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본문 :  로마서 11장 1-6절

설교자 : 이병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해서 신실하다고 했을 때 어떤 것을 기대할까요? 예를 들어, 결혼을 위해 누군가를 신실한 형제라고 소개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 어떤 모습을 기대하게 될까요? 약속한 시간에 늦지 않게 나오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거짓이 없고 진실하게 말하는 것을 기대할 것입니다. 신실하다면 자신이 말 한대로 행동할 것이고 약속한 것이 있다면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하다는 말은 이렇게 풀어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실하다는 것은 말한 것을 충실히 이행하고, 약속을 지키는데 모든 노력을 다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에 대해서 신실하다고 말하는 것은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그러한 분이십니다. 안심하고 의지할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하신 말씀대로 행하시며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십니다. 사람은 신실하지 못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은 항상 신실하시며 온전하십니다. 완벽하게 신실하십니다. 우리가 이렇게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실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것과는 다른 현실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말씀에 물음표가 생기는 그런 어려움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한 예로, 계속해서 누군가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간절히 기도하는데 아무런 변화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왜?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사실, 지금 우리보다 훨씬 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이 바울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서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동족 이스라엘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간절히 기도합니다. 만약 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저주를 받아서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구원입니다. 바울은 그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이스라엘을 그냥 내버려두십니다.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해서 무관심하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입니다. 율법을 가지고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들보다 특별히 더 잘못한 것이 있을까요? 그래서 생각해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외면하신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사무엘이 그의 노년에 이스라엘을 향해 했던 말씀입니다.

삼상 12:22 여호와께서는 너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는 그의 크신 이름을 위해서라도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실 것이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 것을 기뻐하셨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서라도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94:14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

그런데 지금 현실은 어떠합니까?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신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은 어떻게 된 걸까요?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것은 약속을 저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약속을 저버린 하나님은 신실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실일까요? 당연히 사실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를 두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잘못된 생각을 바로 잡기위해 이렇게 질문합니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바울은 구약의 말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그 단어(LXX)를 그대로 가져와서 질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셨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바울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음을 대적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을 지키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았고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두 가지 증거를 통해서 논증합니다. 이 두 가지 증거를 차례로 살펴보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첫 번째 증거는 자신입니다. 바울 자신이 그 증거입니다.

1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그 사명에 헌신합니다. 누구보다 이방인을 위하고 이방인을 섬기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 사람입니다.

바울은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생각해봐라, 내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냐! 나를 보면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고 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살아있는 증거가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 바울을 봤을 때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며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과거를 알고 있습니다. 바울이 어떻게 믿게 되었습니까? 바울이 처음부터 예수님을 받아들였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열정적으로 복음에 맞서 싸웠고 맹렬하게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다 뒤늦게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하시고 은혜로 부르셨다고 고백합니다(갈1:15)

만약,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바울을 보고 그 모습으로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바울을 버리셨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하나님은 바울이 태어나기도 전에 그를 택하셨고 구별하셨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때가 되었을 때 그를 부르셨고 구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신실하게 그 뜻을 이루십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에 불순종한다 하더라도 철저하게 실패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키시고 하신 약속을 지키십니다.

 

다음으로 두 번째 증거는 성경입니다. 구약 성경이 그 증거입니다. 바울은 성경에서 엘리야의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11:2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11:3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엘리야가 활동했을 때는 영적으로 암흑과도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우상과 바알 선지자를 따랐습니다. 엘리야가 나만 남았다고 고백하는 것은 과장된 말이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열왕기상을 보면 엘리야의 상황을 좀 더 실감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왕상 19: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엘리야가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엘리야는 혼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외롭게 나만 남았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나 혼자 뿐입니다. 엘리야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11:4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

엘리야의 생각은 틀렸습니다. 엘리야 혼자 남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신실한 자들을 남겨두셨습니다. 다만, 엘리야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엘리야가 아무도 없다고 나 혼자라고 생각할 때에도 모든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난 것처럼 보였던 때에도 사실은 하나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자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엘리야가 그랬던 것처럼 이스라엘의 실패를 보면 오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대다수가 예수님을 거절하고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남겨 두신 자들이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있는데 내가 모르는 것입니다. 나 혼자만 남은 것이 아니라 더 있는데 내가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울은 자신과 성경의 증거, 이 두 가지 증거를 가지고 결론을 내립니다.

11:5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남은 자” 성경에서 여기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의 말을 정리하면 이러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나를 봐라. 내가 남은 자가 아니냐! 그리고 성경을 봐라. 엘리야 때 남은 자가 있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고 있지 않느냐! 이와 같이 지금도 남은 자가 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시다.’

나무가 베임을 당하더라도 그루터기는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뿌리가 남아있기에 그루터기에는 다시 새싹이 돋아납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 마치 베임을 당한 나무처럼 보입니다. 그루터기를 보면 주인이 나무를 버린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래서 더 이상 소망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소망이 있는 것은 뿌리가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스러운 상황이라 하더라도 하나님은 남은 자를 두십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약속을 지키십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뜻대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좌절되거나 뜻하신 계획이 틀어지거나 일이 잘못되는 일은 절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그래서 실패가 없습니다. 현재 이스라엘의 상황은 전적으로 이스라엘의 실패이지 하나님의 실패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래서 남은 자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은혜뿐입니다.

11:6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

이스라엘 중에 특별히 훌륭한 사람들이 남은 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자기 노력으로 뭔가를 해서 남은 자가 될 수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누군가를 택하셨고 은혜를 베푸셔서 남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엘리야를 통해 일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일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남은 자를 통해 일하십니다.

물론, 남은 자는 전체와 비교했을 때 적은 수입니다. 그 숫자로 따지면 정말 보잘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사람은 숫자를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사람의 믿음을 보십니다. 하나님께는 숫자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에게,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그 능력을 나타내시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러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따를 때,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붙들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 그 뜻대로 역사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니 주님 안에서 확신을 가지시고 주님이 나에게 맡겨주신 일을 계속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에게 있는 그 믿음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나와 다른 모습으로 산다 하더라도 기죽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하나님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아니라 주님을 봅니다. 우리는 주님을 보고 주님을 의지합니다.

말씀을 적용하면서 오늘 질문을 다시 생각해봅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신가? 이 질문에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그래도’라고 제가 질문한 것은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을 반영한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일들을 만나고 그러한 현실은 우리를 힘들게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하나님은 신실하시다고 고백할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면서 하나님께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으십니까? 진심으로 고백할 수 있는지요? 저의 경우 생각해보면, 솔직하게 실망한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들이 있고 실망할 수 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면서 다시 곰곰이 제 자신을 돌아보고 생각해봅니다. 그리고 조용히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다시 생각했을 때 결국, 하나님에 대해서 실망할만한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눈에 보이는 것들을 주목하면 실망할 만한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온통 실망할 수 있는 것들뿐입니다. 바울의 경우를 생각해보십시오. 바울은 어떠했을까요? 그에게는 실망할 만한 일이 없었을까요? 더 많았을 것입니다. 바울이 그렇게 고생하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합니까? 실망이 되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이 복음을 믿도록 하는 것, 하나님께 어려운 일입니까? 하나님이 하시면 되는데 하나님은 왜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실까요? 게다가 계속 바울을 쫓아다니며 방해하고 대적하는 유대인들과 거짓 교사들, 그들로 인해 낙심되지 않았을까요? 바울이 밤낮 수고함으로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고 그렇게 헌신하여 세워진 교회가 진리를 떠나 거짓을 따르고 바울의 사도됨을 인정하지 않을 때 실망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현대인의 성경)고후 4:8 우리가 모든 일에 괴로움을 당해도 꺾이지 않으며 난처한 일을 당해도 실망하지 않고

바울은 실망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요? 문맥을 보면 그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의 마음을 비추었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해, 바울은 하나님의 영광이신 그리스도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보물을 가졌기 때문에 내가 가진 보물이 너무도 귀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대수롭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가진 것이 너무도 대단하기에 주변에 있는 어떤 것도, 내가 겪는 어떤 일도 내 마음을 흔들 수 없는 것입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알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여러분도 바울이 가졌던 보물을 가지고 계십니까? 여러분도 이 보물의 가치를 알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으로 하면, 우리에게 있는 보물은 “남은 자”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남은 자라는 사실, 이 사실 하나가 다른 모든 것들을 사소하게 만듭니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별일 아닌 것이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셨고 이 땅에 남은 자로 두셨습니다. 사실을 말하면, 우리는 남은 자에 들어갈 수도 없는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음을 허락하셨고 복음을 듣고 믿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게 하셨고 그 놀라운 은혜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이 부족해서 실망할 수 있겠습니까? 무엇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다시 한 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가 되셨습니까?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보물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하기에 우리가 예레미야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3:22 여호와의 크신 사랑 때문에 우리가 소멸되지 않았으니 그의 자비가 영원하구나.

(현대인의 성경)3:23 이것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는 정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예레미야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무궁하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은혜와 사랑은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은혜가 우리에게 주어집니다. 매일매일 새로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정말 신실하시기에 변함없이 우리에게 새로운 은혜를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심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