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랑을 버린 교회는 들을지어다
본문 : 요한계시록 2장 1절~7절
설교자 : 최종혁
성도가 100명이 있는 교회라면, 그 안에는 교회에 관한 100개의 의견이 있다고 봐야한다. 멀리서 보면 모르지만 가까이 보면 성도들 각자가 교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생각은 다 다르다. 이유는 간단하다. 우리가 다 다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다. 지난 수요일 말씀에서 들었던 것처럼 각자의 재능과 은사도 다르다. 그런 차이들은 다른 가치관을 만들어 내고 교회에 대해서도 그렇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의도하신 바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계처럼 똑같이 창조하실 수도 있으셨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다양하게 지으셨다. 그리고 그 다양함으로 서로를 섬기며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게 하셨다.
하지만 어쨌든 교회는 어느 한 방향을 향해 가긴 해야 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을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0개의 의견 중 무엇을 따라야 할까? 경영 능력이 뛰어난 사람? 헌금을 많이 하는 사람? 교회 가장 오래 다닌 사람? 좋은 학교에서 공부한 똑똑한 사람? 사실 무슨 수식어를 붙여도 ‘사람’에게서 답이 나오지 않는다.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정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이다. 교회는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 있는 교회든,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주인이시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교회의 주인이 예수님이 아니라 사람들이 되어 있는지 모른다. 많은 교회가 목사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어떤 교회는 헌금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이 주인이다. 어떤 교회는 이상하게도 구도자가 주인이다. 그래서 어떻게든 구도자님들을 모시기 위해 애쓴다. 예배 시간에 트로트를 같이 부르고, 그들이 편안하도록 예배에서 말씀이 차지하는 비중은 줄어들고 음악과 쇼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도 한다. 예배를 드리는 것인지, 대체 누구에게 드리는지를 알 수가 없다.
역사상 그 어느때보다 많은 교회가 있는 시대이지만, 진정 예수님이 주인으로 계신 교회가 그렇게 많아졌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교회들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교회는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계시록 2-3장의 말씀을 통해 하려고 하는 것도 그것이다. 물론 모든 성경의 말씀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고 우리가 귀를 기울여야 하지만, 특히 계시록 2-3장의 말씀은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서 교회로서 우리가 더욱 집중해야할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은 거의 받아쓰기를 하듯이 교회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말씀을 기록하여 당시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그 편지들의 끝에는 동일하게 이런 말씀이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에베소에게 쓴 편지에도 동일하게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7절). 일차적으로 에베소의 상황에 대한 말씀이지만, 다른 교회들에게도 적용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그 교회들은 당시의 일곱 교회 뿐 아니라 아시아의 모든 교회, 그 당시의 모든 교회, 그리고 그 후의 모든 교회까지 포함한다. 우리는 교회들에게 하시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럼, 먼저 에베소에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함께 보자. 처음 편지가 낭독 될 때의 상황이라고 생각하고 한번 들어보라.
계 2:1–7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편지의 서론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1절)
이 편지는 에베소 교회의 인도자를 통해 에베소 교회에게 전달된 편지다. 에베소는 오늘날의 터키 지역에 해당되는 소아시아 서부의 항구 도시로서 가장 중요하고 번성한 도시였다.
- 정치 : 아시아의 수도는 아니었지만, 로마 총독이 에베소에서 대부분 집무함.
- 경제 : 주요 무역로들의 만나는 거점. 경제 활동이 활발하고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듦
- 종교 : 황제 숭배가 만연했고 무엇보다 고대의 불가사의 중 하나로 언급되는 아르테미스(아데미, 다이아나)를 위한 거대한 신전이 있는 곳으로 유명. 종교가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종교는 곧 그들의 문화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신전에 모여 축제를 벌이면서 운동 경기, 연극, 음악 등을 즐겼고, 신전의 창기들과의 관계를 즐겼다.
이런 에베소에 복음을 들고 들어 갔던 사람은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이었다(행 18-19장).
- 기초 :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바울은 고린도에서 이들을 만나 함께 에베소로 갔다가, 이들을 남겨두고 자신은 안디옥으로 돌아갔다(행 18:18-22).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아볼로가 회당에서 말하는 것을 보고, 그를 데려다가 가르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게 도왔다. 이들이 에베소에 처음 복음을 전한 일꾼들이었다.
- 성장 : 3차 전도 여행에서 바울은 에베소 사역에 집중했다. 에베소로 돌아온 바울은 요한의 제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침례를 베푼 후에 약 3년을 에베소에서 사역했다. 계속해서 여러 도시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었던 바울에게는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3차 전도 여행을 끝내면서 바울은 에베소의 장로들과 눈물의 작별을 하기도 했다.
- 그 후로도 디모데(딤전 1:3), 오네시보로(딤후 1:16, 18), 두기고(딤후 4:12)가 에베소에서 섬겼고, 믿을만한 전승에 따르면 사도 요한이 그 후로 오랫동안 에베소의 장로로 일했다. 밧모섬 유배되기 전 요한이 있었던 교회가 바로 에베소였다는 말이다.
여러 면에서 에베소는 중요한 도시였고, 따라서 그곳에 세워진 교회도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 바울과 요한이라는 두 사도가 많은 노력을 이 도시의 교회에 쏟아 부은 것도 그런 면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그 교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이어진다. 그 전에 주님이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시는지 보자.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1절)
이 표현은 1:12-13, 16에서 사용된 표현이다. 다른 일곱 편지의 시작에서도 이렇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에 대한 표현을 다시 언급하며 편지의 내용에 합당한 예수님의 모습을 강조한다.
에베소 교회에 있어 강조된 모습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대한 주권을 가지고 계시며 교회를 관리 감독하신다는 것이다. 이런 면이 여기서는 더 강조되어 있다. 1:16은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고만 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일곱 별을 붙잡고 있다는 표현으로 주권이 더 강조되어 있다. 1:13에는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있다고만 했는데, 여기서는 그 사이를 거닐고 있다고 하여 예수님께서 교회에 관심을 가지고 행동하시는 면이 강조되어 있다.
본문에서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지만, 앞서 살펴본 에베소의 상황, 그리고 앞으로 우리가 보게될 에베소의 모습을 고려해보면, 에베소 교회는 조금은 교만한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우상숭배의 중심지였던 대도시에 있는 교회로서 온갖 핍박을 견디며 교회를 지켜왔고, 사도들의 주목을 받은 중요한 교회로서 진리를 굳건히 지켜온 교회가 에베소였기 때문이다. 주변의 교회들의 리더와도 같은 역할을 자연스럽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들이 아니라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시며, 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생각나게 했을 것이다.
예수님이 교회에 대하여 이렇게 하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큰 위로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큰 두려움이다. 교회의 인도자들은 큰 열정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한계를 경험하면서 괴로워할 때가 많다. 주님께서 맡겨주신 양들을 제대로 먹이고 돌보지 못하고 있다는 자책에 빠진다. 하지만 이렇게 주님께서 교회를 붙들고 돌보고 계심을 보면 그런 무한 책임감에서 조금은 위안을 얻는다. 결국 주님께서 하실 일이고 나는 내 능력과 관계없이 충성하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 전체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여러 어려움과 나약함을 느낄 때 주님께서 붙들고 돌보심을 생각하면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이것은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지금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있는 에베소 교회가 그러했을 것이다. 그들 가운데서 그들이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직접 그들이 하는 일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편지를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수능 성적표를 열어보는 수험생이나 입사 지원했던 회사의 입사 결과를 열어보는 취준생의 마음에 비할 수 없을 것이다. 언젠가 마주할 그리스도인의 심판대에 미리 선 것 같은 마음으로 이어지는 편지의 내용에 귀를 기울였을 것이다.
편지의 본론
2-6절이 편지의 본론이다. 본론에서 예수님은 먼저 “내가 안다”고 말씀하셨다. 이어지는 다른 편지들에서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이 표현을 사용하셨다.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들어서 아시는 것이 아니라 봐서 알고 계셨다. 에베소에 대한 가장 온전하고 확실한 지식은 에베소의 성도들이나 인도자들이 아니라 예수님께 있었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를 안다고 하셨는데, 이는 단순히 어떤 일을 하는지를 아신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인 생활, 영적인 상태를 아신다는 말씀이시다. 주님의 이들의 삶을 두 단어로 요약하셨다. 바로 “수고”와 “인내”다.
먼저 이들은 수고했다. 학자들은 소진될 정도의 수고, 괴로움을 동반한 과도한 노동, 지쳐 쓰러질 정도의 수고라고 이 단어의 뉘앙스를 설명한다. 말 그대로 수고인 것이다. 주님께서 구체적으로 어떤 영역에서의 수고인지 말씀하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이 단어의 의미를 특정할 필요는 없다. 이들은 수고하는 교회였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가르친대로 성도들 각자가 은사를 따라 최선을 다해 섬겼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특별히 언급하신 수고는 이들이 진리를 지키기 위해 수고했다는 점이다.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2절)
교회를 위협하는 거짓 교사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도 경고하셨을 정도로 어느 교회든 그런 위험은 있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던 것처럼 에베소가 우상 숭배의 중심지였다는 것을 고려해 보면, 에베소는 그런 거짓 교사, 거짓 가르침의 위험에 매우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전에 에베소의 장로들을 불러 모으고 특별히 이 부분을 강조했었다.
행 20:29–30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30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후에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에베소에 편지를 쓰면서 여전히 이 부분에 있어 염려를 표현했다. 그는 에베소의 우상숭배하는 자들을 언급하면서 “누구든지 헛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엡 5:6), “그들과 함께하는 자가 되지 말라”(엡 5:7),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둠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엡 5:11)고 반복해서 강한 표현들로 경고했습니다.
에베소서 4:14에서는 영적 성장의 결과 중 하나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 4: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만큼 에베소는 거짓의 공격에 많이 노출되어 있었고, 그래서 바울은 뒤에 에베소에서 사역한 디모데에게도 거짓 교사를 주의해야 할 것을 강조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약 40여년이 흐른 시점이 에베소가 주님께 이 편지를 받았을 때다. 바울이 예상했던 것처럼 에베소에는 그들을 속이고, 거짓으로 유혹하려는 자들이 안팎에서 일어났지만, 교회는 여전히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않았고 또한 분별력있게 거짓을 드러내며 진리를 위한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끝까지 진리를 지키는 것이다. 타협은 쉽다. 그냥 있으면 된다. 좋아하는 것만 하면 된다. 하지만 진리를 지키는 것은 그냥되지 않는다. 싸워야 한다. 하기 싫은 일을 해야 한다. 의자에 편한 자세로 앉아 있으면 당장은 편하지만 결국 허리를 상하게 하는 것처럼, 진리를 지키는 것도 그렇다. 내가 이해하기 쉬운 진리, 내가 원하는 진리, 나를 불편하게 하지 않는 진리만 따르면 결국은 타협하게 되고 진리는 사라진다. 에베소 교회가 오랜시간 동안 진리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불편할지라도 진리를 위해 수고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히 지식하고만 관련된 얘기는 아니다. 진리의 지식을 바탕에 두고 그에 따라 결단하며 살지 않으면 진리는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경제적으로 더 풍요로운 삶, 정치 사회적으로 더 높은 삶, 문화 종교적으로 더 행복한 삶을 약속해줄 것 같은 에베소의 거짓과 속임수를 그들은 따르지 않았다.
에베소서의 말씀을 그들의 문화 속에서 읽는다면, 바울의 말이 얼마나 그들에게 혁명적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여자를 소유물 취급하던 문화 속에서 아내를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했다. 아내는 자기를 물건 취급하는 남편에게까지도 순종해야 했다. 종들은 자신들을 괴롭히는 주인을 기쁜 마음으로 섬겨야 했고, 주인들은 종들을 위협하지 않으면서 자기나 자기의 종이나 동일하게 하늘에 더 높은 주인이 계심을 기억해야 했다. 친구들과 함께 즐기던 성전의 축제를 멀리해야 했다. 할수만 있다면 남을 속여서 이익을 취하고, 할수만 있다면 일하지 않고 살아가고 싶은게 사람들의 마음이지만, 그렇게 하지 말아야 했다.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빛의 자녀가 된 자들은 어둠의 일을 버리고 진리에 따라 살아야 했기 때문이다. 에베소는 그렇게 수고하며 진리를 지켜온 것이다.
당연히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의 인내도 아신다고 말씀하셨다.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사도행전 19장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본격적으로 전도를 시작해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가 기록되어 있다. 우상을 만들며 풍족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사람들을 선동하여 일어나 바울과 동역자들을 대적했었다. 에베소 교회는 그런 상황에서 복음을 선포하면서 타협하지 않고 신앙 생활을 했다.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모두 주관하던 것이 우상 숭배였기에 그들은 무엇을 하든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다. 이유 없이 비방을 당하고, 이해할 수 없는 억압을 받았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원래 그런 생활을 했을 수도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런 모든 것들을 누리고 있다가 믿고 구원을 받으면서 반대의 상황에 처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모든 어려움들은 에베소 교회는 참고 견뎠다. 게을러지지 않았다. 지쳐서 쓰러지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그들이 믿는 주님의 이름으로 했다. 이것은 그들 스스로의 고백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모두 아시는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즉, 에베소 교회는 순수하게 사심없이 예수님을 위하여, 복음의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고 인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주님은 “내가 너희가 그렇게 해온 것을 잘 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편지가 처음 교회에서 읽혀졌을 때,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성도들은 모든 것을 보상 받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동안의 수고와 인내를 주님께서 알아주셨기 때문이다. 두려운 마음에 편지가 읽혀졌지만, 이 말씀을 듣고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르겠다. 심판대 앞에서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는 말씀을 듣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런데, 4절에서는 그들이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단어가 주님의 입에서 나왔다. 바로 “그러나”다. 이것은 절대 긍정적일 수 없는 “그러나”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잘한 점에 대해서 길게 말씀하셨지만, 그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짧지만 단호하고 엄중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4절)
주님의 이 말씀을 들은 에베소의 성도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장로들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래도 주님이 칭찬을 더 많이하시고 책망 받은 것은 이거 하나니까 괜찮아라고 서로 위로할 수 있었을까? 아니다. 주님은 5절 끝에서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랑을 버린 것은 ‘그것 하나’ 정도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그것이 없으면 너희는 더 이상 교회로서의 역할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강력하게 말씀하신 것이다.
이들은 처음 사랑을 버렸다. 사랑을 잊은 것이 아니라 버렸다. 예수님은 그들이 버린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특정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예수님에 대한 사랑인지, 성도에 대한 사랑인지를 밝히지 않으셨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으셨다. 이 계시를 가장 먼저 받은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밝혔듯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성도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둘은 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하나를 버렸다면, 사실 둘 다 버린 것이다. 성도가 아닌 아직 구원받지 못한 영혼에 대한 사랑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 모든 사랑의 가장 근간이 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기에, 예수님은 “너희가 나에 대한 처음 사랑을 버렸다”는 의미로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을 버린 것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났을 것이다.
앞서 에베소서 말씀에서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지키는 것에 대해서 강조한 부분을 살펴봤었다. 그런데, 에베소서 말씀을 보면 또한 사랑에 대해서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은 1-3장에서 하나님께서 어떤 사랑으로 그들을 구원하셨는지를 강조했다. 그러면서 3장 끝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엡 3:17–18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18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리고 교회의 실제 삶에 대한 가르침을 주면서는 이렇게 시작했다.
엡 5:1–2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2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주님의 사랑으로 구원 받은 자는 그 사랑 가운데서 자라가야 하고 그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더욱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을 받은 자녀로서 사랑 가운데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에베소는 이렇게 잘 시작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행하라’는 명령만 그들의 머릿속에 남아있었고 그들의 마음에 ‘사랑 가운데서’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실수라고 하지 않으셨다.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어떻게 교회가 이렇게 되었을까? 어떻게 사랑 없는 수고와 인내를 할 수 있었을까? 스윈돌은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에 그들에게 있던 사랑이 하룻밤사이에 없어진 것은 아니다.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대뜸 “나는 더 이상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예수님에게 싫증이 났고 기독교와도 이제 완전히 끝이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그렇게 한순간에 되는 일이 아니다. 이것은 고생, 답이 없는 의문, 무의미해 보이는 시련, 건강의 상실, 희망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등을 거치면서 세월을 두고 서서히 벌어지는 일이다.”
이런 일을 겪는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버리지는 않는다. 문제는 그런 과정 속에서 계속해서 주님을 바라보지 못할 때 찾아온다. 내가 원하는대로 되지 않을 때 주님께 실망하고 세상 속에서 위로를 찾는 일이 반복되면, 결국 세상을 사랑하면서 그저 자기 할 일만 하는 그런 교회가 되는 것이다.
어느날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이렇게 말한다고 가정해 보자. 중요한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먼저는 “이것 때문에 바뀔 것은 아무 것도 없어”라고 안심을 시킨다. 그리고 “난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라고 말한다. 그래도 내가 해야할 책임은 다 할테니 실제로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한다. 단지 사랑하지 않을 뿐이라고.. 만약 그런 말을 배우자에게 듣는다면 어떨까? 그 사람이 아무리 많이 돈을 벌어다 주고, 기념일을 챙기고, 매일 큰 선물을 사다준다고 해도, 결코 그것이 좋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이 더 미울 것이다. 지금 에베소를 보는 주님의 마음이 딱 그러했을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사랑을 버린 에베소 교회를 여전히 사랑으로 책망하시며 이렇게 그 죄 문제를 해결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5절)
주님은 3단계로 해결책을 제시하셨다.
먼저는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하라는 말은 기억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추억과 다르다. 사전적인 의미는 기억이나 추억이나 별 차이가 없지만, 일반적으로 우리가 추억한다고 하면 좋았던 일이고 할수만 있다면 돌아가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을 추억한다고 한다.
하지만 기억하는 것은 꼭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마치 누가복음 15장의 잃어버린 아들의 비유에서 아버지의 집을 떠난 아들이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아버지 집에서의 좋았던 일을 기억했던 것과 같다. 그는 돼지가 먹는 열매라도 먹으려고 했지만 먹지 못하자, 그의 아버지 집에는 품꾼들조차도 양식이 풍부하다는 것을 기억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기억이다. 그저 좋았던 때를 생각해 보라는게 아니다. 돌아가야 할 곳, 원래 있어야 하는 곳, 그곳을 생각하라는 것이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어떤 사랑을 베푸셔서 그들이 구원을 받았는지 기억해야 한다. 그들이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주님을 예배했던 그 때를 기억해야 한다. 해야해서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 더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말씀에 어떻게든 순종하려고 노력했던 그 때를 기억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주님은 “회개”하라고 하신다. 회개는 죄에서 돌이킨다는 말이니, 주님은 처음 사랑을 버린 것은 죄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죄를 버리고 다시 주님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처음 행위”를 가져야 한다. 처음과 똑같이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말씀이 아니다. 주님을 사랑하여 사랑 가운데 행하던 그 때의 삶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자. 교회는 그동안 많은 수고와 인내를 해왔다. 그것이 자신들의 영적인 성장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은 오히려 처음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기운 빠지는 말이다. 방금 전까지 모든 것을 보상 받은 것 같았던 기쁨은 전부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정반대로 그동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힘들게 믿음을 지켜왔을까 하는 자괴감이 찾아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것이 핵심일 것이다. 그들은 힘들게 믿음을 지켜왔다. 물론 주님의 말씀처럼 믿음 생활은 쉽지 않다. 고난이 있고 핍박이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다면 겪지 않을 일들을 겪는다. 타협하면 피할 수 있는 일들을 굳이 피하지 않고 감당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이 신앙 생활의 전부는 아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처음 주님과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을 때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면서 기뻐했다. 그것을 마땅하게 여겼을 뿐 아니라 오히려 특권으로 여겼다. 주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천국을 소유하는 자에 대해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셨다.
마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그것이 처음 사랑을 가진 자의 행위다. 모든 것을 다 팔지라도 그리스도를 소유한 그 구원의 기쁨이 그를 수고하게 하고 인내하게 하는 것이다. 라헬을 사랑한 야곱이 칠년을 수고했지만 그것을 며칠같이 여겼던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렇게 기꺼이 주님을 위해 산다. 주님은 에베소 교회가 다시 그런 교회로 회복되기를 원하셨다.
6절 말씀은 주님께서 마치 에베소 교회가 볼멘소리를 할 것을 예상하시고 하신 말씀과 같다.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
니골라 당은 성경에 두번 나오는데, 여기와 2:12-15다. 아마 그때 더 자세한 말씀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 교회는 “그래도 우리는 주님께서 미워하시는 니골라 당을 미워하고 그들처럼 살지는 않습니다”라며, 이게 그래도 주님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냐고 반문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지 모른다. 주님은 그것 역시 알고 계셨다.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도 미워하지만,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을 미워하는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 교회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은 잘하는 것이지만, 그것에 주님을 사랑한다는 증거도 아니며, 더욱이 주님에 대한 사랑을 대신할 수는 없다. 그들은 핑계를 멈추고, 처음 사랑을 버린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여야 했다. 그것이 그들이 교회로 남아있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편지의 결론
7절은 이 짧지만 강력한 편지의 결론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7절)
주님은 여기서 이기는 모든 자에게 약속된 영생을 교회에게 상기시키신다. 이 주님의 책망의 말씀을 듣고 뉘우치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들이 참된 믿음을 가진 자들이고 그들이 이기는 자들이다. 만약 그렇게 하지 않고 계속해서 세상을 사랑한다면, 그들은 교회 안에 있지만 참된 교회의 지체가 아닐 것이고 그들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영생은 그런 자들의 것이 아니다.
주님은 여기서 영생이라는 짧은 단어를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고 길게 말씀하셨다. 영생이 그저 죽지 않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며 의도하셨던 그런 기쁨과 평안, 만족의 삶이다. 하나님 안에서 그렇게 풍성히 누리는 삶이 영생이다. 그리고 그 영생은 이 땅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우리가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 영생을 맛보며 살아갈 수 있다.
도전
이 편지의 시작에서 예수님은 자신을 교회에 대한 권위를 가진 분으로서 그 사이를 거닐고 계신 분으로 말씀하셨다. 계시록 당시의 일곱 교회에만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니다. 지금도 주님은 교회에 대하여 그렇게 하신다. 주님께서 우리 교회도 그렇게 바라보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은 당시 에베소 교회의 실제 상황이었다. 우리 교회의 실제 상황이었다면 어떨까? 주님께서 보내신 이 편지를 교회 앞에서 읽는다면, 당신의 마음은 어떠하겠는가? 어쩌면 부끄러움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감격의 눈물이 아니라 후회의 눈물을 쏟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이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다. 5절의 “그러므로”가 중요하다.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기억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기를 주님은 원하신다.
스스로 점검해 보라.
- 이렇게 공적인 자리가 아닌 곳에서, 스스로 나는 얼마나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기도하고 있는가? 따로 시간을 내서 그렇게 하고 있는가? 삶의 순간 순간 그렇게 주님과 동행하려고 하고 있는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어도 마찬가지다. 말씀 준비하려고 말씀을 보고 하는 것들이 분명 신앙에 도움이 되겠지만, 그렇게만 말씀을 본다면 문제가 있다. 기도도 그렇다. 개인적으로 주님을 더 알기 원하고 더 가까이하기 원하는지 점검해 보라.
- 성도에 대한 사랑은 어떤가? 영혼에 대한 사랑은 어떤가? 다른 성도의 삶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기억하며 기도하고 있는지. 내 주위에 있는 영혼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한지.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전도를 하고, 성도들의 사생활을 캐물어야 사랑이 있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일 수도 있다. 다만, 내가 그 영혼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기계적으로, 습관적으로, 의무감에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면 지금이 그것을 바로 잡을 때다. 주님을 위해 하고 있는 일로 인해 만족하고 있었다면 지금이 그것을 바로 잡을 때다.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게 했던 말처럼, 우리 모두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서, 사랑을 받는 자녀로,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주님을 사랑하고, 사랑 가운데 행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