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은혜가 만드는 하모니
본문: 로마서 12장 3-8절
설교자: 이병권

가나안 성도는 과거에 교회를 출석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지금은 더 이상 교회를 나가지 않는 성도를 말합니다. 2013년 글로벌리서치를 통해 가나안 성도를 대상으로 조사한 통계자료에 의하면 가나안 성도가 과거에 교회를 다닌 년 수가 평균 14년이라고 합니다. 통계자료니까 실제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생각해보면 가나안 성도의 다수는 교회를 잠깐 다닌 사람이 아니라 오랜 시간 교회를 출석했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교회를 나가지 않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가나안 성도가 되게 했을까요? 저마다 사연이 있겠지만, ‘가나안 성도 신앙생활 탐구’라는 연구 세미나에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31.2%가 ‘교회출석 욕구 부재’라고 응답했습니다.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많은 18.8%가 ‘개인적인 이유’로 응답했고, 세 번째로 많은 13.9%가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라고 응답했습니다.

이 정도 이유면 교회에 출석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요? 교회에 가야겠다는 마음이 생기지 않으면, 교회에 정해진 시간이나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신앙생활하고 싶으면 교회를 떠나 혼자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해도 되는 걸까요? 교회에서 하라는 것 하지 않아도 되고 다른 사람 눈치 볼 필요도 없고 내가 시간될 때 인터넷으로 원하는 설교를 들으면 되고 얼마나 편합니까?

우리는 왜 교회에 출석해야 되는 걸까요? 코로나의 상황에서도 왜 교회가 계속 모여야 하고 함께 해야 되는 걸까요? 우리가 가나안 성도가 되면 안 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여러 이유를 말할 수 있겠지만 그중에서 먼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 말씀이 함께 하라고 모이기를 힘쓰라고 명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라 함께 주님을 예배하고 함께 주님을 따르며 함께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믿는 자의 삶에 있어서 근본적인 것입니다.

물론, 복음의 은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과 나의 관계가 새롭게 되고 내가 구원의 은혜를 누리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은혜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구원의 감격과 복음의 은혜는 주님을 향한 감사와 사랑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어지고 자연스럽게 교회적인 차원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생각해보십시오. 그 은혜를 받은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실까요? 나 혼자만 은혜 받고 나 혼자만 기뻐하고 나 혼자만 위하는 신앙은 건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각자가 개인의 삶을 세울 뿐만 아니라 서로 돌아보아 서로를 세우고 그리하여 함께 교회를 세워가길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함께 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예배에 대해서 생각해보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받은 자로서 산 제물을 드립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삶의 예배를 드립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드리는 예배입니다. 그리고 삶의 예배는 교회적인 차원으로 연결됩니다. 분리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까요? 우리 각자가 악기를 가져와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함께 연주를 한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각자가 원하는 악기로 각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연주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불협화음을 내는 시끄러운 소음이 될 것입니다. 각자가 자기 소리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의 소리에 무관심하다면 함께 연주하는 소리는 도저히 들을 수 없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그냥 소음일 뿐이고 각자가 열심을 내면 낼수록 더 큰 소음이 될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연주를 해야 될까요? 부르심을 받은 공동체로서 우리가 교회로 모이고 교회로 함께 할 때 어떻게 해야 교회가 함께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을까요? 다시 말하면,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를 세워주고 함께 건강한 교회를 세우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오늘 이 주제를 “하모니”라는 단어로 생각해보려고 합니다. 하모니는 조화, 일치라는 뜻인데 음악에서 주로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둘 이상의 음이 규칙에 따라 조화를 이루는 현상을 하모니라고 합니다. 하모니의 핵심은 단지 여러 가지를 섞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어우러져서 마치 하나가 된 것처럼 자연스러운 것, 그것이 하모니입니다.

교회가 함께 세워져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이러한 하모니입니다.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를 그냥 썩어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가 각자의 고유한 특징을 가지면서도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모니는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하나로 통일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뷔페식당에 가서 여러 가지 음식을 그냥 한 접시에 담는 것이 아닙니다. 비빔밥처럼 다양한 재료가 하나로 어우러져서 맛을 내는 것입니다. 여러 악기가 모여서 파트에 따라 아름다운 하나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무엇이 하모니를 가능하게 합니까? 어떻게 교회가 하모니를 이룰 수 있을까요? 설교의 제목이 답을 말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가능하게 합니다. 은혜는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교회가 하모니를 이루게 합니다. 하모니는 은혜의 결과이고 또한 하모니는 은혜를 경험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그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은혜가 어떻게 하모니를 이루게 하는지, 세 가지로 생각해보겠습니다.

 

은혜가 만드는 하모니, 첫째는 겸손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고 겸손이 하모니를 이룹니다.

12: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말합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사도의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 말씀에서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말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받은 사도됨의 은혜를 근거로 각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울의 외적인 조건을 두고 따지면 바울에게는 내세울 수 있는 것들이 많았습니다. 그의 혈통, 그의 신분이나 학벌, 그의 열심이나 업적, 그가 가진 지식과 능력, 그 탁월한 것들은 충분히 자랑거리가 됩니다. 만약 바울에게 있는 특별함을 근거로 그가 사도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보다 뭔가 잘 한 것이 있어서 그가 사도로 뽑힌 거라면 바울은 자부심을 가지고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나의 열심으로 사도가 되었기에 충분히 자랑할 자격이 있어’

하지만 바울은 자신에게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갈6:14). 오히려 자신의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고후12:9). 바울의 고백은 이러합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고전15:10)

교회를 핍박하던 바울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복음을 전하고 지금 로마 교회의 각 사람에게 하나님의 권위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은혜로 된 일입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은 일입니다. 은혜임을 알기에 바울은 자신을 바르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교만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은혜를 잘 알기에 각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것입니다.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라” 우리는 보통, 자신을 좋게 평가하고 더 높은 점수를 줍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높은 마음을 품을 때가 많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켜야 하는 생각의 선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선을 넘어서 자신을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그 반대편에 있어서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가 선을 지켜야 하는 것은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않는 것과 더불어 그 이하의 생각도 품지 않는 것입니다. 한쪽을 지나치게 강조했을 때 오히려 반대편으로 치우칠 수 있는 것입니다. 교만하지 않는 것은 자신을 비하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을 업신여기는 것도 잘못입니다.

바울은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명령합니다. 여기 지혜롭게 라는 말은 술 취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데 온전한 정신으로 정확하게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선을 바르게 두고 그 이상으로 넘지도 말고 그 이하로 내려가지도 말고 하나님이 허락하신 믿음의 분량대로 자신을 바르게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대평가는 물론, 과소평가도 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분량대로 은혜에 근거하여 자신을 바라볼 때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앎과 동시에 주님 안에 있는 나의 가치를 바르게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지금 나에게 있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 나의 위치, 주님 안에서의 나의 신분, 주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알기에 그 은혜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그러니 은혜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의 토양에서는 교만이 자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우리 마음 밭을 은혜로 일구어야 합니다. 교만이 싹트지 않도록 우리는 부지런히 은혜로 밭을 일구고 은혜로 비옥한 땅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땅에는 교만이 뿌리내리지 못하고 겸손이 열매 맺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로 말미암은 겸손이 교회가 함께 할 때 하모니를 이루게 할 것입니다.

 

은혜가 만드는 하모니, 둘째는 지체입니다. 은혜가 우리를 한 몸 되게 했고 지체로서 하모니를 이루게 합니다.

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바울은 교회를 설명할 때 몸의 비유를 자주 사용합니다. 우리가 몸의 비유로 교회를 생각할 때 교회가 함께 해야 하는 이유와 그 중요성을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몸을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사람의 몸은 여러 지체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얼굴만 생각해도 눈, 코, 입, 귀 여러 지체가 있고 각각의 기능을 합니다. 각 지체들은 몸에 붙어있고 각자의 역할을 하는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머리가 명령하는 대로 모든 지체가 한 뜻과 한 목적으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신비한 것은 어느 것 하나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지체가 자신이 아니라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모든 지체가 서로에게 필요하고 함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한 몸이고 우리가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사실은 교회를 바라보는 우리의 근본적인 생각을 바꿉니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또한 나를 위한 것입니다. 지체들이 서로를 위해 존재하기에 결국 함께 유익을 누리고 함께 세워져 가는 것입니다.

갈수록 개인주의가 자연스러운 삶의 방식이 되고 있는 시대의 흐름에서 우리는 내가 어떤 존재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는 내가 왜 이 땅에 살고 있는지, 나의 존재의 이유와 목적을 알게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세상이 당신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당신을 보며, 당신의 신분을 밝히십시오. 당신의 정체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누구인지 정체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체는 지체입니다. 나는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입니다. 여러분 한 명 한 명이 주님 안에서 교회의 지체로서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지체는 서로 다릅니다. 다양합니다.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닙니다. 많은 지체가 한 몸을 이루지만 서로의 다름 속에서 한 몸을 이루는 하모니입니다. 우리 각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은 자가 되어서 그 다름 속에서도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아름답고 신비한 은혜로운 하모니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각자가 다르지만, 한 몸을 이루는 지체라는 것을 기억할 때 서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할 수 있고 귀하게 여기고 존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로서 함께 하는 일의 중요함을 깨닫고 지체로서 각자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하모니를 이룰 수 있습니다.

 

은혜가 만드는 하모니, 셋째는 은사입니다. 은혜로 우리가 은사를 받았고 은사를 통해 하모니를 이룹니다.

12: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12:7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12:8 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했을 때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움에 감탄하며 그 은혜로 마음이 뜨거워졌을 때 어떤 고백을 하게 되십니까? 하나님, Thank you! 하고 끝일까요? 은혜에 감격하면 우리는 주님을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주님을 위해 살고 싶다’, ‘주님을 섬기고 싶다’ 고백하게 됩니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은혜를 받은 우리가 은혜를 따라 살 수 있도록 은혜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 있도록, 또 다른 은혜인 은사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은사는 하나님이 믿는 자에게 교회를 섬기도록 주신 영적인 능력입니다.

본문을 보면 7개의 은사가 나오는데, 이 목록은 모든 은사의 종류를 다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목록의 강조점은 각 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은혜대로 받은 은사를 사용해야 한다는데 있습니다.

존 맥아더는 기록된 은사의 종류를 기본 물감을 둔 팔레트에 비유합니다. 팔레트에는 그림을 그릴 때 필요한 모든 색깔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에 따라 물감을 섞어서 알맞은 색깔을 조합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정말 다양한 은사를 은혜로 허락하셔서 그 뜻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은사는 구원받은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채로운 색깔을 가지는 것입니다. 같은 은사를 가졌다고 해도 그 분량과 성격에 따라 다르게 표현됩니다. 무지개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곱 빛깔 무지개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더 많은 색깔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라와 문화에 따라 무지개 색깔을 다르게 이해하는데, 무지개의 색깔을 엄밀하게 따지면 207개의 색으로 구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실제와 그 실제를 표현함에 있어서는 차이가 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은사가 그러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다양한 은사를 우리의 이해범위 안에서 구분하려면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은사의 사용하는 것입니다.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은사를 주신 목적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4:12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방법은 교회를 위해 은사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 방법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일로, 어떤 사람은 위로하는 일로, 어떤 사람은 섬김으로 각각 다르게 다양하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목적은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은혜로 은사를 주셨기 때문에 예외는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모든 믿는 자에게 은사를 주셨다는 사실은 구원 받은 자는 혼자가 아니라 교회로서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증거합니다. 그래서 은혜와 은사와 교회는 서로 땔 수 없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각 사람에게 합당한 은사를 주십니다. 어떤 경우에는 타고난 재능에 은사가 더해져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예상하지 못한 은사가 생겨서 능력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어떤 경우든지 교회는 서로의 은사를 귀하게 여기고 주어진 은사를 충성스럽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사로 교회를 섬기는 것은 단순히 취미활동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부르심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은혜에 감사함으로 어떤 은사를 가졌든지 그 은사를 통해 은혜를 드러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은혜로 주신 은사에 대한 우리의 마땅한 반응은 충성입니다.

여러분은 내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함을 어떻게 표현하고 계십니까? 감사함은 개인적인 삶을 통해, 뿐만 아니라 교회를 통해 드러나야 합니다. 내게 주신 은혜로 교회를 섬김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세워가야 합니다. 올해 교회의 목표가 회복하는 2022입니다. 실천사항으로 섬김의 기쁨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섬길 때 교회를 세우고 섬김의 기쁨을 회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받은 은사대로 교회를 섬길 때 계속해서 주님 안에서 하모니를 이루어 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함께 하는 것에 대한 의문이 제시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는 교회가 모이는 것에 대한 공격이 있고 내부적으로는 모이기보다 개인적인 삶이 우선되기도 하고 갈수록 모이는 것이 어려워지는 상황을 직면하고 있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우리는 왜 교회가 모여야 하는지, 교회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로 함께 하는 것은 하나님은 우리를 택하셔서 그 풍성한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교회의 지체가 되었고 우리가 은혜로 은사를 받았고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은혜이기에 우리는 겸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기억하십시오. 은혜를 받은 우리가 함께 할 때 다양한 소리가 나겠지만 다양한 생각이 있겠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모든 것을 조화롭게 하시고 아름답게 빚어갈 것입니다. 은혜로운 하모니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하게 하실 것입니다. 우리의 할 일은 하나님의 은혜의 놀라움에 압도되어서 그 은혜의 풍성함을 마음에 담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은혜가 계속해서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