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하시는 너희 하나님을 보라

본문: 이사야 43장 1 – 7절

설교자: 최종혁

 

‘사랑’만큼 흔한 주제가 없다. 영화든, 음악이든, 책이든, 미술이든, 사람들이 무언가를 만들어낼 때 가장 흔하게 주제로 삼는 것이 ‘사랑’이다. 그런 것들을 보고 들으면서 사람들은 ‘나도 저런 사랑을 하고 싶다. 나도 저런 사랑을 받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흥미롭게도 성경이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 주제도 ‘사랑’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계명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사람)을 사랑하는 것으로 요약하셨고, 제자들에게 주신 새계명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역시 신약에 주어진 모든 명령들을 포함하는 가장 큰 계명이다. 심지어 성경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 말하기도 한다(요일 4:8).

이렇게 보면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 가장 쉬운 하나님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굉장히 제한적이고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사랑 그리고 자기가 원하는 사랑을 하나님이 하실 것이라는 의미로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신다고 이해한다. 그래서 스스로 대단한 사람처럼 여기기도 하고, 반대로 자기가 뭔가를 잘못하면 하나님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사랑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보다는 사랑 받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순종하려고 한다. 쉽게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정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오해)하는 경우도 많다. 하나님의 사랑은 무조건 모든 것을 포용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대로 살면서 “하나님 제 마음 아시죠. 저도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근데 잘 안되네요.”라고 말만 한다. 정말로 회개하고 싶은 마음은 없는 것이다. 거기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나를 바꾸려고 하면 안되고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요즘에는 후자의 경우로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많다. 그게 훨씬 더 좋게 들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보니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란 노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사람도 다 알고 있을 정도다. 내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는데 싫어할 사람이 없다. 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도 죄와 회개, 심판에 대한 메시지는 빠지고 ‘예수님이 널 사랑하셔’만 남아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러니 예수님을 안믿을 이유가 없다. 힘들 때 위로도 해주고 나중에 천국도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롭 벨이라는 목사가 쓴 <사랑이 이긴다>는 책이 큰 이슈가 되었던 적이 있다. 이 책을 쓴 이유에 대해 롭 벨은 예수님의 이야기는 그 무엇보다 먼저 우리 각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이 사랑이신데, 어떻게 소수의 사람만 천국에 가고 나머지는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받게 하실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의 말을 인용하자면 이렇다.

롭 벨, <사랑이 이긴다>, 21. “하나님의 사랑을 생각해보면, 오늘날 예수의 이야기라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이 의심스러워진다. 선택받은 소수의 그리스도인은 천국이라고 불리는 평화롭고 즐거운 장소에서 영원히 살 것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아무런 가망도 없이 지옥에서 고통과 형벌 속에 영원히 살 것이다.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배웠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며 그 신앙을 거절하는 것은 곧 예수를 거절하는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들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매우 해로운 메시지이며, 점염되듯 확산될 수 있는 예수의 사랑과 평화, 용서와 기쁨에 대한 메시지를 가로막는다. 이 세상에 꼭 필요한 그 메시지를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이렇게 질문한다.

롭 벨, <사랑이 이긴다>, 29-30. “지금까지 살았던 수십억의 사람들 중에 선택된 몇 명만이 ‘더 나은 곳으로 가고’ 나머지 사람들은 전부 영원한 고통과 형벌 속에서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그렇게 돼도 하나님은 괜찮단 말인가? 하나님은 영원히 고통당할 수많은 사람들을 수십만 년에 걸쳐서 창조하셨단 말인가? 그렇게 하시고도, 아니 그것을 허용하시고도, 여전히 자신은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실 수 있단 말인가?”

롭 벨이 주장하고 싶은 것은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랑이 아니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결국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이었다. 롭 벨의 진짜 의중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겠지만, 사람들 입장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보다는 이 말이 훨씬 설득력있게 들리는 것은 사실이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듣기 좋다. 혹시 모를 뭔가 때문에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어쨌든 사랑이 이기니 어떻게 살든 장래의 운명을 걱정할 이유는 없어진다.

이 주장이 사실이면 좋겠다. 하지만 롭 벨 목사의 주장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적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자신이 생각하는 사랑을 하나님께 대입해보고 뭔가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런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아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없다. 이 설교 시리즈의 서론에서 말했던 것처럼 그것은 결국 하나님을 하나님의 자리에서 끌어내려 하나님되지 못하게 만드는 반역이기 때문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게 하나님을 바꿔서는 안된다. 그것이 우상숭배다. 내가 아는 공의로 하나님을 정의할 수 없다. 하나님이 공의를 정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곧 공의로운 일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아는 사랑으로 하나님을 정의해서는 안된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곧 사랑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가장 잘 말해주는 말씀 중 하나로서 우리에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준다. 여기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사랑을 말씀해주신다.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는지 주의깊게 들어보라.

43:1–7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하나님께서 여기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특별한’ 사랑이다. 시편에서 많이 볼 수 있었던 ‘헤세드’다. 언약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랑은 이스라엘이 아닌 오늘날의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도 자연스럽게 적용된다. 본문을 통해 이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표현되었으며, 어떤 특징이 있는지, 어떤 목적이 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우리 하나님을 볼 수 있다.

사랑의 시작(1절)

먼저 1절 말씀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볼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작이 사랑의 기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려준다.

43: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야곱(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독점적인 소유권에 대한 표현이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과 나라들에 대해서도 같은 말씀을 할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은 그런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이후의 말씀도 그렇지만 여기 1절은 분명히 ‘너와 나’의 관계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신 분이시지만 여기서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 “너를 지으신 이”로 표현된다. 구원자이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표현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라고 말씀하신다. 마치 부모가 자기 자녀의 이름을 지어 부르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그렇게 하셨다는 말이다. 7절에도 유사한 표현이 나오는데, 거기서는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은 ‘성’ 대신 ‘누구의 아들’로 불려졌었는데, 하나님은 지금 그것을 통해 자기 백성과의 매우 특별한 관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관계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특별히 부르시면서 시작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간절히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아브라함이 그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많은 자손을 약속하셨는데, 그들이 이방 나라에서 종살이를 하며 괴롭힘을 당하다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여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살게 하실 것도 미리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그 말씀 그대로 아브라함의 손자인 야곱의 가족들은 기근으로 인한 식량난으로 인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하나의 민족을 이루게 되는데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하기 위해 모세를 보내시면서 하나님은 이미 이스라엘을 “내 백성”이라고 표현하셨다. 그리고 모든 출애굽 사건의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6:6–7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 내가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내며 그들의 노역에서 너희를 건지며 편 팔과 여러 큰 심판들로써 너희를 속량하여 7너희를 내 백성으로 삼고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낸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

그리고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시내산으로 인도하시고 그곳에서 공식적으로 언약을 맺으시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 선포하셨다. 특히 십계명을 주시기 전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19:4–6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

이사야 43장 1절에서 하나님은 바로 이 사실을 다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상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구속하시고 이름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에 대해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당하게, 마땅하게, 주권적으로 선포하실 수 있으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관계라는 사실이다. 이스라엘 측에서 뭔가를 먼저 한 것이 없다. 심지어 지금 이 말씀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겨서 다시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이방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 있을 자들에게 주어진 말씀이다.

1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신다고 하는데, 여기서 지금은 시간 상으로 현재를 의미한다기 보다는 전환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 전에 무슨 말씀이 있었는지를 봐야한다.

42:18–19 너희 못 듣는 자들아 들으라 너희 맹인들아 밝히 보라 19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하나님은 여기서 이스라엘을 “맹인”이라고 말씀하신다. 영적인 맹인이다. 사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영적인 맹인인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보게 하시려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그런 이스라엘이 맹인이 된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보지 못했고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못했다.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했고 제사장 나라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언약에 신실하지 못한 이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할까?

42:2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맹렬한 진노와 전쟁의 위력을 이스라엘에게 쏟아 부으시매 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징계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그 땅을 잃고 쫓겨나게 된 것은 그들이 바벨론보다 약했기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언약에 신실하지 못했던 백성을 바벨론을 통해 징계하신 것이었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했을 때 이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그들이 멸망한 것은 불순종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지자들을 통해 경고하셨다. 같은 길을 가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하지만 결국 남유다도 북이스라엘의 전철을 따랐고 이사야는 남유다도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하나님께 징계를 받을 것을 예언한 것이다.

그런데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영적으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할 것이다(“그 사방에서 불타오르나 깨닫지 못하며 몸이 타나 마음에 두지 아니하는도다”). 영적으로 완전히 무감각해진 것이다. 그럼 하나님은 어떻게 하셔야할까? 이들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으셔야 할 것 같다. 애초에 제대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역할을 한적도 없는 것 같은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이제(지금)는 그들이 아닌 다른 백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셔야 할 것 같다.

누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은 1절과 같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을 향해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은 애초에 하나님께서 시작하셨고, 그 기초에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겠다는 언약으로 자신을 묶어두셨기 때문이다.

다른 민족도 많은데 왜 하필 이스라엘이냐고 묻는다면, 그에 대해 우리가 고개를 끄덕일만한 답은 없다. 아니, 그보다 먼저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사랑하셨는지에 대한 질문부터 해야한다. 하나님은 범죄한 천사들은 용서하지 않으시고 심판 때까지 지옥에 두신다(벧전 2:4). 범죄한 사람을 하나님께서 동일하게 그렇게 하시지 못할 이유가 있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지 못하실 이유가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셔야할 이유가 없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으신 것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베푸신 일반 은혜인데, 그조차도 천사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특별한 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사와 사람을 비교했을 때 사람에게 나은 무엇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선택하신 것 뿐이다. 그렇게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렇게 하기를 기뻐하셔서 그렇게 하셨다.

7:7–8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8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으로 말미암아, 또는 너희의 조상들에게 하신 맹세를 지키려 하심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권능의 손으로 너희를 인도하여 내시되 너희를 그 종 되었던 집에서 애굽 왕 바로의 손에서 속량하셨나니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이 이렇게 주권적인 선택이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의 어떠함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런 면에서 이스라엘은 걱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들의 상황이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하나님께서 더 이상 그들을 사랑하시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해도, 여전히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며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주권적인 선택으로 시작되었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한 이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이 사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제거한다.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런 사람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구원하신거야”라고 말할 수 없다. 반대로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 “내가 이래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지 않으실거야”라고 말할 수도 없다.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 앞에서 자기를 자랑하거나 반대로 좌절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할만한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신다. 사랑할 사람을 사랑하실 뿐이다.

9:15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교만이다. 이 사랑 앞에서는 나를 내려놓고 무릎꿇고 감사하는 것이 유일한 합당한 반응이다.

사랑의 표현(2절)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 사랑이 어떻게 표현되는지 보자.

43: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말씀을 포로 귀환에 대한 묘사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더 일반적인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물과 불은 삶에 위협이 되는 여러 요소들에 대한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홍해와 요단을 건널 때 물이 그들을 침몰하지 못하게 하셨다. 또한 다니엘의 세 친구들은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졌지만 머리털도 그을리지 않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물론 다니엘과 친구들은 이사야 선지자 이후의 사람들이다.

여튼 하나님은 필요하다면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이루기도 하신다. 그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기도 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항상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이사야도 므낫세 왕 때에 순교를 당했다고 전해진다. 사도들 중에서도 야고보는 바로 순교했지만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구원하셨던 것도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시는지 다 알 수는 없지만,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사실이다. 물이나 불 같은 삶의 위협이 백성들의 삶에서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그 모든 것들이 있을 것이지만 그것들을 통과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것이 궁극적인 해를 가하지 못할 것이라는 말씀이다. ‘궁극적인 해’라는 것은 우리가 싫어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하신 뜻을 이루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물과 불을 통과하지 못해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사야 43장의 이스라엘 백성의 경우 같으면 결국 그렇게 해서 약속의 땅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회복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 어떤 크고 강한 방해와 장애물이 있어도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시편 23편에서 다윗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녀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언급한 것과 같다.

우리 삶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 있느냐가 아니라 누구와 함께 있느냐다. 사실 그에 따라 상황 자체가 달라진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마치 어린 아이를 지켜보는 아버지처럼 자기 백성을 지켜보고 계시며 보호하신다. 수십명의 아이가 뛰어 놀고 있어도 아버지는 자기 아이를 보게 되어 있다. 그래서 언제든 위험이 있을 것 같으면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자기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말이다.

2절의 표현을 보면 마치 물과 불이 의지를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에게 상황은 정말 그렇게 보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서 쫓겨났으니,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하나님도 무능력해지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바로 위의 이사야 42:25를 보면 그 ‘불’은 하나님께서 주신 불이다.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는 불이다. 무엇도 하나님의 계획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사랑하셔서 보호하신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한 회복을 뜻하셨다면 무엇도 막을 수는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회복은 그들이 ‘지금’ 볼 수 있는 현실은 아니었지만, 실현될 현실인 것은 분명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그때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다. 그들이 여전히 맹인처럼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지 못하다면 이런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소유하시고 그들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물이 없고 불이 없어야만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자신들을 보호하여 뜻을 이루신다는 사실은 정말로 큰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물과 불이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이 처한 그 상황이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였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표현되어 왔었기 때문에, 이제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실 것을 믿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 봐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만 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표현되어 왔으니, 지금 이 ‘말’이 우리에게 확신과 위로가 되어야 한다. 지금은 표현되고 있지 않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 상황을 보지 말고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보라. 단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안심하라.

사랑의 특징(3-4절)

이제 오늘 본문에서 가장 어려운 말씀에 도달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어려운 특징에 대한 것이다. 앞에서 내포되어 있던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이 여기서는 대놓고 드러난다. 바로 배타성이다.

43:3–4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강조하시는지 보자. 하나님은 다른 민족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강조하신다. 다른 나라의 구원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구원자임을 강조하신다. 이보다 더 강조할 수 없을만큼 강조하신다. 절대로 오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너희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민족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을 이스라엘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구스와 스바는 애굽의 남부 지역을 의미하니, 여기서 하나님은 출애굽 사건을 회상하고 계시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는 4절의 뒷부분에 더 명확하게 나온다. 다른 민족들을 이스라엘을 위한 희생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이시다. 3절이 말하는 것처럼 애굽에게 하셨던 일을 이후에도 하실 것이라는 의미다.

이 말씀을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없다. 너무나 확실하고 분명하게 그리고 강조해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을 사랑하기 위해서 다른 민족의 생명을 대신 내어줄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포용적인 것이 아니라 배타적이다. 독점적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사랑하는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동일하게 사랑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야곱은 사랑하셨지만 에서는 미워하셨다고 성경이 말할 때 의도한 바로 그 사랑이다. ‘사랑의 하나님이 미워하신다고?’라는 생각이 바로 들겠지만, 성경은 분명히 그렇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너는 내 것이라”고 말하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의도 하신 것은 절대 ‘내가 다른 나라를 사랑하는 것처럼 너희도 사랑한다’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절대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는 말을 이해하면 안됐다.

그리고 그것을 확실히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애굽을 이스라엘을 대신하는 ‘속량물’로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출애굽 사건은 너무나 익숙해서 특별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못된 애굽 사람들의 손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탈출했던 사건으로만 머리속에 그려진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꼭 그렇게 하셨어야했나 하는 생각이 들 수 있다. 영화 등에서는 극적인 효과를 위해 애굽 사람들을 모두 그렇게 악하게 표현하지만, 사실 모든 애굽 사람들이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선량한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더구나 장자의 죽음을 생각해 보면 어린 아이들도 많이 죽었을텐데, 꼭 그래야만 했을까?

당연히 그래야만 했던 것은 아니다. 출애굽의 방법은 충분히 다른 방법도 있었을 것이다. 애굽 사람들을 전부 잠들게 해서 며칠 깨어나지 못하게 하고 그냥 나가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아니 그냥 어느날 자고 일어나서 밖에 나가면 애굽이 아닌 가나안 땅이 보이게 하실 수도 있으셨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방법을 선택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 그래서 애굽을 심판하셨다. 이게 정말 사랑의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 맞나 싶은 일을 하신 것이다.

이런 질문을 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의 위치를 먼저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기준에서 우리 모두에게 마땅한 것은 심판이다. 그것이 공의다. 애굽은 하나님께 무자비하게 심판을 당한 것이 아니라 공의의 심판을 경험했다고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을 경험한 것이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특별한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여전히 이해하기 힘들다. 지식적으로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겠지만, 결정적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다. 하나님은 왜 다 사랑하지 않으시고 선택한 자들만을 사랑하시는지 이해가 안된다. 그렇게 할 수 없어서도 아니다. 혹은 이스라엘에게 정말 특별한 무언가가 있나 싶은데, 그것도 아니다.

4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 대해서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라고 표현하셨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들 자체가 누가 봐도 보배롭고 존귀했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보셨다는 의미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렇게 보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오직 자기 백성을 그렇게 사랑하셨다. 그렇게 다르게 보셨다. 여기서는 다른 백성들의 생명으로 대신하면서까지 사랑한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가 살펴보게 될 이사야 53장을 보면 하나님은 이 사랑을 위해 자기 생명으로 대신하기까지 하신다. 하나님은 그만큼 선택하신 자기 백성을 사랑하신다. 여기에 우리는 어떤 이의도 제기할 수 없다. 이것은 우리가 이해하는냐 이해하지 못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임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의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을 ‘공평하신 분’이라고 말하면서 마치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셔야하는 것처럼 이해하려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앞서 언급했던 롭 벨 목사도 이런 면에서 자신의 이해에 하나님을 맞추어 결국 하나님을 오해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 실수는 아니다. 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특별한 사랑을 부정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공평하지 않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평한 사랑과 공평하지 않은 사랑이 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베푸시는 사랑을 일반 은혜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구원 받는 자들에게 베푸시는 사랑을 특별 은혜라고 한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실 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본받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5: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일반적으로 베푸시는 사랑이다. 호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호의를 오해하면 안된다. 성경은 어디에서도 하나님께서 이런 호의를 베푸시기 때문에 악인과 선인이 똑같이 영생을 누린다고 말하지 않는다. 악인은 영생을 누릴 수 없다. 산상수훈의 끝에서 예수님도 좋은 열매 맺는 좋은 나무와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를 구별하셨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지혜로운 사람과 행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을 구별하셨다. 그리고 이들의 상반되는 운명도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나쁜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진다. 어리석은 사람의 집은 무너져내린다. 사랑의 하나님은 절대 악을 용납하지 않으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랑하는 백성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사랑을 하시는 분이시라면 절대 생각할 수 없는 그 일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런 차별적인 사랑, 공평하지 않은 사랑을 이해해야 한다.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볼 때 우리가 그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도 분명해 진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의 특징은 반율법주의를 제거한다. 하나님의 사랑은 배타적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우리를 있는 그대로 다 받지 않으신다. 우리를 있는 그대로 보배롭고 존귀하다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여 구원하신 자기 백성에 대해서만 그렇게 하신다. 그렇지 않은 자들은 하나님께서 공의로 다스리신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그렇게 사랑하시면 안된다고 할 권리가 우리에게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내가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느냐 없느냐다. 하나님께서 공평하게 비추시는 해, 공평하게 내리시는 비를 보며 거기에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고 바래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합당한 반응이다.

사랑의 목적(5-7절)

끝으로 5-7절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렇게 사람들을 특별히 사랑하시는 목적을 살펴보자.

43:5–7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5-6절은 2절에 대한 재확언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결국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것이다. 그들이 먼 곳, 땅 끝에 있더라도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서 그들을 보호하실 뿐 아니라 그들을 본래 약속하신 땅으로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이 약속은 그들의 자손이 되어도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약속의 성취를 통하여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또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이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에베소서 1장에 바울이 정확히 이 사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1:3–6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4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5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6이는 그가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송할 수 있게 한다. 우리로 가장 행복한 삶을 살게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랑을 바로 볼 때, 우리는 영생을 제대로 누릴 수 있다는 말이다.

도전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같지 않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크고 높고 넓고 깊다. 우리가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누군가는 하나님의 일반적인 사랑을 누리면서 특별한 사랑을 하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께 간곡히 요청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시라.

이 말씀을 제대로 읽었다면 ‘그래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사랑하셔. 그래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지 않고 구원하실거야’라고 결론 내릴 수 없다.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사랑은 자기 백성을 위한 것이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지금 모습 그대로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시니, 넌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회개하고 돌이키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이보다 더 심한(?) 말씀도 하셨다.

18:8–9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장애인이나 다리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9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하나님의 사랑은 제한적이고 배타적이다. 우리에겐 그것이 옳다 그르다 지적할 자격도 없고 그럴 시간도 없다. 내 손이나 발이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들어가는데 방해가 된다면 잘라 버리는 것이 더 낫다. 그만큼 하나님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계신 분이시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아직 하나님께서 나에게 기회를 주고 계시다는 의미다. 기회가 되면 계속되는 이사야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과 용서에 대해서 나누겠지만,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지금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나아오라. 그리고 영생의 기쁨을 누리라.

이미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으로 나아온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오늘 말씀에서 “두려워하지 말라”(1, 5절)는 이 명령에 주목해야 한다. 사랑과 두려움의 관계에 대해 사도 요한은 이렇게 말했다.

요일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요한은 여기서 종말론적인 관점에서 말했겠지만, 사실 우리 일상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말씀이다. 우리가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고 있다면 두려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물 가운데 있든 불 가운데 있든, 그곳에 나를 사랑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로 위로를 얻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셔서 지금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내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을 수 있다. 나를 너무 힘들게 하는 사람 때문에 혹은 어떤 상황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말씀을 보면 그런 순간은 없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을 멈추시는 일은 없다.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는 것만큼 듣기 힘든 말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말을 이렇게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너무 쉽게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불평과 원망의 말이 다 그런 말들이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지 않다고 하나님께 말하고 있는 것들이다. 혹, 지금 내가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기 바란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신다고 나에게 말해주시는지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이 사랑의 말씀을 하나님은 나에게 특별히 하신다.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그 모든 선하신 뜻을 이루시는 과정 중에 있다. 이 일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실 것이고 나에게 가장 좋은 일을 이루실 것이다.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이 우리를 정말로 사랑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