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사랑으로 승리하여 회복의 기쁨을 누리라
본문: 고린도후서 2장 1-11절
설교자: 최종혁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용서가 어렵다’는 것은 성경의 다른 명령에 대해서 ‘어렵다’고 말하는 것과 조금은 그 결이 다르다. 성경의 대부분의 명령들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맞다는 것을 인정하는데 실제로 그렇게 하기 ‘어렵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용서하라’는 명령에 대해서는 종종 명령 자체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명령에 따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용서하는게 정말 맞느냐는 식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회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그렇게 반응하는 경우가 적다. 일단 잘못이 분명하면 회개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은 한다. (실제로 회개를 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긴 하다.)
C. 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실제로 용서해야하기 전까지는 용서가 멋진 일이라고 말한다”고 했다. 그리고, 정작 용서가 필요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용서라는 말만 꺼내도 화가 나서 으르렁 거리는데, 용서가 너무나 지키기 힘든 고차원적인 미덕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너무나 하기 싫은 창피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그는 용서가 기독교의 덕목 가운데 가장 인기 없는 덕목이라고 생각한다고도 했다.
생각해 보면 정말 이상하다. 왜 용서의 명령에 대한 구원받은 사람들의 태도가 이럴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용서’다.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을 하나님께서 용서하신 이야기가 바로 구속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이라는 표현 뿐 아니라 ‘죄 사함’(죄 용서)이라는 표현도 자주 사용한다.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단순히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가게 된 것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임을 고려해보면, 구원 받은 사람들만큼 용서의 가치와 중요성을 아는 사람들도 없다. 그래서 용서 받은 우리는 마땅히 용서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용서하라고 하시고 또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용서가 어렵다. 용서를 받은 것은 좋지만 용서를 하는 것은 싫은 것이다.
이상하지만 이것이 우리의 현실이고,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이곳이 가장 치열한 우리의 영적 전쟁터가 되어야 할 것이다. 삶의 다른 영역에서는 승리를 경험하는 성도들이 용서의 영역에 있어서는 패배를 더 많이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성경의 명령들에 대해서는 순종적인 성도들이 유독 용서의 명령에 대해서는 여전히 굳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마치 최후의 보루처럼 그 마음을 지키고 있다. 다른 것은 다 양보해도 이것만큼은 안된다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용서에 대한 말씀은 죄책감이 생기니 읽지도 않으려 하기도 하고, 이런 용서에 대한 설교에는 귀를 닫는다. 계속해서 용서하지 않을 이유를 마음 속으로 떠올린다. ‘용서해야죠’라고 말은 하지만 솔직한 심정으로는 용서하고 싶지 않다. 조금 불편하긴해도 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니, 회복도 별로 원하지 않는다. 싸우려고 하지도 않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항상 용서와 회복을 경험하고 있다. 죄인인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있어 용서와 회복은 언제나 있을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없으면 함께 사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죄로 인해 깨진 관계의 회복은 용서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용서의 온전한 모습은 아니다.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는 식으로만 될 때가 많다. 회개도 정말로 죄에서 돌이키고 책임을 지기보다, 그저 벌어진 일에 대한 유감 표명 정도일 때가 많다. 하지만 어쨌든 그런 것이라도 있기에 우리는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렇기 때문에 교회도 진정한 용서가 아니어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회개와 용서가 불완전하면 회복도 그렇다. 그래서 그냥 덮어두고 참았던 문제가 어느 순간 폭발하고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되어버리는 일들이 종종있다. 당장에 큰 문제만 없으면 괜찮은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런 상황을 가장 바라는 것은 당연히 사탄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않게 만들면 사탄은 여러모로 얻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그들을 통해 용서하시는 하나님이 선포되지 않는다. 교회는 갈등과 반목이 가득하여 세상과 전혀 다른 부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내부의 문제만으로 벅찬 교회는 전도에 힘쓰지 않을 것이고 설령 전도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힘도 없게 된다.
그러기에 사탄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힘들면 하지 말라고 우리를 유혹하는 것이다. 마치 우리를 생각해서 해주는 말처럼, 용서하지 말라고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이런 사탄의 계략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은가. 방금 했던 얘기들이 새롭게 들리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이런 사탄의 계략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알면서 우리는 속고 있다. 마치 그것이 나와는 상관 없다는 듯이, 나는 용서할 수 없다고 용서하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 전쟁터에서 항복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이 싸움에서 우리는 절대 그렇게 패배를 선언해서는 안된다. 처음에 말한 것처럼 우리가 받은 용서가 구원의 핵심이고, 우리가 용서하는 것이 바로 그 구원을 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용서 받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아무 의미 없는 것이라는 메세지로만 세상에 전달될 것이다.
그래서 용서의 문제는 어렵고 불편하지만 그냥 둘 수는 없는 문제다. 우리는 이 문제를 직면해야 하고 승리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오늘은 고린도후서 2:1-11의 말씀을 중심으로 바울이 어떻게 이 전쟁에서 승리했으며 그 결과로 어떻게 회복의 기쁨을 누렸는지를 살펴보자. 그래서 우리도 그렇게 승리할 수 있으며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음을 알고 다시 이 전쟁터에서 치열하게 싸울 수 있기를 바란다.
고후 2:1–1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2내가 너희를 근심하게 한다면 내가 근심하게 한 자 밖에 나를 기쁘게 할 자가 누구냐 3내가 이같이 쓴 것은 내가 갈 때에 마땅히 나를 기쁘게 할 자로부터 도리어 근심을 얻을까 염려함이요 또 너희 모두에 대한 나의 기쁨이 너희 모두의 기쁨인 줄 확신함이로라 4내가 마음에 큰 눌림과 걱정이 있어 많은 눈물로 너희에게 썼노니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 5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7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8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9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10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11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이 본문은 일차적으로 교회의 징계 후 회복에 대한 말씀이다. 5절을 보면 “근심하게 한 자”가 언급된다. 바울 뿐 아니라 고린도 교회를 근심하게 한 자이고 6절을 보면 이 사람은 벌(징계)을 받았다. 그리고 7절을 보면 바울은 교회가 이제는 이 사람을 용서하고 위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를 받아주고 회복해야 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길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 승리의 길로 가는 길에 필요한 것은 바로 사랑임을 우리는 이 말씀에서 볼 수 있다.
죄와 죄의 대면(1-4절)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린도후서의 배경을 좀 알아야 한다. 가끔 드라마를 보면 전화 통화를 하면서 상대방이 하는 말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있다. “뭐 그 사람이 너한테 그렇게 하라고 했다고? 그래서? 그래서 너는 그렇게 했다는 말이지?” 이런 식으로 해서 보는 사람들이 대화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런 드라마가 아니라 실제로 있었던 일이 기록된 것이다. 일상 생활에서 대화를 할 때는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굳이 서로 다 아는 얘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여기 말씀도 그렇다. 우리는 바울이 보낸 편지를 통해 바울 입장에서 기록된 내용만 알 수 있다. 그래서 좀 답답하고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상황을 더 정확히 안다면 좀 더 바울의 말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것까지는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하셔서 우리에게 드러내지 않으셨다. 따라서 이 상황을 과도하게 추측하고 또 추측 위에 추측을 더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한 상황을 재구성해보는 것은 바울의 이 말을 이해하는데 모음이 된다.
우리는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가지고 있지만, 이 두 편지가 바울이 고린도에 보낸 유일한 편지는 아니다. 고린도전서를 읽어보면 이미 “내가 너희에게 쓴 편지”라는 표현이 나온다(고전 5:9). 즉, 고린도전서 전에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게 쓴 편지가 있다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이 편지에 대해서 답장을 보냈고, 고린도전서는 바로 이 편지에 대한 답장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는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라는 표현도 등장한다(고전 7:1).
하지만 고린도전서를 통해 고린도 교회의 문제가 얼마나 해결되었는지는 다 알 수 없다. 해결된 문제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문제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떤 문제들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지만 언제든 다시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불거진 문제는 고린도 교회를 개척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그들의 문제를 바로 잡아주었던 바울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들 안으로 거짓 사도들이 들어왔다(고후 11:13-15). 그리고 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바울을 공격하면 그가 전했던 복음을 비롯한 모든 가르침과 진리를 무너뜨리고 그들이 원하는대로 자신들의 배를 불릴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들에게 동조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그들도 바울에 대한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바울이 편지(글)는 잘쓰는데 실제로 보면 약하고 말도 시원치 않다고 공격했다(고후 10:10). 그리고 줏대없이 계획도 마음대로 바꾸는 사람이어서 믿을만하지 못하다고도 공격했다(고후 1:17). 궁극적으로 이런 것들을 통해서 바울이 진짜 사도는 아니라는 식으로 그를 무너뜨리려 했다.
이런 류의 공격들이 그렇지만 처음에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냥 몇 사람이 가지고 있는 생각인가보다 싶고 어차피 거짓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가라앉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어쩌면 바울도 그랬을 것이다. 특히나 당시에 바울은 에베소에서의 사역으로 바쁜 때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었고 바울은 짧게라도 고린도 교회를 찾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근심이 가득한 고통스러운 방문이었지만 문제를 다 해결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그때 아마도 바울은 공개적으로 비난을 당하기도 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바울은 어쩔 수 없이 상한 마음과 슬픔 가운데 고린도를 떠날 수 밖에 없었다(고후 12:20-21). 그가 그곳에 있는 것이 교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2:1-2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이 바로 이 고통스러웠던 짧은 방문이다. 그와 같은 방문을 다시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는 것이다. 아직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마땅히 다시 방문을 해야하는 상황이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바울은 1:23절에서 “너희를 아끼”기 위해서 다시 고린도로 가지 않았다고 밝힌다. 자신의 방문으로 문제가 더욱 커지고 교회가 근심하게 되는 것을 그는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를 그냥 둘 수는 없었다. 단지 자신이 공격을 당하고 치욕을 당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렇게 할 수 있는 상황이면 바울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는 차라리 형제를 위하여 속는 것이 낫고 형제가 고기로 인해서 실족한다면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오해받는 것은 바울에게 큰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고린도에서 진행되는 있는 일은 단지 바울 자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전한 복음과 진리에 대한 문제였다. 지금 공격을 당하고 있는 것은 바울 같아 보였지만 사실은 복음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또 다른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다. 그것이 2:4에서 말하는 “많은 눈물의 편지”다.
바울은 “큰 눌림과 걱정” 가운데 이 편지를 썼다고 말한다. 그 편지가 분명히 고린도 교회를 근심하게 만들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7:8을 보면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다”고 말하기까지 한다. 그만큼 편지를 쓰는 모든 순간부터 보낸 순간까지 바울은 고민하고 고심했던 것이다. 그 자신이 먼저 큰 슬픔과 고통 가운데 이 편지를 눈물로 썼던 것이다.
목적은 자신을 비방한 사람들에게 보복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를 대신해서 그 사람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라고 편지를 썼던 것이 아니었다. 바울은 그들을 향한 넘치는 사랑으로 이 편지를 썼다. 그를 비방하던 자들에 대해서, 특히 5절에서 말하는 “근심하게 하는 자”를 징계할 것을 분명하게 말했을 것이지만, 그 목적은 그들로 회개하고 돌이켜 다시 회복하기 위함이었다.
이 편지를 바울은 아마도 디도를 통해 고린도로 보냈던 것 같다. 아니면 다른 사람을 통해 먼저 보내고 후에 고린도 교회가 이 편지에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를 알기 위해 디도를 급히 보냈을 것이다. 어쨌든 바울은 디도가 가지고 올 결과를 기다렸다. 그 결과를 기다리는 것 자체도 바울에게는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고후 2:12–13 내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하여 드로아에 이르매 주 안에서 문이 내게 열렸으되 13내가 내 형제 디도를 만나지 못하므로 내 심령이 편하지 못하여 그들을 작별하고 마게도냐로 갔노라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마음이 편하지 못했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너무 심하게 말했나 싶은 고민이 계속 있었을 것이다. 교회에게 너무 고통스러운 일을 하라고 말한 것은 아닐까 싶었을 것이다. 편지를 받고도 지난번 방문 때처럼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어떻게하지 하는 불안한 마음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여튼, 바울의 마음은 복잡했을 것이다. 전도도 하지 못할만큼 그는 고통스러운 상태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디도를 만나게 되었고 디도는 고린도 교회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해주었다. 그 상황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고후 7:6–11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8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바울은 기뻐했다. 그의 근심이 컸던만큼 그의 기쁨도 컸을 것이다. 그는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기록한 것이 고린도후서다.
여기까지의 내용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서 봐야할 것이 두 가지 있다.
첫째로,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이는 죄도 교회를 무너뜨릴 정도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고린도 교회 안에 있었던 (우리 기준에서 볼 때) 크고 끔찍한 죄들에 비해서, 바울에 대한 비난이라는 죄는 사소해 보인다. 회사에서 상사들 얘기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 얘기하는 것처럼, 교회에서는 교회의 리더들에 대한 얘기를 쉽게 할 수도 있다. 어쩌면 바울에 대한 비난도 그렇게 별 것 아닌 것처럼 성도들 사이에서 오고 갔을 수 있다.
하지만 결국 그 죄가 가져온 결과는 교회에 치명적이었다. 거짓 교사들이 들어왔을 때 그들의 사상을 퍼뜨릴 수 있는 좋은 토양이 되었다. 결국 그로 인해서 교회가 분열되고 싸우게 되었다. 서로 위로를 얻고 서로에게서 즐거움을 얻어야할 성도들이 오히려 서로로 인해서 근심하게 되었다. 바울은 복음 전하는 것을 자신의 사명으로 여겼고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다”라고 까지 말했던 사람다(고전 9:16). 그런 바울이 복음의 문이 열렸는데도 복음을 전할 수 없었다. 이 모두가 어쩌면 별 것 아닌 것 같아 보였던 비방의 죄로 인해서 벌어진 일이다.
우리는 죄의 힘을 과소평가할 때가 있다. 처음도 아니고 여러번 반복했는데도 큰 문제가 없으면 앞으로 계속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죄는 불과 같아서 어느 순간 조건만 맞으면 걷잡을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지금까지 괜찮았으니까 앞으로도 괜찮을거라고 생각하면 안되는 것이다. 죄는 나를 파괴할 뿐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파괴할 수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죄도 그런 힘이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나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벌어지는 죄들은 더욱 조심해야 한다. 어떤 식으로 그 불길이 번질지 알 수 없다.
다음으로 바울이 죄를 대면하는 모습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바울이 이 죄의 가장 직접적인 피해자다. 하지만 바울에게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피해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분노하지도 않았고 위로를 갈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 벌어진 죄의 문제를 바로 잡으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직접 자신을 비방하며 사도권에 도전했던 사람들의 죄를 대면해야 했다. 또한 그런 죄를 용납하고 있었던 고린도 교회도 대면해야 했다.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있었기에 바울은 큰 눌림과 걱정으로 많은 눈물의 편지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바울이 그 고통스러운 일을 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실추된 명예를 바로 세우려는 목적도 아니었고 자신을 공격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복수하기 위한 목적도 아니었다. 죄가 교회 가운데 들어왔고 그 죄가 성도들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교회를 파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죄를 대면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얼마나 고통이 되는지 관계 없이 그 일은 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동기를 바울은 “사랑”이라고 말한다. “이는 너희로 근심하게 하려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내가 너희를 향하여 넘치는 사랑이 있음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라”(2:4)
교회를 사랑했기 때문에 바울은 고통스럽지만 죄를 대면했던 것이다. 앞서 읽었던 7장의 말씀처럼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에게도 근심이 될 것을 그는 알았다. 이것 역시 죄가 가져온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죄의 문제를 바로 잡는데는 또 다른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죄를 지적 받는 사람만 괴로운 것이 아니라 지적하는 사람도 괴로운 것이다. 그렇지 않고 죄를 지적하는 것이 즐겁다면 그 사람은 그 일을 하면 안된다. 성도의 죄를 대면하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될 수 없다. 두렵고 떨리는 일이고 괴로운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반드시 해야하는 일이다. 그래야 회개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다. 죄를 대면할 때 근심하겠지만, 그것이 하나님 뜻대로 된 것이라면 결국은 회개에 이르게 될 것을 우리는 기대할 수 있다. 그런 기대를 가지고 사랑하기 때문에 죄를 대면하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위해서 기꺼이 그렇게 했고,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용서와 회복(5-11절)
바울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죄를 대면했을 때 긍정적인 결과가 양측에서 모두 드러났다. 고린도 교회는 적극적으로 죄를 대면하고 그에게 벌을 내렸다(6절). 합당한 징계를 내렸다는 것이다. 정확히 어떤 징계를 내렸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아마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장에서 말씀하신 과정을 밟았을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이 사람을 출교했을 것이다.
교회의 징계의 최종 단계는 그 사람을 이방인으로 여기는 것, 즉 교제 공동체에서 쫓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경우도 많다. 교회는 많고 교회마다 성도들을 더 오게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상황인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교회에서 쫓겨나면 다른 교회로 가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이런 것이 오늘날 교회들이 진리와 거룩을 지키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하지만 처음 교회가 시작되었던 이 때는 그렇지 않았다. 출교는 훨씬 더 실제적인 어려움을 주는 징계였다. 유대인들을 생각해보면, 예수님을 믿으면 그들이 속해있던 공동체에서 쫓겨나는 경우들이 많았다. 그나마 그렇게 되더라도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해 있을 수 있었는데, 출교는 거기에서도 쫓겨나는 것이 된다. 삶에 있어 실제적인 어려움을 겪게되는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참된 신자라면 다른 신자들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괴로움이 될 수 밖에 없다. 그게 정말 아무 문제가 안된다면 그 사람은 정말 이방인, 즉 구원 받지 않은 사람일 것이다. 참된 성도라면 다른 성도와 함께 교제하고 예배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출교는 교회 안에서 죄를 제거하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고, 일시적으로 죄를 범한 성도를 빨리 회개하도록 돕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여튼 고린도 교회는 ‘근심하게 한 자’의 죄를 그렇게 대면했고 그 결과 그 사람 그리고 아마도 그와 함께 했었던 무리들은 회개에 이르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고린도 교회가 지나치게(?) 회개했다는 것이다.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아마 바울의 눈물의 편지를 통해서 이들은 크게 뉘우쳤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이 죄를 대면하는데 아주 열심을 냈고 그것이 좀 지나칠 수도 있는 상황이 됐다. 즉, 죄를 범한 사람이 회개에 이르도록 징계를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를 했는데도 징계를 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울은 그것도 바로 잡는다. 죄를 대면하는 목적은 벌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다른 복수일 뿐이다.
고후 2:5–6 근심하게 한 자가 있었을지라도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 어느 정도 너희 모두를 근심하게 한 것이니 어느 정도라 함은 내가 너무 지나치게 말하지 아니하려 함이라 6이러한 사람은 많은 사람에게서 벌 받는 것이 마땅하도다
먼저 바울은 벌어진 죄의 문제로 인해 교회가 근심하게 된 것을 언급한다. 그런데 그는 “나를 근심하게 한 것이 아니요”라는 조금은 납득하기 어려운 말을 한다. 바울이 직접적인 피해자이기 때문이다. 왜 이렇게 말했을까? 바울은 이미 이 사람을 용서했기 때문이다. 용서했기 때문에 나는 괜찮다고 말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고린도 교회가 이 죄로 인해서 근심하는 것이 잘못된 것도 아니라는 측면에서 근심하게 한 자가 너희를 근심하게 했다고 말한 것이다. 바울은 매우 신중하게 말한다. 고린도 교회가 죄를 범한 자를 징계한 것이 뭔가 잘못인 것처럼 들리지 않도록 신중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6절에서는 이제는 징계가 충분하다고 말한다. “마땅하도다”라고 번역되어 있는데, 충분하다는 의미다. 근심하게 한 자에게 징계가 내려졌고 이제는 충분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회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더 이상은 징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고후 2:7 그런즉 너희는 차라리 그를 용서하고 위로할 것이니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길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은 이제는 회개한, 이 옛가해자를 걱정하고 있다. 회개한 사람에게 징계가 계속된다면 이제는 오히려 그가 너무 많은 근심에 잠기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그를 용서하고 위로해주라고 말한다. 다시 공동체 안으로 받아주라고 말하는 것이다. 계속 용서를 미루지 말고 바울이 그런 것처럼 그들도 용서하고 더 나아가서 이제는 그를 위로하고 다시 기쁨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고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교회가 사랑을 나타내는 모습이라고 말한다.
고후 2:8 그러므로 너희를 권하노니 사랑을 그들에게 나타내라
바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라. 사실 바울이 일차적인 피해자였고 현재 고린도 교회는 그런 바울의 편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이런 입장이었다면 그런 상황이 좋았을지 모른다. 감사했을지 모른다. 적극적으로 그렇게 해달라고 할 수 없는데, 알아서 교회가 나의 복수를 해주는 것 같은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모른척해서 나에게 해를 끼쳤던 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더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자신의 감정이나 이익보다 성도의 회복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성도의 기쁨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용서로 사랑을 나타냈고, 고린도 교회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명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봤을 때 바울도 자신을 공격하고 교회를 무너뜨리려했던 이들이 좋게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전히 마음에 조금의 앙금이 남아 있을 수도 있고, 앞으로 이들이 얼마나 회개한 모습을 보일지에 대한 확신도 없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보다 중요한 것은 회복이었다. 성도가 죄책감과 근심 가운데 살게 만드는 것이 그가 할 일이 아니었다. 이 성도(들)은 회개하고 돌아왔으니 회복되어야 했고 교회는 그것을 위해 사랑을 나타내야 했다. 이것이 죄를 대면하는 목적이다. 용서하고 회복하는 것이다. 사랑으로 죄를 대면했으면 사랑으로 회개한 자를 용서할 수 있어야 한다.
끝으로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그렇게 용서할 수 있도록 3가지를 강조한다.
첫째로 이것이 순종의 문제임을 분명히 한다.
고후 2:9 너희가 범사에 순종하는지 그 증거를 알고자 하여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썼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지금 굉장히 신중하고 부드럽게 권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용서는 순종과 불순종의 문제다. 그들의 감정이나 생각에 관계없이 첫째로 이들은 회개한 자를 용서하고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했다.
다음으로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고후 2:10 너희가 무슨 일에든지 누구를 용서하면 나도 그리하고 내가 만일 용서한 일이 있으면 용서한 그것은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 앞에서 한 것이니
말이 조금 복잡하게 들리지만, 쉽게 말해 너희가 용서하면 나도 용서한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는 용서하지 않으면서 “바울을 생각해야지. 우린 그렇다고 쳐도 바울 사도에게 당신이 한 일을 생각해봐. 무슨 염치로 다시 교회 오려고 해”라고 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은 전혀 문제되지 않는다고 분명히 말한다. 그러니 내 핑계대지 말고 용서하라는 것이다.
용서하지 않을 이유들을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 낼 수 있다. 이 사람의 회개가 진심이 아닌 것 같아 보인다. 여기서 용서하면 나중에 또 이 사람이 같은 일을 할 것 같다. 아직은 피해자의 감정이 준비되지 않았다.
아마 용서하지 않을 이유를 찾으면 끝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핑계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고 회개할 때 용서를 선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끝으로, 용서는 영적 전쟁이다.
고후 2:11 이는 우리로 사탄에게 속지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바가 아니로라
용서와 회복 시리즈 첫 시간에 우리가 왜 용서해야하는지를 강조해서 말했었다. 그것이 세상과 교회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용서해야 한다. 사탄은 우리가 용서하지 않음으로써 세상과 교회의 차이가 없음을 세상 가운데 보여주고 싶어한다. 우리가 그 계책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속고 있다. 이런 저런 내가 만든 이유로 사탄이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용서와 회복의 문제는 그저 나와 그 사람만의 문제가 아님을 기억해야 한다.
처음에 말했듯, 용서와 회복은 치열한 전쟁터다. 이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할 수 있는 무기는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계속해서 보여줬던 태도, 바로 사랑이다. 사랑스러워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고 싶고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한다.
이 부분에 있어 C. S. 루이스는 우리에게 다시 한번 도움을 준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에 대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말씀에 전혀 사랑할 만한 부분이 없는 사람들도 사랑하라는 뜻이 담겨 있다는 점은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자신에게는 사랑할 만한 부분이 있어서 사랑합니까? 여러분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 대상이 여러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모든 자아들을 이와 똑같은 이유로, 또한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는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보여 주시기 위해 우리 자신의 경우를 통해 쉽게 그 본보기를 얻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법칙을 다른 모든 자아들에게도 계속해서 적용해야 합니다 – <순전한 기독교>, C. S. 루이스
용서하기 어렵다면, 사랑하기 어렵다면, 하나님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를 생각해 보라. 하나님은 애초에 사랑할만하니까 사랑하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다만 하나님을 닮은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 사랑이 우리에게 있다면,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사탄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고, 회복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도전
이 설교 시리즈를 통해서 용서가 어렵다는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르겠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지만 용서만큼 중요한 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래서 이 시리즈를 통해 우리가 용서 해야하고 용서 할 수 있다는 말은 여러 측면에서 반복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같은 말을 하는 것이 수고로움이 없고 오히려 안전하기 때문이다.
선교사 짐 엘리엇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창끝>을 보면 아우카 족의 남자들은 항상 창을 소지하고 다닌다. 그 창은 사냥을 위해 사용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그 창으로 다른 부족을 공격하기도 한다. 다른 부족에게 공격을 받으면 반드시 다시 공격을 해야하는 것이 이들의 룰이다. 반드시 보복을 해야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들의 역사는 분쟁과 살상의 연속이었다. 그들의 창끝은 언제나 서로를 향해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의 창이 끝을 맞게 된다. 복수에 복수가 이어지고 살인에 살인이 이어질 수 밖에 없었던 악의 사슬이 끝나게 된 것이다.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가던 창끝의 역사가 끝나게 되었다. 그들 안에서 대단한 지도자가 나타났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 가운데 절대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등장해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들어갔을 때 그렇게 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용서를 알게 되었을 때 그들에게 창은 더 이상 무의미한 것이 되었다.
이런 일은 이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에게 일어나는 일이다.
엡 2:14–18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막힌 담을 허물었을 뿐 아니라 우리 사이에 막힌 담도 허물었다. 그 벽을 다시 세우는 것이 죄이니, 이 죄를 조심해야 한다. 혹 죄가 다시 벽을 세웠다면, 회개와 용서가 다시 그 벽을 허물 수 있다. 십자가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들만이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은혜다. 우리 가운데 죄가 없을 수 없다면, 우리가 용서하는 사람들이 되어서 이러한 십자가의 은혜를 항상 누릴 수 있는 우리들이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