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라의 죽음
본문 : 창세기 23장
설교자 : 이병권
우리는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슬픈 일들을 만나게 됩니다. 인생에서 슬픈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날 동안에는 슬픈 일들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슬프고 힘든 일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우리 인생의 과제입니다.
우리가 만나는 여러 가지 슬픈 일들 중에서 슬픔의 정도가 가장 큰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맞이하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을 함께 해서 나의 인생에서 빼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배우자가 죽었을 때 느끼는 슬픔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혹시 배우자의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한 번 생각해봤습니다. 배우자가 죽었을 때 경험하는 허전함과 아픔이 얼마나 클까? 그동안 함께 했던 기억들, 또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세기 23장에서의 아브라함은 바로 그런 깊은 슬픔 가운데 빠져있습니다. “사라가 백이십칠 세를 살았으니 이것이 곧 사라가 누린 햇수라 사라가 가나안 땅 헤브론 곧 기럇아르바에서 죽으매 아브라함이 들어가서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다가“(1-2)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127년을 살았고 가나안 땅 헤브론에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녀가 어떻게 죽었는지는 기록되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창세기에서 이렇게 나이를 언급하며 죽음을 말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사라의 죽음이 좀 특별한 것은 여자의 죽음에 대해서 나이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죽었을 때 그 나이를 기록하지만, 그들의 아내가 죽었을 때는 나이를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라는 유일하게 예외로, 여자로서 그 나이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만큼 사라가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라의 삶을 보면 연약함이 있었고 실수도 많았습니다. 완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긴 세월을 아브라함과 함께 했습니다. 서른 살에 결혼했다고 치면, 대략 100년이라는 세월을 같이 살았습니다.
사라의 죽음을 만난 아브라함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사라는 이제 차가운 시신이 되어 아브라함 앞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더 이상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흐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사라를 위하여 슬퍼하며 애통했다’고 말합니다.
지금까지 성경에 아브라함의 감정에 대해서 묘사된 것은 거의 없습니다. 아브라함의 감정이 직접 기록된 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불신하여 웃은 것 정도 밖에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에도, 전쟁에 큰 승리를 거둘 때에도, 이삭이 태어났을 때에도,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에도, 성경은 아브라함의 감정에 대해서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라의 죽음에서는 아브라함의 슬픔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은 아내를 보면서 아브라함은 그동안의 사라의 모습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라는 65세의 나이에 남편을 따라 가족들과 친구들이 있는 정든 고향을 떠나 낯선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이런 저런 많은 일들을 겪었고, 남편의 비겁함 때문에 두 번이나 권세 있는 자들의 첩이 될 뻔했습니다. 자식이 없어 오랜 세월동안 고생이 많았던 사라, 때가 되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고 기뻐했던 사라의 모습, 그러나 이제 그녀는 싸늘한 시신으로 누워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슬퍼하며 애통하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저는 어렸을 때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만 울어야한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남자가 우는 것은 나쁜 거고, 울면 안 되는 것을 생각했습니다. 잘못된 생각이죠.
우리의 감정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고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슬플 때는 울고, 기쁠 때는 웃는 것이 정상입니다.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휘둘리는 것은 문제이지만, 사람이 느끼는 감정 자체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성경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12:15)고 명령합니다. 예수님도 우셨습니다. 우리가 슬픔을 만났을 때 우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슬픔이 모든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래서 삶을 비관하거나 다른 것을 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그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죽음을 겪으며 슬퍼하며 애통했지만 다시 사라의 죽음 앞에서 일어납니다. 아브라함이 그 슬픔을 이기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시신 앞에서 일어나 나가서”(3) 특별히 “일어나”라는 표현은 아브라함의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7절에도 같은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일어나’,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지금 아브라함에게는 자기 소유로 된 땅이 없습니다. 사라의 매장지도 없는 형편이었습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결국 그냥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여전히 ‘나그네’로, 떠돌이, 이방인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마 멀지 않은 장래에 자기도 사라처럼 죽게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삶을 살다보면 아브라함과 같은 상황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된 축복을 기다리며 살고 있는데 지금 내 삶을 보면 별로 특별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이삭을 낳는 놀라운 일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한 번입니다. 또 살다보면 잊혀지는 겁니다. 그렇게 반복되는 삶을 살면서, 때로는 허무함과 슬픔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데 갈수록 부담만 커지는 것 같습니다. 나름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데, 별로 되는 일도 없고, 별 차이도 없고, 앞은 잘 보이지 않고, 그런 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래서 힘든 이곳을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지 않았을까요? 그냥 고향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요? 하지만 아브라함은 아내의 죽음이라는 이 위기를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로 만듭니다. 그는 슬픔을 넘어서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가나안의 주민인 헷 족속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나그네요 거류하는 자이니 당신들 중에서 내게 매장할 소유지를 주어 내가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시오”(4)
아브라함은 사라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묻기로 결정했습니다. 보통 매장은 자신의 고향 땅에 했었는데, 아브라함은 고향이 아니라 가나안 땅에 매장하기로 합니다. 이 가나안 땅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그리고 자신은 물론 자신의 후손을 위한 땅으로 만들려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계속 거하기로 합니다. 돌아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자신의 고향 ‘갈대아 우르’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이런 결단이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단호하게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없애는 것입니다. 돌아가지 않도록 이미 건너온 다리를 태워버리는 것입니다. 두 마음을 품지 않고, 믿음으로 버티겠다는 각오가 필요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요청에 대해 헷 족속은 매우 긍정적으로 대답합니다. “내 주여 들으소서 당신은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이시니 우리 묘실 중에서 좋은 것을 택하여 당신의 죽은 자를 장사하소서 우리 중에서 자기 묘실에 당신의 죽은 자 장사함을 금할 자가 없으리이다”(6)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들로부터 존경과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7절과 12절에 나오는 그의 태도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땅의 백성들에게 몸을 굽힙니다. 아브라함의 나이나 재력이나 가지고 있는 것들을 생각해볼 때, 백성들에게 이런 태도를 보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겸손한 사람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사람에 대한 올바른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사람에 대해서 교만하고, 무례하고, 함부로 하는 사람은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입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매장지를 공짜로 쓰라는 제안을 거절합니다. 그리고 충분한 대가를 주고 땅을 사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로 나의 죽은 자를 내 앞에서 내어다가 장사하게 하는 일이 당신들의 뜻일진대 내 말을 듣고 나를 위하여 소할의 아들 에브론에게 구하여 그가 그의 밭머리에 있는 그의 막벨라 굴을 내게 주도록 하되 충분한 대가를 받고 그 굴을 내게 주어 당신들 중에서 매장할 소유지가 되게 하기를 원하노라 하매”(8-9)
이 말을 들은 에브론이 아브라함이 원하는 밭과 굴을 그냥 주겠다고 하지만, 아브라함은 끝까지 그 값을 주겠다고 합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음식점에서 서로 돈을 내려고 하는 장면 같습니다. 결국 에브론은 땅 값이 은 사백 세겔이라고 말했고 아브라함은 그 땅을 충분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구입합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에브론 사이의 거래가 끝이 납니다. “성 문에 들어온 모든 헷 족속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된지라“(18)
그 땅이 모든 백성들이 보는 데서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습니다. 이제 이 가나안 지역에 아브라함의 소유가 생겼습니다. 특별히 아브라함이 끝까지 값을 치르고 땅을 구입하기를 고집했던 것은, 그리고 그 성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들의 방식대로 절차를 거친 것은 이 땅의 소유를 견고히 하려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중에 이 땅이 시비에 걸리거나 문제가 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하신 약속을 신뢰했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의 계획하심 가운데 아브라함의 자손들은 갈대아 우르가 아닌 가나안을 상속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땅은 아브라함의 소유로 확정되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사라의 죽음과 장사를 지내는 장면인데, 실제로 사라의 죽음에 대해서는 아주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이 땅을 구입하는 일은 아주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상식적으로 사라의 죽음으로 인한 아브라함의 슬픔이 더 자세히 묘사되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창세기 저자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강조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값을 주고 땅을 샀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 대한 실제적인 소유권을 아브라함이 가졌다는 것이고, 그리고 이 소유권은 그의 후손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의 소유에 대한 타당성과 명분을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라의 묘지가 된 헤브론은 이스라엘의 거의 모든 선조들의 묘지가 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리브가와 레아와 야곱이 이곳에 매장됩니다. 창세기 23장을 시작으로 이 헤브론은 아브라함 집안의 땅이 되었습니다.
훗날 세월이 지나서 모세가 파견한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살피고 돌아왔을 때, 헤브론에 대한 보고가 기록된 것도 이 땅이 그런 역사적인 중요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민 13:22).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 약속의 땅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합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을 거절하며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하나님을 불신함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한 것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어떠했습니까? 땅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전혀 이루어질 것 같지 않고, 자기와 함께 약속을 받은 사라는 죽었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도 사라처럼 약속을 보지 못하고 그렇게 죽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고향으로 돌아가기보다 이 가나안 땅에 머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이 땅에서는 나그네임을 알기 때문에,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땅이 아니라 더 멀리 있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런 선택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를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11:13-16)
아브라함은 더 좋은 땅을 얻기 위해 이러 저리 찾아다니지 않았습니다. 떠나왔던 고향을 생각하며 다시 돌아가지도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땅에 속하지 않은 더 나은 본향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만나는 슬픈 일과 어려운 일들 속에서 그 모든 것들을 넘어 하나님을 계속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은 이 땅에서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나은 본향이 있습니다. 이 땅은 우리의 본향이 아닙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나그네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축복을 준비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슬픔의 순간은 우리의 믿음을 드러내는 기회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는 그 모든 슬픔, 심지어는 무덤까지도 넘어서는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며, 그 곳을 사모하고 계십니까? 우리의 마음이 머지않아 누리게 될 영원에 대한 소망으로 가득 차있습니까? 아니면 이 세상, 현재의 상황에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습니까?
한 주일학교 선생님이 아이들에게 이런 질문했습니다. ‘천국에 가고 싶은 사람?’ 아이들은 너도 나도 질세라 앞 다투어 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아이만 손을 들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묻습니다. ‘우리 친구는 천국에 가고 싶지 않니?’ ‘아니오. 가고 싶어요!’ ‘그래? 그런데 왜 손을 들지 않았니?’ ‘천국에 가고는 싶은데, 오늘 저녁에 TV에서 재미있는 걸 하거든요, 천국보다 집에 먼저 가야 해요.’
우리도 이 아이처럼 얼마나 자주 영원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 땅의 현실에만 눈을 돌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영원을 바라보지 않고 이 땅을 바라보면 쉽게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낙심은 슬픈 일을 만났을 때 더욱 심각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낙심할 만한 때에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슬픈 시기에 오히려 믿음으로 행했습니다. 아브라함은 돌아갈 수 있는 다리를 불태웠습니다.
혹시 슬픈 일이 있습니까? 나름대로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는데 실망스런 일만 생깁니까? 그렇더라도 낙심하지 말고 포기하지 말며 뒤로 물러서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은 이 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더 나은 본향을 바라보고, 그 본향을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생명은 이 땅에서 보내는 백 년도 안 되는 시간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영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을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사는 날 동안, 그는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습니까? 돌에 맞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고, 배반을 당하기도 했으며,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영원한 본향에 시선을 고정함으로써 슬픔과 고난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7-18)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우리에게는 슬픔을 이기는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소망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슬픔의 순간에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수고한 모든 것을 기억하시며 보상하십니다. 그리고 언젠가 놀라운 방법으로 그 모든 약속을 이루실 것입니다.
그러니 슬픔을 넘어 더 나은 본향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계속해서 하나님을 더 신뢰하시기 바랍니다.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말고 각자의 삶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믿음을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잠시 잠깐 있는 이 땅에서의 나그네와 같은 삶을 영원한 본향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