포하셨던 하나님에 대한 묘사를 인용하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힘주시고 구원하여 주실 것을 구한다.
시 86:15–16 그러나 주여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16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하소서
다윗은 자신을 “주의 여종의 아들”이라고 표현하며 최대한 낮춘다. 낮은 자에게,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 은혜 베풀어주시기를 구한다. 하나님은 과거에 그렇게 하셨었는데, 지금 그 은혜가 또 다시 필요한 것이다.
그러면서 다윗은 17절에서 조금은 의아한 요청을 한다.
시 86:17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
여기 “은총의 표적”은 앞서 말한 구원의 다른 말일 수도 있지만, 다윗은 뭔가 눈에 보이는 분명한 증거를 말하는 듯하다.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구원보다는 뭔가 분명한 구원의 증거를 보여주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면 다윗 자신에게 분명 도움이 될 것이다. 고난이 끝나지는 않더라도 결국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실 것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은 여기서 자신보다는 그를 미워하는 자들을 언급한다. 하나님께서 은총의 표적을 보여주신다면 그의 대적들이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을 돕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결국 앞서 말했던 것처럼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게되어 하나님께서 영광 받으시기를 구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86편의 다윗의 기도는 어찌보면 자신을 위한 기도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위한 기도임을 알 수 있다. 사실 우리의 기도가 이러해야 한다. 내가 원하는 것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같아야 하는 것이다. 왜냐면 우리는 종으로서 선하신 주인이신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기 때문이다. 만약 하나님의 뜻과 다른 것을 내가 구하고 있다면 나는 종으로서 합당하게 구하지 않은 것이란 말이 된다. 마치 자기 앞에 주를 두지 않은 자처럼 구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우리를 ‘종’이라고 말하는 것이 좀 거슬릴 수 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우리를 종이라고 하지 않으시고 친구라고 하신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5:15). 하지만 성경은 우리를 여전히 그리스도의 종이라 말한다(고전 7:22; 엡 6:6). 예수님께서 우리를 ‘친구’라고 하실 때는 질서의 측면이 아니라 관계적 측면과 하나님의 뜻을 아는 측면에서 말씀하셨다. 우리는 여전히 종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해야 한다. 다윗은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11절)라고 기도 했는데, 우리는 더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인 성경이 있다. 우리는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 우리가 구할 것은 그 뜻에 따라 언제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언제든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내용이어야 한다.
도전
“하나님께 당신의 문제가 얼마나 큰지 말하는 대신에 당신의 문제에게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말하라” – 익명
멋진 말이기는 한데, 실제로 어떻게 하라는건지가 좀 잘 와닿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시편을 보면 다윗이 정확히 이렇게 한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다윗은 자신의 상황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다. 대신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지를 묵상한다.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신지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지를 묵상한다. 성경의 여러 말씀들을 통해서 그렇게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구했다. 내가 그 크신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구했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은혜들을 구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의 도움이 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확실히 우리를 돕기 원하신다. 그 삶에 어려움이 찾아올 때, 이런 확신 가운데 다윗처럼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신들 중에 주와 같은 자가 없습니다. 주여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그리하여 주의 이름에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기도 가운데 우리가 일심으로 충성되게 종으로서의 삶을 산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맞아주실 것이다. 그날을 기대하며 지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