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명의 대가
본문 : 사도행전 21장
설교자 : 조정의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떤 면에서 결혼과 같다. 배우자의 매력에 흠뻑 빠져 이 사람과 부부로 평생 함께할 수만 있다면 가난하고 아프고 슬프고 외롭고 괴롭고 힘든 일을 만나도 다 감수하겠다는 결단으로 시작한다(서약). 억지로가 아니라 넘치는 기쁨으로 결혼의 대가가 무엇이든 반드시 치르겠다고 결심한다.
행복한 결혼 생활의 비결은 처음 사랑(결심)을 계속해서 간직하고 지켜내는 것이다. 더 이상 대가를 치르지 않으려는 남편이나 아내는 반드시 자신뿐만 아니라 배우자를 불행하게 만든다.
만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신은 그리스도와 연합한(결혼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된 것이다. 당신은 신랑의 영광에 매료되었고 당신을 위해 목숨 바친 사랑의 프러포즈에 눈물과 기쁨으로 “예스”를 외친 사람이다. 당신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어떤 대가를 치르든지 그리스도와 함께하겠다고 결단했다.
그런데 살다 보면 처음 그 결심을 잊어버리게 할 만큼 큰 대가를 치러야 할 때가 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면서 영광을 함께 얻기 위해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함을 아는데(롬 8:17), 힘들게 받아들이고 믿음으로 통과해야 할 상황이나 일들이 계속 있으면, 사명은 잊고 대가만 지불하는 것 같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
1. 받은 사명을 기억하라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그들)과 힘겹게 작별하고(‘억지로 떼어 놓다’), 예루살렘까지 먼 거리를 배(1,070km)와 도보(100km)로 이동했다. 1절을 보면 고스(히포크라테스), 로도, 바다라로 며칠간 연안선을 타고 이동했고, 2-3절을 보면 베니게로 건너가는 큰 배를 타고 수리아에 있는 두로까지 항해했다. 7일 후 바울은 두로에서 돌레마이(7절), 가이사랴(8절)를 거쳐 마침내 예루살렘(17절)에 이르렀다(A. D. 57년 5월 29일 오순절).
바울은 사명을 위한 대가를 예루살렘에서 톡톡히 치를 것을 알았다.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행 20:23). 각 성에서 여러 번 확증하셨다.
하지만 바울은 사명을 위해 어떠 대가든 치를 각오가 됐다.“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바울은 지난 수년 동안 복음을 증언하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숯한 대가를 치러왔다. 가는 곳마다 유대인의 비방과 핍박이 있었고, 이방인들의 송사와 폭동을 겪었다. 투옥되고 돌에 맞고 자기 손으로 일하는 수고를 감당하고 교회 안에선 약한 성도들, 교회 밖에선 거짓 교사가 일으킨 문제와 싸워야 했다. 예루살렘에 간다고 달라질 건 없다. 결박과 환난이란 대가는 사명을 마치기 위해 당연히 요구되는 것이다.
예루살렘까지 가는 여정에도 성령은 여러 번 사명의 대가를 알려주셨다. 먼저 두로에서 힘들게 찾은(추적) 성도들(제자들)이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라고 했다(4절).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이 감수해야 할 대가를 미리 보고 그를 만류한 것이다.
가이사랴에 갔을 때 예루살렘의 기근을 예언했던 선지자 아가보를 만났다(행 11:28). 그는 바울의 허리띠를 가져다가 자기 손발에 묶고, 이렇게 바울이 유대인에게 결박당해 이방인의 손에 넘겨질 것이라고 경고했다(10-11절). 그 말을 들은 가이사랴 성도들(빌립과 네 딸) 그리고 바울의 동역자들(“우리가”, 12절) 더불어 바울에게 권한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12절).
바울을 아끼고 사랑했던 성도들의 마음이 어땠을지 헤아려진다. 두로에선 성도들이 아내와 자녀를 다 데리고 나와 배를 타고 떠나는 바울을 기도하며 전송했고(5절), 가이사랴에선 계속 울면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지 말라고 간청했다(13절). 바울도 왜 슬프고 아프지 않았겠는가?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13절).
여러분이 어찌하여 울어(미완료)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빨래를 막대기로 때리다). 하지만 바울은 자기 사명을 잘 알고 있었다(“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행 20:22). 사명에 대가가 따른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13절). 슬픔에 빠진 성도들도 결국 주님 뜻대로 되는 것이 옳다는 걸 받아들였다.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절).
그리스도인은 슬프고 아프고 힘들어도 자신의 사명과 그에 따른 대가를 알기 때문에 이들처럼 또 주님처럼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과 대가다.
혹시 나의 행복과 평안과 형통을 위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가 있다면, 그건 참된 기독교가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걸 알아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좇으라고 하신 생명의 길은 좁고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은 길이다(마 7:14).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길이다(눅 9:23).
당신은 그리스도의 무궁한 영광과 헤아릴 수 없이 큰 사랑에 압도되고 감격하여 그분과 함께할 것을 결단했다. 영생의 주와 함께할 때 영원한 생명과 복을 받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땅에서 아무런 시험이나 고난이 없을 것이라 기대하지 말아라. 베드로처럼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이상한 일처럼 여기지 않고 당연한 일로 여겨야 한다(벧전 4:12).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내가 잘되고 내가 편안하고 남들 보기에 부러운 삶을 누리려고 하는 게 아니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심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 그것이 내 사명이고 그 사명을 위해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를 했다. 바울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 바로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이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는 것(빌 1:20).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사명) 죽는 것(대가)도 유익하다(빌 1:21).
2. 받을 대가를 각오하라
사명에 사로잡혀 어떤 대가든 치를 각오를 한 바울은 마침내 예루살렘에 이르렀다(17절).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뜨거운 영접을 받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야고보(예수님의 형제)와 장로들(아마도 70명)이 바울의 사역 간증을 듣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셨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8-20절).
성령은 바울이 유대인에게 결박당할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실제로 그럴 소지가 다분했다. 예루살렘 교회(믿는 자)에만 율법에 열심 있는 유대인이 수만 명이었다. 바울은 성내 유대인에게 평판이 매우 좋지 않았는데, 이방인 지역에 전도하며 만난 모든 유대인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아들들에게 할례를 행하지 말고 또 관습을 지키지 말라”라고 가르친다는 헛소문 때문이었다(21절).
예루살렘 장로들은 유대인의 오해를 불식할 기막힌 방안을 제시했다. 마침 나실인 서원을 하고 있던 네 사람이 있었는데, 30일의 서원 기간의 종료를 공적으로 알리는 정결 의례를 7일간 성전에서 행할 때(민 6:13-21)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으면서 함께 결례를 행하고 그들의 비용을 대신 지불하면(암수 어린양, 숫양, 곡식, 붓는 제물), 그걸 지켜보는 유대인들이 바울을 오해했다고 깨닫지 않겠는가?
하지만 인간적으로 생각해서, 솔직히 너무한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억울하다. 바울은 모세를 배반한 적이 없다.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고 강력하게 선포했지만 그렇다고 할례 자체를 금지한 적은 없다.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선포한 관습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고?(25절, 우상 제물,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행) 그 공문을 누가 선교지에 다니며 선포했나? 바울이었다(행 16:4).
예루살렘 교회 대표가 모두 바울이 이방 지역에서 행한 일이 하나님의 사역이었다고 인정하지 않았나?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드리며 영접하지 않았는가? 책잡을 일이 전혀 없다는 거다. 게다가 바울이 왜 마게도냐, 아가야, 아시아의 각 교회 편지하고 동료를 보내 헌금을 모으라고 했는가? 그걸 받아서 자기 파송교회인 안디옥에 들리지도 않고 속히 예루살렘으로 달려왔나? 예루살렘 성도를 구제하고 싶어서가 아닌가?
그런데, 뭐라고? 네 사람의 나실인 정결 예식비를 나보고 내라고? 그러면 내가 하지도 않은 일 때문에 생긴 오해를 풀어줄 수 있다고?
하지만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의 제안을 기쁨으로 수락했다(26절). 선교지에서 이방인에게 이방인 같이 되어 그들을 얻고자 한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유대인과 같이 되어 그들을 얻고자 했다(고전 9:19-22).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사명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하였다. 그 대가를 기쁨으로 감수했다. 그렇게 주를 나타내고 사람을 얻는 복음에 참여하려고 했다(고전 9:23).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 성도를 얻기 위해, 믿지 않는 이웃과 가족을 품기 위해 당신도 억울하고 말도 안 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를 위해 치러야 할 대가인 것이 분명한 상황도 있지만, 그냥 삶에서 주님이 허락하신 환경 자체가, 상황 자체가 나에게 슬픔과 고통과 외로움과 억울함을 터져 나오게 할 수도 있다.
바로 그때도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지금 주님께서 당신에게 허락하신 상황을 복음에 참여하기 위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대가로 여기겠는가? 하나님 영광을 드높이는 도구, 영혼을 얻는 기회로 삼겠는가?
3. 받으실 영광을 기뻐하라
바울의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유대인의 오해가 풀리기는커녕 성전에서 머물며 정결 예식을 치르다 더 큰 오해를 받고 죽을 위기까지 맞게 되었다. 27절, 그 이레가 거의 차매. 무교절-유월절-오순절로 이어지는 대 절기를 지키려 사방에서 유대인이 성전에 모여들었고 그중엔 바울이 좀 전까지 사역했던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있었다(27절, 비그리스도인, 유대교인).
그들은 온 무리를 충동하며 가뜩이나 바울을 오해하던 유대인들에게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크게 외쳤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도우라 이 사람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과 율법과 이 곳(성전)을 비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그 자인데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이 거룩한 곳을 더렵혔다(28절). 거룩한 백성, 거룩한 법, 거룩한 성전을 더렵힌 죄목은 돌로 쳐서 죽여야 할 죄 곧 신성모독이다. 게다가 헬라인(이방인)을 데리고 이방인의 뜰을 넘어 성전 안뜰로 데리고 왔다면 즉시 사형감이었다. 실제로 이방인의 뜰은 함부로 넘지 못하도록 벽으로 막혔는데, 벽에는 ‘외국인은 누구든 막론하고 들어오면 죽음의 고통을 겪으리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고고학적 증거).
사실 유대인의 송사는 모두 거짓이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율법, 성전을 비방한 적이 전혀 없다. 성전 금지구역에 헬라인을 데리고 들어간 적도 없다. 29절에 누가가 밝힌 것처럼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시내에 있었을 뿐인데 그를 데리고 성전까지 갔다고 자기 마음대로 추측한 것이다.
합당한 심문이나 재판도 없이 백성들이 달려들어 바울을 잡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다. 성전 안쪽에서 경비가 문들을 굳게 닫았다. 밖에서 일어날 끔찍한 살인과 우리는 아무 상관 없다는 듯이. 바울은 어쩌면 스데반을 떠올렸을 것이다. 자신이 증인이 되어 돌로 치는 자들의 겉옷을 맡았었는데, 이제 그가 스데반의 자리에 있다. 사람들은 바울을 때리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죽음까지 각오한 바울에게 정말 죽음이 눈앞까지 이르렀다.
바로 그때, 성전 바로 옆 안토니아 요새에서 로마 군대 천부장(연대장)이 백부장들과 병사들을 이끌고(200여명) 성전의 치안을 지키기 위해 급히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마치 음식을 빼앗긴 사나운 개처럼 사람들은 군사들이 바울을 데리고 영내로 완전히 들어갈 때까지 따라오면서 어떻게든 바울을 죽이려 했다. “그를 없이하자”라고 외치면서(36절). 그래서 들고 날라야 했다.
바울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했을 때 상황이 나아졌는가? 그렇지 않다. 더 큰 오해를 받고 목숨까지 잃을 위기가 닥쳤다. 더 평안하고 안락하고 형통한 결과를 얻었나? 그렇지 않다. 더 고통스럽고 두렵고 억울한 결과를 맞았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그리스도께 영광이 된단 말인가? 어떻게 기쁨이 되는가?
흥미롭게도 누가는 복음서의 많은 분량을 그리스도의 마지막 수난을 기록하는데 할애한 것처럼 사도 바울의 수난(예루살렘, 가이사랴)을 기록하는데 상당히 많은 분량을 할애했다(거의 1/4). 왜 그랬을까? 바울의 수난을 통해 그리스도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바울의 고난을 통해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떻게 이방인의 땅끝까지 이르는지 강조하여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만류에도(마 16:21-22) 불구하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신 것처럼(눅 9:51) 바울도 그랬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환난과 결박이 기다린다고 말씀하셨듯 바울도 그랬다(눅 18:32).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아버지의 뜻대로 되어 지리다’라고 기도하신 것처럼 바울도 그랬다(눅 22:42). 예수님이 억울한 누명을 받으신 것처럼 바울도 그랬다(눅 22:63-5). 자기 동족으로부터 ‘없이 하라’는 외침을 받은 예수님처럼 바울도 동족에게 똑같은 협박을 받았다(눅 23:21). 예수님이 맞으신 것처럼 바울도 맞았고, 예수님이 로마 병정에게 끌려간 것처럼 바울도 끌려갔다. 예수님이 산헤드린에서 억울한 판정을 받은 것처럼 바울도 산헤드린에서 억울한 판정을 받는다(23장) 예수님이 이방인의 재판에서 ‘무죄’를 세 번 선고 받은 것처럼(23:14) 바울도 이방인 재판장인 벨릭스, 베스도, 헤롯 아그립바 앞에서 무죄 선고를 세 번 받는다(행 24, 25, 26장).
바울은 살든지 죽든지 아무 일에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길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한다 말했다. 자, 바울을 통해 누가 보이는가? 바울이 당한 고난과 시험 중에 누가 드러나고 있는가? 하나님은 바울이 인내하며 사명을 위해 묵묵히 대가를 치를 때 가장 큰 영광을 받으셨다. 또한 바울이 생각한 방법은 아니었지만 결국 그를 로마까지 인도하여 달려갈 길을 마치게 하셨다.
그리스도를 생각함으로 참을 때 당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상황에서 오히려 당신은 그리스도를 더욱 또렷이 나타낸다. 당신은 점점 더 그리스도를 선명하게 나타내는 그리스도의 형상이 된다. 아무 일에든지 당신 삶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것, 그것이 진정 당신이 바라는 일인가? 그 일을 위해 기쁨으로 무슨 대가든지 치르겠는가?
사명의 대가를 기쁨으로 감당하는 우리는 언제나 어떤 상황에 있든지 이렇게 고백할 수 있다. | 십자가를 질 수 있나 461장 후렴
우리의 심령 주의 것이니 주님의 형상 만드소서
주 인도 따라 살아 갈 동안 사랑과 충성 늘 바치오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