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보다 나은 사랑

본문 : 시편 63편

설교자 : 최종혁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누군가에게는 단순히 죽어서 천국이라는 좋은 곳에 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약 그렇다면, 딱히 하나님을 믿지 않을 필요도 없다. 더구나 성경은 행위는 아무 필요 없고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니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훨씬 편하기도 하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죽고 나서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다. 누군가에게는 결혼이나 사업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자녀가 잘 되게 하려고, 부모님을 위해서 그렇게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교회에 다닌다는 말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지금 언급한 것들의 공통점은 결국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하나님을 통해 얻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이다. 그것이 이 땅에 살 때 원하는 것인지, 이 땅을 떠나고 원하는 것인지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그런 것일까? 하나님이 원하는 무언가를 우리가 주면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무언가를 주는 것이 기독교인가?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 믿는 것을 그렇게 오해하는 이유는 세상의 종교들이 다 그렇기 때문이다. 종교는 초월적 존재를 통해 내가 원하는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앞서 말한 그런 것들이다. 그래서 무언가를 해야한다. 고행을 하든, 수행을 하든, 돈을 내든, 쌀을 내든, 뭔가를 해야한다. 그렇게 해서 신을 내가 원하는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종교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참된 신,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시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도 그런 의미가 될 수 없다. 바울의 말처럼 하나님은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시다(행 17:25). 시편 50편에서 아삽이 말한 것처럼 이 세상과 그 안에 가득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시 50:12). 사람이 만들어낸 신과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은 다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흔히 말하는 종교를 가진다는 것과는 다르다.

특히, 하나님은 사람들과 언약을 맺으시는데, 이 언약은 계약과는 다르다. 계약은 계약의 두 당사자의 상호 합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상대가 무엇을 하는 식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언약은 사랑의 언약으로 조건이 없다. 마치 결혼 서약과도 같다. 요즘에는 혼전계약서 같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본래 결혼 서약은 ‘당신이 이렇게 하면 나는 이렇게 할거다’라고 조건을 걸지 않는다. 오히려 조건 없는 사랑을 약속한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건강할 때나 병들었을 때나, 나이가 들어도 죽음이 갈라놓기 전까지는 변함없는 사랑을 할 것을 약속한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그렇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로 표현하기도 하고 아버지와 자녀로 표현하기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살아계시고 인격체이신 하나님은 우리와 기계적인 관계가 아니라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낮추셔서 우리를 찾아 오셨고 먼저 사랑해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그 사랑에 화답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것은 단순히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얻고 못얻고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의 문제인 것이다.

성경 속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은 이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알기 원했고 경험하길 원했다.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의무적으로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명령들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조금이라도 더 알고, 사랑하여 하나님을 닮아가고 하나님과 친밀히 교제하는 것이 그들이 원했던 삶이다.

다윗은 정말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붙은 별명인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는 어쩌면 사람에게 있어서 최고의 찬사일 것이다. 시편 63편은 그런 다윗이 하나님께 보내는 러브레터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잘 드러나있기 때문이다.

  1. 사랑의 갈구 :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1-2절)
  2. 사랑의 표현 :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함(3-7절)
  3. 사랑의 다짐 :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8-11절)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의 표현인 예배를 돌아보고, 다윗과 같은 사랑의 다짐을 할 수 있게 되기를 원한다.

I. 사랑의 갈구 : 하나님을 간절히 찾음(1-2절)

먼저 이 시의 표제는 다윗이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말해준다.

“유다 광야에 있을 때에”

다윗은 광야에 있다. 1절의 표현에 따르면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있다. 광야에 놀러간 것은 아니고 9절의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이라는 표현을 보면 도망해서 광야에 있다는 것을 추측해볼 수 있다. 11절의 ‘왕’이란 표현을 고려하면 왕으로서 이런 상황에 있는 것이니 가장 적합한 때는 압살롬의 반역 때로 추정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다윗은 지금 실제로 광야에 있다는 것이다.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을 피해서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 피해있다면 어떤 마음일까? 다윗과 동일한 상황에 처할 일이 아마 우리에게는 없겠지만 가정을 해본다면, 참 복잡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왜 또 다시 이런 상황에 놓였는지 이해가 안되기도 했을 것이다. 결국 자신의 범죄 때문에 벌어진 상황인 것을 알기 때문에 죄책감이 컸을 수도 있다. 전쟁에 대한 걱정, 차기 왕으로 생각했던 아들 압살롬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당장에 광야에 있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피할 곳에 대한 걱정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다윗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그런 걱정보다는 바로 이것이었다.

시 63:1-2 1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2 내가 주의 권능과 영광을 보기 위하여 이와 같이 성소에서 주를 바라보았나이다

다윗의 마음을 지배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이셨고, 그래서 지금의 광야 생활은 그런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그의 마음을 잘 보여주는 그림처럼 보였다. 메마른 땅에서 목마른 사람이 물을 간절히 찾듯이 다윗은 하나님을 찾았다.

“간절히 주를 찾는다”는 표현은 어떤 번역에서는 “일찍 주를 찾는다”로 번역하기도 했는데, 본래 단어가 “새벽”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기 싫은 일은 최대한 미루려고 하고 하고 싶은 일은 최대한 빨리 하려고 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는데 밤 늦게까지 하고 새벽 같이 일어나서 하는 일은 그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다윗이 그렇게 하나님을 찾았다는 말이다. 6절에서 다윗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이만큼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고 있다. 목마른 사람처럼 하나님을 갈급했고, 또 하나님을 앙모했다. “앙모하다”는 특이한 표현이긴 한데, 비슷한 아랍어 동사는 “창백해지다. 시력이 약해지다”는 뜻이 있다. 너무나 간절히 원해서 눈이 어둡게 될 정도라는 의미가 될텐데, 우리말에도 어느 하나를 간절히 원할 때 ‘눈에 뵈는게 없다’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여튼, 그렇게 몸이 힘들정도로 하나님을 간절히 원한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윗은 이런 특별한 표현들을 사용해서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원하는지, 그래서 만나고 싶은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하나님에게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를 바라고 있다. 2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때를 회상하는데, 바로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을 마음껏 예배할 수 있었을 때다. 그곳에서 그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었다.”

하나님을 실제로 보았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누구도 그런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윗이 본 것은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감사의 기도와 찬양을 드리는 예배였을 것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종교 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보았다. 짐승을 잡아 피를 흘리고 태우는 장면이다. 하지만 다윗에게 보였던 것은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 예배를 통해 드러나는 하나님의 권능과 영광을 그는 보았고, 하나님을 보았다. 그가 성전에서 하나님께 예배할 때 그는 하나님을 만났던 것이다. 지금 그가 광야에서 간절히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여기서 잠시 우리의 예배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예배를 통해 무엇을 보고 있는가? 얼마나 찬양팀이 찬양을 잘 하는지를 보는가? 얼마나 설교자가 내 마음을 잘 위로하고 나하고 같은 생각을 말하고 있는지를 보는가? 만찬에 참여하는 형제들이 얼마나 기도를 잘하는지를 보는가? 애찬을 나눌 때 얼마나 반찬이 맛있는지를 보는가? 봉사를 하면서는 누가 보고 있는지를 보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이 예배이고, 예배가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우리는 무엇을 하든 하나님을 바라봐야 한다. 하나님 보기를, 하나님 만나기를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광야에서도 다윗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원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모습이다.

II. 사랑의 표현 : 하나님을 온전히 기뻐함(3-7절)

다윗은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 이름을 두신 예루살렘의 성전과는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 마음은 하나님으로 가득 찼다. 그때 그의 입에서 이런 찬양이 흘러나왔다.

시 63:3-7 3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4 이러므로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5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 나의 입이 기쁜 입술로 주를 찬송하되 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7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음이라 내가 주의 날개 그늘에서 즐겁게 부르리이다

다윗은 계속해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언급한다. 무엇으로? 그의 입술로(3절), 언제? 그의 평생에(4절), 어디서? 주의 날개 그늘에서(7절).

그럼, 어떻게 찬양하는가? “손을 들고”(4절), “기쁜 입술로”(5절), “즐겁게 부르리이다”(7절). 즐겁게 찬양하는 것이다. 억지로, 겨우, 해야하니까 입만 뻥긋뻥긋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그 안에서 솟아나는 기쁨을 다윗은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까지 할까? 그것도 광야에서. 물론 다윗은 음악인으로서 좀 더 감성적이고 즉흥적인 면이 있다.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는 아니다. 다윗은 자신이 기뻐했던 근본적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3절)

이것이 다윗의 기쁜 찬양의 가장 중심에 있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 여기서 다윗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 그리고 오늘날의 사람들은 다윗을 잠깐 불러 세울 것이다. “다윗, 하나님 믿는건 좋은데, 너무 그렇게까지 빠지지마. 다 먹고 살자고 하는거고, 다 잘살아보자고 하는 건데, 생명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더 낫다니,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종교는 사는데 도움이 되어야 종교지, 그게 사는 것보다 낫다니 말이 안되잖아.”

하지만 다윗은 여기서 전혀 과장하고 있지 않다.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낫다는 말은 아름다운 시적인 표현을 넘어 사실 그대로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은 거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수만 있다면 생명을 얻기 위해 무엇이든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다. 생명이 좋은 것은 맞다. 그것은 귀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생명이 ‘이 땅에서의 삶’만을 의미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라.

마 16:26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예수님도 동일하게 생명, 목숨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면서 그 중요한 목숨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마 16:25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 모순적인 말이 역설적으로 가장 중요한 진리인 것은 우리의 목숨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땅이 전부라면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그냥 잃는거지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 후에는 심판이 있고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다. 얼마나 길게 사는지는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그 영원한 삶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다. 그 영원한 삶을 사랑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영생이다. 그 영원한 삶을 진노의 하나님과 함께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영원한 심판이다.

그러니 실제로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주관하시기 때문이고 그 삶은 이 땅에만 한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고 고백했던 것이다.

다윗이 광야에서 기쁨으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이렇게 표현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하나님의 인자하심 때문이다. 하나님의 헤세드, 변하지 않으시는 사랑이 그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삶에서 좋은 것들은 있다가도 없어진다. 없어지지 않아도 그 가치를 금세 잃는다. 좋은 TV를 사도 얼마 못가고 좋은 차를 사도 마찬가지다. 삶 자체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사랑하겠다고 선택하신 사람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잃을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지난 주일에 배웠던 말씀처럼 그 어떤 것도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롬 8:38-39). 예수님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 10:28-29 28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29 그들을 주신 내 아버지는 만물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이렇게 때문에 하나님은 언제든 다윗의 도움이 되시고 안전한 피난처가 되신다(7절). 그 하나님을 기억하고 그분의 말씀을 묵상하면(6절),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한다(5절). 다른 어떤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히 기뻐하며 찬양할 수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이 생명보다 낫기 때문이다. 우리가 온 천하를 가지고도 하나님이 없으면 우리에게 참된 만족이 없고 온전한 기쁨이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에 참된 만족을 주시기 때문이다. 이 땅의 다른 것들이 우리를 채워줄 것 같지만, 사실 그것들은 이 참된 만족을 빼앗아갈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가 이것을 얼마나 그렇게 소중히 여기고 있느냐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하고 속이려 할 때, 우리는 다윗처럼 하나님을 바라봐야할 것이다. 하니님의 권능과 영광을 보고 더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6절에서 다윗은 그런 노력을 넌지시 언급했다.

시 63:6 내가 나의 침상에서 주를 기억하며 새벽에 주의 말씀을 작은 소리로 읊조릴 때에 하오리니

계속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기억하고 묵상하는 것이다. 자기 전에 그렇게 하고 자고 일어나서 그렇게 한다. 먹고 사는데 바빠서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잊고 사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곱씹고 되새길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게 될 것이고, 온전한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사랑의 다짐 : 하나님을 가까이 따름(8-11절)

다윗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만나서 온전히 기뻐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를 다짐했다.

시 63: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가까이 따른다”는 말은 딱 붙어있는 것을 의미한다. 창세기에서 남자가 그 부모를 떠나 아내와 한 몸이 된다고 할 때 사용한 표현이고, 룻이 시어머니인 나오미를 떠나지 않고 붙좇았다고 할 때 사용한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그 언약하심에 따라 변하지 않는 신실하신 사랑을 보여주신 것처럼 다윗 역시 그렇게 하겠다는 다짐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다짐에 기초해서 다윗은 광야로 돌아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대적을 멸하시고 하나님께 충성된 사랑을 맹세한 자들과 함께 하나님을 즐거워할 날을 바란다.

시 63:9-11 9 나의 영혼을 찾아 멸하려 하는 그들은 땅 깊은 곳에 들어가며 10 칼의 세력에 넘겨져 승냥이의 먹이가 되리이다 11 왕은 하나님을 즐거워하리니 주께 맹세한 자마다 자랑할 것이나 거짓말하는 자의 입은 막히리로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한 자들은 결국 그 생명까지 잃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계속해서 가까이 따르는 자는 함께 하나님을 자랑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게 될 삶의 결말이다.

도전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오늘 다윗의 시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의미다. 하나님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으로 기뻐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따른다는 의미다. 하나님께서 생명보다 나은 사랑을 우리에게 먼저 보여주셨고 계속해서 변함없이 그 사랑을 확인시켜 주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회에 모이고, 찬양을 하고, 말씀을 듣고, 교제를 하고, 봉사를 하고 하는 모든 것들의 동력이 바로 사랑이다. 우리가 더욱 거룩한 삶을 살려고 하고, 복음을 정하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사랑 때문이다. 다윗의 말대로 생명보다 나은 주의 인자하심(헤세드, 언약의 사랑) 때문인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이 사랑과 관계없이 하는 모든 일들은 종교적 행위에 불과하다. 해야되니까 하는 일, 하던 일이라 하는 일, 이기적인 욕심을 채우기위해 하는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이 없는 사랑의 행위는 위선이고 기만일 뿐이다.

어쩌면 광야에 있던 다윗의 상황이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함께 모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생각도 든다. 다윗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던 것처럼, 우리도 지금 그렇게 하나님을 간절히 찾아야할 때다. 하나님으로 만족하고 하나님께 딱 붙어 떨어지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할 때다. 그러기 위해 하나님을 계속해서 기억하고 그 말씀을 묵상해야할 때다.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깊이 깨달을 때, 우리는 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다. 그러면 우리가 다시 모일 때, 우리는 함께 생명보다 나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해 즐거워하며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